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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사는 소꿉친구 검성이 무섭다-109화 (109/475)

〈 109화 〉 107화 : 그것은 꽃봉오리인가? 아니면…… (2)

* * *

‘시간이 멈추었다’.

이따금 책에 나오는 그 표현을볼 때마다, 아무리 그래도 과장이 너무 심한 거 아니냐며 피식 웃었었는데.

지금 이 순간, 나는 절절이 깨달았다.

그건 과장도 뭣도 아닌, 정말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적은 것이었다는 것을.

“……”

……정말로 시간이 멈출 수 있어.

그것도 나 혼자만.

그녀는 여전히 시간의 흐름 속에서,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은빛 드레스 위에 붉은색 가운을 겉옷처럼 걸치고 있다.

그 가운은, 코르셋이라 하던가?

검은 끈으로 가슴과 허리를 조이는 부분이 달려 있다.

그 탓에원래도 결코 작지 않던 가슴은 더 부각되고, 허리는 더 잘록해선 평소보다 훨씬 더 굴곡져 보였다.

그 위, 대담하게 훤히 드러낸 가슴께에는 내가 고르고, 내 손으로 걸어준 펜던트……

은방울꽃 세 송이가 계곡 위에 활짝 피어 있다.

그녀의 가는 목에는 펜던트와 같은 색상의 목걸이가 걸려 있는데, 얼핏 보면 펜던트와 한 쌍 같았다.

그리고 그 위에는……

결코 화려하진 않지만 그녀를 한껏 더 생기 있게 보이게 하는 화장.

우아하게 틀어 올린 머리.

옆머리에 꽂힌 커다란 흰 백합꽃 장식.

살짝 내리깐 시선.

……아아,이 모든 것을 완성시키는 그녀의 얼굴이 있었다.

솔직히 옷 자체는 그리 화려하지 않다.

중간중간에 레이스가 달렸을 뿐, 화려함 자체는 아까 위슨이 입은 드레스가 훨씬 더하다.

하지만,

……나는 호흡마저 잊어버린 채,

그 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정말로……

저게 메린이라고?

“……”

‘예쁘다’는 말로는 터무니없이 부족해.

‘아름답다’는 말도 충분하지 않아.

……아, 모르겠다.

무슨 말이 그녀를 완벽하게 담을 수 있는 건지모르겠어.

머릿속이 새하얗게 빈 탓에,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눈을 깜빡이는 것도 잊은 채, 그녀만을 바라보았다.

“……”

멍하니 선 나를 향해, 그녀가 한 걸음 한 걸음, 가까이 다가왔다.

어딘지 안절부절 못한 채 이리저리 움직이던 그녀의 주홍빛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그 속에 나를 담았다.

그 순간,

“……어……라…….”

……갑자기 주변 소리가 사라졌다.

심장이 뛰는 소리 말고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

나를 보는 주홍빛 눈동자 외에는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감각이 전부 마비된 거 같아.

어떻게 숨을 쉬었던 건지도 잘 모르겠어.

얼굴이……아니,

머리부터 발끝까지,

전부뜨거워진 탓일까?

나를 보는 그녀의 고개가 약간 올라가 있다.

……나 의자에서 일어서 있었구나, 그 사실이 흐릿하게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녀의 입술이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아, 진짜 이상해진 거 같아.

달싹이는 입술과, 그 안에 살짝 보인 분홍빛 혀에까지 눈을 못 떼겠어.

심장이,

터질 거 같아……!

“……야, 뭐라고 좀 해봐. ……나, 이상하지 않냐……?”

다른 건 안 들리는데, 그녀의 목소리는 이상하게 심장 소리를 뚫고 귀에 다다랐다.

불안함이 잔뜩 묻어, 살짝 떨리기까지 하고 있는 목소리…….

익숙하지 않은 차림을 한 탓에 어색한 거겠지.

나도 그녀의 정수리에 솟아 있는 머리카락 두 가닥만 아니었으면 못 알아봤을 거다.

그만큼 그녀는 내가 아는 모습에서 저 하늘만치 벗어났지만……

……아아, 그녀는 여전히 내가 아는 메린이었다.

