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0화 〉 108화 : 그것은 꽃봉오리인가? 아니면…… (3)
* * *
이 뒤뜰엔 돌로 포장된 길이 있고, 나머지는 전부 풀밭이다.
그러니 누가 오든 발소리가 나야 정상인데,나는 그가 오는 발소리를 전혀 듣지 못했다.
……그 정도로 내가 넋을 빼놓고 있던 건가?
이 사람, 대체 언제부터 여기 서 있었던 거지?
왕자는 여전히 무릎을 살짝 구부린 채, 나를 내려다보며 말을 꺼냈다.
“하하, 저택이 넓은 탓에 찾느라 조금 고생했습니다. 잠시 괜찮으시죠?”
“……”
대답 대신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왕자에게 자리를 양보해야 한다는 생각이 머리 뒤편에 희미하게 떠올랐지만,애석하게도 그걸 실행할 여력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가 말을 걸기 직전에 떠오른 그 생각이,
머릿속을 헤집고 나가면서 온 몸의 기운을 싹 빨아간 듯했다.
그러나 왕자는, 감히 자리를 내주지 않는 나를 지적하는 대신, 아무 거리낌없이 풀밭에 털썩 앉고서 의자에 살짝 등을 기대었다.
누가 봐도 입장이 역전된 모습이다.
왕성 사람이 이 모습을 보면 나를 괘씸죄로 감옥에 처넣겠지.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그는 저 너머 하늘을 내다보며 말을 꺼냈다.
“음, 잊어버릴 거 같으니 전언부터 전해드리죠. 위슨 씨와 사제님이 각각 말을 전해달라고 하셨습니다.
위슨 씨는 ‘이름을 부르면 튀어나오도록 했으니까 잘해라’고 하셨어요. 당신은 무슨 뜻인지 알 터이니, 그렇게 전해달라고만 하시더군요.”
이름을 부르면 나오도록 했다……?
아, 정령 얘기인가?
목소리로 부를 수 있다면야 더할나위 없지.
무슨 상황이 벌어지든 빠르게 대처할 수 있을 테니까.
나는 이해했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고, 왕자는 위슨의 말이 무슨 뜻인지 캐물을 생각이 없는지 곧바로 다음 전언을 들려주었다.
“사제님은 ‘안 건드릴 테니까 진정되는 대로 오시라’고 전해달라 하셨습니다.”
“……”
건드리지 않겠다니, 참 자비로우시기도 하지.
전엔 별 거 아닌 걸 가지고 막 놀려 댔었으면서.
……아무래도 그녀가 장난을 포기할 정도로, 의상실을 뛰쳐나가는 내 모습이 너무 처참했던 모양이다.
“지금부터는 제 이야기인데, 음…… 미리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군요.”
그런 말을 하는 왕자의 얼굴엔 전혀 미안해하는 기색이 없다.
오히려 싱글벙글 웃는 얼굴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의상실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들었습니다. 굉장히 놀라셨다면서요.”
“……”
“하하, 아는 사람의 모습이 평소와 달라져도 아주 많이 달라졌으니 놀라는 건 당연하죠. 그리 주눅드실 건 없습니다.”
“아뇨, 저는 그게…….”
단순히 놀라기만 한 게 아니다, 그렇게 말을 이으려다가 도로 입을 다물어버렸다.
……이 사람에게 그런 이야기를 해도 되는 걸까?
이상하게 보지 않을까?
나랑 잘 알고 지낸 사이인 것도 아닌데.
입을 닫은 채, 다시 열어야 하나 망설이는 나를 보며, 왕자는 가볍게 웃었다.
“……예, 들었습니다. 메린 씨를 보고 평정을 잃으셨다고요. 당연합니다. 제가 보기에도 아름다우시던 걸요. 사내라면 누구나 그 모습에 반할걸요.”
뭐……?
……몸의 열기가 급속도로 식어가며,다른 의미로 머리가 새하얗게 비어버렸다.
“반하다니…… 지금 제가 그렇다는 건가요……?”
고개를 저었다.
젓고, 또 저었다.
“아니야…….”
……말도 안 되는 소리야.
그럴 리가 없어.
내가 메린에게 그런 마음을 품는다고?
감히 그녀를, 내가……?!
……아냐, 아냐아냐.
절대 아니야!
그건 절대 안 돼!!
“……아니에요. 절대 아니야.나 같은 놈이 그래도 될 리가……!”
"카엘 씨.”
왕자의 목소리가 단호히 내 말을 끊었다.
그는 내 말에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이지도, 나를 따라 좌우로 젓지도 않았다.
진지한 얼굴로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그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진정하세요. 당신이 그렇다는 게 아니에요.”
“……”
노란 눈동자는 조용히 미소 지으며, 나를 타이르듯이 천천히 말을 이었다.
“저는 당신이 그 분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릅니다. 저뿐 아니라 그 누구도 몰라요.
