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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사는 소꿉친구 검성이 무섭다-98화 (98/475)

〈 98화 〉 96화 : 땅 속에 핀 복수초 (4)

* * *

자정까지 삼십 분 정도 남았을 무렵, 우리는 복수초의 ‘집’으로 출발하려 저택 앞에 모였다.

주인 대신 우리를 배웅하러 나온 집사는, 우리가 탈 마차를 보며 살짝 얼굴을 찌푸렸다.

“불필요한 주목을 피하기 위해서라는 건 이해합니다만…… 이런 짐마차로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예. 천막까지 쳐져 있다니 완벽한데요? 정말 감사합니다.”

“……”

집사는 좀처럼 얼굴을 펴지 않았다.

아무리 내가 요청한 거라 해도, 손님을 짐마차에 태워서 보낸다는 사실 자체가 영 껄끄러운 모양이었다.

메린이 가볍게 먼저 올라타고, 그 다음에 내가 올라타려는 순간, 로나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카엘 님. 역시 저는 여기 남을게요.”

“뭐?! 네가 안 간다고?! 아니, 왜?!”

세상에, 이게 무슨 소리야, 로나가 여기서 빠지겠다니!!

뒷골목 보스 보고 싶다며, 마차 바닥에 붙어서라도 따라올 줄 알았는데!!

로나는 로나대로 내 반응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어라?! 혹시 저 남으면 안 되는 건가요?”

“아, 아냐아냐, 남아도 돼. 진짜야. 그냥 좀 의외라서. 뭐 이유라도 있어?”

그녀는 내 물음에 쓴웃음을 지었다.

“옐리카 님이 눈에 밟혀서요. 사제로서 그냥 못 두겠어요.”

“……그래. 부탁할게.”

그러나 이건 옐리카만 위로해서 될 일이 아니다.

배웅할 면목은 없지만 그래도 도리를 지켜야 한다며, 이 자리에 나와 고개만 푹 숙이고 있는 저 등신 새끼, 피터 왕자를 어떻게 해야지.

사실 옐리카가 먼저 쉬겠다며 들어가자마자 왕자를 붙잡고 잔소리를 퍼부어주려고 했는데……

어느 틈에 간 건지, 이미 방에 들어가버린 탓에 할 수가 없었다.

그러니 이렇게 눈앞에 있는, 이때를 잡아야 한다.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왕자님, 옐리카 님을 경멸하십니까?”

“……아닙니다.”

“그런데 왜 침묵하셨죠?”

“그건…….”

왕자는 말을 잇지 못했다.

무언가 성가신 이유가 있는 모양인데, 지금은 그걸 캐낼 시간적 여유도, 인내심도 없다.

그러니 잔소리만 해주기로 했다.

“경멸하시는 게 아니라면, 그 뜻이라도 옐리카 님께 전하세요. 어떤 사정이 있든지 간에, 자신을 좋아해주던 사람이 그딴 오해를 하는 걸 그냥 두면 안 돼요.

그건 사람이 해선 안 될 짓이라 봅니다.”

“……”

왕자는 끝까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내가전할 건 전했다.

나머진 왕자 스스로 알아서 하겠지.

나는 한숨을 쉰 후, 짐칸에 올라 메린의 맞은편에 앉았다.

이제 위슨만 올라오면 출발인데……

녀석은 잠시 고민하더니, 가만히 손을 흔들기 시작했다.

안 갈 생각이구만.

물론 강제로 끌고 갈 생각은 없지만……

으으음…….

“……너 설마, 괜히 그런 데 가서 시간 낭비할 바에야 여기서 공부나 하련다~ 뭐 이런 이유인 건 아니겠지?”

“너 내가 그렇게 야박한 놈으로 보이냐?”

“조금.”

“……”

이 녀석, 아까도 큰 소리 막 오가는 와중에 내내 책 읽고 있었단 말이지.

그런 상황에서도 글자가 머리에 들어오나?

어찌 보면 대단하네.

어쨌든 전~혀 관심을 가지지 않은 걸 보면 이 녀석도 좀 박정한 면이 있는 것 같다.

위슨은 내 말에 잠시 할 말을 잃은 듯이 멍하니 있다가 한숨을 쉬었다.

“만약을 대비하려는 거야. 시체도 보낸 놈들인데, 무슨 괴상한 짓을 할지 모르잖아. 호위병들이 있긴 하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오오! 그런 깊은 뜻이……!”

“……너 나 놀리냐? 아무튼 나도 여기 남을 테니까, 이거 가져가.”

그렇게 말하며 그가 건넨 것은, 물약이 들어 있는 작은 병이었다.

