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7화 〉 95화 : 땅 속에 핀 복수초 (3)
* * *
무려 열 아홉 해나 살고 있으면서 지난달에나 겨우 이름을 알게 된 이 왕국,
올레이스의 국왕인 퓰리에스 디왈리에겐 여섯 명의 자식이 있다.
첫째는 마가렛 공주.
다른 귀족에게 시집간 지 오래이다.
둘째는 퍼시벌 왕자.
장남이자 현 왕태자이면서, 선포식 땡땡이 친 비범한 분이다.
셋째는 프레데릭 왕자.
어째서인지 선포식을 땡땡이 친 형을 대신해 앉아 있던 사람이다.
어쩐지 눈을 안 마주치려고 하더라.
넷째는 캐롤린 공주.
역시 제 언니처럼 옛적에 시집갔다.
다섯째는 피터 왕자.
역시 선포식에 안 나온 사람이다.
……왜 왕자들은 다 이 모양이지?
그리고 햇수 좀 띄어서, 마지막 여섯째가 율리아 공주.
예언의 아이, 창조주의 말을 전하는 대언자이자 현 교단의 최고사제이다.
그 미모와 자비, 위엄이 철철 넘치는 모습으로, 왕국민들의 사랑과 경외를 가득 받고 있다.
……그 얘기가 나올 때마다, 기억 속의 모습과 괴리감이 너무 심해서 내 표정이 찌그러지긴 하지만.
아무튼 여섯이나 되는 자식들 모두 성년을 맞이하여, 각자의 의무에 충실……히 임하고 있다.
그렇게 알려져 있는데,
“……”
왜 이 사람은 지금 내 눈앞에 죄인처럼 고개를 떨군 채 앉아있단 말인가?
후반이긴 해도 아직 20대니까 마지막 청춘을 불태우고 싶었던 걸까?
피트, 아니 피터 왕자는 옐리카의 소개인사가 끝난 뒤에도 가만히 앉아 있을 뿐이었다.
당장 입을 열어도 모자랄 판에 왜 꿋꿋이 침묵을 지키고 있는 건지…….
그 처연한 모습이 기가 막혀, 나는 고개를 저었다.
“하실 말씀 없으십니까? 피터 왕자님.”
“……”
“진짜 없어요? 있으실 거 같은데요. 아니, 있으셔야 합니다.
왕자님, 당신은 반드시 하실 말씀이 있으셔야 해요.”
내 거듭된 재촉을 견디지 못하겠는지, 왕자가 고통스러운 듯이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카엘 씨. 제 신분을 숨긴 것, 정말로 무어라 사죄드려야 할지…….”
“아니, 그거 말고!”
겨우겨우 열린 입에서 튀어나온 말이 그딴 거라니, 돌겠네!
멍하니 나를 올려다보는 왕자에게, 나는 더 참지 못하고 크게 쏘아붙였다.
“누가 그거 사과 받고 싶다고 했어요?! 당신이 왕자이든 말든, 나랑은 하등 상관없어요! 관심도 없고! 물론 놀랐기는 하지만 그게 뭐 어떻다고요?!”
만약 그걸 정말로 제 잘못이라 여기고 있다면, 이 왕자님은 단단히 착각하고 있다.
이 도시로 오는 길에 만났던 그 도적들의 주머니가 왜 두둑했겠는가?
왜 몬스터들의 배가 불룩했겠는가?
마을과 성 바깥으로 나가는 순간, 길가의 작은 돌멩이조차 목숨을 위협하는 적이 되기 때문이다.
몸뚱이 말고는 별 값나가는 거 없는 평민조차도 그림자와 사람을 경계하는 시대이다.
하물며 잃을 게 훨씬 많은 귀족, 그것도 왕족이라면 더 하겠지.
이유는 모르겠지만 왕자가 혼자 여행하고 싶었다면, 당연히 신분부터 숨겨야 하는 거다.
그러니 만약 그가 끝까지 그 사실을 숨겼다고 해도, 나는 잠시 넋이 저 하늘 너머로 올라갈지언정 화는 절대 내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감탄하겠지.
그러니 그는 다른 말을 해야 했다.
별 것도 아닌 걸로 죄의식에 빠져 허우적대지 말고,눈앞에 있는 사람을 보아야 한다.
그런데도 이 빌어먹을 왕자님은, 혼란스러워하는 얼굴로 나를 보고만 있다!
답답해 죽겠네, 진짜!
