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용사는 소꿉친구 검성이 무섭다-99화 (99/475)

〈 99화 〉 97화 : 땅 속에 핀 복수초 (5)

* * *

목소리가 들린 건 위쪽, 2층 테라스인 듯했다.

고개를 돌려 위를 올려다보니, 아까 봤던 그 커다란 의자 앞에 누군가가 서서 박수를 치고 있었다.

“크크큭! 그래, 그래! 그 정도는 되어야 용사가 아니겠나!!”

두 팔을 벌리며 불빛 아래로 걸어 나온 것은, 얼굴 절반이 수염으로 뒤덮인 듯한 털북숭이였다.

한쪽 눈은 빼먹기라도 했는지 시커먼 안대를 끼고 있다.

지하가 아니라 바다, 그것도 해골 그림 깃발을 단 배에 타고 있어야 할 면상인데?

근데 뭔 두목처럼 저러고 있냐?

난 또 의자 엄청 크길래 잉그리트가 앉아 있나 했는데……

…………아, 설마.

에이, 아니겠지!

하하, 나도 참, 뭔 상상을 하는 거야?

“야야, 카엘. 저 놈이 잉그리트 아니냐?”

“어허, 떽! 뭔 끔찍한 소리하고 있어! 그럴 리가 없잖아!”

“너도 그 생각하고 있었구만, 뭘.”

“으아악, 아니야!!”

어딘지 귀족적인 이름, 글을 쓸 줄 알 뿐 아니라, 자신의 정체에 대한 상징을 담을 줄 알며, 사람 시체에 끔찍한 짓을 하는 제정신 나간 여자.

온갖 폭력적인 사업은 다 하는, 이 커다란 도시 뒷골목의 한 기둥을 담당하는 여자.

그게 바로‘복수초’, 잉그리트일 터.

……그럼 말야.

그 창관에서 봤던 버그베어, 아니 여전사만큼은 아니어도 말야.

딱 봐도 뭔가 사악하게 생긴 미인상에 주먹이 엄청나게 매섭고, 그러면서도 목소리와 태도에 카리스마가 철철 흘러 넘치는 강한 누나여야 되는 거 아냐?

“……야, 너보다 나이 많은 여자, 이거 빼고는 다 쓸데없는 거 아니냐?”

“아니. 엄청 중요한 건데.”

“그러냐.”

아무튼 여자가 나와야지, 왜 털북숭이가 튀어나오냐고!

나이비 대장의 자매라며?!

이런 망할 자식들, 날 속였어!!

“아.”

아니야. 옐리카는 어쨌든, 그 대장도 잉그리트가 자신의 자매라는 걸 인정했잖아. 그렇다는 건 설마……!

“저 사람, 자신을 여자라고 생각하는 건가?!”

“……어? 그런 사람이 있어?”

“읽은 적이 있어. 자신은 원래 다른 성별로 태어나야 했다고 생각하며 사는 사람이 있대. 어쩌면 저 사람도‘몸은 남자이지만 영혼은 여자’인 사람인 건지도 몰라!”

이건 대충 삼십 년 전, 왕국에서 제일 유명한 모험가가, 나이를 먹고 은퇴하면서 공개한 일지에 있는 이야기이다.

이 모험가가 어느 숲에서 길을 잃었는데, 거기서 어떤 나뭇꾼을 만나 하룻밤 신세를 졌다고 한다.

모험가는 왜 나뭇꾼이 위험천만한 숲에, 그것도 가족도 없이 혼자 사는 건지 궁금해서 물어봤더니……

­­……내 이리 사내의 몸을 가졌으나, 난 본디 여인이오. 여인이었어야 하죠.

내가 가졌어야 할, 하지만 가지지 못한 여인의 삶들을 계속 보면 화딱지가 나서, 여기서 혼자 사는 거요.

라며 허탈하게 웃었다고 한다.