“섬광물약이야. 혹시 모르니까 가져가.”

“흠…… 이거 깨지면 발동하는 거지?”

“어. 아니면 우리 목소리에만 반응하게 해뒀으니, 던진 다음에 크게 소리쳐도 돼. ‘터져라’든 ‘뒤져라’든 ‘섬광’이든 네 취향대로 질러.”

“……”

병을 깨뜨려야 발동하는 구조이니아무 소리나 질러도 병이 알아서 깨진다는 건 굉장히 유용한 기능일 거다.

그리고 그 기능을 저렇게 의욕 팍 꺾이게 설명해주는 것도 재능이면 재능이라 할 수 있겠지.

나 참, 마지막의 ‘섬광’은 뭐야, 뭔 기술 이름 외치는 것도 아니고!

“……그럼 조심히 다녀오십시오.”

집사의 인사말을 신호로, 짐마차가 길을 달리기 시작했다.

낮보다도 더 밝게 빛나는 말리스의 밤거리, 그 속에 숨은 암흑을 향해.

마부는 지도에 표시된 곳, 창고 근처 큰길에 우리를 내려주었다.

감사 인사를 하는 나를 향해, 마부는 고개를 끄덕이며 딱 한 마디 남기고 떠나갔다.

“시계탑 앞에서 기다리겠습니다.”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떠나가는 저 자세……!

음, 뭔가 전문가 같아!

……역시 이런 분쟁 같은 건 흔하게 일어나는 건가?

“……”

굳게 닫힌 문을 보며, 또 한 번의 심호흡.

마차에서 쉰 것까지 합하면 이게 과연 몇 번째일까?

메린이 그런 나를 보며 짤막하게 물었다.

“연다?”

준비됐는가?

“……어.”

각오를 다지고 고개를 끄덕였다.

주홍빛 눈동자는 한 번 깜빡인 후,

콰앙!

시원하게 문을 걷어차버렸다!

“……”

와아……문짝이 날아가선 벽에 부딪쳐서 완전히 박살났어…….

와아……날아가면서 그 도중에 있던 선반 몇 개 넘어졌는데…….

저거 다 배상해야 되는 건 아니겠지……?

나는 가만히 녀석을 돌아보았다.

“……야, 꼭 이래야 됐냐?”

“뒤에 누가 숨어있을 수도 있잖아.”

“그건 그런데…… 일단 우리 초대돼서 온 거잖아……. 싸우러 온 거 아니라고…….”

만약 여기 중앙에 잉그리트가 앉아 있었다면 방금 그걸로 죽었을 거다.

그럼 어떻게 되는 거지?

메린이 새 두목이 되나?

……왕국 끝장나겠는데?

하마터면 말리스의 뒷골목 기둥이 될 뻔한 그녀는, 덤덤한 얼굴로 어깨를 으쓱였다.

“그거 함정일수도 있잖아.”

“그래…… 그러겠지……. 하…… 가자…….”

“왜. 내 말이 틀려?”

“아니야, 맞아……. 네가 다 맞아…….”

이런 밤길에, 그것도 인적 드문 창고에 들어가는 거니 경계해야 하긴 하지.

게다가 주먹과 연이 먼 창관에서도 눈 뜨고 당한 거나 마찬가지였는데, 이번엔 진짜 폭력조직의 본거지로 들어가는 거잖아.

그래, 경계하고 또 경계해야지.

암, 그렇고 말고.

……그래도 문은 그냥 평범하게 열었으면 좋겠다. 흑.

“……너 실은 내가 틀렸다고 생각하는 거 아냐?”

“아니야, 그런 거……. 진짜 아니니까 그냥 가자…….”

의심 가득한 시선을 보내는 메린과 함께 창고 안으로 들어섰다.

“음…….”

근데 이렇게 화려하게 노크했는데도 아무도 안 나오네.

쓰러져 있는 사람도 없는 걸 보면, 창고 구역에는 아무도 없는 모양이다.

아니면 바짝 얼어서 어디 구석에서 덜덜 떨고 있거나.

이 다음은 어떻게 해야 되지?

일단 불러볼까?

“계십니까아~ 잉그리트 님께 선물 감사인사 드리러 왔습니다아~”

으음…… 아무도 안 나오네.

등불 하나 빌려올걸.

밤눈 좋은 메린에게 물어보았다.

“뭐 보여?”

“상자랑 포대밖에 없어. 위에도 별 거…… 있네. 누가 앉아서 이쪽 노려보고 있는데?”

“……”

……그거 봐선 안 될 걸 본 거 같은데!

왜 거기 있는지는 그다지 생각하고 싶진 않은데, 아무튼 이렇게 맥없이 들킨 건 좀 불쌍하다.

