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7화 〉 115화 : 등잔 밑 비추기 (1)
* * *
주위의 소음이 무미건조하게 흘러 지나간다.
그녀를 두 팔로 감싼 시점에서 시야는 이미 닫혀 있다.
아무래도 좋은 것들은 의식 저편에 치우고, 오로지 두 팔로 감싼 것만을 느꼈다.
놀란 듯이 살짝 굳었다가, 곧 긴 숨을 내쉬며 내게 기대는 어깨.
즐거워하는 듯한 웃음소리.
내 손 안에 담긴, 품에 맞닿은 따스한 온기.
……아아, 다행이다.
너는 정말로 여기에 있는 거구나.
아직 이렇게, 내 손이 닿는 곳에 있어.
“……미안. 기다리게 해서.”
깊이 안도한 탓인지 목이 메여 버렸다.
거의 속삭임이나 마찬가지였는데도 충분히 들린 모양인지, 그녀는 가볍게 웃으며 내 등에 두 손을 둘러왔다.
“괜찮아. 이렇게 왔으니까 됐어. 후후, 올 줄 알고 있었는데, 진짜 오니까 왠지 좋다!”
“그래?”
“응!”
메린이 내 등에 두른 팔을 풀었다.
그녀의 온기가 멀어지는 것에 마음이 동하면서도, 나 역시 그녀를 놓아주었다.
……뭐, 그래도 그렇게 나쁘진 않아.
저렇게 환히 웃는 얼굴을 볼 수 있으니까.
“왔냐.”
담백한 목소리가 들려 돌아보니, 예복을 입은 위슨이 어떤 여자애와 함께 약간 떨어진 곳에 서 있었다.
파랑새는 어디 주머니에 넣고 있는지, 긴 머리를 한데 묶은 위슨은 홀로 뒷짐을 지고 서 있다.
“……”
……근데 옆에 서 있는 여자애, 어디서 본 거 같은데.
잿빛 눈동자를 반짝이며 이쪽을 뚫어져라 보고 있는 그 소녀는,
연갈색 머리칼을 양갈래로 땋아 길게 늘어뜨리고, 연한 푸른빛 프릴 드레스에 모자를 쓰고 있었다.
입을 가린 탓에 확실하진 않지만, 왠지 모르게 정말 눈에 익다.
특히 저렇게 자신의 입을 두 손으로 막고 있는 모습이!
“……너 로나니?”
끄덕끄덕.
“……왜 입을 막고 있어?”
내 물음에 답한 건 위슨이었다.
“괜한 소리할까봐. 쓸데없이 찔렀다가 튀면 안 되잖아.”
“……?”
……뭘 찌른다는 건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위슨 흉내내려고 저러는 건 아닌 거군.
그나저나 로나까지 예복을 입을 줄은 몰랐네.
“로나 너 아까는 사제복으로 충분하다더니. 완전 싹 꾸몄네.”
“모처럼이니 입으라고 그 여편네랑 아가씨가 밀어붙였어.”
대신 대답해주는 위슨의 말에, 로나는 옆에서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정작 그 위슨은 또 파랑새가 대신 말하고 있는 중이다.
사정을 알고 보니 되게 기묘한 그림이군.
아무튼 그렇구나.
마릴리에 부인의 작품이구나.
그 극성맞은 부인을 상대로는 천하의 로나도 고집을 꺾을 수밖에 없었던 모양이다.
옐리카는 옆에서 좀 보탠 수준이겠지.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위슨의 옷 어느 주머니에 들어있을 파랑새에게 말했다.
“에코 너, 안에 들어가선 진짜 말 좀 가려라. 네가 위슨을 위한다면 제발.”
“봐서.”
“하……. 아무튼 잘됐네. 로나 너도 이런 옷 입을 기회가 흔하지 않잖아. 잘 어울린다.”
로나는 배시시 웃으며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여전히 입을 두 손으로 막은 채.
설마 쟤 오늘밤 내내 저러고 있는 건 아니겠지.
톡톡, 메린이 가볍게 내 어깨를 두드렸다.
“야, 이제 가야 돼. 왕자…님이랑 아가씨는 이미 저기 계단 오르고 있어.”
“아, 그렇겠구나.”
내가 늦게 왔는데도 이제 계단을 올라가고 있는 건가.
그 두 사람도 나를 기다려주었던 모양이다.
아마 초대받은 주체로서 더 늑장을 부릴 순 없으니 먼저 올라간 거겠지.
우리는 옐리카의 동행손님으로 온 거니, 서둘러 그 뒤를 따라야 한다.
“어…… 근데 걸어서 가나?”
내 물음에 메린이 살짝 고개를 저었다.