그 이야기를 들은 모험가는 나뭇꾼의 술에 수면제를 탔고, 다음날 동이 트자마자 그 집을 뛰쳐나왔다고 한다.

왜 수면제를 탔는지는 안 밝혔는데, 뭐, 그 모험가도 남자이니 뭔가 느낀 게 있었겠지.

아무튼 이 이야기가 왕국 내에 퍼진 뒤로, 너도 나도‘나도 그러하다!’며 들고 일어나는 바람에 좀 큰 소란으로 번졌다고 한다.

물론 뒷이야기는 아버지가 해준 거라 좀 안 믿기긴 한데, 어쨌든 이야기 자체는 정말로 존재한다.

그러니 저 털북숭이도 그런 종류의 사람일 수도 있는 것이다!

우와, 그런 전설적인 존재가 내 눈앞에 있다니!

“크크크! 과연 듣던 대로 얼빠진 놈이로군! 게다가 망상까지……! 용사라기보단 광대가 어울리겠구나!!”

……아, 뭐야, 아니었어?

이런 씹어먹을 새끼가 있나, 대놓고 사람을 속여?!

“아잇! 그럼 꺼져, 털실뭉치 새꺄!! 괜히 튀어나와서 사람 헷갈리게 하고 있어!! 잉그리트 나오라 그래!!”

속에서 천불이 솟아올라, 털북숭이를 향해 고래고래 소리쳤다.

“잉그리트? 아아, 그 여자…… 그 여자를 왜 찾지? 복수초를 만나러 온 거 아니었나?”

“둘이 같은 거잖아! 개소리 치우고 잉그리트 불러와!!”

“크크크, 그래, 둘이 같은 의미였지.사흘 전까진 말이야!”

털북숭이가 크게 외치며 공중에 떠올랐다.

……정말 말 그대로 공중에 둥실 떠서 울타리를 넘어오더니, 우리 머리 위에 떠 있다!

“크하하하!나베리우스 놈의 연락을 받았을 때는 긴가민가했는데, 정말로 얼빠지게 생긴 놈이었군! 이렇게 내 앞으로 알아서 굴러오다니!”

엥? 나베리우스?

저 놈이 나베리우스를 어떻게……

아니아니, 잠깐, 연락을 받았다고?!

“설마 그 잡놈의 동료인가!”

“크크크크! 놈은 우리 중 최약체……! 성검을 잃고, 사제도 없는 용사 따위 내 상대가 못 되지!”

아니, 진짜 어이가 없네.

왜 여기서 갑자기 악마가 튀어나오고 지랄이야?

왜 악마가 쓸데없이 반란을 일으켜서 두목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거야?!

악마라면 악마답게 속삭여서 꼬드기라고!

왜 실체화해서 인간 행세를 하고 있는 건데?!

……아니, 진정하자.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냐!

나는 검집을 잡은 채 물었다.

“하나만 묻지. 잉그리트는 살아 있나?”

내 물음에, 악마는 씨익 웃었다.

“글쎄? 여기 어디 던져둔 다음엔 그냥 잊어버렸거든.”

“아, 그래? 그럼 뭐, 너 없애고 이 놈들 중 하나에게 물어봐야겠군.”

“크크크! 성검도 없는 놈이 이 몸을 감당……”

푹.

놈은 채 말을 끝맺지 못하고, 가슴에 솟아난 화려한 검 자루를 보며 아연해했다.

“……뭐……라고……!”

그대로 공중에서 추락했다.

하얗게 활활 타는 게 이미 죽은 것 같긴 하지만, 혹시 모르니 놈의 목도 댕겅 잘라주었다.

털북숭이 인간의 모습을 한 악마는, 그렇게 등장한 지 오 분 만에 하얀 재가 되어 사라졌다.

……근데 거리 될 거 같아서 성검 뽑자마자 던졌는데,이걸 맞고 죽네.

“나베리우스보다 더 약한데?”

그 놈은 성검에 찔리고, 그 빛을 다 맞고, 심지어 반으로 쪼갰는데도 징그럽게 버텼구만.