느닷없이 문이 파괴됐는데도 열심히 숨 죽이며 버틴 보람이 없으니까.

음, 그런데도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우리 두 사람이 이야기한 건 다 들렸을 텐데?

혹시 아직도 숨어있을 생각인가?

그냥 내려오는 게 서로 편하고 좋을 텐데. 나 참.

“이거 던져보자.”

메린이 근처에 굴러 떨어져 있는 과일 하나를 주워서 휙 던졌다.

큰 동작없이 그냥 던진 거 같은데, 어째 날아가는 소리는 거의 화살이나 다름없었다.

이내 짧은 비명과 함께 무언가 툭 떨어지는 것 같았는데,

“커헉, 끄르라아악!!”

“우와, 목 매달렸어?!”

떨어지다 말고 중간에 걸려버렸다!

아니, 이게 왜 이렇게 돼?!

어처구니 없지만 아무튼 저 사람을 구해야 돼!

“메린! 칼 던져!”

“엉? 그냥 두면 알아서 뒤질 텐데, 굳이?”

“아잇! 밧줄이든 뭐든 저 사람 목 조르고 있는 거 끊으라고! 저 사람을 구해야 길을 물을 거 아냐!”

“굳이 물어봐야 되나…….”

그녀는 툴툴대면서도 내 부탁대로 대거를 던졌고, 나는 그 사람이 바닥에 부딪치기 전에 가까스로 받을 수 있었다.

“아야야…… 이거 생각보다 아프네…….”

메린 녀석은 나 받을 때 아무렇지도 않은 것 같던데.

힘 차이 대체 얼마나 나는 거야?

속으로 투덜대면서, 막혔던 숨이 뚫려 기침하고 있는 그 사람을 엎어뜨리고 팔을 뒤로 꺾었다.

다리 쪽이 비었지만 뭐, 메린이 잡아주겠지.

“그야아아아악! 쿨럭쿨럭, 카흑! 아파, 아파아아아!!”

대들보에 숨어 있던 암살자는 기침과 비명을 동시에 처리하느라 정신이 없어 보였다.

그냥 말하면 분명 못 듣겠지.

나는 그가 내 목소리를 잘 들을 수 있도록, 머리채를 잡고 고개를 세워주었다.

“안녕하세요. 잉그리트…… 복수초 님의 초대를 받고 온 사람인데, 어디로 가야 됩니까?”

“아파, 새끼야!! 놔, 이거 놔아아아!!”

아프라고 하는 건데.

그리고 놓으면 죽이려 들 게 뻔한데, 내가 미쳤다고 놓을까?

팔을 꺾는 손에 힘을 더 주었다.

“못 들었어요? 우리 여기 초대받고 온 건데, 길을 모르겠으니 좀 알려달라니까?”

“끄아아아! 이 미친 새끼들아아아!! 초대받은 새끼들이 이딴 짓을 하냐아아아!!”

“닥쳐, 미친놈아! 그러게 누가 초대해놓고 함정 걸랬냐?!”

메린이 보지 못했다면 분명 우리 중 누군가가 대들보에 목 매달렸겠지.

그 누군가는 십중팔구 내가 될 거고!

하, 진짜!

무슨 환영인사가 이래?

이런 놈들 때문에 메린 녀석이 자꾸 세게 나가는 거 아냐!

이렇게 자꾸 명분이 생기면 내가 대처하기가 점점 더 힘들어진다고!

“아오, 진짜, 이런 썩을 놈들 때문에 나만 개고생하지!! 빌어처먹을 새끼들!!”

“끄아아아아악!!”

원한을 담아 신나게 꺾어주었다.

잠시 후, 그 거지 같은 암살자가 알려준 대로 창고 벽 구석, 그림자 속에 드리워진 밧줄을 쭉 당겼다.

덜컹!

“아잇, 깜짝이야!”

소스라치게 놀라며 뒤를 돌아보니 바닥이 튀어나와 있었다.

암살자에게 받은 등불을 조심스럽게 가까이 대보니, 그냥 바닥이 아니라 문이었다.

어이씨, 간 떨어지는 줄 알았네.

열릴 거면 조용히 열릴 것이지…….

“푸하, 쫄았대요.”

“시끄러, 임마.”

킥킥 웃는 녀석을 무시하고 문 반대편으로 돌아갔다.

사람 한 명은 넉넉히 들어갈 수 있을 공간이 뻥 뚫려 있었다.

“지하로 내려가나본데.”

그것도 계단이 아니라 사다리로.

이 깜깜한 밤에 계단 내려가는 것도 꺼려지는데 사다리라니…….

