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8화 〉 116화 : 등잔 밑 비추기 (2)
* * *
인간의 강점은 뭐니뭐니해도 적응력이다.
아무리 혹독한 환경이라 해도, 그곳에 생물이 살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만 갖추고 있다면 어떻게든 터전으로 삼아버릴 정도로 강한 적응력.
그리고 정말 다행스럽게도, 나 역시 그 종족적인 특성을 여지없이 발휘하고 있었다.
로비를 가로질러, 위층 계단 앞에 선 볼케 백작부인에게 인사할 즈음엔, 마음이 한결 평온해진 것이다.
어디를 보든 화려한 드레스 차림을 한 여자들이 있어서,메린 역시 굉장히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비춘 것도 그에 한몫 했다.
물론 메린의 빛이 바랜 건 아니다.
마치 무성한 숲 속에 꽃이 가득 핀 나무가 한 그루 있는 것처럼, 계속 눈이 가더라도 호들갑 떨지 않을 뿐.
“와, 조명 엄청 밝은 거 봐. 바닥에 그림자도 안 생겨!”
신기한 듯이 이리저리 시선을 돌리며 메린이 재잘대었다.
그 움직임에 따라 그녀의 가는 목이 빛을 받으며, 쇄골까지 매끄러운 선을 그리고 있었다.
그래, 이제 이걸 봐도 아까처럼 어지러워지거나 머리가 터져버릴 것 같진 않는다.
적응했으니까.
“……”
……여전히 그때마다 심장이 두근거리며 마구 뛰고, 여전히 얼굴은 화끈거리지만 아무튼 적응한 거다.
헛발 짚지 않고, 말 더듬지 않으며, 팔다리가 굳어 있지도 않고, 또 숨 막혀 죽을 거 같다는 생각은 안 드니까.
나는, 적응한 거다.
아무튼 그렇다.
“이쪽으로…….”
별장 하인의 안내를 받아 들어간 곳은, 방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크고 널찍했다.
꽃과 리본으로 화려하게 장식된 벽과 창문, 악기를 들고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는 연주자들.
그리고 방의 좌우 가장자리에 놓인, 알록달록한 요리들이 쭉 놓여 있는 길다란 테이블.
그야말로 파티장이었다.
“우와…….”
이거에 비하면, 우리 마을 촌장님네 딸 결혼식은 그냥 애들 소꿉장난이었다.
너무 화려해서 오히려 현실미가 떨어지는 거 같아.
근데 요리 테이블과 의자들이 방 가장자리에 있어서 그런가?
방 중앙에는 아무도 없이 싹 비워져 있었다.
“아, 저기 먹을 거 있네. 야, 얼른 가보자!”
그새 뾰족구두에 완전히 적응한 메린이, 별 어려움없이 까치발을 들며 요리 테이블을 가리켰다.
……역시 메린이야.
나 참, 화려한 장식엔 눈 하나 안 주고 먹을 거부터 보고 있네.
생각 같아서는 피식 웃으며 그녀를 데리고 가고 싶지만…….
“……”
여기 사람 너무 많은데요!!
이 방 크기가 작은 것도 아닌데, 왜 인구밀도가 이렇게 큰 거 같지?!
죄다 가장자리에 있어서 그런가?!
저 테이블도 뭐 음식 하나 집으려면 사람들 무더기에 껴서 아웅거려야 할 거 같고!
아니, 다들 저녁 굶었나, 뭐 저리 테이블에 우글대고 있어?!
아, 다른 의미로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여기서 이렇게 굳어버리면 안 돼!
혼자 있는 것도 아닌데!
“카엘 씨!”
거의 사생결단하는 심정으로 발을 내딛으려는 순간, 나를 불러 세우는 목소리가 들렸다.
반가움이 울컥 솟아오르며 고개를 돌리자, 그야말로 반짝반짝 빛이 나는 두 남녀가 서 있었다.
옷이 좀더 화려해진 것 외엔 별 달라진 게 없는 피터 왕자, 그리고 처음 만났을 때보다도 한층 더 화려하게 꾸민 옐리카가 그와 팔짱을 끼고 있다.
……에스코트의 범위를 한참 넘어선 팔짱을.
남의 눈을 요만큼도 신경 쓰지 않는 저 대담함……!
우와,난 절대 흉내 못 낼 거야.
옐리카는 우리를 방 가장자리로 끌고 가더니, 킥킥 웃으며 말을 건넸다.
“정말 오셨네요! 이런, 오라버니와 내기했는데, 당신 덕분에 져버렸어요!”
“……제가 안 오는 거에 거셨어요?”