으음, 본체를 드러내지 않아서 그런가?

아무튼 뭐, 내가 보기엔 이 털북숭이가 제일 밑바닥인 거 같다.

그나저나 ‘용사가 성검을 잃었다’고 했겠다?

……그 검은 머리 여자, 이 놈들이 보낸 건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악마를 끝장내어 일을 마친 성검은, 잠시 후 일반 철검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검을 다시 검집에 넣으며 돌아온 나를 향해 메린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였냐? 저 놈.”

“몰라. 잡놈이겠지.”

“하긴.”

다시 널부러진 놈들을 하나하나 살피기 시작했다.

……털북숭이에 대한 건 머릿속에서 순식간에 지워지고 말았다.

잠시 후, 우리는 잉그리트를 찾아 지하 공간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메린이 쓰러뜨린 놈들 중에 아직 숨이 붙어 있는 놈도 있긴 했지만,자연적으로 깨어나길 기다렸다간 분명 날이 샐 게 뻔하니, 그냥 직접 찾는 게 낫다고 판단한 것이다.

“하아…… 아까 그 튀던 놈 하나 붙잡을걸.”

왜 꼭 최고의 해결방법은 다 지나고서야 생각이 나는 걸까?

나는 한숨을 쉬며 문을 닫았다.

이 방 안에도 잉그리트는 없었다.

여기까지 오면서 문 열 개 정도 연 것 같은데, 대체 어디 있는 거지?

“아잇, 진짜! 잉그리트으으으!! 어딨어어어!!”

……답답해서 소리질러 보았지만 아무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아……그냥 죽은 걸로 칠까?

“야, 얼마 안 남았잖아. 그만 꿍얼대고 얼른 가기나 해.”

“하…… 설마 마지막 방에서 나오는 건 아니겠지.”

“어차피 다 뒤질 거였는데 뭐 어때.”

“……”

참고로 메린 녀석은 식량 창고에서 가져온 치즈를 우물거리며 가는 중이다.

또 창고를 탈탈 털려는 걸 겨우겨우 말리고, 치즈랑 빵 두 개만 챙기는 걸로 끝내도록 설득하느라 진땀을 좀 빼야 했다.

아니, 나처럼 돈 상자를 털든가, 얘는 왜 맨날 식량 못 챙겨서 안달이야?

하…… 누가 보면 진짜 굶고 산 줄 알겠네.

속으로 한숨을 쉬며 다음 방의 문을 열었다.

어디로 이어지는지 알 수 없는 긴 통로가 나왔다.

“……여긴 나중에 가야겠네.”

일단 닫고 다른 방들을 쭉 돌아보았는데,정말정말 불행하게도 죄다 침대밖에 없는 방이었다.

젠장, 결국 그 통로도 가봐야 되잖아.

아, 젠장, 이제 슬슬 잠이 오는데!

“환장하겠네, 진짜.”

“챙길 돈이 많아서?”

“아니거든?!”

베개맡에서 누군가의 금시계를 챙기는 메린에게, 나는 그새 도로 묵직해진 주머니를 꽉 조이며 쏘아붙였다.

이 자식이 누굴 돈벌레로 알고 있어.

나 참, 기가 막혀서!

침실에서 나와, 아까 발견했던 문 안으로 들어갔다.

입구에 있던 횃불을 들고 길을 쭉 따라가 길 끝의 문을 열고 들어가니, 창살이 쭉 늘어서 있는 곳, 감옥이 나왔다.

“이런 데에도 감옥이 있구나~”

“당연한 거 아니냐?”

“으아악?!”

뭐야뭐야뭐야, 누구야, 갑자기?!

너무 놀란 탓에 들고 있던 횃불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그 횃불의 불빛이 화르륵 타오르며, 창살 안쪽에 서 있는 목소리의 주인을 비추었다.

……이마부터 턱까지, 정확하게 세로로 얼굴이 절반 잘려 있는 얼굴을!!

