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1화 〉 109화 : 구름 속 보물찾기 (1)
* * *
어느 듬직한 아름드리나무 뒤, 나는 한여름 매미마냥 그 나무에 찰싹 붙은 채 앞쪽을 살피고 있었다.
저 앞에는 흉부만 철판으로 덧댄 갑옷을 입은 병사들이, 집 안으로 이어지는 문을 지키고 서 있다.
얄궂게도 그 문은 두 팔 벌려 환영하듯이 활짝 열려 있는데, 이따금 하인이나 하녀가 쓰레받기를 털거나 물통을 비우러 오가고 있다.
아마 저 분장을 하고 슬쩍 들어가면 들키지 않겠지.
어쩌면 이미 몇 명은 사용인인 척하고 안에 들어가 있을 거다.
잠입에 성공했다는 사실에 우쭐해하며, 보검이 있을 법한 방으로 걸음을 서두르고 있겠지.
그러다 그 방으로 들어간 후…….
“……얼씨구, 또 나오네.”
덤불 속에 숨은 시커먼 덩어리, 아니 앨런이 콧방귀를 뀌며 중얼거렸다.
후드를 푹 눌러쓰다 못해 거진 복면이 된 상태인데도, 앞은 진짜 잘 보이는 모양이었다.
당연히 그가 보고 있는 모습은 내 눈에도 훤히 잘 보였다.
활짝 열린 문으로 걸어나오는 두 장정.
온 몸을 검은 천으로 칭칭 둘러싼 그 두 사람이 커다란 포대자루를 하나 들고 나오고 있다.
……붉게 얼룩진 포대자루를.
그들은 뒤뜰 구석의 구덩이로 가더니, 포대자루를 풀고 그 안을 탈탈 털어 넣었다.
내가 있는 곳에서 구덩이까지는 거리가 떨어져 있는 탓에, 나는 그 안으로 떨어지는 내용물의 윤곽이랑 색깔만 겨우 알아볼 수 있었다.
……그게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
방금 구덩이 속으로 떨어진 건 사람 시체였으니까.
밝은 것은 살결이요, 붉은 것은 그 속에 흐르던 피일지니.
그러므로 이따금 시체에서 따로 떨어지던 그 검붉은 덩어리들은……
“……”
으아악, 생각하지 마!
그냥 굳은 피였던 걸로 퉁쳐!
자꾸 슬그머니 ‘아닌 거 같은데~ 뭔가 대롱대롱거렸는데~’ 라며 딴죽을 거는 머리를 살짝 나무에 부딪쳐준 후, 나는 뒤통수를 문지르며 다시 집을 살폈다.
마침 그 검은 장정들이 빈 포대자루를 들고 다시 저택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경비병들은 그들이 마치 보이지 않는 것처럼 눈길 하나 주지 않고 저들끼리 계속 잡담을 이어갔다.
……정말 웃긴 상황이다.
내가 도둑처럼 숨어서 남의 집을 살펴보고 있는 것도 웃기고, 진짜로 내가 여기 도둑질하러 온 것도 웃기다.
근데 진짜 웃긴 건 저 집이야.
대체 저 포대자루는 몇 번이나 이 집과 구덩이를 오가고 있는 것인가?
저렇게 대놓고 시체로 만들어버린다고 위협하는데, 왜 누군가가 계속 도전하는 것인가?
그전에 저 검은 장정들은 어디서 뭐하는 놈들인가?
아니 그전에, 잠시 후에 손님들이 몰려올 집에 저렇게 피냄새를 풀풀 풍기다니, 집주인은 진짜 제정신인가?
나는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쉬었다.
“다들 미쳤어.”
“애송아, 여기 있는 시점에서 너도 미친놈이란다.”
껄껄 웃는 앨런에게 나는 아무 반박도 할 수 없었다.
나 역시 저 집에 들어갈 기회를 엿보고 있으니까.
……여기는 어느 4층짜리 집 뒤뜰에 있는 아름드리나무의 뒤.