“아니, 마차 타고.”
“역시 그렇지?”
“어. 그러니까 얼른 타.”
메린이 뒤에 세워져 있는 마차를 가리키며 내게 손짓했다.
“……”
…………어째 나랑 저 녀석 둘이서 저걸 타야 하는 거 같은데.
저거 2인용이잖아.작잖아!
한쪽에 한 명씩만 앉을 수 있잖아!
마주봐야 되잖아아!!
“으……!”
갑자기 메린의 차림새에 새삼 눈이 가며 얼굴이 달아올랐다.
아아아, 이러니까 일찍 올 생각이었는데!
“안 타고 뭐해?”
의아한 눈으로 고개를 갸웃거리는 메린의 모습에, 또 다시 가슴이 마구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이, 이거 같이 앉아서 가는 건 엄청나게 위험할 거 같은데!
죽을지도 몰라!머리 터져버릴 거라고!
어쩌지? 이걸 어떡해야 돼?
……아, 그래, 말!
이 녀석을 두고 갈 순 없잖아. 그래!
“아, 그…… 저, 나는 말이……!”
“아~ 걱정 마십쇼~ 제가 그 놈까지 착~실하게 데리고 모셔다드립죠!”
아잇, 이 마부 아저씨가 쓸데없이 끼어들고 있어!!
눈 마주치니까 씨익 웃으며 엄지를 세우고 있고!
뭔 뜻이야, 그거?!
메린이 어깨를 으쓱이며 재차 입을 열었다.
“그렇다는데? 가자.”
“……어, 으, 응.”
그래, 가자!어차피 각오했던 거잖아!
그냥 같이 앉아서 가면 되는 거 아냐!
근데 왜 다리가 말을 안 듣냐, 젠장할!
그때, 갑자기 내 양팔이 붙들리면서 내 몸이 마차를 향해 끌려가기 시작했다.
“거 되게 시간 끄네. 늦었다니까.”
“아 오으 아에어 으어아아 오오 어아으 어애오.”
위슨과 로나, 두 녀석이 각자 내 팔 하나씩 잡고 있었다!
그보다 로나 녀석, 뭐라고 하는 건지 모르겠는데 왠지 알면 안 될 거 같아.
두 사람은 마차 문 앞에 밀어버리듯이 나를 놓고, 빤히 쳐다보았다.
위슨은 말 그대로 그냥 쳐다보는 건데……
……로나에게선 엄청나게 강한 압박이 느껴졌다!
“……”
활짝 열린 마차 문가에 선 남자.
그리고 그 앞에 선 여자.
……아, 그런 건가.
저 사제님이 뭘 시키고 싶어하는지 알 것 같았다.
저택에서 같이 출발했다면, 거기서부터 나한테 시켰겠지.
품격 있는 숙녀이니 마땅히 받아야 한다면서.
그 말이 맞긴 하지만, 곧바로 행동에 옮기기에는 몸이 너무 굳어 있었다.
“후우…….”
심호흡을 한 후, 나는 그녀에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자, 오르시지요. ……메린 아가씨.”
……뒤에서 만족스러워하는 시선이 느껴졌다.
무시하자, 무시. 무시!
그런데 메린은 내가 어렵게 내민 손을 곧바로 잡지 않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엉? 손? 필요 없는데?”
“아, 원래 이러는 거야. 빨리 잡고 타!”
“아, 하긴. 아까 출발할 때도 그런 소리 들었지. 왠지 거북해서 그냥 혼자 올라탔지만.”
그녀는 그렇게 말하면서, 내 손을 살포시 잡고 마차에 올라탔다.
내가 그녀를 따라 올라탄 건, 심호흡을 두 번쯤 더 한 뒤였다.
“어……그럼 가서 보자.”
“오냐.”
위슨과 로나에게 인사한 후,마차의 문을 닫고 마부석 쪽을 툭툭 두드렸다.
음, 책에선 이렇게 해서 출발했던 거 같은데.
이내 따그닥, 하는 말발굽 소리와 함께 마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오,그거 진짜였네.”
“뭐, 책? 그런 것도 나오냐?”
“나오지. 인간과 관련된 건 다 나와 있을걸?”
그 대신 인간이 아닌 것에 대한 문헌은 굉장히 적다.
심지어 창조주는 물론이고, 그 분을 섬기는 교단에 대한 것도 그리 많이 알려져 있지 않다.
나는 일 때문에 교단 쪽 책을 본 적이 있어서 알지만, 일반 사람들은 전투사제이니 하는 보직이 나뉘어져 있다는 것도 모를 거다.
그나마 많이 알려져 있는 게 오크와 고블린일 거다.
툭하면 나오니까.
