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6화 〉 94화 : 땅 속에 핀 복수초 (2)
* * *
저녁식사 중에 하게 되는 이야기는 보통 두 가지일 것이다.
하나는 ‘오늘 무엇을 했는가?’일 것이고, 다른 하나는 ‘내일 뭘 할 것인가?’이겠지.
그리고 그 첫 주제가 나오자마자 나는 목이 막혀서 죽을 뻔했다.
오늘 뭐했냐고 묻길래 별 생각없이 대답했더니, 옐리카가 아가씨다운 감탄사인 ‘어머머’를 연발하면서 한 마디 툭 던진 것이다.
“데이트라니 부럽네요!”
“푸흐얽?!”
대체 왜 맨날 뭐 먹고 있을 때 저런 말이 날아드는 걸까?
혹시 용사를 죽이고 싶어하는 악마 새끼들의 음모가 아닐까?
아무튼 나는 또 멋지게 사레가 들려버렸고, 그 탓에 기침하느라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기침이 멎은 뒤에도 화끈거리는 것 같지만 그건 그거다.
원래 열이 한번 오르면 식는 데 좀 시간이 걸리는 법이라고.
……아무튼 그런 거야!
“데, 데이트라니, 무, 무슨 말씀을……!”
“어머? 애인끼리 같이 놀면 데이트이지, 아니면 뭔데요?”
이 아가씨가 미쳤나, 뜬금없이 뭔 소리를 내뱉는 거야?!
나도 모르게 옆자리의 메린을 힐끗 쳐다보았는데……
……굉장히 평화롭게 빵을 오물거리고 있다.
그 모습을 본 순간, 달구어졌던 내 얼굴도 확 식은 느낌이 들었다.
“……”
이 자식, 또 주변 이야기는 대충 귓등으로 듣고 있구만?
그래도 이번엔 녀석의 그 무심함이 고마웠다.
저 괴상한 소리를 기억하지 않을 테니까.
나는 한숨을 쉬었다.
“저희 둘은 그런 사이 아니에요. 아니, 남녀가 같이 있으면 다 애인이에요? 나 참…….”
“응? 메린 씨가 하고 있는 저 펜던트, 카엘 씨가 선물하신 거 아니에요? 애인 사이 맞는 거 같은데 왜 시치미를 떼신대?”
“……!”
우와, 그건 또 어떻게 봤대, 진짜 귀신같네!
젠장, 도로 얼굴 뜨거워졌어!
아무튼 설명, 으으, 설명해야 되는데 열 때문에 머리가 잘 안 돌아가!
“그, 그건 쟤가 평소에 훈련이다 뭐다 많이 해주고 있으니까 고맙다는 표시로……!”
“그리고 카엘 씨가 직접 고르셨을 테고.”
“아니 그건 또 어떻게……! 아아아뇨, 그건 쟤가 악세서리는 별 관심이 없으니까,”
“그래서 이것저것 시험해본 다음, 가장 잘 어울리는 걸로 샀고, 그걸 목에 건 채 계속 다녔죠?
게다가 옷 갈아입은 지금도 걸고 있고, 그걸 본 카엘 씨는 은근히 좋아서 씰룩거리고 있고. 애인 맞네요, 뭐.”
아니 어떻게 그걸 다 알고 있는 거야?
어디 숨어서 보고 있던 거 아냐?!
그보다 누가 씰룩거렸다고!
“아니, 그건 그러니까……! 그……!”
으아아, 반론해야 되는데 아무 생각도 안 떠올라!
거울 안 봐도 알 거 같아.
지금 내 얼굴 엄청 빨갛게 되어 있겠지?!
아, 진짜 미치겠네, 이걸 대체 뭐라고 해야……!
“흐음…… 카엘 씨, 왜 그렇게 열심히 부정하세요?”
“네? 왜, 왜냐니! 그, 그야 아니라는데도 안 믿으시니까……!”
“그거 아세요?정말 아무 생각 없는 사람은 딱 잘라서 아니라고 하지, 카엘 씨처럼 그렇게 허둥대지 않아요.”