내가 매미마냥 나무에 바싹 붙어서 지켜보고 있는 집은, 오늘밤 화려한 파티가 열릴 예정인 무대……
바로 랜돌프 볼케 백작의 별장이다.
작은 소란 때문에 엉망진창이 된 머릿속을 정리한다는 핑계로 저택을 빠져나온 뒤, 나는 이 볼케 백작의 별장 근처에서 나를 도와줄 도둑 할아버지인 앨런을 만났다.
그는 약속 시간보다 훨씬 일찍 나타난 나를 보고 조금 놀랐지만, 뭐 어떠냐면서 바로 별장에 숨어들어가는 길을 알려주었다.
그 다음은 이렇게 숨어서 살펴보고 있는 참이다.
“……”
그나저나 이 백작 진짜 맘에 안 드네.
침입한 도둑들을 죽이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지.
나도 강도 새끼들은 싫으니까 별 동정도 안 간다.
내가 맘에 안 드는 건, 별장을 4층씩이나 올렸다는 점이다.
물론 크기 자체는 옐리카의 저택이 훨씬 크지만, 그 집은 3층이다.
각 층의 방 넓이를 모두 합치면 이 별장이 더 넓은 거 아니야?
나 참, 진짜 돈지랄도 정도껏 해야지.
적어도 옐리카는 이 도시에 사는 주민이라고.
근데 여긴별장이잖아.
잠깐만 지내다가 가는 집!
그런 집을 4층씩이나 올려서 지어?!
게다가 그 돈은 엘프에게 받은 보석을 팔아서 번 돈일 거 아냐.
애들을 판 돈으로 저렇게 대놓고 떵떵거리고 있다니, 진짜 맘에 안 들어!
“쯧.”
오늘밤에 온 도시의 도둑이 여기 모인다고 했지?
보검을 훔쳐서 난리가 난 틈에, 다른 도둑들이 여길 싹 다 털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자자손손 대머리가 되고, 또……
“아.”
한창 저주를 퍼붓고 있는데, 또 다른 사람이 후드를 푹 눌러쓴 채 조심스럽게 별장에 접근하는 게 보였다.
그는 능숙한 솜씨로 창과 벽을 타고,4층 꼭대기의 활짝 열려 있는 창문안으로 훌쩍 들어갔다.
……그리고 잠시 후, 또 한 번 붉은 얼룩이 진 포대자루가 집 바깥으로 나왔고, 근처에서 앨런이 한숨을 쉬며 중얼거렸다.
“미끼 참 무는구만. 아니, 불에 뛰어드는 나방 꼴이라고 해야 하나?”
“……”
나와 앨런이 저 포대자루가 왔다갔다 하는 걸 본 것만 벌써 열 번째이다.
우리가 보기 시작했을 때부터 이미 포대자루엔 얼룩이 묻어 있었으니, 필시 저 구덩이 속엔 열 구가 넘는 시체가 쌓여 있을 터.
참고로 우리가 저 집을 지켜본 지 이십 분도 안 됐다.
그 짧은 시간에 벌써 열 명이나 죽은 거다.
저 활짝 열린 창문으로 들어간 도둑이 구덩이에 처음 버려진 때.
아마 그 시점 이후로 장정들이 바빠졌을 거라고 앨런은 말했다.
다른 방의 창문들은 모두 닫혀 있는데, 오직 한 방만 활짝 열려 있다.
게다가 그 창문으로 들어간 도둑은 죄다 죽어서 나오고 있다.
그게 의미하는 건 하나다.
앨런은 씨익 웃으며 말을 맺었다.
“와볼 테면 와보라는 거지.”
제 실력에 자부심을 가진 자라면 결코 무시할 수 없는 도발.
함정인 걸 뻔히 알지만, 그렇기 때문에 그 뒤에 있을 보물의 냄새를 맡고 더더욱 이끌리고 만다.
……불나방이네, 불나방.
나는 질색하며 고개를 저었다.
저게 왜 도발이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도둑 눈에는 그렇게 보인다니 어쩔 수 없지.
그건 넘어갈 수 있어.
앨런이 한 말 자체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난 진짜 모르겠지만, 아무튼 대놓고 도발하는 걸 어떻게 무시하겠나?
