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용사는 소꿉친구 검성이 무섭다-100화 (100/475)

〈 100화 〉 98화 : 땅 속에 핀 복수초 (6)

* * *

쾅!

테이블이 부숴져라 술잔을 내려놓으며, 잉그리트는 발효된 보리주의 향이 듬뿍 담긴 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리고 곧바로 옆에 내려놓은 술통에 잔을 푹 담그더니 또 단숨에 꿀꺽꿀꺽 마셔댔다.

갈색으로 그을린 목울대가 꿀렁이는 게 멈추자마자, 술잔은 또 통 속으로 푹 잠겼다.

말리스의 뒷골목 거물 중 하나, ‘복수초’ 잉그리트.

얼굴에 난 엄청나게 큰 흉터만 빼면 꽤 미인상인 무시무시한 누나는 지금, 정말 말 그대로 맥주를 퍼마시고 있었다.

“밥이 고픈 게 아니라 술이 고팠나보네요.”

“크흐흐! 너도 사흘간 *같은 맹물만, 그것도 하루에 한 잔만 마셔봐라. 나처럼 술통 까고 싶어질걸?”

“핑계 아니에요? 평소에도 그러고 있을 거 같구만.”

“그야 당연하지! 하하하!”

소소한 연회가 이뤄지고 있는 이곳은, 아까 작은 소란이 있었던 그 지하 광장이다.

널부러진시체들을 구석에 던져 놓고, 테이블을 하나 잡아서 놀고 있는 중이다.

왜 이렇게 됐냐?

그건 간단하다.

내가…… 아니, 내 부탁을 받은 메린이 그녀를 감옥에서 꺼내주었으니까.

‘묻는 대로 다 대답해주겠다’며 항복한 잉그리트는 정말로 내 질문에 전부 다 대답해줬고, 나는 그 보답을 했을 뿐이다.

……물론 뒷골목 주민 아니랄까봐, 잉그리트는 내 ‘보답’이라는 말을 진짜 징그럽게 믿지 않았다.

­­개수작부리지 마, 새꺄. 뭔 꿍꿍이야?

­­아, 거 진짜 의심 한 번 되게 많으시네. 댁 동생인지 언니인지랑 약속해서 그럽니다. 됐어요?!

뭐, 거짓말을 한 건 아니다.

실제로 약속을 나눈 건 아니지만, 나이비 대장이 내 요청을 전한 건 내가‘해코지 안 하고 얌전히 이야기만 하고 갈 것’이라 했던 걸믿어서 그런 게 아니겠나?

그 전언을 받은 게 잉그리트가 아니라 웬 털북숭이라서 그렇지.

그리고 감옥을 나오면서 털북숭이를 없앴다는 걸 알려줬더니, 잉그리트가 크게 웃으면서 이렇게 거한 술판을 벌인 것이었다.

……다른 음식 없이 오로지 맥주 술통밖에 없는, 진정한 술판이라 할 수 있었다.

물론 그 털북숭이가 악마였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괜히 성가셔질라.

나는 맨 처음에 받은 첫 잔을 열심히조금씩홀짝이며 물었다.

“근데 진짜 어쩌다 그 털뭉치에게 당한 거에요?”

“낸들 아냐? 일주일인가 전에 갑자기 ‘용사 새끼 모가지에 돈 걸고 싶다’며 돈 들고 찾아왔어. 그래서 내가 뭘 했는지는 아까 말해줬지? 아무튼 모가지는 못 보고, 딴 새끼가 말하기론 그 새끼가 들고 다니던 검만 왔다더라.”

요약하면, 그 털북숭이 악마는 용사의 목에 현상금을 건 것이었다.

다만 그 까마귀 악마의 연락이 잘 전달이 안 됐는지,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지는 몰랐던 모양이었다.

그래서 잉그리트는 그 현상금의 일부를 상으로 걸고, 모든 부하에게 대륙을 싹 다 뒤져서 찾으라는 명령을 내렸다고 한다.

……그래. 그래서 피터 왕자가 탈탈 털린 것이었다.

이유는 모르겠는데,마침 이 근방엔 피터 왕자를 용사로 보는 소문이 퍼져 있었던 것이다.

그 검은머리 도둑도 현상금을 노리고 보검을 훔친 거겠지.

왜 보검만 훔친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러나 털북숭이가 사흘 전에 갑자기 싸움을 건 탓에, 정작 잉그리트는 그 보검을 보지도 못했다고 한다.