“……네……?”
그게 지금……
무슨 뜻……
아니, 나는 정말로 메린 녀석이랑은 그런 사이가 아닌데 자꾸 오해하니까 그런 건데……?
“……말도 안 되는 오해를 받으니까, 당연히……당황……하죠.”
“왜 말이 안 돼요?”
“그야……”
……어라? 뒷말이 바로 떠오르지 않는다.
왜 말이 안 되지? 왜?
왜……말이 안 되더라……?
저 놈이? 하, 말도 안 되지………….
……들렸다.
얼굴만 아는 사람들이 과거에 들려주었던 말들이.
그 이유 말고 뭐가 있겠냐며 마음속의 내가 중얼거리는 듯했다.
“……그야 저는 안 어울리니까요.”
입술 사이로 새듯이 말이 흘러나왔다.
고향에 있을 땐 바로바로 떠올랐었는데, 이렇게 시간이 걸리다니 희한하네.
……마치 잊고 있었던 것 같아.
“……아.”
새삼스럽게 주위가 무척 조용해진 듯한 기분이 들었다.
식기가 부딪치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무거운 적막이다.
“……”
카엘, 이 멍청아, 쓸데없이 그딴 칙칙한말을 하면 안 되잖아!
하…… 이런 거 하나 재치 있게 못 넘기는 녀석이 무슨!
“흐음…… 카엘 씨도 고생이시네요.”
아무 일도 아닌 듯한 말투였다.
분위기 풀려고 억지로 던지는 게 아니라, 정말로 별일 아니라는 듯한 그런 말투.
천천히 시선을 돌리자, 옐리카는 고개를 끄덕이며 와인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후후, 함께 일하는 동료이자선배로서조언 하나 해드리죠.”
“……?”
“‘나는 그 사람을 어떻게 생각하는가’를 먼저 확실히 하세요. 당신은 지금 너무 앞서가고 있어요. 순서가 잘못됐다고요.”
“순서요……?”
이런 거에도 순서가 있나?
옐리카는 내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냥 순서도 아니고 무려 시발점이랍니다! 흠, 오히려 왜 그 부분이 쏙 빠져 있는지가 이상한걸요?
참고로 저는 이런저런 순서를 다 밟은 끝에, 오라버니를 절대 포기하지 않기로 결정했답니다!”
“푸흡.”
조용히 식사만 하고 있던 피트가 괜히 불똥을 맞고 말았다.
옐리카는 “어머나, 오라버니! 괜찮으세요~?” 라며 누가 봐도 일부러 과장하는 몸짓으로 피트의 등을 만지작, 아니 쓸어내린 후, 굉장히 만족스럽게 웃으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뭐, 그건 나중에 시간되실 때 혼자 열~심히 생각해보세요! 아, 그러고보니 어디어디 가셨어요? 계절정원은 가셨다고 했고…… 중앙박물관은 가보셨어요? 거기가 있죠~”
지금 당장은 생각할 틈을 주지 않겠다는 듯, 옐리카는 이후에도 내게 말을 걸며 식사를 이어갔다.
들려오는 이야기에 이따금 웃기도 하고, 양을 통째로 구운 호화로운 요리에 깜짝 놀라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귀족 아가씨가 던졌던 말도 머릿속에서 차츰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식사가 끝나기까지, 아니 끝난 뒤에도 그 말은 사라지지 않았다.
희미해질 대로 희미해진 채, 마음 한구석에 자리잡아 떠나지를 않았다.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되는, 소중한 가르침인 것처럼.
식사 후, 우리는 또 그 회의실에 들어가서, 오늘 얻은 조사 내용들을 정리하기로 했다.
“그곳에서 찾은 기록들입니다.”
피트가 테이블에 문서들을 두자, 꼭 먹이를 발견한 물고기들처럼 그 주변으로 모여 들었다.
두 명 빼고.
……메린은 그렇다 치고, 위슨 저 녀석도 이 사건에 대해선 별 관심이 없는 모양이다.