그리고 난 절대 아니지만, 모험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위험을 즐기기도 하겠지.
그럼에도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 도발에 걸리는 사람이 전부 도둑인 시점에서 글러먹었으니까.
호승심이든 모험심이든 말만 번지르르하게 하면 뭐해, 결국 도둑질이잖아!
미친놈들인가, 왜 도둑질에 자부심을 갖고 지랄이야?!
아니, 그전에 저 방이 진짜 보검이 들어 있는 방인지도 확실하지 않잖아.
왜 확인도 안 하고 냅다 들어가는 거야?
어떻게 자신은 안 죽고 넘어갈 거라고 자신할 수 있는 거야?!
“확인이 불가능하거든. 저 만한 높이까지 자란 나무가 없어. 그러니 어쩌겠냐? 일단 들어가봐야지.”
“?!”
불쑥 튀어나온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지를 뻔했다.
대체 언제부터 있던 건지, 내가 숨어 있는 나무 위의 굵은 나뭇가지에 누군가가 올라타고 있었다.
“아니, 누구세요?!”
“훗, 어둠 속을 살아가는 거미……라고 해두지.”
“……”
미친놈이군.
그 이상은 더 알 필요도 없고, 더 알고 싶지도 않았다.
덤불 속의 앨런이 콧방귀를 뀌며 중얼거렸다.
“뭐야, 누군가 했더만…… 너 용케 아직 모가지 붙어 있구나.”
“큭큭큭, 영감이야말로 아직도 세상 안 떴어? 진작에 귀신 됐을 줄 알았구만.”
“쯧쯧, 하여튼 젊은 놈들은 하나같이 싸가지가 없어서 문제야. 말세구만, 말세.”
나도 모르게 속이 덜컥했다.
물론 그가 뭘 알고 하는 이야기는 아닐 거다.
말세라는 건 어르신들이 한탄할 때 흔히 쓰는 말이니까.
……아, 말해주고 싶다.
말세 맞다고.
내년에 세계가 멸망할 수도 있으니까.
홀로 쓴웃음을 짓는 내 귀에, 두 도둑의 대화가 계속 들려왔다.
“그나저나 영감이 올 줄은 몰랐네. 손 씻었다며?”
“하, 이런 대환장 파티가 열린다는데 어떻게 안 오냐?”
“큭큭, 그렇긴 해. 밤나비 년도 왔으니까 말 다했지.”
“하, 부엌에서 고기 하나 쌔비러 온 거겠지. 죽기 싫다며 맨 빵이나 가져가는 년이 무슨.”
하긴 돈을 건드리지 않으면, 훔치는 걸 들키더라도 몇 대 맞는 정도로 끝나겠지.
그게 아니면 창부가 되는 길밖에 없을 텐데, 그건 그것대로 몸에 안 좋을 거 같고.
……창부로 사는 거랑 빵 도둑으로 사는 것, 둘 중에 뭐가 나은 건지는 모르겠다.
나무 위에 앉은, 자칭 거미라고 하는 도둑의 목소리가 이어서 들렸다.
“큭큭큭, 영감 아직 노망 안 났네. 맞아, 그 년은 구경만 할 거야. 근데 얼룩고양이, 나이트호크, 검은칼날에 잿빛안개까지, 진짜 날고 기는 놈들은 다 모였어. 눈깔사냥꾼까지 왔다고.”
“뭐? 그 새끼가 왜 와? 그 새낀 이쪽 분야가 아니잖아.”
“그러니까 기가 막히지. 하, 진짜 영감 말대로 대환장 파티라니까.”
그리고 이 대화를 말없이 듣고 있는 내 속에서도 대환장 파티가 열리고 있었다.
진짜 뭔 소리인지 하나도 모르겠네.
일단 얼룩고양이 등등은 도둑들의 별명일 테니 그냥 잊어버리고, 나는 마지막 것만 물어보기로 했다.
“눈깔사냥꾼? 그 사람이 왜요?”
“애송아, 그 놈이 왜 그딴 별명이 붙었을 거 같냐?”
