〈 86화 〉 84화 : 가는 실이라도 어디야 (2)
* * *
금발이라……
흔하다면 흔한 색깔이긴 한데, 이렇게까지 샛노란 금발은 처음 본다.
지금도 천장 조명에 반사되어서 좀 눈부신데, 햇빛 아래 있으면 눈도 못 뜨는 거 아닐지 모르겠네.
“으…….”
오. 깨어났다.
청년의 눈꺼풀이 열리면서 노란색 눈동자가 드러났다.
금발에 노란 눈!
……꼭 일부러 색깔 맞추기라도 한 것 같다.
청년은 비틀비틀 몸을 일으킨 후, 멍한 눈으로 우리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러다 갑자기 소스라치게 놀란 얼굴로 벌떡 일어섰다.
“다, 당신은……!”
“엉?”
뭐지? 날 알아보는 듯한 분위기인데?
언제 만난 적이 있었나?
난 처음 보는 것 같은데…….
청년은 별안간 부담스럽게 환히 웃으며 내 손을 덥썩 잡더니 힘차게 흔들기 시작했다.
“이렇게 또 만나다니! 그리고 또 이렇게 도움을 받다니!”
“어어…….”
어이씨, 큰일났네.
이쪽은 날 아는 모양인데 어쩌지?
전혀 기억 안 나!
대체 언제 만나서 언제 도움을 줬다고?!
몬스터의 습격을 받았던 사람 중 하나인가?
“정말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이번에야말로 반드시…… 이름을…….”
풀썩.
내 손을 흔들며 반갑게 말하던 그가, 갑자기 주르르 녹아내리듯이 바닥에 엎어졌다.
참 극단적이군.
“저기…… 괜찮으세요?”
“으으으…… 죄송합니다…… 뭔가 먹을 것 좀……. 으어어……”
“……아, 예…….”
으악, 또 좀비 같은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빨리 뭘 먹이지 않으면 또 물어 뜯길 거야!
배낭은 숙소에 두고 왔으니, 여기 부엌을 뒤지는 수밖에 없겠어.
“여기 부엌에 좀 가보고 올게.”
“왜? 먹을 거 때문에? 안 가도 돼. 저기 다 챙겨 뒀어.”
메린이 차를 홀짝이며 턱으로 가리킨 곳을 돌아보았다.
녀석이 술잔으로 박살을 내버린 접수대였던 것 앞에, 웬 보따리자루가 하나 떡 놓여 있었다.
……꽤 불룩한 것 같은데.
뭘 얼마나 챙긴 거야?
가까이 가서 끌러보았다.
어디 보자……
생닭에 날고기 몇 덩이, 밀가루, 달걀, 순무, 버터케이크, 롤빵, 말린 고기, 허브 몇 다발, 말린 딸기, 복숭아, 살구, 라임에……
하아아…….
“얌마, 창고 다 털었냐? 이걸 어떻게 들고 다니려고?!”
“분류해서 위슨 배낭에 넣어두려고. 안 썩는대.”
“무려 석 달 전에 넣고 까먹은 달걀도 멀쩡히 부화한다고! 핫하!”
“……”
마법 너무 사기 아니냐?
아침 댓바람에 밤하늘 만드는 것보다도 이게 더 사기 같은데?
이런 능력을 가지고도 그 섬에만 틀어박혀 있질 않나, 바깥에 나와서도 대륙을 정복한다든가 하지 않고 조언자로 남질 않나……
괜히 ‘현자’라 불렸던 게 아니었구나.
새삼 존경스러웠다.
“하…… 진짜 부럽다……. 왜 위슨만 준 거야?”
만드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나……?
그래도 묻기라도 해주지.
“위슨밖에 못 쓰니까. 마력을 다룰 수 있어야 되거든.”
무슨 원리인지는 몰라도, 배낭에 물건을 넣고 꺼내는 데에 마력을 이용하는 모양이었다.