뭐, 도와달라고 하면 도와주니 상관없나?
아무튼 옐리카가 전에 ‘기록 자체를 막을 수는 없다’고 했던 것처럼, 이 도시에 ‘비료’들이 오간 기록들은 빠짐없이 적혀 있었다.
그 기록들 중 일부는 진짜 비료일 수도 있을 텐데, 종이를 슥 훑어본 옐리카는 죄다 가짜 비료라고 딱 잘라 말했다.
“짐마차 한 대에 비료를 어떤 때엔 다섯 포대, 어떤 때엔 열 포대만 싣는다? 말도 안 돼요. 적어도 오십 포대는 실어야 운송비라도 뽑을 걸요. 목적지라고 댄 곳과도 어울리지 않고요.”
기록에 적힌 모든 ‘비료’들은 죄다 한 곳으로 몰려가고 있었다.
웨셋.
왕국의 가장 서쪽에 있다는 마을이자, 산맥 입구나 다름없는 곳이었다.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여기도 농사는 지을 거 아니에요?”
“밭농사야 짓겠죠. 하지만 그 마을의 주 산업은 목축, 산양을 치는 것이랍니다. 굳이 비료를 사서 쓸 필요가 없어요.”
“그럼 애들을 데리고 국경을 넘었다는 게 되는데……. 그 너머엔 인간 마을이 없지 않나요?”
있더라도, 지도에 찍히지 않은 걸 보면 엄청나게 작은 마을이겠지.
주기적으로 들어오는 애들을 다 수용하고 키우려면, 마을이 어느 정도 커야 할 텐데?
이번에 내 질문에 대답한 것은 피트였다.
“맞습니다. 산맥 너머에는 인간이 살지 않아요. 산맥 위에 작은 마을이 여럿, 그것도 무척 띄엄띄엄 있죠. 그들 덕분에 조금이긴 해도 아직 드워프제 물품들이 들어오고 있고요.”
“아, 그랬군요.”
드워프가 만든 물품들이 유통되고 있었다니, 세상에, 난 한 번도 못 봤는데!
어쩌면 오늘 돌아다니다가 봤을지도 모르겠다.
그건 그렇고, 산맥 위에만 마을이 드문드문 있다는 건……
……혹시 애들을 제물로 바치는 미친 사이비 이단 새끼들이 산맥 주변에 숨어살고 있는 걸까?!
로나는 내 말에 팔짱을 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으음~ 그럴 가능성도 있네요……. 보통 동굴이나 땅굴 속에서 이단 의식을 벌인다고들 하니까요.”
“그럼 ‘비료’라는 건, 지들 교단을 확장시키기 위한 비료라는 뜻인가?”
“그럴싸하긴 하네요~ 확실하진 않지만요.”
“흠…….”
애들이 가장 최근에 이 도시에 들어온 건 닷새 전, 그리고 그 다음날 바로 말리스를 떠났다.
아무래도 그 밀수꾼들 말고도 다른 놈들이 애들을 납치하고 있는 모양이다.
……결국 이 도시에서 애들을 찾진 못하겠구만.
거래장소로 쓰던 창관도 불타버렸으니, 우리가 직접 뒷거래 현장을 찾아서 막는 건 불가능하다.
적어도 누가 그랬는지 알아내든가, 아니면 다른 단서라도 최대한 모아야 할 텐데.
……그러려면 잉그리트의 입을 열어야 한다.
오늘 안에 답을 주지 않으면 내일 바로 쳐들어갈 거라는 말까지 전했는데도, 아직까지 아무 소식도 없다는 건…….
“……옐리카 님, 혹시 복수초의 본거지가 어디에 있는지 아시나요? 주 사업장도 괜찮습니다.”
“응? 대장과 얘기가 잘 안 되셨나요? 사업장이야 몇 군데 알긴 한데…… 쳐들어가시려고요?”
“나이비 대장은 말을 전해주기로 했어요. 복수초가 요청을 무시했다 싶으면 내일 바로 쳐들어갈 생각입니다.”