“웃긴 게 뭔 줄 아냐? 갑자기 바람이 불어서 날 날려버렸어. 하, 이 지하에서 바람이 불었다고. 말이 되냐?”

음, 아무래도 그 털북숭이 악마는 바람을 자유자재로 부릴 수 있었던 모양이다.

방심하는 틈에 없애버려서 다행일지도 모르겠어.

“더 어이없는 건 뭔지 아냐? 날 따*지도 않고 그냥 감옥에 처박았다는 거야. 그 새끼 취향이 남자 뒷구멍인 게 아니면 미친 거지.”

“……아니, 다행 아니에요? 왜 어이없다고 하신대?”

“애송아, 내가 이래 봬도 몸이 좋거든? 내 밑에 있던 새끼들은 다 나 가지고 밤마다 * 잡고 허공에 *질해댔어. 발정난 개처럼. 하, 생각해보니 진짜 덩치만 크지, 덤벼들 배짱 하나 없는 쪼다 새끼들이었네.”

아잇. 돌겠네, 진짜.

나는 손을 내저어서 말을 끊어버렸다.

“아무튼 이제 어쩌실 거에요? 부하들은 다 튀어버렸는데.”

“하, 그딴 병신 찌꺼기 새끼들은 필요 없어. 돌아오면 그 목을 내놔야 할 거야. 돌아올 배짱도 없겠지만.”

빠득, 이를 가는 소리가 들린 듯했다.

나도 모르게 살짝 시선을 돌리며 술잔을 기울일 정도로, 그녀의 눈에 살기가 이글거리고 있었다.

지하 광장에 오자마자 널부러져 있던 남자들의 목을 죄다 꺾어버린 걸 보면, 배신은 용납하지 않는다는 게 그녀의 신조인 듯했다.

“으응…… 뭐야……?”

잉그리트의 살기를 느낀 건지, 옆에서 엎어져 자고 있던 메린의 눈이 살짝 떠졌다.

잠이 완전히 깨기 전에, 나는 그녀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어 주었다.

“아무것도 아냐. 괜찮아. 자.”

“……”

눈이 도로 감겼다.

그 뒤로도 얼마간 더 쓰다듬어 준 후, 나는 작게 안도했다.

처음엔 테이블에 앉자마자 졸리다며 엎어져서 어이가 없었는데, 지금 보니 진짜 다행이다.

아니면 저 누나가 하는 드러운 말 다 들었을 거 아냐.

어휴, 안 그래도 손이 험한데, 입까지 더 험해지면 내 위장이 끊어질 거야.

어딘지 그리운 듯한 눈으로 메린을 내려다보던 잉그리트는, 곧 콧방귀를 뀌며 입을 열었다.

“딱 봐도 맹수 같은 년인데, 잘 길들였군 그래?”

“맹수라뇨. 그냥 좀 많이 거칠 뿐이에요. 아무튼, 아무리 당신이 대단해도 혼자서 다시 시작하는 건 어렵지 않겠어요?”

잉그리트는 가볍게 코웃음 치며 술잔을 비웠다.

이번에는 테이블을 크게 내려치지 않았다.

“할 필요가 없어서 그렇지, 하려면 왜 못하냐? 내 부하는 그 놈들 말고도 아직 많거든. 아마 내가 감옥에 갇혔던 것도 몰랐을걸? 하지만 튄 새끼들이 다 그쪽으로 갔을 테니 이제 알았겠지. 조만간 여기서 크게 모일 거다.”

“아하.”

그 좀도둑 소녀, 클레어의 할아버지가 공격받던 게 떠올랐다.

그때 뒷골목의 싸움을 구경하던 사람들은, 그 할아버지를 죽이려 했던 네 명을 ‘잉그리트의 부하’라며 두려워했었지.

……악마 주제에 사흘이 흐르도록 조직뿐 아니라, 이 도시 사람들의 두려움을 장악하지 못했던 모양이다.

진짜 잡놈 중의 잡놈이었네.

잉그리트는 또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켜 잔을 비워버린 후, 나를 향해 입을 열었다.

“너, ‘토끼풀 저택’이 없어졌다고 했지? 그럼 거기 있던 그 갈*년은 어떻게 했냐?”

“베아트리스요? 옐…… 바실리예프 이사 집에 갇혀 있죠.”

……그러고보니 그 무시무시한 심문 끝나면 혀를 뽑아버리겠다고 옐리카가 길길이 날뛰었는데, 이미 뽑혔나 모르겠네.