잘 들으세요.카엘 씨 외에는 아무도 몰라요. 다른 사람이 뭐라고 하든 믿지 마세요.”
누군가는 그게 말도 안 되는 망상이라 비웃을 것이다.
또는 착각이라며 만류하거나, 드디어 그녀에게 정욕을 품은 거냐며 흥미진진해할 것이다.
단순한 친애나 동정일 뿐이라고 어깨를 으쓱일지도 모른다.
그러나나는 그 모든 말들에 귀를 닫아야 한다.
듣더라도, 믿으면 안 된다.
……설사 그들이 하는 말 중에 확연한 정답이 있다 할지라도.
왕자는 그렇게 단호히, 아무리 생각해도 납득이 안 가는 이상한 말을 던졌다.
……근데 진짜 말이 안 되는 소리야.
아무리 내 머리가 고장났어도 그렇지, 그런 이상한 조언을 막 던지다니 너무하네.
아마 내 눈은 지금 굉장히 어처구니없다는 시선을 던지고 있을 것이다.
“이상한 말씀을 하시네요.이런 건 원래 다른 사람이 더 잘 보는 거 아니에요? 그런데 믿지 말라니…….”
“하하하,카엘 씨의 상황이 일반적이지 않으니, 당연히 조언도 그 범위를 벗어날 수밖에 없죠.”
“……”
할 말이 없었다.
대놓고 이렇게 ‘너 이상하다’고 던지다니, 높은 신분에서 오는 여유인가?
여전히 빙긋 웃는 얼굴로, 왕자는 재차 입을 열었다.
“어제 저녁, 당신은 ‘메린 씨와 어울리지 않는다’고 했죠. 그 분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도 모르시면서.”
나와 메린의 사이를 오해한 옐리카에게, 나는 그렇게 대답했었다.
그건 말도 안 되는 오해라고.
나는 그녀에게 어울리지 않으니까.
……단지 그것뿐.
그의 말대로, 나는 아직 그녀를 어떻게 생각하는 건지 그 답을 찾지 못했다.
항상 그녀를 보게 되고,
이따금 가슴이 아련하게 뭉클어지는 이걸,
대체 뭐라고 부르는 건지, 나는 아직도 그 정체를 알 수가 없다.
……정말로 모르는 건지도 알 수 없다.
그걸 아는 게 내게 용납되는 것인지조차 알 수 없다.
“어울리지 않는다는 건 당신이 결정한 게 아니에요. 다른 누군가의 말을 듣고, 당신이 그렇게 믿고 있는 거지.
제 말이 맞을 겁니다. 아시다시피, 제 감이 좀 좋잖아요?”
“……”
“하지만 이건 당신의 감정이죠. 다른 누군가의 것이 아니라. 카엘 씨,당신은 다른 사람의 말이 아니라, 당신 스스로의 말을 듣고 믿어야 합니다.”
……알고 있다.왕자의 말은 옳다.
다른 사람들은 극히 자연스럽게, 그 감정들의 이름을 알고, 때로는 조용히 매듭을 지으며 살고 있는 거겠지.
어째서 나는 그게 안 되는 걸까?
다들 아무렇지도 않게 할 수 있는데, 왜 나는……?
“……”
눈을 질끈 감았다.
……여기선 안 돼.
다른 사람이 있는 곳에선 안 된다.
속으로 되뇌이는 스스로가 우스워, 나도 모르게 헛웃음을 흘렸다.
“흠……”
어딘지 관찰하는 것처럼 나를 빤히 쳐다보는 그의 시선이 부담스러워, 나는 눈을 돌렸다.
“옐리카는 가만히 두라고 했지만…… 하하, 생명의 은인이 곤경에 처했는데 그걸 그냥 둘 수 없죠.
카엘 씨, 아름다운 여성을 보고 동요하는 건 당연한 겁니다. 그게 누구든 당연한 거에요. 본능이잖습니까?”
“……본능…….”
“예. 본능이요.”
피터 왕자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 크게 기지개를 켰다.
“예복을 입는 건 오늘밤뿐입니다. 내일 아침이 되면, 메린 씨는 다시 당신이 익히 아는 차림으로 나타나시겠죠. 그때도 당신이 오늘과 같은 감정을 느낄지 어떨지는 아무도 모르죠?”
“……즉, 그냥 옷차림 때문에 그랬던 건지도 모른다……는 건가요?”
“가능성은 있지 않습니까?”
……그렇긴 하다.
오늘처럼 이렇게까지 심하게 이상해진 적은 없었으니까.
생전 처음 보는 그녀의 화사한 모습에 놀라서, 그게 너무 눈이 부신 탓에 어지러워져서 횡설수설해진 걸 수도 있는 거다.
그냥 그런 걸로 하면 되지 않을까?
“다만,”
고개를 끄덕이려는 내 귀에, 왕자의 단호한 목소리가 푹 꽂혀들어왔다.