“먼저 간다~”

“……”

그리고 메린은 전혀 거리낌없이 쑥쑥 내려가기 시작했다.

……용감? 아니, 그냥 겁을 상실한 거지.

속으로 한숨을 쉬며, 나도 녀석의 뒤를 따라 내려가기 시작했다.

사다리를 다 내려온 후 몇 걸음 걸으니, 횃불이 훤히 켜져 있는 길이 나왔다.

그 길을 따라 걷는데, 불현듯 캄캄한 어둠 너머에서 사람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오기 시작했다.

“흠, 여기 맞긴 맞나보네.”

근데 본거지를 은근히 깊은 데에 만들었네.

아니, 원래 갱도였나?

일방통행으로 뚫린 길을 쭉 걸어가는 동안, 그저 메아리치는 정도였던 소리들도 점점 커져갔다.

이윽고 길을 빠져나온 우리를 맞이한 건,

“이예에에에에!!”

“크하하하하, 왓하하하하하!!”

귀 찢어질 듯한 소음이었다!

“아으으…… 뭐야, 여기?”

“이것저것 있나 본데.”

사방으로 뻥 뚫린 커다란 공간에, 여기저기 횃불이 켜져 있다.

광장이라고 해도 될 것 같은데.

그리고 이 지하 광장의 중앙에는 두 사람이 서로 주먹질을 하고 있다.

그 주변은 나무 울타리가 뺑 쳐져 있고, 또 그 울타리를 둘러싸듯이 사람들이 모여서 마구 환호성을 지르고 있다.

싸움 구경……인가?

다른 한편에는 주사위를 굴리고 있는 사람들이, 또 다른 한편에는 술을 마시며 왁자지껄 떠드는 사람들이 있다.

여기가 지하라는 것과 여자가 하나도 없다는 것만 빼면, 말리스의 밤거리에서 보던 풍경 그대로였다.

“야, 카엘, 저기.”

메린이 가리킨 쪽, 일반 건물로 따지면 2층 테라스가 될 곳에 누군가가 큰 의자에 앉아 이 군상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횃불이 있다고 해도 이 큰 공간을 다 밝히기엔 역부족이었기 때문에, 내 눈에는 그 사람의 모습이 잘 보이지 않았다.

“어이, 거기 둘! 여긴 어떻게 들어온 거냐!”

갑자기 험상궂게 생긴 남자가 구석에서 쿵쿵 발소리를 울리며 이쪽으로 다가왔다.

남자의 큰 고함소리에 순식간에 사방이 조용해지며, 시선이 이쪽으로 쏠리는 게 느껴졌다.

……우와, 여기서 쫄면 안 돼!

좀 꼬이긴 했지만, 아니 시작부터 망하긴 했지만 어쨌든 우린 초대받고 온 거니까!

“잉그, 복수초 님에게 초대받고 왔습니다.”

“뭐? 초대? ……아아~ 그렇구만! 자자, 이리와, 이리!”

“으아아?!”

느닷없이 남자가 내 팔을 붙잡고 중앙 쪽으로 가기 시작했다!

어느 정도 안으로 들어오자, 남자가 내던지듯이 내 팔을 홱 뿌리쳤다.

그리고는 씨익 웃더니, 목청이 터지도록 크게 외쳤다.

“형님들!! 보스가 말씀하신 놈이 왔슴다!!”

여기저기서 덜커덩거리는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왜 다 자리에서 일어나는 거지?

그리고 이 앞에 있는 남자도 어째, 주먹을 풀고 있는 것 같고?

메린이 칼자루를 쥐며 주변을 경계하기 시작했다.

“……”

이거 분위기가 좀 위험한 거 같은데…….

젠장, 싸우기 싫은데 해야 되나?

물론 싸우면 우리가 이긴다.

메린은 당연하고, 나 역시 이런 놈들에게 밀리진 않을 테니까.

수가 좀 많긴 하지만, 헬하운드 일곱 마리의 집중 공격을 받고서도 산 몸이다.

불량배 따위에게 질 리가 없지.

문제는 저 놈들이 순수히 무력만으로 덤비지 않을 거라는 거다.

십중팔구 독을 쓸 텐데, 로나도 없는 지금 독에 걸리면 그대로 끝장이야!

그러니한 방에 전부 쓸어버리자.

마침 딱 좋은 수단이 있으니.

“……댁들은 손님 대접을 이렇게 하나?”

점점 더 다가오는 놈들을 돌아보며 조용히 물었다.

순간, 남자의 웃음이 더 비릿해진 듯한 기분이 들었다.