……그나저나 대답을 해야 하는데 미치겠네.

머리는 익어버렸나 돌아가지도 않고, 목도 무언가에 막힌 것처럼 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메린이 묻고 있잖아.

대답을 해야지!!

“……카엘……? 열 나?”

그녀의 손이 천천히 나를 향해 뻗어왔다.

들키면 안 된다는 생각과, 물러나기 싫다는 생각이 서로 싸우느라 움직이지 못한 사이, 그녀의 손바닥이 내 이마에 닿고 말았다.

“우와, 엄청 뜨거워! 너 괜찮냐?”

“아…… 그……”

낯선 차림을 한 것 때문에 불안해하면서도, 그녀는 곧바로 나를 걱정했다.

항상 그랬듯이 나를 먼저 걱정해준다.

……그 사실을 인식하자마자, 이번엔 심장이 조여왔다.

터질 것처럼 뛰면서 동시에 이러는 게 어딨어?!

아, 진짜 죽을 거 같아……!

“괘, 괜찮아…….”

있는 힘껏 짜낸 말인데, 메린은 살짝 표정을 찡그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미치겠다.

진짜 미칠 거 같아.

그녀의 움직임 하나하나에 가슴이 마구 요동치고 있어.

갑자기 내가 왜 이러지?

진짜로 미친 건가?!

그냥 옷만 갈아입었을 뿐이잖아……!

그냥 머리 모양을 바꿨을 뿐이라고……!

“진짜로? 쉬어야 되는 거 아냐?”

“아, 아니, 진짜 괜찮아……. 진짜로…….”

막힌 목이 한 번 뚫리니, 그 이후는 훨씬 수월하게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

……여전히 머리는 전혀 돌아가지 않고 있지만.

“그…… 이거, 이상하지……?”

또 다시 던져온 그 물음.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대답을 해야 할 텐데.

하지만 머리는 열에 완전히 익어버린 탓에 생각을 할 수가 없다.

열이 식기를 기다렸다가는 너무 늦을 텐데.

아니, 그 전에 이거 식기는 하나?

그녀는 정말 불안한 듯이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말을 이었다.

“왠지 내가 아닌 거 같아……. 다리 쪽도 뭔가 허전하고…… 신발도 높고……. 이상해…….”

“……아니, 안 이상해.”

굳었던 게 거짓말처럼, 저절로 혀가 움직이며 말이 나와버렸다.

머리가 회복되길 더 못 참겠다는 듯이, 심장이 대신 말을 꺼내주고 있는 듯했다.

지금 내 몸에서 그나마 멀쩡히 움직이는 건 심장뿐이니까.

지금도 이렇게, 다 들으라는 듯이 다른 소리는 죄다 삼켜버리면서목청껏 소리치고 있으니까.

그 외침을, 드디어 입 밖으로 낸다며 기뻐하고 있으니까.

“이상하지 않아. 엄청 잘 어울려.”

이 세상 누구보다도.

“그래……?”

“응. 예쁘다는 말도 부족할 만큼 잘 어울려.”

이 세상 무엇보다도.

너는 이 순간을 담아두고 싶을 만큼,

“……계속 바라보고 싶을 만큼 아름다워. 세상의 어떤 보석도 네 앞에서 빛을 잃을 만큼.”

“……”

“……아.”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내가 방금 뭐라고……?!

“……!!”

으아아아아아!!

무슨 말을 입 밖에 내고 있는 거냐, 카엘 에스트렐!!

뭐? 계속 바라보고 싶어?

보석? 빛을 잃어?!

내가 진짜 미쳤나, 갑자기 뜬금없이 뭔 소리를……!!

아아, 아아아, 고개를 못 들겠어!

어디든 못 쳐다보겠어!!

“아, 으, 그, 아니 그게 아니라, 아니, 맞긴 한데, 아니아니아니, 그게 그러니까!!

그…… 시, 실례하겠습니다!!”

……그대로 바깥으로 뛰쳐나갔다.

“……망했어. 다 망했다고.”

저택의 뒤뜰에 놓인 의자에 앉은 채 중얼거렸다.

고개를 푹 숙인 데다 얼굴을 감싸고 있으니, 이번에는 진짜 아무도 못 듣겠지.