아니, 그보다 아직 살아 있을까?

“그래? 그럼 그 년, 나한테 넘겨.”

“네? 왜요? 아, 넘기고 말고는 이사님이 결정해야 되니까 지금 당장은 대답 못해요. 그래도 이유 알려주시면 전해드릴게요.”

“죽여서 그 살 씹어먹으려고.”

“……”

어우씨, 즉답하는 거 봐, 되게 무섭네.

사정은 모르지만, 일단 원한이 엄청 깊다는 건 알겠다.

“음, 그 여자, 몸이 성하진 않은데요. 그래도 괜찮아요?”

“뭐, 눈이라도 뽑았냐? ……그래? 흥, 좀 아쉽긴 하지만 상관없어. 아직 목구멍은 움직일 거 아냐. 그 년 비명 들을 수 있으면 되지.”

우와…… 대체 평소에 어떤 업보를 쌓고 살면 이렇게 큰 원한을 살 수 있는 걸까?

그리고 어떻게 그러면서도 자신 있게 나다닐 수 있었던 걸까?

그것도 대단하다면 대단하다.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이사님에게 전해드릴게요. 음, 근데 왜 그렇게 죽이고 싶어하는 거죠? 아, 이건 그냥 제가 궁금해서 묻는 거니, 알려주신다면 아무에게도 말 안 할 거에요.”

“상관없어. 어차피 여기 사는 놈들은 다 알아. 그 년이 우리 세 자매를 고아원에서 샀어. 말했지? 내가 돼지 새끼한테도 깔렸었다고. 그 *같은 경험을 거기서 했다.”

“아…………어? 세 자매요? 둘이 아니고? 아니, 그보다 고아원에서 애를 팔아요? 아니, 이 도시에 고아원도 있어요?!”

안내책자 지도에선 못 본 것 같은데!

아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진짜 돌았나, 이 도시?

고아원에서 직접 애를 판다고?!

“뭘 놀라냐? 너도 여기 며칠 있으니까 알 거 아냐. 여기 사는 새끼들은 대가리 속이 전부 돈으로 차있어. 고아원이라고 다르겠냐? 아마 돈은 여기서 제일 많이 벌고 있을걸?

자선사업이라고 조합에서 돈 나오지, 애새끼들은 그냥 길바닥에서 주워서 대충 죽 처먹이고 거적대기 입히면 되니까 돈 안 나가지,

그 애들 중 반반~한 놈들은 창관이나 변태 새끼들한테 비싸게 팔고, 글이랑 셈을 곧잘 하는 똑똑한 새끼들은 다른 상점이나 부잣집 쪽에 팔아먹고, 나머지는 그냥 대충 잡부로 팔거나 아니면 딴 마을에 팔아버리지.

너도 돈 계산은 할 줄 알지? 하, 존나 수지맞는 장사 아니냐?”

“……”

“아무튼 세 명이야. 언니는 봤을 거고, 여동생도 하나 있어. 그 둘이 불려가기 전에 그 창관에서 빼냈지. 그 대신 내가 거기서 몇 년 굴러야 됐는데, 그 쌍년이 좀 지랄맞게 굴어야지. 언젠가 그 가죽 다 벗겨주겠다고 벼르고 별렀는데, 흐흐, 마침내 기회가 왔다~ 이거야.”

……놀라운 이야기였다.

돈독 오른 미친 고아원 이야기도 놀랍긴 한데, 그보다도 잉그리트가 자신의 두 자매 대신 희생했다는 게 놀라웠다.

솔직히 그 둘을 버리고 혼자 나올 것처럼 생겼는데, 사실은 정반대라니.

물론 그 감상을 입 밖에 내진 않았다.

이 ‘좋은 관계’를 굳이 망치고 싶지도 않고, 그런 말을 하는 건 이 여자가 가장 자랑으로 여기는 걸 욕보이는 거니까.

“그럼 종종 만나고 있겠네요.”

“……연 끊었어. 아니, 끊었었지. 거기 나올 때 연락 안 했거든. 언니랑 다시 만난 것도 얼마 안 됐어. 내가 알리지 말라고 했으니, 동생은 아직 내가 그 창관에 있는 줄 알걸.”

“엥? 그럼 동생분은 당신이 죽은 줄 알 거 아니에요.”

“……오히려 잘됐지. 어차피 못 알아볼 텐데. 옛날엔 이런 얼굴이 아니었으니까.”