“손님? 크크크, 손님은 무슨!먹잇감이겠지!!”

“메린!”

놈과 거의 동시에 외쳤다.

메린이 나를 향해 달려들던 남자를 거세게 차버렸고,

“……”

나는 품속에 넣은 손을 넣은 채 그대로 우뚝 멈추었다.

나뿐 아니라, 서서히 다가오며 우리를 포위하던 놈들도 그 자리에 못이 박힌 듯이 서서, 남자가 날아간 방향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다.

메린이 날려버린 남자는 저 멀리, 벽 앞의 바닥에 엎어져 있다.

남자의 주변엔 붉은 토사물이 쫙 깔려 있고, 더 앞쪽에는 다른 떡대들이 여럿 널부러져 있었다.

아마 남자가 날아갈 때 거기 휘말린 거겠지.

……어쨌든 저거 죽었구만.

멍한 머릿속에 그 생각이 조용히 떠올랐다.

“주, 죽었어?!”

“말이 되냐! 발차기 한 방에 뒤지는 새끼가 어딨어?! 누가 가서 좀 봐!”

가장 가까이에 있던 남자 몇 명이 그쪽으로 향하는 게 보였다.

“……뒈졌어. 씨발, 머리가 완전히 아작나서 뒈졌다고!”

“씨, 씨발, 이게 뭔……!”

놈들이 순식간에 동요하기 시작했다.

뭐, 그럴 만하다.

나도 지금 좀 그러니까.

메린이 검을 손에 들고, 주변을 둘러싼 놈들을 스윽 겨누었다.

한참 떨어져 있는 놈들까지 기겁하며 뒷걸음질치기 시작했다.

……그녀의 검이 나를 향하는 일은 없다.

그렇게 나 자신을 다그치며, 자꾸 뒤로 가려 하는 다리에 힘을 꽉 주었다.

“……카엘, 거기 의자.”

“아, 옙.”

재빨리 대령해드렸다.

메린은 한 손을 의자 위에 걸친 채, 놈들을 향해 물었다.

“다음. 없냐?”

덤덤한 목소리.

아마 표정도 무덤덤하겠지.

그녀는 그대로 의자를 던지며 외쳤다.

“없으면 다 꺼져, 잔챙이 새끼들아아!!”

파아아앙!!

터졌어!!

박살이 나는 게 아니라 의자가 터져버렸다고!!

아니, 얼마나 세게 던져야 저렇게 되는 거야?!

땅까지 패였어, 우와, 뭐야, 진짜 장난 아니네!

“흐이이이익!!”

누군가의 신음과 같은 비명을 시작으로, 놈들이 거의 경기를 일으키다시피 하며 다들 뛰쳐나갔다.

……원래 메린이 남자를 날려버린 틈을 타, 위슨이 줬던 섬광물약 던지려고 했는데 말야.

하하, 물약 아꼈네…….

커다란 지하 광장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기지개를 쭉 켠 후, 메린은 나를 돌아보았다.

“저 놈들 중 하나한테 또 물어볼 거지?”

널부러져 있는 놈들을 향해 고갯짓하는 그녀에게, 나는 가만히 고개만 끄덕였다.

……뒤늦게 공포가 엄습해, 다 끝난 지금에서야 몸이 떨리기 시작한 탓이다.

지금 목소리 냈다간 홱 뒤집어질 거야.

그딴 꼴을 보일 순 없지.

가만히 심호흡을 한 후에야, 나는 겨우 말을 꺼낼 수 있었다.

“……너 저 놈 원래 죽일 생각이었어?”

“엉? 어.”

즉답이었다.

……처음부터 이렇게 다 쫓아낼 생각이었구나.

“그래…….그럼 다음부터 그냥 검 써, 검…….”

“검? 기선제압으론 좀 부족하지 않냐?”

“몰라, 임마, 내가 어떻게 알아…….”

뭐가 더 잘 통할지 그딴 걸 뭐하러 구분해?

나 같은 일반인에겐 뭘 쓰든 효과 직통일 텐데.

메린 녀석이라면 깃펜도 훌륭한 무기가 될걸.

깃펜을 휘두르며 싸우는 메린.

한 번 상상해보았다.

“……히익.”

무섭잖아! 게다가 기괴하고!

……그래도좀 웃기긴 하네.

피식 웃으며 널부러진 놈들에게 다가갔다.

그래도 한 놈은 살아 있겠지.

하나하나 살펴보려는 순간, 갑자기 커다란 박수 소리가 지하 광장 안에 울려퍼졌다.

“크크큭! 최고야, 최고! 아주 훌륭해!!”

뒤이어 살짝 뒤집어진 목소리가 들렸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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