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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사는 소꿉친구 검성이 무섭다-119화 (119/475)

〈 119화 〉 117화 : 등잔 밑 비추기 (3)

* * *

백작은엄지손가락으로옐리카의 손가락을쓰다듬으며 그 손을 놓았다.

“당신의 그 따스한 염려를 받다니, 이거 다음엔 정말 누워야겠군요.

……항상 그러하긴 했으나, 오늘밤은 특히나 더 아름다우십니다. 바실리예프 양.”

“어머, 다정하기도 하시지. 후후, 부인은 굉장히 행운이 넘치시네요. 백작님처럼 이리 다정하신 분을 남편으로 두시다니!”

“하하, 당신의 앞에 서는 영광을 얻은 저야말로 행운아이지요. 그리고……”

그녀를 핥듯이 바라보던 백작은, 그제야 옆에 선 왕자에게 눈길을 돌렸다.

“……이런, 용서하십시오, 피터 왕자님. 숙녀분께 그만 눈이 빼앗겨, 결례를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하하, 괘념치 마십시오. 아름다운 꽃에 먼저 눈길이 가는 건 순리이지 않습니까? 더군다나 숙녀의 아름다움에 찬사를 바치는 것은, 신사로서 마땅히 행해야 할 의무이지요.

그런 면에서 백작은 확실히 신사 중의 신사이십니다. 숙녀를 기쁘게 하는 법을 굉장히 잘 알고 계시니까요. 한 수 배우고 싶군요.”

피터 왕자는 웃고 있었다.

입은 확실하게.

“하하, 왕자님께서 그리 말씀하시니 이거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제 작은 비결이라 하자면, 아름다운 꽃을 즐기는 것이라 할까요?

저는 영지에 있을 때, 매일 아침마다 정원을 쭉 둘러본답니다. 그러다 끌리는 꽃을 찾으면, 그 꽃이 가장 활짝 피어났을 때에 손수 꺾어서, 병에 꽂죠. 하하, 제 소소한 취미입니다.”

“이런, 의외로 낭만적인 분이셨군요! 하하, 공연히 그 멋진 콧수염에 항상 꽃향기가 풍기는 게 아니셨네요.

그래도 조심하십시오. 꽃에는 이따금 날카로운 가시가 있지 않습니까? 또한 꽃에는 늘 벌이 맴도는 법이니, 자칫하다 쏘이시기라도 할까 걱정입니다.”

그를 상대하는 백작 역시 호탕하게 웃고 있었다.

일단 웃음소리를 내고 있는 건 확실했다.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 정원의 벌들은 참 신기하게도 굉장히 순해서 말이지요. 열심히 모은 꿀을 빼앗겨도 그저 묵묵히 있을 뿐이랍니다.

게다가 정원에는 다른 꽃들도 워낙 많으니, 한 송이 정도 꺾는다고 그리 크게 성을 내진 않겠지요.”

“하하, 특별한 아름다움을 지닌 꽃이라면 그에 이끌린 벌도 조금은 다를지도 모르지요.

그나저나 백작은 정말 축복을 한껏 받으셨습니다! 강력한 영지에 아름다운 부인도 모자라, 요전에 후계자를 얻으셨다고요? 하하, 그 아이에게 기대가 크시겠습니다.

무척이나 가까운 가신들을 굉장히 많이 두고 계시니, 볼케 가문의 미래는 창창하겠군요.”

……참 희한하네.

둘 다 서로 웃으면서 정겹게 대화를 주고받고 있는데, 어째 그걸 듣고 있는 내 등줄기는 자꾸 오싹오싹 떨리고 있다.

그냥 취미가 어떻고, 다치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덕담을 하고, 가문 탄탄하니 좋으시겠다며 이야기하는 내용인데……!

이윽고 옐리카가 부드럽게 웃으며, 마치 두 사람 사이를 가로막듯이 한 발짝 나서며 입을 열었다.

“어머머, 두 신사분 모두, 이 소녀는 안중에도 없으시네요! 섭섭해라.

후후, 백작님, 저에게 보여주시기로 한선물은 언제쯤 볼 수 있을까요?”

“안 그래도 그 때문에 당신을 찾은 것입니다. 그럼, 두 분 모두 손님방으로…….”

“손님방? 어머, 저는 여기서 보여주실 줄 알았는데요.”

그녀의 말에, 백작은 의외라는 듯이 눈을 살짝 크게 떴다.

“여기요?”

“네! 제 친구들에게 귀한 보물을 볼 수 있을 거라고 잔뜩 말해두었는걸요. 후후, 백작님, 제 체면 살려주실 거죠?”

“예에…… 당신이 그리 원하신다면야.”

어딘지 끈적한 느낌이 묻어나는 미소를 지으며, 백작은 집사를 불러 무언가를 속삭였다.