“오, 사내답고 좋네요! 후후, 그럼 내일 출발하실 때 지도에 표시해드릴게요.”
……보통 말리거나 걱정하지 않나?
이 아가씨도 참 특이하네…….
옐리카는 유쾌한 표정으로 과자를 우물거린 후, 재차 말을 꺼냈다.
“그러고보니 그 엘프, 나이비 대장을 찾아가셨을 때 만나셨다면서요? 암살 시도하려던 걸 잡으셨다고요?”
“아, 네.”
“흐음…… 그냥 감옥에 넣기만 하고 따로 심문은 안 했는데, 엘프가 목숨을 노릴 만한 사람이 거기 있었나요?”
어라? 당연히 아는 줄 알았는데……?
멍하니 위슨을 쳐다보자, 녀석이 어깨를 으쓱였다.
“말하면 그 엘프, 사지분해 될 거 같아서.”
“……”
역시 나만 그렇게 생각한 게 아니었어!
블루벨은 정말 이 둘에게 고마워해야 된다.
사회적으론 이미 수치사(??死)한 거나 다름없긴 하지만, 어쨌든 몸은 지켜주었으니까!
“으응? 왜요? 누굴 노렸길래?”
“그…… 피트 님입니다.”
“……뭐라고요?”
아가씨의 얼굴이 싹 굳으며 차가워졌다!
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그녀는 곧바로 길길이 날뛰지는 않았다.
“그 년이 오라버니를 죽이려고 했다고요? 혹시 이유도 들으셨나요?”
오히려 굉장히 차분하고 침착하게 묻고 있었다.
……눈은 지금 당장이라도 그 엘프를 쳐죽여버리겠다며 흉흉히 빛나고 있었지만.
위슨이 고개를 끄덕인 후, 로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파랑새를 통해 의사전달을 해야 하는 그로서는, 녀석의 말투가 걸리는 듯했다.
“듣긴 했는데, 정말정말 희한한 이유였어요.”
로나는 방긋 웃는 얼굴 그대로 차를 홀짝이며 말을 이었다.
“글쎄, 피트 님이용사라서 노렸다고 하네요. 정말 희한하죠?”
아니, 이건 또 뭔 소리야?
“용사라니……그럼 뭐야, 그 엘프는 용사를 죽이라고 파견된 거야?!”
“그렇다니까요. 정말………무슨 생각인 걸까요……?”
얼굴에는 여전히 미소가 걸려 있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약간 낮게 깔려 있었다.
불쾌함을 넘은, 분노가 서려 있는 듯했다.
반면, 옐리카는 안도의 한숨을 쉬고 있었다.
으음, 사모하는 낭군님이 암살 대상이 아닌 걸 알았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반응이겠지만……
당사자 앞에서 대놓고 그럴 건 없지 않나?
흥.
“예에, 예…… 안심되시겠지요…… 피트 님이 아니라 제가 목표이니까요…… 예~ 거 참 자알~ 됐네요~”
“어머, 오해하지 마세요. 오라버니가 목표가 아니라 다행인 것도 있긴 하지만, 그보다 전쟁 걱정을 할 필요가 없어서 안심한 거랍니다.
아무리 이 도시가 튼튼하다고 해도, 전화(戰?)에 휩쓸리면 어떻게 될지 모르잖아요?”
“전쟁……? 아, 하긴, 피트 님은 도련님이시니까…….”
얼마나 큰 성의 후계자인지는 모르지만, 만약 피트가 블루벨에게 당했다면 전쟁이 일어나긴 했을 것이다.
엘프에게 직접 걸든 아니면 왕성에 호소하든, 대포에 누가 불을 붙일 건지만 다르겠지.
“도련님……? 무슨 말씀을………설마, 아무것도 모르시는 건가요?”
“네?”
“……”
그녀는 매서운 눈초리로 피트를 흘겨보았다.
