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3화 〉 101화 : 천칭은 어디로 기우는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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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택의 의상실에서 몸 치수를 잰 다음, 우리는 모두 피터 왕자의 방에 모여 앉았다.
왕자의 방엔 커다란 소파에 티테이블까지 갖춰져 있으니, 여럿이 모여 앉아 이야기를 나누기엔 딱 좋았던 것이다.
물론 회의실이 제일 좋지만……
애석하게도 옐리카가 외출한 탓에, 그곳은 더 쓸 수 없었다.
분명 잉그리트를 만나러 간 거겠지.
그녀가 타고 갈 마차에 손발이 묶인 여자가 실렸으니까.
그리고 그게, 내가 보는 ‘여왕장미’ 베아트리스의 마지막 모습이리라.
“……이해가 안 돼요.”
로나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어째서 옐리카 님은 그 거래를 취소하지 않으시는 거죠?”
“……하아…….”
……정말이지, 그 아가씨 진짜 고집 세네.
설마왕자의 사랑고백조차 그 결정을 바꾸지 못할 줄이야.
오히려 더 기뻐하는 것 같았는데, 설마 그런 취향인 건 아니겠지?
“……아니요. 옐리카는 그런 사람이 아니에요. 제가 해를 입는 걸 볼 수 없다는 이유가 가장 클 겁니다.”
조용히 대답하는 왕자의 눈은 비통에 젖어 있었다.
자신 때문에 옐리카가 그런 선택을 해야 한다는 것에 고통을 느끼고 있는 거겠지.
솔직히 거기서 사랑고백을 할 줄은 몰랐지만, 그렇다고 그의 잘못이 없어지는 건 아니다.
이 사단을 만든 원흉이니까.
“왕자님, 왜 보검을 들고 나오셨던 겁니까?”
“……하하, 이제 제 차례인가요? 설교는 어제 사제님께도 굉장히 많이 들었는데…….”
아무래도 로나는 옐리카뿐 아니라 피터 왕자의 이야기까지 들었던 모양이다.
그녀가 따로 나에게 귀띔을 해주지 않은 걸 보면, 두 사람 다 비밀로 부친다는 조건을 걸었던 거겠지.
나는 고개를 저었다.
“설교라니, 제 주제에 무슨……. 전 그저 이유를 알고 싶을 뿐입니다.”
“이유…… 말씀드렸지 않나요? 아이들을 구하는 위해서라고.”
“그건 동기이죠. 당신이 혼자 무모하게 움직인 이유를 여쭙는 겁니다.”
납치된 아이들을 구하고, 그 배후를 알아내는 것은 성에서도 충분히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실제로 율리아 공주가 지금 하고 있지 않은가.
믿을 만한 사람이 주변에 하나도 없을 리도 없고, 게다가 왕자이니 얼마든지 조사 임무를 내릴 수 있었을 텐데.
……그런데도 그는 굳이 직접 나서는 걸 선택했다.
그것도 혼자서 몰래.
심지어 보물고에 있던 보검까지 들고나오면서.
잠시 입을 다문 채 침묵을 지키던 왕자는, 이윽고 입을 열었다.
“……제 자신을 증명하고 싶었던 거 같습니다.”
“같다?”
“……하하, 저 자신도 왜 그랬는지 분명하진 않아요.”
왕자는 고개를 들어, 저 머나먼 곳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저에게 있는 건 이 몸뿐입니다. 퍼시벌 형님처럼 왕국의 후계자인 것도 아니고, 프레데릭 형님처럼 공적을 세워 영지를 받은 것도 아니죠. 결혼도 하지 않았으니, 두 누님처럼 배우자의 힘을 빌릴 수도 없고요.”
물론 그가 아무 능력도 없는 건 아니었다.
태어나고 몇 년 동안은, 막내로서 귀여움도 받고 나름 기대도 받았었다.
……여섯째가 태어나기 전까진.
“율리아는 예언과 상관없이 특별한 존재였어요. 왕성이 아니라 신전에서 자라며 교육을 받았는데도 우리 형제들 중 누구보다도 총명하고, 사람을 이끄는 힘이 있었죠. 그 애가 열 다섯 살때부터 왕실을 대표하기 시작했다면 믿으시겠어요?
물론 그 애가 앞에 나서는 건 저희 형제들이 모두 부재중일 때밖에 없었지만…… 하하, 아바마마께서 그리 크게 신임하시는 걸 보니, 이상하게도 점점 게을러지더라고요.”
물론 율리아 공주가 정치나 군사 쪽에 관여한 적은 없다.
그녀가 대타로 나선 건 오로지 외교적인 일뿐.
……그리고 그녀가 앞에 서는 횟수는, 해를 지나면서 점점 더 늘어나게 되었다.
그것은 질투로 인한 심술이었던 걸까, 아니면 그저 내팽개치고 벗어나고 싶었던 걸까.
피터 왕자의 가늘어진 눈은, 어느 쪽이라 단정할 수 없는 감정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그러는 와중에 그 이야기를 들었어요. 아이들이 납치되어서 어디론가 사라진다는 이야기를.