아까와 달리 굉장히 말끔하게 차려 입은 집사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빠른 걸음으로 파티장을 떠났다.

백작은 하인을 불러 손님들에게 술잔을 들게 하도록 지시한 후, 우리를 향해 빙긋 미소 지었다.

“그래서…… 이 분들이 당신의 친구들이군요. 흠…… 한 분은 낯이 익은 듯한데…… 실례지만 성함이 어찌 되십니까?”

……나한테 묻는 건가?

왕자가 내게 슬쩍 눈짓하는 걸 보니 맞나 보군.

나는 반 걸음 정도 나서며 허리를 굽혔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백작님. 저는 에스트렐…… 카엘 에스트렐이라 합니다.”

“에스트렐……? 어디서 들은 듯한데……. 아아, 그래. 생각났군.

아이레의 천문학자 가문이었지?”

“예?”

이게 뭔 뜬금없는 소리래?

천문학자 가문이라니??

다른 사람들 모두 깜짝 놀란 눈으로 날 보고 있는데, 내가 제일 크게 놀라고 있으니까 그렇게 보지 말았으면 한다.

“음? 몰랐습니까? 하긴, 아이레가 무너진 게 이십 년도 더 전이니 이상할 것 없죠. 그와 별개로 얼굴이 눈에 익은데…….

아아, 그래! 용사님이시군요. 어째서 북쪽 산이 아닌 이 도시에 계시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이리 직접 인사를 올릴 수 있다니 저야말로 영광입니다.”

아무래도 백작 역시 그 선포식에 왔었던 모양이다.

알아보는 데에 시간이 좀 걸린 걸 보면, 그렇게 주의 깊게 본 건 아닌 모양이지.

……아니면 내가 워낙 흔하게 생겨서 기억에 안 남았던가.

백작은 하하 웃으며 내 뒤에 선 동료들을 스윽 훑어보았다.

“굉장히…… 독특한 일행들이시군요. 흠……?”

그러다가 또 다시 내 쪽으로 시선을 고정시켰다.

……아니, 날 보는 게 아니야.

이 새끼가 보는 건…….

“그 아가씨도 용사님의 일행이십니까?”

“예.”

나도 모르게 옆으로 살짝 더 움직였다.

내 바로 뒤에 메린이 서 있으니까.

백작은 내가 그러거나 말거나 음흉한 미소를 띄며 재차 입을 열었다.

“호오…… 괜찮으시다면 나중에 춤 한 곡 함께 해주셨으면 하군요.”

“……”

이 미친 씨발 개새끼 확 죽여버린다.

감히 그딴 눈으로……!

“……으.”

그녀가 내 소매를 꼭 잡는 게 느껴졌다.

직접 눈으로 보지 않아도 그녀가 불안해한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가만히 그 손을 잡아주며, 나는 백작에게 웃는 얼굴로 답했다.

“이를 어쩌죠? 그녀의 춤 약속은 이미 다 차버렸습니다. 정말 죄송하지만 아무리 백작님이라 하셔도 양보해드릴 수 없을 듯하니, 부디 양해해주십시오.”

꺼져, 버러지 새끼야.

“이런! 너무 늦어버린 건가요? 하하, 이리도 아름다우시니 당연하지요. 정말 아쉽습니다. 아, 혹시 괜찮으시면 내일 저녁 식사는 어떠실런지요?”

“아, 이런, 정말 죄송합니다. 저희가 내일 아침에 이곳을 떠날 예정인지라…….”

미친 새끼가 지랄하고 있네.

“허허어, 이거 정말 연이 닿지 않는 모양이군요. 저 역시 말리스에 지내는 건 오늘로 완전히 마지막이니, 언제 다시 뵐 수 있을지도 알 수 없겠네요.”

“어머? 백작님, 말리스에 다시 오지 않으실 생각이신가요?”

백작은 옐리카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또 다시 그 끈적한 미소를 지었다.

“애석하게도 그렇습니다. 한동안 다른 일에 집중해야 하는지라……. 그러니 더더욱, 오늘밤을 제 기억에 담고 싶군요.”

아, 그래. 그 소원은 이뤄질 거다.

아마 평생 못 잊을걸!!

마침 백작의 집사가 커다란 상자를 품에 안고 돌아왔다.

백작이 손짓하자, 집사가 상자를 든 채로 우리를 향해 비스듬히 서서 주변 하인들에게 눈짓했다.

두 하인이 상자의 뚜껑에 손을 대는 것과 동시에, 백작의 우렁찬 목소리가 또 한 번 파티장에 울려퍼졌다.

“이 아름다운 밤, 이 한 자리에 모이신 모든 신사 숙녀 여러분! 드디어 때가 되었습니다! 제 평생에 접한 어떤 것보다도 더 값진 보물을 지금, 여러분께 보이는 바입니다!”