“!!!”

소리는 내지 않았다.

정말 다행히도, 꼴사납게 비명을 지르진 않았지만 그대로 몸이 굳어버려서 움직일 수가 없었다.

메린이 그런 나를 뚱하게 보며 고개를 젓더니, 횃불을 주워 들고 그 끔찍한 얼굴에게 말을 걸었다.

“잉그리트냐?”

“허? 못 보던 놈인데, 드디어 날 죽이러 온 거냐?”

“잉그리트 맞나 보네. 야, 어쩔 거냐? 꺼내?”

툭툭, 메린이 내 어깨를 두들기며 물었다.

……우와, 이 녀석, 저걸 봐도 진짜 아무렇지도 않구나. 예상은 했지만.

“……아, 아니, 일단 물어보고.”

“그럼 얼른 물어봐.”

“……네가 하면 안 되냐? ……어우씨, 알았어, 내가 하면 되잖아! 횃불 들고 표정 구기지 마!”

이야, 그냥 얼굴을 찡그린 것뿐인데, 불빛이 얼굴 일부만 비추니까 그림자가 껴서 쓸데없이 박력 넘치네.

방금 건 진짜 소름 쫙 돋았어!

나는 한숨을 쉬며 터덜터덜, 창살 앞으로 다가갔다.

“당신이 복수초, 잉그리트 맞죠? 전 카엘이라고 합니다. 물어볼 게 있어서 왔어요.”

“맨 입으로?”

“음……”

역시 무언가 대가를 지불해야 할까?

감옥에 있는 사람에게 돈을 줘봤자 별 소용없을 테고…….

아, 그래, 그 놈이 그냥 던져놨다고 했으니까 어쩌면 배 곯고 있었을지도 몰라.

“야, 메린, 빵 하나만.……아, 두 개 있잖아. 하나만 줘.”

“……”

“하…… 알았어. 반만 줘.”

“……”

“아니 반도 안 돼? 야, 너 뭐 굶어 죽은 귀신이 붙었냐?! 하, 진짜 어이가 없네.”

그래도 여전히 메린의 얼굴은 뚱하게 굳어 있었다.

어쩐지 살짝 험악해지기까지 하고 있다!

아니, 빵 두 개 있으면서 왜 하나를 못 나눠주는 건데?!

“하…… 그래, 내가 졌다, 졌어! 돌아가는 길에 그 창고 한 번 더 가자. 됐냐?”

“자.”

“돌겠네, 진짜.”

녀석이 준 빵을 그대로 잉그리트에게 건넸다.

“……뭐냐?”

“배고플 거 같아서.”

“고작 이거 먹고 떨어지라는 거냐? 하, 내가 그렇게 싸구려로 보여?!”

쾅!

창살을 걷어찬 건지, 굉장히 큰 소리가 울리며 천장에서 흙이 조금 떨어졌다.

감옥에 갇힌 사람 치고는 아직 힘이 팔팔하구만.

괜히 주먹 세계의 두목이었던 건 아닌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래봤자 창살에 갇힌 사람일 뿐.

내가 주눅들 필요는 전혀 없지.

“음식을 나눠 먹는다. 좋은 관계를 위한 첫걸음으로 딱 좋지 않아요? 그리고 서로 대화를 나누다가 친해지면, 우리가 당신을 여기서 꺼내 줄 수도 있죠?”

“……뭐? 너 이 새끼, 누구야. 누가 보내서 왔어?”

응? 어째 더 험악해졌네.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아무도 안 보냈는데요. 물어볼 게 있어서 왔다니까 그러네.

‘토끼풀 저택’ 알죠? 거기 주인이었던 베아트…… ‘여왕장미’가 무슨 거래에 협조하고 있었는지 아는 거 있어요?”

“뭐야, 조합에서 나온 놈이냐. 하, 그 미친 새끼, 조합에게 굽신거리기로 했군, 그래?