그녀는 킬킬 웃으며 자신의 얼굴에 난 커다란 흉터를 가리켰다.

정확하게 얼굴을 반절씩 나누듯이 쭉 그인 흉터.

그 외에도 목과 팔, 그리고 술잔을 쥔 손에까지 잔흉터가 여럿 남아 있다.

거친 삶을 살았다는 걸 온 몸으로 내보이는 거나 다름없으니, 숨기고 싶은 것도 이해 못할 건 아니다.

하지만…… 그래도 나는 가만히 다물고 있을 수 없었다.

“……제 어머니가 두 해 전에 숲에서 늑대한테 물려가셨어요. 시신은 못 찾았는데, 다들 그냥 죽은 걸로 치자면서 장례 치렀죠. 근데 그게 기분이 많이 더럽더라고요. 쓸데없이 ‘사실은 살아계실지도 모른다’고 계속 생각나고.”

“그래서?”

“‘죽은 게 확실한 사람을 떠올리는 거’랑 ‘죽었을 것 같은 사람을 떠올리는 거’는 차이가 커요. 당신 동생분, 평생 당신이 살아있을지도 모른다며 찾아다니면 어쩔 건데요?”

잉그리트는 얼굴을 찌푸렸다.

“넌 안 찾고 있잖아.”

“늑대한테 물려가신 거니까요. 한 일주일간 숲 돌아다니고 포기했어요.”

그리고 한 일주일 앓아 눕고, 그 다음 한 주는 잘 기억 안 나는데, 메린 말로는 산 송장처럼 그냥 누워만 있었다고 한다.

“뭐, 아무튼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죽은 걸로 치고 싶으면 동생분이 괜히 당신 찾아다니고 그러지 않게 했으면 좋겠다는 거에요.”

“……그래, 생각해두지.”

잉그리트는 술잔을 비운 후, 술통째로 들어 잔에 콸콸 부었다.

맥주가 흘러 넘치든 말든, 통이 빌 때까지 계속 부었다.

이게 마지막 잔이라는 뜻인 듯했다.

그녀가 맥주 범벅이 된 술잔을 들며 씨익 웃었다.

“만나서 반가웠다, 등신아. 목숨을 구해준 보답으로,갈색머리 용사님의 소문을 묻어주지.”

“……네?”

머리를 얻어맞은 기분이다.

아니, 나 아무 말도 안 했을 텐데?

이름도 ‘카엘’이라고만 댔고.

이 사람이 선포식에 왔을 리도 만무하고!

잉그리트는 내 얼굴을 보더니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와하하하! 뭘 그리 놀래냐? 그 미친 새끼가 언니의 편지를 가로챈 줄 알았냐? 우리끼리만 쓰는 암호로 쓰니까, 그건 절대 불가능하다고.”

“……나 참, 뭔가 속은 기분인데.”

“누가 속였다 그래? 아무튼, 네가 수도에서 온 갈색머리 용사이지? 시뻘건 옷 입은 꼬맹이 사제 데리고 다니는 놈. 존나 우락부락하고 대가리 꽉 막힌 새끼일 줄 알았는데, 전혀 아니어서 웃겼다.

아무튼 네 얘기도이쪽 동네엔 쫙 퍼져 있어. 근데 너도 봤듯이, 이 동네엔 쓸데없이 현상금을 걸 정도로 미친놈이 좀 많거든? 그러니 그 소문이묻히도록손써주겠다, 이거야. 고맙게 여기라고, 용사님.”

완전히 지워주었으면 하지만, 그건 떠도는 바람을 없애달라고 하는 거나 매한가지이다.

한 번 생긴 소문은 절대 사라지지 않으니까.

그러나 더 깊고 어두운, 더 달콤하고 자극적인 비밀을 품은 소문을 그 위에 끼얹는다면……

……그 틈바구니에 묻혀 완전히 잊히겠지.

이 누나는 지금 그걸 해주겠다고 하는 것이다.

목숨을 구해준 답례로.

그 효과가 얼마나 큰지, 그 답례가 이후의 여행에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칠지는 모르지만,

선물은 준다고 할 때 고맙게 받아야 하는 법.

나 역시 술잔을 들며 웃었다.

“하하, 네. 감사합니다, 복수초 님.다신 보지 맙시다.”

“하하하! 내가 할 말이다, 새꺄!영원히 꺼져!”

통!

술잔이 맞부딪치는 경쾌한 소리가 호탕한 웃음 소리와 맞물리며 지하 광장에 가득 울려 퍼졌다.