달리 말하면, 위슨이 없이는 그에게 맡긴 물건을 절대 꺼내지 못한다는 것!
……식료품은 적당히 나누는 게 좋겠군.
나 홀로 굳게 다짐했다.
자루에서 우유와 버터케이크, 과일 몇 개를 꺼내어 금발 청년 앞에 내려놓으려다……
……주변 환경이 뭘 먹기엔 극하게 좋지 않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위슨, 저 사람 저쪽으로 옮기는 게 나을 거 같은데. 늑대…… 뭐였더라, 테라? 좀 부탁해도 될까?”
“웡!”
위슨이 무어라 대답하기도 전에, 늑대가 금발 청년을 등에 태우더니 나를 보며 꼬리를 살랑거렸다.
“오, 네가 맘에 드나본데. 암컷이라 그런가?”
“뭐? 아니, 지난번에 목소리 들었으니까 그럴 거 같긴 했는데……. 정령도 성별이 있어?”
“본체는 없는데, 육체를 얻을 때 정하거든. 참고로 나도 암컷이야.”
“……야, 그 목소리로 그딴 말 하지 마!”
처음 봤을 때처럼 엷은 목소리라면 몰라도, 지금의 파랑새는 남자 목소리로 조정해둔 뒤이다.
그 상태로 암컷 어쩌고 하는 건 좀 많이 위험하다고……!
쓸데없는 오해를 불러 일으킬 수도 있어!
아무튼 늑대의 도움으로 금발 청년을 홀 구석으로 옮긴 후, 자루에서 꺼내 온 음식들을 그 앞에 내려놓았다.
그는 놀란 눈으로 그 음식들과 내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더니, 갑자기 고개를 푹 숙인 다음 어깨를 떨기 시작했다.
“……흑, 크흑…… 가, 감사합니다……!”
“……아, 예…….”
먹을 거 줬다고 감동해서 울다니……
우와, 엄청 부담스러워…….
편하게 눈물 젖은 식사를 하도록 그 자리에 내버려두고, 다시 시뻘건 피투성이 공간으로 되돌아왔다.
어느새 위슨도 두 사람에 섞여 차를 마시고 있다.
나 역시 멀쩡한 의자를 하나 끌고 와, 차를 한 잔 받았다.
……사람의 적응력이란 무서운 법이다.
“근데 성과는 있으셨어요?”
“성과? ……아~ 붙잡은 것도 성과라고 하면 성과인가? 지하에 던져놨어. 여긴 별일 없었어?”
“딱히 없었는데…… 아, 그러고보니 부엌에서 나오는데 웬 놈들이 허둥지둥 밖으로 도망치고 있더라. 그거 말곤 없었지?”
역시 도망쳤구나.
그래도 고용주이든 대장이든, 아무튼 부하가 되어 모시고 있었을 텐데, 구하거나 찾으려는 놈이 하나도 없었단 말인가?
그 늙은 여우, 평소에 어떻게 했으면…….쯧쯔.
“아, 맞다. 카엘 님, 메린 님과 정한 게 있는데요.”
불현듯 로나가 찻잔을 내려놓으며 말을 꺼냈다.
어딘지 기대가 가득한 얼굴로 웃는 게……
“히히~”
……약간 불안했다.
굉장히 불안했다!
“……뭔데?”
조심스럽게 묻자, 로나는 함박웃음을 지으며 외쳤다.
“사흘에 한 번, 저도 저녁 대련에 참가하기로 했어요! 히히히~”
“……뭐?”
로나가 낀다고?대련에?
“서, 설마 나랑?!”
“네? 에이, 카엘 님도 참! 당연히 메린 님이랑 하죠! 저도 가끔은 전력으로 움직여야지 실력이 녹슬지 않으니까요.”
“……뭐, 응. 그렇겠지…….”
당연히……그래, 뭐……
당연히 메린이겠지…….
하하, 나도 참 뭔 소리를…….
그나저나 대련이라, 그거 또 갑작스럽네.