“어…… 눈알만 다 뽑아가서?”
“……”
뭐지?
표정은 안 보이는데, 왠지 앨런이 되게 아연한 시선을 던지고 있는 것 같다.
일단 내 머리 위에 앉아 있는 도둑은, 확연하게 어처구니없어 하는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렇게 이상한 답이었나?
사냥꾼이라며?
쥐 사냥꾼은 쥐만 잡고, 멧돼지 사냥꾼은 멧돼지만 잡잖아.
같은 거 아니야?
심지어 옛날 이 대륙에는, 적들의 머리만 똑똑 따가는 부족이 있었다고 한다.
남의 머리를 가져가서 뭐에 쓰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지만, 아무튼 그 괴상한 습관 탓에 그 놈들 별명은 머리사냥꾼이 되었다.
그러니 이 눈깔사냥꾼이라는 놈도 그런 종류인 줄 알았는데.
“……영감, 이 놈 뭐요? 댁 제자야? 웬 미친놈을 데리고 다니고 그래?”
“내 고용주다. 이놈 이거, 생긴 거랑 다르게 발상이 존나 끔찍하네.”
“……”
세상에, 내가 이 사람들에게 저딴 말을 듣다니……!
바닥에 엎드리고 싶었다.
“아니, 그럼 뭔데요.”
“목표로 삼은 집 식구들의 눈을 죄다 베어버리고 집을 털어가서 그런 별명이 붙은 거다.”
“뭐야, 그냥 강도잖아.”
내 말에, 거미가 쯧쯧 혀를 차며 말을 꺼냈다.
“그냥 강도한테 그딴 별명이 붙겠냐? 그 놈은 밤이든 낮이든 쳐들어가서, 일단 거기 사는 놈들 눈부터 베고 그 다음에 집을 털었다고. 소문엔, 맘에 드는 눈은 고이 뽑아서 먹는다고도 하던데.”
그냥 강도가 아니라 미친 강도였다!
아니, 이 도시엔 진짜 순 미친놈들밖에 없네.
옐리카도 물들기 전에 얼른 이사 가는 게 좋지 않을까?
아무튼 왜 그 놈이 이번 일에 맞지 않는다는 건지는 잘 알았다.
으, 마주치지 않았으면 좋겠네.
자칭 거미의 목소리가 또 들렸다.
“그래서 영감은 언제 들어갈 거요?”
“좀 있다.”
“흠, 몫을 좀 나눠준다면 내가 도와줄 수도 있는데.”
“지랄하네. 나한테 통행료 낼 생각이나 해라.”
퉁명스럽게 대꾸하는 앨런의 말에, 거미는 킬킬 웃더니 나무 위에서 내 머리를 툭툭 쳤다.
“형씨가 이 영감을 어떻게 찾아서 구워삶았는지는 몰라도 일 펴서 좋겠어. 나도 간만에 좋~은 구경하나 하겠구만.”
“왜요? 이 할아버지가 그렇게 대단해요?”
“대단한 게 아니야. 전설이라고, 전설! 나나 다른 놈들이나, 다 이 영감 밑에서 큰 거나 다름없다니까. 끝까지 구닥다리 도구만 고집하는 게 흠이지만.”
우와, 이 할아버지, 도둑계에선 제법 거물인가?!
허 참, 사람은 겉만 봐선 모른다더니.
근데 그런 사람이 왜 골목길에서 죽을 뻔했던 거지?
덤불 속에서 무언가 작은 막대 같은 것이 나무 위로 슉 날아가며, 앨런의 목소리가 울렸다.
“쓸데없이 주둥이 놀리며 방해하지 말고 저리 꺼져라. 애송이 앞에서 확 본명 까발려버린다.”
“어휴, 노인네가 성질만 더러워선……. 알았어요, 알았어. 얌전히 꺼져줄게.
이따 보자고, 영감.”
그 말을 끝으로, 거미는 나무 위에서 사라졌다.
내 주변 어느 바닥도 딛지 않은 것 같은데, 어디로 어떻게 사라진 거지?