……두 번 다시 이 울림을 듣는 일이 없도록, 서로를 위해 기원하는 듯이.

다시 저택으로 돌아가는 길, 나는 마차 바닥을 가만히 두드리면서 어둠 속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밤이 깊은 데다 술도 한 잔 들어갔지, 바로 옆에서 쿨쿨 자는 아가씨도 있지, 사실 눈을 감으면 바로 잠에 들 것 같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밤거리의 위험이 걱정되어서? 설마.

무슨 위험이 닥치면 메린 녀석이 바로 깰 텐데, 내가 왜 그런 걱정을 해?

“……”

사실 짐칸에 올라타자마자 곧바로 자려고 했다.

그러나 눈을 감으려는 순간, 지하 감옥에서 들었던 말들이 생각나, 그걸 머릿속에서 한번 정리하지 않고는 도저히 잘 수 없을 듯했다.

“……”

잉그리트는 말했다.

베아트리스의 창관 쪽으로 애들을 실은 마차가 가길래, 그 여자가 드디어 애들도 써먹으려는구나 싶어서 진짜로 조져버리려고 뒤를 캤었다고.

그렇게 알게 된 건 세 가지였다.

하나, 그 창관을 들락거리던 클라우드라는 귀족이 이 도시에 별장을 지니고 있다는 것.

둘, 거래가 있을 때마다 그 귀족이 ‘후드를 쓴 사람’에게 굉장히 값비싸 보이는 보석을 받았다는 것.

그리고 마지막 하나는, 그 ‘후드를 쓴 사람’이……

……척 봐도 이질적일 정도로 귀가 길쭉했다는 것.

내가 알기로, 이 대륙에 인간과 같은 체형을 가지면서 ‘귀가 길쭉한 사람’은 단 하나밖에 없다.

“……엘프…….”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지……?

북의 대재앙, 드래곤 아트라토스를 영원히 적대하리라 맹세했던 종족이 용사를 죽이려고 하질 않나, 인간 어린애들을 사고 있질 않나…….

로나 역시 엘프가 왜 이런 짓을 하는지 모르는 걸 보면, 블루벨이 그 이유까지는 모르는 게 분명하다.

……무언가 잘못되고 있는 것 같아.

젠장, 할 수만 있다면 창조주께 직접 물어보고 싶다!

아니면 율리아 공주에게라도 어떻게 연락을……

덜컹!

“으앗.”

짐마차가 크게 흔들리며 메린의 몸이 앞으로 쓰러지려 했다.

황급히 붙잡은 덕에, 녀석이 바닥에 부딪치는 일은 없었다.

“……”

메린은 이마에 혹이 생길 뻔한 것도 모른 채, 세상 편한 얼굴로 자고 있다.

나 참, 누구는 지금 머리 복잡해 죽겠구만.

되게 부럽네.

­­혼자 있을 때보다 너랑 있을 때가 더 편한 거 같아.

문득, 그녀의 그 말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어째서 웃음이 나오는지는 여전히 알 수 없다.

­­‘나는 그 사람을 어떻게 생각하는가’를 먼저 확실히 하세요.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런 생각은 한 번도 안 해봤는데.

누구도 그걸 묻지 않았고, 나 역시 그럴 필요를 전혀 못 느꼈으니까.

나는 그녀의 잠든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나는 너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이렇게 쭉 옆에 있어주는 너를.

어린 시절, 별 생각없이 내민 과자에 처음 먹어보는 거라며 배시시 웃던 너를.

어제 낮, 펜던트에 걸린 은방울꽃 장식을 만지작거리며, 거울에서 눈을 떼지 못하던 너를.

그저 생명의 은인이라기엔 부족한 것 같고,

검술 스승이라기엔 소리높여 전면 부정하고 싶고,

……그냥 고향 친구라고 하기엔, 왠지 목이 메여오는 너를.

“하아…….”

……일단 분명한 건, 나도 이 녀석과 같이 있으면 잠이 잘 온다는 거다.

아무 걱정할 게 없으니까.

무슨 일이 일어나든, 분명 어떻게 다 될 테니까.

메린도 그런 걸까?

내 어깨에 기대고 있는 녀석의 머리에 얹듯, 가만히 고개를 기울였다.

이 녀석의 ‘편하다’는 말이 품은 그 느낌이……

……나와 같으면, 좋을 텐데.

멍하니 생각하며, 조용히 들리는 숨소리에 응하듯이 눈을 감았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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