흠…… 이렇게 화려하게 모의전 한 판 치른 거랑 연관 있나?
로나는 방글방글 웃으며 차를 홀짝였다.
“메린 님, 욕구불만이셨던 거 같아요.”
“푸흡.”
……얘는 또 갑자기 뭔 소리하는 거야?!
나뿐 아니라 위슨도 당황한 얼굴로 기침하고 있었다.
역시 내가 이상한 게 아니었어!
“콜록콜록! 무, 뭐? 뭐라고?!”
“어~ 그러니까, 메린 님은 좀이 쑤시셨던 거 같아요. 여행 떠나시기 전엔 기력이 다 빠질 정도로 싸우신 적 없으시다면서요?”
“아마도?”
흠, 생각해보니까 그렇네.
마을 주변에서 튀어나오는 몬스터들은 죄다 일격이었고, 무투회에서도 일부러 손대중해서 상대했으니…….
“그런데 이렇게 여행을 다니면서 엄청난 강적들을 만난 거잖아요? 평소와 달리 한 방에 쓰러지지 않는 적, 조금만 삐끗하면 패배할지도 모른다는 긴장감, 내 공격이 어디까지 통할까 하는 설렘……! 그리고, 그리고!!”
“……”
“마침내 그 난적을 쳐부쉈을 때의 쾌감! 후후, 후후후후……!! 알고 말고요! 그 손맛, 그 두근거림! 꼭 다시 맛보고 싶어지고 말고요!!
카엘 님도 아시죠?”
“미안. 전혀 모르겠어.”
방금 그 웃는 얼굴, 자경단원들이 훈련할 때 본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하……무기 쓰는 전사들은 다들 그런 거 즐기나?
진짜 특이하네…….
“모르세요?! 하아…… 역시 카엘 님은 전사가 아니시네요.”
“……”
전사가 아닌 건 맞지만, 저렇게 대놓고 ‘인생 손해보고 있다’며 안타까워할 만한 일은 아니지 않을까?
그보다 그거 그냥 전사가 아니고 광전사 아니냐.
다른 말로는 전투광이라 할 수 있겠지만 어느 쪽이든 미쳤다는 건 마찬가지이니 아무래도 좋겠지.
“사제님도 정상이 아니구만.”
덤덤하게 감상을 내뱉으며 차를 홀짝이는 옆사람을 무시하고, 미치, 아니, ‘열성적인’ 사제님은 계속 말을 이었다.
“아무튼 이게 너무 쌓이면 엄청 답답하거든요~ 그러다 잘못하면, 약한 상대가 아둥바둥 무의미한 발버둥을 치는 걸 보는 게 재미있어지는 무뢰배가 될 수 있으니 조심해야 돼요!
저는 신전에서 항상 대련 상대가 있었으니까 큰 문제없었는데, 메린 님은 그간 적당한 상대가 없으셨으니까, 이번에 확! 터져버린 것 같아요.”
“……아, 그래서 욕구불만이었다고?”
“네! 그 여자분은 가엾게 됐지만, 운이 없었던 거죠.”
……그랬구나.
그래서 여전사가 처음 발차기를 맞고 날아가지 않았을 때 웃었구나.
어차피 자신보다 약하다는 건 알지만, 그래도 두들길 맛이 있으니 신난다……는 건가?
왜 그딴 마음이 드는 건지 이해는 잘 안 되는데, 그건 아마 내가 로나 말마따나 싸움을 업으로 삼는 사람이 아니니까 그런 것이리라.
……내가 어떻게 해줄 수 없는 부분이 있구나.
나는 신이 아니니까 당연한 이야기일 텐데, 어쩐지 마음이 가라앉는 기분이 들었다.
……근데 이런 얘기를 본인 앞에서 해도 되는 건가?
메린 본인이야 별말 없긴 한데.
“……”
찻잔을 기울이면서 다른 곳을 보고 있다.