“그래? 그럼 이런 데서 뭐해야 하는지도 읽은 적 있어?”
“당연하지.”
책 이야기를 해서 그런 건지, 걱정했던 것보다도 훨씬 편하게 그녀와 말을 주고받고 있었다.
나는 빙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파트너와 같이 한입거리 요리들을 먹고, 술을 마시고, 음악에 맞춰 춤추고…… 서로 이야기하고 그런 거지.”
“아, 그럼 난 너랑 쭉 있는 건가?”
“그……렇지……? 아, 추, 춤출 때는 다른 사람이랑 해도 상관없을 거야.”
아잇, 진짜. 카엘, 이 등신아, 네가 뭔 사춘기 애냐?!
일일이 반응해서 굳지 마, 임마! 티 나잖아!
티 나도 이 녀석은 별 신경 안 쓸 테지만!
“춤……? 꼭 해야 되냐?”
“아니, 뭐, 하기 싫으면 안 해도 되고.”
너무 거절해도 실례라고 했던 것 같지만, 어차피 우리가 이 호화로움에 참여하는 건 오늘밤뿐이다.
그 안에 있는 사람 중 태반은 두 번 다시 보지 않겠지.
다른 사람에겐 조금 특별한, 또는 피곤한 일상이나, 우리에겐 한밤의 꿈과 같은 시간일 뿐이다.
……찰나에 흩어져버리는, 덧없고 허망하며 서글픈 시간이자,
무엇에도 매여 있지 않은 채, 그 순간을 즐기도록 허락된 자유로운 시간인 꿈.
……그래.
이건 단지 현실에 좀더 오래 잔향을 남길 꿈일 뿐이다.
“……”
꿈의 내용이 무엇이든, 그걸 꾸는 동안엔 아무 위화감 없이 녹아들기 마련이다.
이 시간을 정말로 꿈처럼 여길 거라면, 나 역시 그에 맞게 행동해야 하겠지.
그러니 괜히 의식해서 당황하지 말고, 어디까지나 자연스럽게…….
“아, 나뭇잎.”
그녀가 손을 뻗어 내 머리와 어깨를 툭툭 털었다.
“……”
……그게 되겠냐!!
꿈으로 치기엔 너무 실감난다고!!
이건 절대 꿈이 안 돼! 그러기도 싫어!
아아아아! 싫은 건 또 뭐야, 으아아아!
……가는 내내속으로 절규했다.
그래도 마차에서 내릴 때는 별 문제없었다.
주위 사람들이 죄다 그러는 분위기라서, 에스코트를 위해 그녀에게 팔을 내민 것도 굉장히 자연스러웠다고 생각한다.
그 다음부터가 문제여서 그렇지.
메린은 메린대로 익숙하지 않은 뾰족구두로 걷느라 불안해하며 살짝 허둥거렸고,
나는 나대로 그녀와 가까이 붙은 탓에 여러모로 죽을 거 같았다.
그녀의 걸음걸이가 현저히 느려진 탓에 더더욱 미칠 노릇이었다.
팔짱을 낀 것도, 그러느라 그녀의 어깨가 닿는 것도,
눈을 살짝 돌리면 은방울꽃 장식과 깊은 계곡이 바로 보이는 것도,
자꾸만 얼굴을 화끈거리게 해서 어지러울 지경이다.
근데 그것도 모자라다는 듯이 코에까지 맹렬한 공격을 해대니까 진짜 미칠 거 같아……!
아니, 대체 왜,
왜아까 마차를 같이 탔을 때부터좋은 향이 풍기는 건데?!
설마 향수……?향수 뿌렸어?
그런 귀한 것까지 빌려주다니,날 완전 죽이려고 작정을 했구나, 옐리카 바실리예프!!
……아,심장이 한시도 멈추지 않고 과다운전하고 있다.
안 돼, 잠시라도 멈춰야지 안 그러면 진짜 터져버릴 거야.
아니, 멈추면 죽잖아!
뭔 소리하는 거야, 정신 차려, 카엘 에스트렐!
“으으…… 걷는 연습했는데도 좀 어렵네…….”
천천히 계단을 올라가며, 그녀가 볼멘 소리로 중얼거렸다.
……그 목소리 덕분에 아주 약간 정신이 잡힌 것 같았다.
나는 목을 가다듬고, 태연하게 들리길 간절히 바라며 말했다.
“내, 내가 보기엔 괜찮은데? 너무 신경 쓰는 거 아니야?”
“그런가…….”
더 주의를 기울이고 조심하려 하면, 오히려 더 어색해지고 불편해지는 것도 있다.
숨을 몇 초 동안 마셨다 내쉬는 게 좋은가 생각하는 게 대표적인 예이지.