왕실은 지금 각지에서 들고 일어나는 몬스터들에 대처하느라 여유가 없습니다. 아이를 잃은 부모들의 통곡을 듣고만 있죠. 다른 귀족들은 제 영지를 돌보는 데에만 온 정신을 쏟고 있고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이 현실에 화가 났고…… 정신을 차리니, 보검을 들고 왕성 밖에 나와 있더군요. 참 신기하게도, 그날따라 하늘에 뜬 달 말고는 아무도 보고 있지 않았습니다.”
어차피 그를 찾는 사람은 없다.
멋대로 성을 나간 왕족을 찾을 뿐, 피터 개인을 찾는 사람은 없는 것이다.
정무(??)는 왕태자인 퍼시벌 왕자가, 군무(??)는 프레데릭 왕자가, 외무(外?)는 율리아 공주가 돌보면 되니까.
그의 역할은 이미 없어진 지 오래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용사를 자칭한 겁니까?”
“……하하, 믿지 못하시겠지만,저는 스스로를 용사라 한 적이 없습니다. 그저 지나가는 길에 몬스터나 도적을 해치웠을 뿐이죠.”
그 역시 왜 자신이 용사라 착각을 받은 건지는 모르겠다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찬란하게 빛나는 금발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저런 거 본인은 모르는구나.
말리스로 오는 길에 봤던 어느 여관 종업원의 모습이 새삼 떠올랐다.
엄청나게 빛이 날 정도로잘생긴 사람이었다며 엄청 꺅꺅댔었지…….
게다가 왕자는 보검을 들고 있었다.
그 검이 얼마나 화려한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보검도 아니고 왕가의 보검이니까 엄청나게 화려하겠지.
그 상태로 마을 사람들의 문제들을 해결해주었으니, 용사라 불리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이야기일 거다.
“……”
그에 반해 나는 어떤가?
이름을 대어야 소수의 사람이 알아본다.
용사의 증표인 성검은 지 일할 때만 튀어나오니까 있으나 마나이고.
젠장, 나도 지나는 길에 몬스터 잡고 도적 때려눕혔는데!
……역시 사람은 잘생기고 봐야 하는 건가?
아니, 유명해지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는데 그래도 왠지 열받아!
“후…… 염병…….”
“윽…… 역시 불쾌하시죠. 죄송합니다…….”
“아뇨, 왕자님에게 한 게 아닙니다.”
이 더러운 세상에 한 거지.
나는 깊~은 한숨을 쉰 후, 고개를 살짝 흔들어 잡념을 떨쳐버렸다.
지금은 자학하며 침울해할 때가 아니다.
“그래서, 옐리카 님과 결혼하실 건가요?”
“예.”
“우와…….”
이걸 바로 대답을 하네.
그 정도로 옐리카를 마음에 두고 있었다는 거 아냐.
왜 진작에 결혼하지 않은 거지?
그보다……
“역시 둘이 그렇고 그런 사이였구만! 전엔 아니라며 막 잡아떼더니!”
“아, 아니요, 그건……! 저, 정말로 정식으로 교제하고 있던 건 아니라서……!”
“왜 안 하신 거죠?”
당황하며 변명하기 시작하는 그의 말을, 로나의 목소리가 가로막았다.
그녀는 정말로 진지한 표정으로 묻고 있었다.
흥미진진하게 눈을 반짝이지도 않고, 장난기어린 미소를 짓지도 않은 채.
피터 왕자는 약간 붉어진 얼굴을 살짝 내리깔며, 씁쓸히 웃었다.
“……말씀드렸다시피 제가 가진 건 몸뿐이에요. 반면, 옐리카는 성년이 되기 전부터 이미 바실리예프 남작의 사업을 여럿 맡고 있었죠. 그리고 성년이 되자마자 말리스에 온 후…… 일 년만에 조합이사의 자리에 올랐고요.
그녀를 음해하는 자들은 남작이 힘을 실어주었을 거라 수군댑니다만…… 아니요, 절대 그렇지 않아요. 그건 순전히 그녀 자신의 힘입니다.”
그런 그녀와 서로 마음을 주고받기에는, 왕자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는 그 사실이 너무나도 부끄러웠다며 고개를 떨구었다.
“……그럼, 옐리카 님에게 사실을 밝히지 못한 것도…….”
“……도저히 할 수가 없었습니다. 바보 같은 짓을 저질렀다는 것도, 그 때문에 크게 곤란해졌다는 것도 알릴 수 없었어요. 제 자신이 너무 한심했으니까요.”
“그럼 어제 저녁엔 왜 침묵하셨습니까?”
그렇게까지 좋아하면서.
왕자는 깊이 한숨을 쉬었다.
“……그녀가 저를 떠나는 것도 좋겠다 싶었어요.게다가 그녀에 대해 이야기만 들었을 때는, 정말로 그렇게 생각한 적도 있으니 완전히 없는 이야기를 한 것도 아닙니다. 남작은 마약에 노예에…… 정말 팔 수 있는 건 다 팔던 사람이거든요.물론 옐리카를 직접 만나고, 알고 지내게 된 후로는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한 적은 없습니다.