끝부분이 복슬복슬한 부채로 입을 가린 옐리카의 눈이 장난스럽게 빛났다.
“어머어머, 설마요~ 당신이 메린 씨를 에스코트하느냐, 안 하냐를 두고 걸었죠! 메린 씨가 너무 빛이 나니, 아예 가까이 가지 못하는 거 아닐까 싶었답니다!”
“……”
별 쓸데없는 걸로 내기하고 있네.
부자라서 그런가?
아니, 내가 메린 말고 누구를 에스코트해?로나?
……사람을 뭘로 보고!
“옐리카, 그쯤하세요.”
선량한 시골 청년을 놀리는 심술쟁이 아가씨를 제지한 후, 왕자는 쓴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농담입니다, 카엘 씨. 내기 같은 건 하지 않았으니 기분 푸세요. 하하, 겸사겸사 긴장도 푸시라고 하고 싶지만, 이런 곳엔 처음이시라 하셨으니 어렵겠죠?
……숨을 돌리고 싶을 땐 언제든 테라스에 가시면 되니, 무리하지 마세요. 아니면 지금 좀 바람 쐬셔도 되고요.”
“……아, 아니요. 아직 괜찮습니다. 기억만 해둘게요.”
좀 초조할 뿐, 당장에 여길 뛰쳐나가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고 있으니 괜찮은 편일 거다.
아마도.
“다들 여기 모여 계시네요!”
평소보다도 한층 더 발랄한 목소리로 로나가 인사를 건넸다.
아까 전에 그녀의 입을 막던 두 손은 접시를 들고 있는데, 한입크기로 잘린 고기 요리가 담겨 있었다.
“위슨은?”
“저~쪽 테이블이요.”
“……”
얘네도 바로 음식부터 돌진하네!
하긴, 아직 저녁 안 먹었을 테니 배가 고프긴 하겠지.
……아, 이 녀석이 들고 있는 음식 봤더니 갑자기,
배가……
고파…졌다……!
통, 통, 통!
……왠지 머릿속에서 작은 북이 울렸다.
“히히~ 여기 오길 잘했네요! 눈 호강도 하고, 맛있는 것도 먹고! 주스밖에 못 마시는 게 좀 슬프네요~”
신난 듯이 재잘거리며, 로나는 음식 하나를 입에 넣고 만족스럽게 웃었다.
……으, 배고파.
“과일펀치 없어? 파티니까 있을 거 같은데.”
“카엘 님도 참! 그게 주스잖아요. 이런 데선 와인 마셔야죠! 아니면 벌꿀주라도! 근데 하인분들이 저한텐 와인을 안 주는 거 있죠? 위슨 씨는 받았는데! 너무하지 않아요?!”
“아니, 전혀.”
대놓고 술을 못 받았다며 분개해하는 이 소녀의 나이는 열 네 살이다.
그리고 위슨은 열 다섯 살이니, 나는 이제 그 녀석이 들고 있을 와인잔을 빼앗으러 가야 했다.
“야, 카엘.”
그녀가 내 팔을 살짝 당기며 속삭여왔다.
“너 계속 여기 있을 거지? 나 가서 뭐 하나 가지고 올게.”
“어? 아, 아냐, 나도 같이,”
“됐어. 넌 여기서 얘기나 나누고 있어. 갔다 온다~”
메린은 내가 더 말릴 틈도 없이 굉장히 빠른 걸음으로 요리 테이블을 향해 가버렸다.
와글거리는 인파를 매끄럽게 뚫고 가는 모습이, 꼭 춤 스텝을 밟는 거 같았다.
음, 왠지 진짜 춤도 출 수 있을 거 같은데.
툭툭.
“??”
무언가 길다란 게 나를 두드리는 느낌에 돌아보니, 옐리카가 예의 그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쥘부채를 살살 부치고 있었다.
“후후, 그렇게 파트너만 멍~하니 보시면 안 돼요! 조금 섭섭해지려 하네.”
“예? 아, 그…….”
“농담이에요! 저도 메린 씨에게 계속 눈이 가는 걸요? 후후, 안 그래요, 오라버니?”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건너간 그녀의 말에, 왕자 역시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그야 당연……히 아닙니다. 옐리카, 내 눈은 오직 당신만을 보고 있으니까요.”
“어머, 오라버니도 참! 다른 분들 앞에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에요! 아이, 부끄러워라!”
“……”
나는 봤다.
왕자가 ‘당연’이라 말할 때 이 아가씨의 눈에 시커먼 그늘이 끼려고 했던 걸, 이 두 눈으로 똑똑히……!