내 입을 열고 싶어? 그럼 그 새끼한테 전해. 그 새끼가 내 앞에 엎드려서 내 발을 핥으면 그때 알려주겠다고.”

음, 내 말을 듣지 않는군.

이 놈이나 저 놈이나 죄다 왜 그러는 거야?

아니, 여태껏 살면서 사기꾼처럼 생겼다든가 하는 소리는 한 번도 들은 적 없는데, 왜 다들 내 말을 귓등으로 듣는 거지?

알고 지낸 시간이 짧아서 그렇다기엔, 아버지도 내 말을 들어준 적 별로 없고.

“하아……메린, 왜 다들 하나같이 내 말을 안 들어처먹는 걸까?”

나도 모르게 중얼거리듯이 물어보았다.

“네가 헛소리하니까 그렇지.”

“그게 아닐 때도 잘 안 먹히니까 묻는 거 아냐.”

“그랬나?흠……네가 너무 잡스러워 보여서 그런 거 아닐까?”

“어…… 진짜……?”

충격이다…….

솔직히 내가 잘생긴 건 아니어도 그럭저럭 평범한 얼굴이라 믿고 있었는데, 사실 되게 하찮게 생겼다는 거 아냐…….

다름 아닌 메린의 평가다.

‘좋게 말한다’는 개념이 없는 저 잔인한 새끼의 말이니, 진심 어린 평가이리라.

“야, 괜찮아. 넌 네 성격에 딱 어울리게 생긴 거니까.”

“뭐? 내 성격이 어떤데.”

“쫄보에 잔소리꾼에 호구.”

“……”

속이 무언가 쿵 내려앉으며, 누군가 오르간 건반을 쾅 내려친 듯한 느낌이 들었다.

앞의 두 개는 어쨌든, 호구……?

내가 호구 같이 생겼다고……?

그보다 이 나쁜 새끼, 진짜 고민하는 척도 안 하네.

장식이나마 ‘음……’ 좀 앞에 붙여주면 덧나나?!

“……그리고 성실하고, 근성 있고,”

……어라?안 끝났네.

녀석은 팔짱을 낀 손가락을 까닥이며 계속 말을 이었다.

“이상한 데서 배짱부리고, 이상한 데서 고집부리고, 이상한 데서 화내고, 이상한 데서 쭈그러지고…… 푸핫, 이렇게 보니까 너 진짜 이상한 녀석이네!”

“……”

호구도 모자라 이상한 녀석까지 되어버렸다.

하아아……괜히 이 녀석한테 물어봤어…….

저 깊이 가라앉는 내 속도 모르고, 메린 녀석은 킥킥 웃으며 재차 입을 열었다.

이제 안 열어도 되는데.

“하긴, 그러니까 계속 나랑 어울리지. 다른 놈들은 다 도망가는데.”

“……”

……멍청이, 내가 어떻게 그러냐?

딴 놈들이 기겁하면서 도망갈 때마다 네가 무슨 표정을 짓는지 실컷 봤는데.

조용히 가라앉는 그 눈을 볼 때마다, 내가 얼마나……

“……”

……하지만 그녀에게 이런 얘기해봤자 통하지 않을 거다.

그녀가 볼 땐, 내가 안타까움을 느낀다는 거 자체가 이상할 테니까.

그래서 시선을 돌리며, 다른 대답을 할 수밖에 없었다.

“……너 까먹었냐? 내가 죽어라 튀는데도 계속 쫓아왔으면서 뭔 소리야? 하도 그러니까 그냥 익숙해졌나보지.”

“엉? 아, 어렸을 때? 푸핫, 네가 좀 재미있어야지! 인사는 받아주면서 놀자고 하면 도망가고. 쫓아가서 잡으면 벌벌 떨면서 되게 크게 악을 써대고. 그러면서 말 걸면 꼬박꼬박 다 대답하고, 달라고 하지도 않았는데 먹을 거 나눠주고.야, 너 같으면 그냥 두겠냐?”