……별 말은 없지만, 마음이 편하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그러니 가끔이라도 저랑 모의전, 아니면 대련을 하기로 한 거에요. 근데 모의전은 아무래도 주변에 피해가 가니까, 주로 대련이 될 것 같네요.”
“……그래. 알았어.”
“그러니까 카엘 님,”
어느덧 로나는 나를 똑바로 마주보며 부드럽게 웃고 있었다.
“괜찮아요. 메린 님은 그냥 몸이 근질거렸을 뿐, 당신이 아는 그대로랍니다.”
“…………”
내가 아는 그대로…….
차가 든 물잔을 슬슬 흔들며 슬쩍, 메린을 쳐다보았다.
대놓고 자신의 이야기가 나오는 게 겸연쩍은 건지, 이젠 뺨이 살짝 붉어져 있었다.
죄책감을 느끼고 있는 건 아니겠지.
피바다가 펼쳐진 이 자리에, 조금만 고개를 돌려도 시신조각들이 널부러져 있는 공간에서 느긋하게 차 마시고 있으니까.
“……메린.”
주홍빛 눈동자가 흠칫 놀라며 나를 향했다가 도로 테이블로 떨어져 버렸다.
잔을 감싸고 있는 녀석의 손에 힘이 조금 들어간 듯했다.
……긴장하긴.
내가 또 저를 나무랄 거라 생각하는 모양이다.
그 모습에 한숨이 나오는 동시에, 마음 한편에선 조금 안심이 되었다.
“몸은 이제 괜찮냐?”
“어? ……어, 응. 독은 다 없어진 거 같아. 로나도 그렇게 말했고.
……저기, 카엘.”
녀석은 사람을 불러 놓고 좀처럼 말을 잇지 못하고 우물쭈물했다.
……뭘 잘못 먹었나, 갑자기 왜 저래?
나한테 말 타는 법 가르쳐달라 부탁했을 때도 저렇게 머뭇거리진 않았는데.
녀석이 안 어울리는 짓을 하고 있는 걸 보니 왠지 나까지 긴장이 되었다.
“왜. 뭔데.”
“………미안.”
“네?”
잘 못 들었습니다?
“그…… 모르고 한 거긴 하지만, 어쨌든 나한테 죽을 뻔했잖아. 그러니까…… 미안.”
………………허?
“……카엘?”
…………사과를 했어……?
그것도 먼저……?
“……”
“……역시……화났어?”
…………시무룩하게……
움츠리고……
“……너,”
“어, 응?”
“너 진짜 괜찮은 거냐?! 아직 독 안 빠진 거 아냐?! 아니면아니면아니면 아아아, 그래! 모의전! 모의전 할 때 머리 맞은 거 아냐?! 네 머리가 아무리 딴딴해도 저건 쇳덩어리인 철퇴니까 직통으로 맞았다면 타격이 갔을 거야! 네가 모르는 새에 머리에 혹 나 있을지도 모른다고! 어디 봐봐! 아, 얼른!!”
쿠웅!
섬광이 일었다.
별이 번쩍이는 게 아니라, 별이 폭발한 거 같은 섬광이다!
……녀석이 내뒷머리를 잡고, 그대로 테이블에 내리찍은 것이다.
이마가 닿을 곳에 주먹을 대는 걸 잊지 않은 건 두 말 할 필요도 없겠지.
그건 그렇고, 뒷머리를 잡다니……!
이 새끼, 기술이 점점 발전하고 있어……!
뒷머리가 얼얼한 동시에 이마가 후끈후끈 욱신거렸다.
그야말로 한 번에 얻기 힘든 환장의 고통이 아닐 수 없다!
이 녀석은 내가 아는 메린이 맞군.
그제야 완전히 안심이 되었다.
“이건 사과 안 해도 되겠지? 하나도 안 미안하니까.”
“와아, 몸을 던져서 메린 님의 기분을 풀려 하시다니! 역시 카엘 님, 배려심이 철철 넘쳐흐르시네요!”