아니 무슨 함정 까는 것도 아니고, 본인이 얘기 꺼냈으면서 왜 그러는 거야?!
다행히 왕자는 아슬아슬하게 그 위기를 벗어났다.
약간 움찔했던 걸 보면, 직감이 그를 살린 게 분명하다.
옐리카는 잠시 혼자 얼굴을 감싸며 꺄아꺄아 운 후, 다시 부채를 살살 부치며 입을 열었다.
“그건 그렇고, 카엘 씨, 오라버니가 무언가 숨기고 있는 거 같은데 그게 뭔지 아세요? 아까부터 분위기가 묘~한 게, 수상하다니까요!”
“아니, 왜 그걸 저한테…….”
“제가 복수초를 만나러 가는 동안, 여러분 모두 오라버니와 정답게 담화를 나누었다면서요? 그러니 무언가 꾸미시는 게 아닌가 싶은데요!”
음, 꾸미긴 했지.
지금 여기서 무언가 꾸미지 않은 사람은 어느새 접시를 다 비운 로나밖에 없을 거다.
그래서 나는 내가 지을 수 있는, 최고로 환한 웃음을 지으며 대답해주었다.
“꾸미긴 뭘 꾸며요? 하하, 저흰 옐리카 님과 달리 모략을 짜는 건 영 서툴답니다. 그러니 안심하세요.”
“어머~ 그게 무슨 뜻이죠? 호호호, 카엘 씨의 말은 이따금 너~무 어렵다니까요!”
“하하하, 어렵긴요. 옐리카 님이 그만큼 슬기롭고 어지시다는 뜻밖에 없는걸요!”
“어머어머, 그런 말씀을 해주시다니 참 영광이에요! 호호호, 근데 왜 꼭 무언가 다른 뜻이 있는 것 같을까요? 참 희한하기도 하지! 호호호호~!”
우리는 잠시 그렇게 마주보며 웃었다.
옆에서 왕자가 진땀을 흘리며, 무어라 말할 수 없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 난처한 듯이 웃는 얼굴에는 어딘지 긴장한 기색이 담겨 있다.
……그럴 만도 하지.
우리는 단순히 파티를 즐기러 온 게 아니니까.
“근데 진짜 아무것도 없어요?”
“뭐가?”
“뭐 꾸미신 거 없냐고요.”
무던히 묻는 로나의 손에는 또 다른 접시가 들려 있었다.
……언제 또 갔다 왔대?
내 얼굴을 빤히 보는 그녀에게,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해주었다.
“없어.”
“진짜로? 다들 깜짝 놀랄 만한 거, 준비 안 하셨어요?”
“내가 그런 거 할 놈이야? 진짜 없어.”
“진짜진짜진짜요??”
아니, 도통 믿지를 않네.
뭔가 냄새를 맡은 건가?
그래도 난 거짓말을 한 건 아니다.
이미 일을 다 끝냈으니 더 뭘 꾸밀 것도 없고,
이 자리에 모인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할 걸 준비한 건, 내가 아니라 앨런이니까.
“사제님도 참 끈질겨. 없다고 몇 번을 말해.”
툴툴거리는 목소리와 함께, 위슨이 음식이 가득 담긴 접시를 들고 나타났다.
로나가 들고 있는 것보다 좀더 큰 접시에, 여러 종류의 음식이 정갈하게 담겨 있다.
음, 손님들이 들고 다닐 크기는 절대 아니야.
“……너 그거 하인 붙잡아서 받았냐?”
“어.”
“돌겠네, 진짜.”
좀 멀쩡한 편인 이 녀석이 이런 기행을 벌인다면……
……윽, 설마 메린 녀석, 그 큰 접시 통째로 들고 오는 거 아니야?!
“아, 다들 모였네.”
마침 메린의 목소리가 들렸다.
오, 주여, 제발 자비를……!
“자.”
“……어, 고마워.”
굉장히 멀쩡하고 평범한 음식 접시였다.
어째 좀 양이 많이 담겨 있는 게, 여러 접시를 하나로 합쳐버린 것 같은데 이건 허용범위인 걸까……?
그보다 뭐 이리 많이 가져왔대?
설마 내 뱃속이 울린 꼬르륵 소리를 들은 건 아니겠지?
“두 사람도, 여기요.”
“어머, 친절하시네요. 고마워요.”
“……감사합니다.”
화사하게 웃으며 접시를 받아드는 옐리카와 달리, 왕자는 살짝 난처한 얼굴로 이쪽을 보며 그녀의 친절을 받아들였다.
음, 역시 하나로 합치는 건 좀 그랬나……?