적어도 왕가의 보검…가보를 도둑맞았다는 사실을 숨긴 걸 미안해하든가!
아니, 그보다도 저게 정말 안 보인단 말야?!
아가씨가 자신의 말을 내심 부정해주길 바라고 있는 게 안 보이냐고!
“정말 모르시겠어요?! 아니면 당신 설마 정말로……!”
“……카엘 씨, 됐어요.”
거짓말이다.
사제가 아닌 나라도 단박에 알 수 있을 거짓말이다.
됐다고 말하는 그녀의얼굴과 목소리는 메말라 있었으니까.
조금 전까지만 해도 반짝이던 짙은 갈색 눈동자가, 검게 흐려져 있으니까.
“아니, 되긴 뭐가……!”
“됐어요. 정말로.”
안 돼.
이대로 끝내서는 안 된다.
왕자와의 관계가 어떻게 되든 내 알 바 아니다.
그녀 자신이 내뱉은, 옐리카 바실리예프라는 존재를 진흙탕으로 추락시키는 그 말들을 부정해야 돼!
그녀와 가장 인연을 쌓았을 왕자가 그걸 해야 되는데, 저 등신 새끼는 진짜!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닐 거에요. 절대 당신이 생각하는 그딴 이유로 숨긴 게 아닐 겁니다. 달리 사정이 있었을 거에요! 그러니,”
“침묵은 곧 긍정이라고 하죠. 뭐, 사실 그리 놀랍지도 않아요. 그간 제가 애써 모르는 척하고 있었을 뿐이니까.”
“옐리카 님.”
“죄송해요. 회의를 계속하기엔 제가 지금 너무 감정이 올라있네요. ……조금 가라앉히고 올게요.”
그녀가 길다란 테이블을 지나 문을 열자마자, 그 앞에 바로 서 있는 집사가 보였다.
막 두드리려던 참인지 손을 올리고 있었는데, 무언가 급한 전갈이 있는 듯했다.
제 주인의 모습을 본 집사는 동요하는 듯했다.
이제 아주 살짝 주름이 진 이마가 살짝 찡그려졌다.
“아가씨……? 무슨 일이……”
“……묻지 마. 그리고 무슨 볼일이든, 나중에 하고.”
시선을 떨군 채 지나쳐가려는 옐리카의 앞을, 집사가 바로 막아섰다.
“……못 들었어? 지금은 됐으니까 나중에,”
“정말 죄송합니다, 아가씨. 그건 불가능합니다. 저택 앞에 배달물이 도착했으니, 가서 보셔야 합니다.”
“배달 따위, 당신이 그냥 알아서……!”
입술을 깨무는 제 주인을 보며, 집사는 거듭거듭 깊이 허리를 숙이며 간청하듯이 입을 열었다.
“정말 죄송합니다만,제가 처리할 수 있는 배달물이 아닙니다. 아가씨 또는 손님분들 앞으로 온 배달…… 아니,선물입니다.”
“선물이라니 이 시간에 무슨……! ……잠깐, 나 또는 손님들 앞으로 왔다고……?”
화를 내려던 옐리카는 무언가를 깨달은 듯했다.
스스로를 진정시키려는 듯이 크게 심호흡을 한 후, 그녀는 자신의 앞에 서서 허리를 숙이고 있는 집사를 바라보았다.
“……클로드, 말해줘. 뭐가 온 거지?”
허리를 편 집사는 다시 한번 고개를 숙여 인사한 후, 주인의 얼굴을 마주보았다.
“시신입니다.”
“누구의?”
“이름은 적혀 있지 않아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외형은 그대로 남아 있으므로, 육안으로 충분히 알아보실 수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우와, 남의 집에 시체를 보낸다는 그 발상도 무시무시한데, 그 사실을 그다지 놀란 기색도 없이 말하고 듣는 저 둘도 무시무시하다.
혹시 이 도시만의 고유 문화인 걸까?
“……그래? 그럼 다같이 보러 가야겠네. 어쩌면 내가 아는 사람일수도 있으니.”
“감사합니다, 아가씨.”
그게 누구이든 나나 메린, 위슨이 아는 사람은 아닐 거다.
하지만 말을 맞추기라도 한 것처럼, 나를 포함한 다섯 명은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나 회의실을 뒤로 했다.
분노로 묵직해진 이 방 안에, 누구 한 명 남아 있고 싶지 않다는 것처럼.