……그런 거 아닌데.
테이블에 엎어진 채, 속으로 투덜거렸다.
“하하, 이거 개판이네. 어째 멀쩡한 놈이 하나도 없냐?”
“남 말 하지 마, 짜샤.”
용서없이 질책해주었다.
차를 한 잔 다 마셔갈 때쯤, 금발 청년의 식사도 다 끝난 듯했다.
배가 찬 덕분에 기운이 다시 돌아왔는지, 청년은 다시금 호들갑스럽게 허리를 꾸벅 숙이며 힘차게 외쳤다.
“다시 한번 정말 감사합니다!! 정말, 당신이 아니었다면 저는 어떻게 됐을지……!”
“……아뇨, 그리 대단한 일도 아니,”
“이것도 분명 창조주께서 맺어주신 인연일 터! 부디 이름을 들려주십시오! 지금은 제가 아무것도 없습니다만, 반드시 이 은혜를 갚도록 하겠습니다!”
“……아뇨, 뭘 그렇게까지,”
“겸손해하실 필요 없습니다! 당신은 제 생명의 은인! 은혜를 갚는 게 당연하지 않습니까!!”
귀 아파!
아니, 뭔 사람이 목소리가 이렇게 커?!
……게다가 눈도 엄청나게 초롱초롱 빛내고 있고.
어우씨, 부담스러워 죽겠네.
“……저기, 그럼 귀 아프니까 좀 목소리 낮춰주세요.”
“예? 앗, 죄송합니다! 너무 감격해서 저도 모르게 그만…… 하하.”
금발 청년은 쑥스러운 듯이 머리를 긁적거렸다.
본인의 목소리가 엄청 크다는 건 자각하고 있는 듯했다.
“뭐, 아무튼……”
갑자기 하품이 터져 나왔다.
시계를 보니, 오후 11시를 넘어 있다.
여관에 돌아가면 날짜가 바뀌겠구만.
으…… 다시 돌아가는 것도 귀찮은데.
그냥 여기서 잘까?
짐이야 날이 밝으면 가지러 가면 되니…….
“……이야기는 날 밝고 하시죠. 전 먼저 쉬러 가겠습니다.”
“예? 어, 여기서 주무시려고요?”
“방도 있는데 뭐 어때요? 손님 우글거릴 정도로 유명한 곳이니 침구가 더럽지도 않을 텐데.”
어쩌면 여관이 더 지저분할 수도 있는 것이다.
여러 남녀가 끈적한 밤을 마구마구 보낸 후에 바로 청소를 안 했을 수도 있지만, 그건 여관 방도 마찬가지잖아.
그 이전에 도로 걸어가기 귀찮다.
가다가 길바닥에 드러누울지도 몰라!
“……카엘 님, 피곤하신 건 알지만, 그래도 여기서 주무시는 건 좀…….”
응? 의외로 로나가 반대를 해왔다.
피바닥에서 차 마시는 건 되고, 창관 침실에서 자는 건 안 된다니.
이 무슨 선택적 관대함인가.
메린 녀석까지 옆에서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야, 이 멍청아. 아까 튄 놈들이 위병 불러올 수도 있으니까 괜히 엮이기 전에 빨리 가자는 거 아냐.
평소엔 제일 먼저 그 얘기하며 난리를 피울 놈이, 잠만 오면 대가리가 굳어선…….”
“아.”
그렇구나.
……어라?그럼 지하에 처박은 늙은 여우는 어쩌지?
데려가야 되나?
잘 안 돌아가는 머리를 억지로 굴리려고 애쓰는데, 입구에서 철걱철걱 하는 부산스러운 소리가 들렸다.
“……이거 참, 처참하구만. 전부 네놈들의 짓이렸다!”
앗. 늦었다.
정갈하게 갑옷을 갖춰 입은 위병들이, 완전히 박살이 난 창관의 출입문을 꽉 막고 있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