“저기 봐라.”
앨런이 슬쩍 가리킨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자,가느다란 줄을 이용하여 나무에서 나무로 날아가고 있는 시커먼 그림자가 보였다.
방금 전까지 이 아름드리나무에 있던 그 도둑이겠지.
작은 키에 체구도 작아서 그런지, 나무 사이를 다니면서도 나무가 아주 살짝만 흔들리고 있었다.
바람이 불었거나 새가 앉았거니 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길 정도로.
……대단한 기술이다.
정말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로 대단하긴 한데……
“……아니 저게 왜 거미야?”
“냅둬. 지가 거미랬잖아.”
……역시 이 사람들 사고방식은 잘 모르겠어.
나는 또 다시 한숨을 쉬었다.
자칭 거미라는 그 괴상한 도둑이 사라진 후, 앨런은 그제야 내게 가까이 오라는 듯이 손가락을 까닥였다.
“이제 아무도 없으니 제대로 작전을 짤 수 있겠구만.”
……설마 계속 저 집만 쳐다보고 있던 건, 아까 그 도둑이 근처에 숨어 있어서 그랬던 건가?
그 놈이 엿듣고 방해하거나 선수를 칠까봐?
세상에…….
“누가 있는지 어떻게 알았어요?”
“아는 놈에게는 잘 보이는 법이야. 아무튼, 애송이 네 생각은 어떠냐? 저 방에 진짜 사냥감이 있을 거 같냐?”
“음……”
직접 확인하기 전에는 아무도 알 수 없다.
저곳에 정말로 보검을 둔 거라면, 백작은 용감하게 도둑들과 정면대결을 펼치는 중이라 할 수 있겠지.
하지만……
……백작이 그렇게 직선적인 사람인가?
나는 고개를 저었다.
“다른 곳에 두었을 거 같아요.”
백작은 엘프와 거래하고 있는 놈이다.
분명 굉장히 조심하는 성격이겠지.
옐리카에게 들이댄 걸 보면 직선적이긴 하지만……
그건 뭐, 욕망을 주체 못해서 그런 거 아닐까?
정말로 직선적인 사람이라면, 왕국 몰래 십 년도 넘는 세월동안 엘프와 거래를 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렇다면 역시 저 방엔 보검이 없다고 보는 게 좋겠지.
엘프와 거래하면서도 그는 철저히 자신을 감추었다.
아마‘토끼풀 저택’을 태운 것도 볼케 백작이겠지.
혹시 모를 증거를 없애고, 은연중에 입막음을 하기 위해.
랜돌프 볼케 백작은 위험을 감수하긴커녕, 단 한 점의 위험도 거부하는 사람일 거다.
그런 사람이 엘프와 그런 거래를 하다니, 참 기가 막히네.
설사 그가 의외로 우직하게 정면승부를 하고 있는 거라 해도, 나는 그 승부에 도전할 수 없다.
저 창문은 저승으로 가는 마차의 문이나 다름없고, 나는 아직 삶에 미련이 많으니까.
“그래, 다른 데에 두었을 가능성이 높아. 문제는 그게 어디인가 하는 건데……. 자, 이거 봐라.”
앨런이 불쑥 내민 것을, 나는 엉겁결에 그대로 받았다.
이건…… 두루마리?
“여기 오기 전에, 그 양반한테 받은 거다.”
“그 양반……?”
누구를 가리키는 거지?
두루마리를 이리저리 살펴보니, 종이 끝부분에 나비 인장이 찍혀 있었다.
그뿐 아니라, 두루마리를 묶은 붉은 끈 매듭에 파란나비 모형도 하나 걸려 있다.
파란나비.
그 의미는 너무나도 자명하다.
시계탑 위에서 모든 것을 관망하고 있는 나비공작 클라우스.
뼛속까지 상인인 그 조합장이다.
“……”
……근데 이렇게 티를 내도 되는 건가?
티를 낼 수 있으니까 거물인 건가?
거물이니까 티를 팍팍 내는 건가?
역시 이해가 안 가!
나는 또 다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두루마리의 끈을 풀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