피트는 그녀의 날카로운 시선도, 내 의아한 눈도 마주할 수 없다는 듯이 테이블만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갑자기 왜 그러지?
순식간에 냉랭해진 분위기 때문에, 나는 깨물려던 과자를 도로 테이블에 두어야 했다.
겸사겸사 메린 녀석의 손도 내려주었다.
천천히, 옐리카의 입술이 달싹였다.
“여러분이 오늘 외출하신 동안, 저도 손님 한 분을 맞이했답니다. 볼케 백작이시라고, 제 단골이시죠. 그 분이 내일 밤, 별장에서 파티를 열 테니 꼭 와주었으면 한다고 하셨어요. 귀한 물건을 손에 넣었으니, 제 감정을 받고 싶으시다며.
……그게 뭐라고 생각하세요? 오라버니.”
피트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녀 역시 대답을 기대한 건 아닌지, 홀로 계속 말을 이었다.
“……왕가의 보검이라고, 그 분이 아주 똑똑히 말씀하셨어요. 왕족만이 쓸 수 있는 보물고에 보관되어 있는 걸, 왜 그 분이 가지고 있는 걸까요? 오라버니는 아시겠나요?”
“……”
“혹시 이것도 아실까요? 지금 이 도시 술집이란 술집에서 떠드는 이야기! 흑발의 긴 머리를 가진 여자 용사가 이 도시에 있다고 하네요!꽃 모양이 새겨진 성검을 가진 용사가!”
“옐리카.”
변명은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이, 그녀는 고개를 흔들며 소리쳤다.
“어쩐지 이상하다 싶었어요. 오라버니가 여기에 오시다니. 아무 연락도 없이, 그것도 혼자서!
왜 그러셨어요?왜 멋대로 보검을 들고 뛰쳐나오신 거에요?왜…… 왜 그 얘기를 저에게 한 마디도 하지 않으신 거에요?!그렇게 제가 미덥지 않던가요?!”
분노에 찬 목소리가 회의실 안에 울려 퍼졌다.
그녀의 기세에 눌린 건지, 아니면 죄책감 때문에 입이 떨어지지 않는 건지, 피트는 여전히 시선을 떨군 채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 틈을 메꾸기라도 하는 듯이, 옐리카의 목소리가 계속 이어졌다.
……목소리뿐 아니라 두 눈 가득히 물기가 어려 있었다.
“……정말 분하고 화나지만, 네, 이해해드릴게요. 당연히 저를 못 믿으시겠죠. 사람이든 뭐든 돈 되는 건 죄다 팔아서 작위를 산 집안의 딸년이니까! 지금도 사람 빼고는 다 팔면서, 그 더러운 돈으로 귀족 아가씨인 척 흉내나 내고 있는 년이니까!
하지만 이 분들은 아니잖아요?! 생명의 은인이라면서요! 어떻게…… 어떻게 목숨을 빚진 사람들에게도 계속 숨기실 수가 있어요?!”
순식간에 험악할 대로 험악해진 분위기 속에서도, 내 머리는 그녀가 쏟아낸 말들을 굉장히 깔끔하게 정리하고 있었다.
그에 따라 도출된 결론은, 아까 식사 중에 들었던 말보다도 더 큰 충격적이었다.
옐리카가 씩씩거리며 숨을 고르느라 말을 멈춘 틈을 타, 내 입이 조용히 움직였다.
시선은 아까부터 피트에게 못 박힌 채였다.
“그러니까…… 당신이 그 사람이군요? 메리골드 장식이 들어간 검집을 가진 사람이.
……근데 그 검이, 뭐요? 왕가의 보검……? 아니, 그럼 설마……!”
“그래요. 제가 대신 소개하는 영광을 누리도록 하죠!
이 분은 이 왕국, 올레이스의 국왕이신 퓰리에스 디왈리 국왕폐하의 다섯째 자식이자 셋째 왕자, 바로피터 디왈리 왕자님이시랍니다!”
고개를 떨군 왕자의 머리 위로, 분노 어린 소개가 쏟아져내렸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