옐리카는 뒤를 돌아보지 않은 채, 집사를 따라가며 물었다.
“가는 길에 후보 선정이라도 하게 알려줄래? 어떻게 생긴 사람이야?”
“스물을 조금 넘은 나이인 듯한 젊은 여자입니다. 머리를 길게 늘어뜨리고 있는데,”
집사는 별안간 목을 한 번 가다듬고, 여전히 덤덤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검은색 머리입니다.”
“검은색 머리……?”
“예. 등불을 비춰서 확인해보았습니다. 확실히, 검은 머리였습니다.”
……검은색 머리?
그것도 길게 늘어뜨린……?
방금 들었던 말들 때문인지, 내 머릿속에 떠오른 사람은 딱 한 명뿐이었다.
꽃무늬가 새겨진 성검을 가졌다는 여자.
말도 안 되지.
그 여자가 정말 있었고, 이 도시에서 죽었다 해도, 그 시체를 왜 이 저택에 보내겠어?
그렇게 생각하며 나간 저택 앞에서, 나는 정말로 그 이유를 진지하게 고민해야 했다. 피터 왕자가 그 ‘선물’을 보자마자 넋 나간 목소리로 중얼거린 것이다.
“말도 안 돼……. 이 여자는……!”
그 목소리를 듣고 바로 깨달았다.
누군가가 커다란 나무 상자, 아니 친절하게 관에 넣어서 보내준 ‘선물’은, 왕가의 보검을 훔쳐간 범인……
그 소문의꽃무늬 장식이 된 성검을 가진 미녀 용사라는 것을.
나는 아무 말도 못한 채, 갑자기 찾아온 이 ‘선물’을 아연히 쳐다보았다.
관 속에 눕혀 있는 여자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 검은 머리카락이 융단처럼 활짝 펼쳐져 있다.
소문대로 미녀이긴 한데……
입술은 검게 물들어 있고, 윤기 없는 두 눈동자는 크게 부릅뜨고 있으니,감탄보다는 질색하게 되는 얼굴이었다.
평소라면 바로 눈을 돌렸을 거지만, 이번에는 그럴 수 없었다.
“……!”
그 여자의 몸뚱이에 글씨가 적혀 있었기 때문이다.
……깃펜보다도 날카로운 펜, 칼로 새긴 글씨가.
그 배덕적인 ‘편지’에 이끌리듯이, 나는 관에 가까이 다가갔다.
근처 하인에게 등불을 빌려 관 위에 드리우자, 창백한‘종이’위에 새겨진 붉은 글씨가 불빛에 반짝였다.
구역질을 참으며, 그 글씨를 읽었다.
“……<정중한 요청에="" 감사함.="" 그="" 뜻으로="" 용사에게="" 이를="" 바침.="" 답례인사를="" 하고="" 싶거든="" 자정="" 즈음,="" 우리집으로="" 올="" 것.="" 동행은="" 몇="" 명이든="" 상관없음.="">……우욱……!”
……글씨는 어떻게 읽었는데, 그 아래를 본 순간 바로 엎드리고 말았다.
거의 보자마자 바로 엎드린 탓에 제대로 기억은 나지 않지만, 어쨌든 약도가 그려져 있는 건 분명했다.
그것도중요한 건물과 길 외에는 전부 파여 있는, 잘못 보고 싶어도 볼 수 없는 약도가!
미친 새끼들,진짜 끝내주게 창의적이고 배려 깊은 솜씨구만!
이거 하난 분명하다.
절대로 오래 엮이면 안 되는 종자들이야……!
“윽…… 하아……!”
……그래도 그간 시체를 많이 본 덕분인지 뱃속이 바로 뒤집어지진 않았다.
이것도 성장이라면 성장인가?
헛웃음을 흘리며 터덜터덜, 뒤로 물러나 털썩 주저앉은 채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눈을 감으면 그 모습이 또 떠오를 것 같아, 검푸른 하늘에 반짝이는 별만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럼에도 이따금 울컥 치솟는 구토감을 참느라 정말 안간힘을 써야 했다.
그러는 와중에, 메린이 옆에서 말을 걸었다.
“안 참는 게 낫지 않냐?”
“하아…… 싫어…….”
모처럼 좋은 음식들을 먹었는데 뱉어버릴 순 없지.
반드시 참아서 전부 소화시켜버릴 거다!
“후우…… 메린, 너 저거 볼 수 있지? 약, 윽, 약도그려져 있으니까,”
“뭐, 표시하라고? 알았어.”