아무튼 그녀는 정말 좋은 여자이니까, 저보다 더 좋은 남자를 만날 자격이 충분하니 그대로 떠나보낼 생각이었어요.
하지만 오늘 이야기를 듣는 순간…… 하아…… 그건 정말 안 될 일입니다.”
“순결 때문에요? 뭐, 그걸 중요하게 보는 분도 있긴 하죠.”
“심술궂으시네요. 아닌 거 아시잖아요.그…… 사실저는 그녀가 경험이 있을 줄 알았습니다. 파티에 가면 잠깐 앉을 새도 없이 계속 춤 신청을 받았거든요. 이런저런 추문도 돌았었고…….
아무튼 그런 건 전혀 상관없습니다. 설령 그녀에게 아이가 있다고 해도 결혼할 겁니다. 그게 드문 일도 아니고요.
하지만 오늘 그녀는…… 스스로를 망가뜨리려고 하잖아요? 절대…… 절대 그렇게 둘 순 없어요.”
나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왕자에게 말했듯이, 나는 그에게 감히 설교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정말로 그냥 이유를 알고 싶었을 뿐이다.
……그보다 아이가 있어도 상관없다니, 게다가 그게 드문 일도 아니라니?
세상에……!
귀족들 뭐야, 무서워……!
뭐, 아무튼 이제 이유를 알았으니, 남은 건 그의 결심을 확인하는 것뿐이다.
“그래서 이제 어쩌실 거죠?”
옐리카는 기어코 제 뜻을 꺾지 않았다.
그녀는 오늘밤, 자신을 바쳐서 왕자를 지킬 것이다.
……왕자에게서 바라디 마지않던 말을 들은 기쁨을 그 가슴 속에 품은 채로.
그는 단호한 눈빛으로 나를 보며 입을 열었다.
“보검의 반환을 요구할 겁니다.”
“……진심이신가요?”
잃을 게 많을 텐데.
잘못하면 ‘왕족’의 지위를 박탈당하지 않을까?
그러나 피터 왕자는 내 표정에서 무언가를 읽은 듯이,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옐리카를 지킬 수 있다면 아무 상관없습니다. 어차피 제가 책임져야 하는 일이잖아요. 비겁하게 남의 뒤에 숨을 순 없죠.
게다가 옐리카는 저에게 큰 상처를 받았으면서도 저를 위해주었습니다. 그에 비하면 제가 하는 일 따위 아무것도 아니죠.”
“옐리카 님은 그걸 원하지 않으실 텐데요.”
“저 역시 그녀가 다치는 걸 원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적어도 그녀에게 떳떳하고 싶어요. 물론 저 때문에 그녀의 품격에 흠이 가게 되겠지만, 하하, 분명 용서해줄 거에요.”
왕자는 어딘지 후련한 듯이 웃고 있었다.
그의 두 눈에서, 굳은 결의가 반짝이는 것이 보였다.
……들을 대답은 모두 들었다.
피터 왕자는 옐리카를 지킬 것이다.
설령 자신이 파멸할지라도.
그렇다면 축복을 빌어주어야겠지.
나는 웃으며 입을 열었다.
“예. 창조주께서 두 분을 보살피실 겁니다.다 잘될 거에요.”
“어…… 예에, 감사합니다.”
“그럼 저는 이만, 할 일이 있어서 실례하죠.”
자리에서 일어서는 나를 향해 여러 시선들이 마구 쏟아졌다.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뭐. 편지 써야 되잖아. 여태 쓸 틈이 없었다고. 너네 셋 다 할 일 없지? 내가 친히 일을 줄 테니 나와라.”
기지개를 켜는 메린, 의아해하는 로나, 그리고 왠지 모르게 뚱해 있는 위슨이, 차례대로 나를 따라 왕자의 방을 나섰다.
계단을 내려가, 응접실로 향한 후, 나는 의자에 앉아 종을 울렸다.
곧 하녀가 빠른 걸음으로 나와몸을 굽혔다.
“클로드 집사님을 불러주세요.”
하녀는 재차 몸을 굽힌 후, 또 다시 빠른 걸음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여전히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로나가 내게 물었다.
“편지 쓰신다면서요?”
“쓸 거야.”
그녀가 재차 무어라 말을 꺼내려는 순간, 응접실의 문이 열리며 집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의자에 앉은 내 앞에 다가와, 꾸벅, 허리를 숙였다.
“바쁘실 텐데 죄송해요.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어서요.”
“개의치 마십시오. 아가씨의 손님을 극진히 대접하는 것이 제 일입니다. 언제든 편히 부르십시오. 그래서 무엇을 원하십니까?”
“편지를 써야 하니, 이따가 제 방에 종이랑 깃펜, 뭐 그런 것 좀 가져다주시고…….
‘나비공작’에게 연락하는 방법 좀 알려주세요.”
집사의 눈썹이 움찔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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