“무슨 감정을 느끼든, 그걸 스스로 부정하지 마세요. 포기하거나 밀고 나가는 것, 이 둘 중 하나를 하셔야지, 싹을 자르시면 안 됩니다. 당신은 그러면 절대 안 돼요. 인생 선배로서 드리는 말이니 꼭 새겨두세요.”
“……”
또 선배인가.
하긴, 나이면에서 둘 다 나보다 선배이긴 하지.
첫 선배인 옐리카는 내게 ‘감정을 확실히 하라’고 조언했다.
그리고 오늘, 그간 신나게 망설이며 헤매다가 겨우 마음을 다잡은 이 두 번째 선배는, ‘감정을 부정하지 마라’고 조언했다.
어찌 보면 상투적인 말들인데, 왠지 모르게 마음에 박히는 것 같아.
옐리카도 그렇고 왕자도 그렇고, 각자의 조언을 온 몸으로 체현해주었기 때문일까?
……근데 서로 마음이 통했다고, 하는 말까지 서로 이어지고 있네.
“후우…….”
긴 한숨이 새어나왔다.
끓어올랐던 열도, 숨이 막힐 정도로 차올랐던 부정과 침울함도 그와 함께 내보내진 것 같았다.
……아무튼 이제 진정되었다.
여러모로.
나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왕자에게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전언과 조언, 모두 달게 받았습니다.”
“별 말씀을요. 하하, 이 정도는 제가 받은 은혜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걸요!”
그런 거 싫다니까 이 양반도 진짜 끈질기네!
“그럼 저택으로 돌아가실 거죠?”
“아니요…….”
시계를 슬쩍 보았다.
약속 시간까지는 아직 한 시간 정도 더 남아 있지만, 조금 일찍 가도 상관없겠지.
본의 아니게, 굉장히 쉽게 밖으로 나갈 수 있도록 나 스스로 상황을 만든 꼴이 되었다.
“……저는 바람을 좀 쐬어야 할 것 같습니다.”
“예? 음, 세 시간 뒤에 파티가 있는 건 아시지요? 그럼 그 전까지……”
“아니요. 그…… 저 빼고 먼저 출발하시라 전해주세요. 볼케 백작의 별장 앞에서 뵙겠다고.”
왕자는 내 말에 흠칫 놀랐지만, 곧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파티가 몇 시에 시작하는지는 들으셨죠? 별장이 어디인지는 아시고?
……예. 알겠습니다. 저희는아마 시작 시간에서 십 분쯤 지난 다음 도착할 겁니다. 그럼 거기서 뵙겠습니다.”
살짝 내게 고개를 숙여 인사한 후, 그는 먼저 저택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몇 걸음 걷다가, 그는 뒤로 홱 돌더니 나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큰 소리로 당부했다.
“꼭 오셔야 됩니다!!”
“……하하, 걱정 마세요.”
어떻게 그 자리를 빠질 수가 있겠는가?
그곳에서 메린을 보면 또 죽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이상해지겠지.
하지만 불참했다가는 로나에게 죽을 거다.
그날로 저 하늘의 별이 되어 창조주께 올라갈지도 몰라.
아니, 진짜로.
“……후우…….”
홀로 남은 뒤뜰에서 기지개를 켜고, 긴 숨을 내쉬었다.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고 깨끗하다.
아무런 고민도 품고 있지 않은 듯한 그 깔끔한 모습이 왠지 부럽다.
“내일…….”
……오늘밤을 넘기고 다시 아침이 찾아오면, 무언가가 달라지는 걸까?
내가 알던 모습으로 돌아온 그녀에게, 무엇을 품게 되는 걸까?
그건 내일의 나만이 대답할 수 있는 물음이다.
오늘의 나는, 오늘의 내가 할 일이나 하자.
다시 한번 더 기지개를 켠 후, 나는 조심스럽게 방으로 가서 옷을 갈아입고, 위슨의 배낭을 빌린 다음 마구간으로 향했다.
그 도중에 어느 누구와도 마주치지 않은 건, 아마 창조주께서 옐리카를 통해 나에게 베푸신 긍휼이리라.
기왕 베푸시는 거, 조금 있다가 하려는 일에도 자비를 베풀어주셨으면 좋겠다.
도둑질이지만.
마구간에서 내 말을 끌고 나오면서, 나는 짚을 우적거리고 있는 엘크에게 속삭이듯 말을 걸었다.
“이따 보자.”
“……”
살짝 고개를 까닥이는 모습에 피식 웃으며 말에 오르고, 가볍게 배를 찼다.
전력질주가 아닌, 가볍게 달리는 구보.
돌바닥을 경쾌하게 울리는 말발굽 소리.
얼굴을 훑고 지나가는 초여름의 푸른 바람.
……가라앉았던 기분이 차츰차츰 풀어지는 게 느껴졌다.
이따 보자.
그렇게 중얼거리며, 나는 저택을 빠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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