메린은 내 어깨를 툭툭 치고는 떠나갔다.
지도 가지러 저택 안으로 다시 들어간 거겠지.
……평소엔 눈치 없으면서, 이런 건 잘 알아챈단 말야.
씁쓸히 웃으며 여전히 하늘을 올려다보는 내 귀에, 옐리카의 중얼거림이 들렸다.
“오라버니의 반응을 보니, 보검을 훔친 건 저 여자가 맞나보군요. 그리고……”
“아가씨, 직접 보실 필요 없습니다.”
“……됐으니까 봉투나 줘. 이제 고상하게 굴 필요도 없는걸.”
그래도 봉투는 들고 가는구나.
……잠깐,그럼 나도 하나 받아야 되는 거 아니야?
안 돼, 이제 겨우 좀 가라앉았는데!
“……윽.”
다행히 봉투가 일할 필요는 없었다.
옐리카는 딱 한 번 신음한 후, 꼿꼿이 서서 시체의 복부에 그려진 약도를 살펴보았다.
“……만나자고 하는 곳은 가게가 아니네요. 그래도 여전히 상업지구 안에 있으니…… 창고이겠군요.이런 곳에 본거지를 숨겨두고 있었으니, 그간 못 찾은 것도 당연하네요.”
“창고요?”
다시 돌아온 옐리카의 얼굴은, 불빛 없는 밤 그림자 속에서도 훤히 보일 만큼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꿋꿋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숨겨진 문을 통해 더 안쪽에 있거나, 아니면 지하에 있을 거에요.
아무튼 ‘정중한 요청에 감사하다는 뜻으로 용사에게 바친다’고 밝힌 걸 보면, 이게 당신이 기다리던 답신이라 봐도 되겠네요.”
“복수초가 보낸 답신…….”
옐리카는 나이비 대장에게 내가 용사라는 것을 알려주었다.
대장 자신은 믿지 못했지만, 그래도 제 자매에게 그 사실까지 모조리 전한 거겠지.
즉, 이건 복수초, 잉그리트가 나에게 보낸 답장이다.
“복수초……. 응, 맞아. 복수초야.”
어느 틈에 간 건지, 위슨이 시체의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는 홀로 고개를 끄덕거리며 말을 이었다.
“위슨이 아는 냄새랑 좀 달라서 바로 못 알아챘네. 이 여자, 복수초를 먹고 죽었어. 아직 피냄새가 풀풀 나는 걸 보니, 죽은 지 몇 시간 안 된 것 같은데.”
“뭐? 그거 진짜 있는 풀이었어? 그것도 독초야?!”
“몰랐냐? 실존하는 독초야. 한 포기로 사람 여럿 보낼걸?”
“우와…….”
어쨌든 이 여자가 복수초를 먹고 죽은 거라면, 잉그리트는 선물상자에 이름을 쓰는 대신 향기로 남긴 셈이다.
글을 쓸 줄 아는 것도 그렇고, 그냥 무식하게 주먹만 센 인물은 아닌 모양이다.
제정신도 아니고.
“누구 한 명 등불 좀.”
메린이 손에 펜과 지도를 들고 나오며 태연하게 말을 꺼냈지만, 주변에 선 하인들 누구도 선뜻 나서지 못했다.
심정은 이해한다.
좀 떨어진 데서도 피비린내가 진동을 해서 죽겠는데, 지금 그녀가 보려는 건 그 끔찍한 약도이니까.
그녀가 관 앞에 선 뒤에도 아무도 나서지 않자, 위슨이 한숨을 쉬며 하인에게 손을 내밀었다.
“등불 줘.”
“아, 으, 예!”
냉큼 등불을 건네는 하인의 모습이 우스웠지만, 그 심정이 백 번 이해가 되는 탓에 웃을 수 없었다.
“와, 되게 깔끔하게 팠네. 어떻게 살이랑 뼈만 싹 파내고 내장은 하나도 안 상,”
“미친년아! 감상 읊지 마!!”
“알았어, 새꺄! 나 참,괜히 성질이야.”
“쟤가 비위 약해서 그런 걸 어쩌겠냐? 메린 네가 참고 얼른 보기나 해. 위슨 팔 아파.”
……내가 잘못한 거야?
끔찍한 거 설명하지 말라는 게 잘못인 거야?!
하……돌겠네, 진짜.