“내가 잡고 있으니까, 걱정 말고 그냥 편하게 걸어.”
“응……. 근데 계단에서 미끄러지면 너도 같이 구를 거 아냐.”
“……”
거뜬히 받아주겠다고 허세를 부릴 수 없는 게 슬펐다.
그렇게 조심조심 계단 끝까지 올라온 후, 그녀는 안도한 듯이 짧은 숨을 뱉으며 씁쓸히 웃었다.
“춤 안 춰도 돼서 다행이다. 이래서는 추라고 해도 못하겠어.”
……말도 안 되는 소리.
네가 못하는 게 어디 있다고.
“괜한 걱정 마라. 내 장담하는데, 너 저 문 통과할 즈음엔 폴짝폴짝 뛰어다닐걸.”
“안 해, 임마! 내가 토끼냐?!”
뾰로통한 그녀의 얼굴을 보니, 갑자기 웃음이 터져나왔다.
“뭐야, 왜 웃어. 너 지금 나 비웃는 거냐?”
“아냐, 하하하, 진짜 아니야! 하하하하, 아, 얌마, 여기서 평소처럼 때리지 마!
……아니, 겉은 진짜 내가 본 누구보다도 예뻐져선 완전 딴 사람 같은데, 속은 여전히 내가 아는 메린 소더라는 게 왠지 다행이다 싶어서.”
중간에 이상한 말이 들어간 것 같지만 조금도 신경이 쓰이지 않았다.
그녀는 뚱한 얼굴로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뭐야, 그게.”
“그러게. 하하.”
당연한 사실인데.
겉이 좀 바뀌었다고 이 녀석이 메린이 아닌 다른 사람이 되는 게 아닌데.
그게 왜 이렇게 안심이 되는 건지 모르겠다.
그래도 웃은 덕분에 긴장이 풀렸는지, 나는 무척 편안한 마음으로 다시 그녀에게 팔을 내밀었다.
“자, 아가씨, 계속 가실까요?”
“……오늘 너 좀 이상해.”
샐쭉한 표정으로 중얼거리면서도, 그녀는 다시 내 팔에 손을 올렸다.
“안 하던 말을 하질 않나, 갑자기 웃질 않나. 이상해.”
“……차림이 이상하니까 그럴걸? 너랑 달리 난 따로 꾸민 것도 없잖아. 그러니, 음, 평소보다도 더 이상하게 보이지.”
나오는 대로 둘러댄 건데, 나 스스로 그 말에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메린은 긴 머리를 땋아서 틀어올린 데다, 아까는 없었던 작은 보석 장식까지 이마에 두르고 있다.
그보다 이 향기, 장미와 라벤더의 은은한 향이 아까부터 진짜…….
그 반면, 나는 그냥 머리만 약~간 다듬었을 뿐, 옷 말고는 달라진 게 없다.
당연히 여러모로 어색하게 보이겠지.
아마 그녀와 이렇게 나란히 걷는 것도 이상하게 보일 거다.
……분명어울리지 않을 거야.
정문을 통과해, 화려한 조명 속으로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주변의 웅성거림이 더 커져갔다.
그 소리가 나를 향한 불평이 아니기를 간절히 빈다.
저 멀리서 탄성을 지르는 소리는메린을 보고 하는 거겠지?
당연히 그렇겠지.
그 소란스러움 속에서, 그녀의 목소리가 가만히 귀에 울렸다.
“아니, 안 이상해.”
왠지 귀에 익은 말.
속삭인 것도 아닌데, 그녀의 말들이주위의 소음을 뚫고무척 또렷이 들려왔다.
“너도 굉장히 잘 어울려.왕자보다도 훨씬 더. 솔직히 놀랐어.”
“……”
아무리 그래도 왕자보다 낫다는 건 너무 과장이 심한 거 아니냐?
네가 우리 마을에서 제대로 차려 입은 남자를 본 적이 없어서 그렇겠지.
축제 맨날 빼먹었으니까.
……등등, 입 안을 맴도는 여러 말 중에 내가 꺼낼 수 있던 건,굉장히 짧은 한 마디뿐이었다.
“……그럼 다행이고.”
“후후.”
들뜬 듯이 웃는 그녀의 얼굴은 아주 살짝 발그레하게 물들어 있다.
아냐, 그건 그냥 불빛 때문이야.
그녀의 주홍빛 눈동자가 평소보다 더 반짝이는 것처럼 보이는 것도, 조명이 한낮의 태양보다 훨씬 밝아서 그래.
그러니까 제발 진정해, 심장아.
이 이상은 진짜 무리라고……!
……끊임없이, 간절히 되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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