“하…… 망했어…….”

제길……

이제 앞으로 메린을 어떻게 보지?

다른 녀석들은 또 어떻게 보고?

아…… 진짜 내가 돌았나,왜 거기서 그런 말을…….

아니, 예쁜 건 사실이긴 해.

그 부인이 말한 것처럼 최고로 아름답……

아으, 어쨌든 거짓말을 한 건 아니지.

그건 아니야.

……그보다 메린 녀석, 그렇게 예뻤었나?

그저 옷을 갈아입고, 화장을 좀 했을 뿐인데.

다른 건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는데.

목을 본 건 당연히 처음이 아니고,

여름에는 덥다며 셔츠가 아니라 민소매 입었으니까 쇄골도 봤는데.

심지어 그녀의 원래 몸매, 속옷으로 가슴을 조이지 않은 상태도 봤다고.

고향에서 검술 사범님 도울 때 빼고는, 다른 여자들처럼 편하게 다녔으니까!

게다가 요전에 섬에서도 봤고!

근데 왜 갑자기, 그 하나하나가 눈에서 떨어지지 않는 건데?

예쁘게 꾸며서?

그 전에도 메린은 예뻤구만, 이제 와서 무슨……!

……아, 아아아, 아니, 예뻤다는 건 객관적인 시점에서 그런 거지, 내가 보기에 그렇다는 게 아니라……!

아니, 나 누구한테 변명하는 거야?!

여기 나 말고 아무도 없잖아!

아니아니, 그 전에 변명이라니 뭐야, 내가 뭐 핑계대는 것도 아니고!!

“……아으…….”

제정신이 아냐.

지금 내 정신 상태가 영 엉망인 게 분명해.

몸도 멀쩡하지 않고.

의상실에서 뒤뜰까지 단숨에 뛴 탓에 숨도 차고,

얼굴은 활활 타고 있는 거 같고,

심장은 아직도 터질 듯이 뛰고 있다.

아, 미치겠네.

전혀 잠잠해지지 않는다.

눈을 감으면 또 그 모습이 뇌리에 떠오를 거 같고, 눈을 뜬 상태로는 마음을 안정시키기가 어렵다.

어떡하지?

계속 여기에 이러고 있을 수도 없는데.

이따가 보검도 처리해야 되는데.

그리고 그 다음은……

그녀와 함께 파티장에 들어가야 할 텐데.

“으…….”

거기선 이렇게 도망칠 수도 없고, 도망을 쳐서도 안 될 것이다.

파티는 이번이 처음이니까 거기서 뭘 할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파티이니 춤을 추겠지.

많은 사람들 앞에서, 드레스 차림의 메린과……?

……절대 못해.

그냥 보기만 했는데도 이 꼴이 났는데, 가까이 붙었다가는 진짜 죽을지도 몰라……!

­­계속 바라보고 싶을 만큼 아름다워. 세상의 어떤 보석도 네 앞에서 빛을 잃을 만큼.

“…………!!”

터져 나오려는 비명을 손으로 틀어막으며 몸부림쳤다.

나 진짜 잘도 그런 소리를, 그것도 술 한 방울 안 먹고 맨 정신으로 입 밖에 냈구나.

진짜 대단하다, 대단해!

아니 맨 정신은 아닌가?

맨날 미친놈이라고 불렸잖아.

그게 이제서야 효과를 본 게 아닐까!

“……하아…….”

……아, 씨발, 존나 쪽팔려…….

그런 말을 던지고 이렇게 튀었으니, 십중팔구 다들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을 거야.

이상한 오해를 할 거라고.

“……?”

…………오해…라니?

무슨 오해……?

나는………….

“카엘 씨, 여기 계셨군요.”

멍한 고개를 들어올리자, 그늘 속에서도 빛이 나는 듯한 금빛 머리카락이 눈에 들어왔다.

의자 위에 쭈그러진 듯이 앉아 있는 내 앞에, 피터 왕자는 무릎을 살짝 구부린 채로 서 있었다.

“……왕자님.”

거의 속삭이듯이 대답하는 나를 마주보며, 그는 빙긋 웃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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