고맙게 먹으려고 하는데, 정작 메린의 손엔 아무 접시도 들려 있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그녀가 들고 있는 건 오로지 포크 하나뿐.
“엉? 네 거는?”
“그거 먹을 건데? 접시 들고 다니기 귀찮아서 네 거에 다 담은 거야.”
“아, 그러냐.”
정말 실용적인 발상이군.두통이 올 정도로.
이 녀석 분명히 접시 안 바치고 콕 집어서 낼름 먹을 게 뻔해.
빵도 아니고 소스 있는 고기 요리인데!
“하…… 그러다 흘리지. 야, 포크 줘.”
모처럼 예쁘게 차려 입은 건데 망치면 안 되지.
나는 그녀의 포크를 받아서 음식을 찍고, 접시에 받치며 그녀에게 내밀었다.
“자.”
그녀는 얼굴 가득 물음표를 띄우며 포크를 잡으려 했다.
“아니, 입 벌리라고.”
“굳이? 그냥 내가,”
“아, 얼른.”
채근하자, 그녀는뚱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내가 내민 포크를 덥썩 물었다.
그녀가 음식을 우물거리는 동안, 나는 손수건으로 그녀의 입가를 살살 닦으며 잔소리를 떠들어주었다.
“빌린 옷인데 깔끔하게 입어야지. 그리고 봐, 다들 얌전히 접시 들고, 안 흘리게 받쳐서 먹잖아. 그냥 동네 술집이면 몰라, 여기선 막 편하게 먹으면 안 된다고.”
“……”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이 그녀가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러나 아직 입 안에 음식이 있는 탓에 그녀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훗, 내가 그러라고 일부러 세 조각 먹였지.
“아무도 뭐라고 안 하는 건 엮이기 싫어서 그런 거지, 그래도 돼서 그런 게 아니야. 알았어? 자.”
그녀의 목울대가 움직일 때쯤, 한 포크 더 내밀었다.
“넌 안 먹어?”
“이거 너 주면 나머지 다 내 거야. ……맛있냐?”
내가 묻자마자 그녀는 입을 우물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맛이 없을 수가 없겠지.
딱 봐도 고급 요리인데.
들고 있던 포크로 음식을 집어 내 입에 옮겼다.
소스에 푹 졸인 돼지고기가 입 안에서 부드럽게 녹아내리며, 한껏 품고 있던 육즙을 아낌없이 내놓았다.
고기 위에 장식으로 놓여 있던…… 뭔지는 모르겠는데, 아무튼 그 녹색 풀이 아삭아삭 씹히며 싱그러운 향내를 내뿜었다.
한 마디로,엄청 맛있었다!
우와아, 옐리카의 저택에서 먹었던 정찬과는 또 다른 맛이야!!
……아, 포크 바꾸는 거 깜빡했다.
뭐, 어때.
“……”
어째 조용하다 싶더니, 다들 내 쪽을 빤히 쳐다보고 있다.
왕자는 약간 당황해하는 것 같고, 옐리카는 부채를 활짝 펴선 눈 빼고 다 가리고 있으며, 로나는 방긋 웃고 있다.
……위슨에게 입이 막힌 채로.
“……왜요?”
“아뇨, 아무것도 아닙니다.”
“신경 꺼.”
거의 동시에 대답이 날아왔다.
……뭔가 있는 거 같은데 도통 모르겠네.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접시를 비웠다.
그렇게 다들 그럭저럭 배를 채웠을 무렵, 이 큰 방 끝까지 다 울릴 듯한 목소리가 들렸다.
“이런, 여기 계셨군요! 바실리예프 양!”
“……!”
왕자의 얼굴이 일순 굳는 게 보였다.
……드디어 납시었군.
얼굴에 긴장이 감돈 왕자와 달리, 옐리카는 태연하게 미소 지으며 그 남자에게 한쪽 손을 내밀었다.
“어머, 볼케 백작님. 이렇게 또 뵙게 되니 무척 기쁘네요. 로비에 계시지 않길래, 설마 몸이 편찮으신 건지 걱정했지 뭐에요!”
굳은살이 약간 박힌 남자의 손이 그녀의 가느다란 손가락을 잡고,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멋들어지게 기른 콧수염, 기름을 발라 광택이 나고 있는 짧은 머리카락.
단순히 놀고먹으며 사는 건 아니라는 듯한 다부진 얼굴.
그리고 두 눈 깊이 시커먼 욕망을 품고 있는 그 남자는, 이 별장의 주인이자 오늘 무대의 주인공.
……바로 랜돌프 볼케 백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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