보통은 도망가는 시점에서 그냥 두지 않나?

개도 아니고 왜 쫓아와?

사실 지금도 이 녀석이 그때……

그러니까 숲에서 만났을 때, 왜 나를쫓아왔는지 진짜 모르겠다.

“아니면 뭐, 사실 싫었는데 이 악물고 참았던 거냐?”

“……내가 그럴 놈이냐?”

“거 봐, 역시 네가 이상한 거지. 그래서 그런가?혼자 있을 때보다너랑 있을 때가 더 편한 거 같아. 너랑 있으면 잠깐 눈을 붙여도 푹 자는 거 같고.”

……그래서 어렸을 때, 낮잠 잘 때마다 맨날 나한테 들러붙었던 건가?

그럼 마차에서 내 어깨 벴던 것도……?

“……”

그렇구나.

나랑 같이 있으면 편하구나.

그렇게 느끼고 있구나.

……희한하네.

별 거 아닌 말인데, 왜 마음이 울리는 걸까?

왜 이렇게……

……기쁘다고 느끼는 걸까?

있는 그대로 다 터놓고 이야기해주니까?

……모르겠다.

“…………아, 그래.”

그래서 그 말 밖에 할 수 없었다.

“어. 근데 진짜 희한해. 가끔 못 봐줄 정도로 한심하고, 항상 깝칠 때마다 빡치는데도눈에 안 보이면 유독 더 속이 휑하니까.”

“……”

“아무튼 호구 같이 생겼으면 뭐 어때? 로나랑 위슨이랑, 너 잘 따르잖아. 마을 어디를 가든 경계 받지도 않고. 그럼 좋은 거 아냐?”

이 녀석은 진심이다.

정말 꾸밈없이, 지 생각 그대로 입 밖에 내고 있는 거다.

환히 웃으면서.

왠지 그 웃는 얼굴을 마주하니,더럽게 만만하게 생겼다는 사실이 정말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물론 신경은 좀 쓰이지만.

“……그래, 뭐, 나쁘지 않은 거 같네.”

“히히, 그렇지?”

아무래도 좋은 대화가 끝난 후, 감옥 안엔 이따금 메린이 무언가를 떠올리는지 혼자 킥킥 웃는 소리와, 무언가 질겅질겅 씹는 소리만 울렸다.

……질겅질겅?

“……다 끝났냐?”

“아.”

고개를 돌리니, 잉그리트가 벌레 씹은 얼굴로 질긴 빵을 씹어 먹고 있다.

맞다,이 사람이랑 이야기하려다 옆길로 샜었지?

완전 까맣게 잊고 있었네.

근데 저 빵, 내가 손에 들고 있었는데 언제 가져갔대?

잉그리트는 나를 마주보더니, 씹던 빵을 꿀꺽 삼킨 후 고개를 돌리고 침을 퉷 뱉었다.

“씨발, 진짜 살다살다 눈앞에서 이런 개지랄을 떠는 걸 다 보네. 야, 이 개새꺄, 차라리 불로 지져. 아니면 손가락 하나씩 자르든가! 할 게 없어서 이딴 거지 같은 고문을 하냐?!

하…… 됐다, 됐어. 야, 다 대답해줄게, 궁금한 거 다 물어봐. 어? 그리고 제발 영원히 꺼져줘.”

“……”

“야, 내가 여태까지 별 더러운 꼴은 다 보고 살았거든? 돼지 같은 새끼한테 깔리기도 한 년이라고. 근데 씨발, 오늘처럼 내가 눈깔 멀쩡한 게 후회된 날이 없다. 하, 진짜 기분 *같네……하, 하하, 하하하!”

……왜 갑자기 분통을 터뜨리지는 모르겠는데, 아무튼 잉그리트를 설득하는 건 성공한 듯했다.

한동안 그렇게, 잉그리트의 헛웃음 소리가 지하 감옥에 울려퍼졌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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