“으응~”
약도에 그려진 부분을 찾기 힘든 건지, 메린은 턱을 긁적이며 고개를 왔다갔다 하고 있었다.
그 옆에서 같이 빤히 보고 있던 로나가, “아” 하며 소리를 내었다.
“메린 님, 여기 아니에요? 여기.”
“응? 어…… 어, 그러네. 너 잘 찾는구나.”
“헤헤, 아까 낮에 여기 근처 지나갔었거든요! 여기 앞에서 솜사탕이라는 걸 팔고 있었는데 맛있더라고요!”
“나도 딴 데서 먹었어. 폭신폭신한 게 엄청 달더라.”
저걸 뭐라고 표현하면 가장 적절할까?
관짝 앞에 아이 둘과 여자 한 명이 모여 있는데, 그 안에 든 시체 보면서 과자 얘기하고 있는 저 모습을 말야.
너무 기가 막혀서 뭐라 할 맘도 생기지 않았다.
그래서 그 괴상한 꼴을 멍청히 보고 있는데, 옐리카가 속삭이듯이 말을 꺼냈다.
“동행은 몇 명이든 상관없다고 했죠? 그럼 시간 맞추어서 여러분 모두 가시면 되겠네요.”
“네? 모두라고 하시면…….”
“물론 오라버니도 가셔야죠. 복수초가 알고 있는 ‘용사’가 카엘 씨가 아니라 오라버니일수도 있으니까요.”
……얼핏 들으면 타당한 것 같지만, 그건 옐리카의 억지였다.
설마 나이비 대장이‘용사’의 생김새만 쏙 빼놓고 말을 전했을까.
그냥 혼자 있고 싶은 거겠지.
그래서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왕자님은 여기 계실 겁니다. 위험한 곳에 모시고 갈 순 없죠. 안 가셔도 되면 더더욱.”
“……”
“또 뭐, 얼굴 모르면 어때요? 어떻게든 되겠죠.”
어차피 내가 물어볼 말은‘용사’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일이다.
일이 꼬이더라도……
뭐, 어떻게든 되겠지!
내 말에, 옐리카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인 후, 재차 입을 열었다.
“좋을대로 하세요. 어쨌든, 오늘 회의는 그냥 마치도록 하죠. 자정까지 좀 시간이 있으니 쉬다 가셔요. 내일 봬요.”
“네? 결과 안 들으시고요?”
그녀는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죄송해요. 저도 여러모로 생각을 정리해야 할 것 같아요. 내일 아침에 들을게요. 그럼 클로드, 나머진 부탁할게.”
“옐리카 님, 잠시만요!”
휘적휘적 다시 안으로 들어가는 옐리카의 팔을 가만히 붙잡았다.
그녀는 내 손을 뿌리치지는 않았으나, 얼굴을 보이지도 않았다.
“……너무 앞서가지 마세요. 저 등시, 아니 왕자님의 침묵이 꼭 긍정이라는 보증도 없잖아요.
저는 평민이라 그쪽 세계는 잘 모릅니다만……귀족들도 돈 벌고 살 텐데,상인 출신이라고 싫어할 리 있겠어요?옐리카 님은 모자랄 데 없는 아가씨이신걸요.”
좀 잔인하고 냉혹한 면이 있긴 하지만, 그렇게 큰 흠이 될 건 아니다.
부드럽게 웃으면서 그러니 좀 기겁을 할 뿐이지.
“후후, 위로해주시는 거에요? 다정하셔라. 그 마음씨를 봐서, 감히 왕자를 등신이라고 한 건 못 들은 걸로 해드릴게요.
……그리고 제 생각이맞을 거에요. 오라버니는 제 아버지를 무척 싫어하시니까. 저도 하는 일 자체는 아버지와 별반 다를 거 없으니, 아마 같겠죠.”
“옐리카 님.”
“괜찮아요. 익숙한걸요. 내일 아침엔 다시 밝은 얼굴로 인사할 수 있을 테니 걱정 마시고, 조심히 잘 다녀오세요.
……고마워요, 카엘 씨.”
옐리카는 부드럽게 웃으며 다시 걸어가기 시작했다.
저택 안으로 홀로 들어가는 그녀의 등은 꼿꼿하게 펴져 있다.
……그러나고맙다며 보인 그 웃음은, 무척이나 서글픈 빛을 띄고 있었다.
“……”
누구도 위로해줄 수 없는 깊은 슬픔을 안은 채, 저택의 주인은 화려한 조명속으로 쓸쓸히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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