뚜껑이 천천히 열리며, 붉은 융단에 싸인 은색의 검이 모습을 드러냈다.

금빛 메리골드 장식이 화려한 조명을 받아 눈부시게 빛나는 그 검은, 누가 보아도 보검이라 고개를 끄덕일 만큼 아름다웠다.

여기저기서 감탄의 한숨이 퍼지는 가운데, 백작이 그 검을 옐리카에게 내밀었다.

그 순간, 나는 피터 왕자가 굳은 얼굴로 세게 주먹을 쥐는 것이 보였다.

조심스럽게 그 옆에 서서, 그에게만 들리도록 작게 속삭였다.

“하실 일을 하세요, 왕자님.”

“……예?”

이제 옐리카는 천천히 돌아서서, 왕자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의아한 눈으로 나를 보는 왕자에게, 나는 빙긋 미소를 지어주었다.

“걱정 마세요. 다 잘될 테니까.”

“……예. 감사합니다, 카엘 씨.”

왕자는 각오를 다진 얼굴로 살짝 고개를 끄덕인 후, 두 손에 검을 든 채 자신을 보는 옐리카와 마주섰다.

“여기요, 오라버니.”

생긋 웃는 얼굴로 검을 내미는 그녀에겐 한 줌의 불안도, 후회도 보이지 않는다.

오로지 ‘검을 찾아서 다행’이라는 눈으로 왕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

그의 등에서 긴장이 사라지는 듯했다.

보이는 것은 오로지 굳은 결의뿐.

마침내 왕자가 그녀의 손에서 검을 받아 들고, 잠시 후, 크게 선포했다.

“이 검은……”

“……가짜입니다아! 후흐흣, 그때 그 백작 얼굴 진짜, 푸흐흡!!”

아무리 여기가 파티장, 아니 무도회장 구석이고 소란스러운 분위기라 해도, 큰 소리로 웃는 건 여러모로 곤란할 터.

덕분에 메린은 조금 전부터 얼굴이 빨개진 채 어깨를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웃음 참느라.

“이야~ 정말 장관이긴 했어요. 푸히힛!”

로나도 그 장면이 다시 떠올랐는지 황급히 입을 가리며 웃음을 참았다.

장관이긴 했지.

그리고 정말 대단한 걸작이었어.

나 역시 조금 전 일을 떠올리며 즐거이 웃음지었다.

­­이 검은 가짜입니다!

피터 왕자가 그렇게 선포하자, 무도회장 전체가 즉시 술렁였다.

볼케 백작이 진짜 왕가의 보검을 손에 넣었다는 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인데, 그게 지금 완전히 부정된 것이다.

그것도 보검의 주인의 입으로.

그러니 볼케 백작이 가장 놀란 건 당연했다.

줄곧 여유로운 웃음을 짓던 표정을 싹 굳힌 채, 그는 말도 안 된다며 큰 소리를 질렀을 정도로 완전히 평정을 잃었다.

­­지금 진지하게 말하는 겁니다, 백작. 이건 보검이 아니에요. 왕가의 보검은 왕족이 손에 들었을 시, 가드의 수호석이 빛을 냅니다.

그리고,

검이 너무 가볍다, 왕자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곧바로 자루를 쥐고 검을 뽑았다.

성검으로 착각할 정도로 화려하고 아름다운 그 검집에서 나온 것은,

잘 익은 순무였다.

“그거 누가 깎았는지 되게 잘 깎았더라.”

위슨이 정말 감탄했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진짜 누가 한 건지는 몰라도 굉장히 사악했다.

세상에, 순무를 그냥 꽂은 것도 아니고, 검 모양으로 반질반질하게 깎아서 광을 내놓다니!

게다가 길이 맞춘다고 아교로 붙이기까지!

열심히 웃음을 참고 있던 나조차도, 그 장면에선 사레가 들려 마구 콜록거릴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백작은 완전히 웃음거리가 되어 버렸고, 그는 분노와 수치심으로 얼굴이 붉어지다 못해 창백해져서는 무도회장을 홱 나가버렸다.

그 자리에서 혈압으로 머리가 터지지 않은 게 다행일 거다.

다시 생각해도 진짜 쌤통이야.

이제 고자가 되면 완벽하다.

그 후 백작부인이 나타나 손뼉을 쳐서 주의를 모으더니, 간단한 사죄의 인사와 함께 파티의 시작을 선포했다.

그 낭랑한 목소리와 함께 시작된 피들과 하프시코드, 그리고 피리 연주소리에 추임새를 넣듯이, 우리는 파티장 구석에 모여 신나게 키득거리고 있는 중이다.

“하아…… 근데 진짜 어떻게 된 걸까요? 옐리카 님도 전혀 예상 못했다는 듯이 경악하고 계시던데. 카엘 님은 아시죠?”

“엥?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로나는 뚱한 눈으로 나를 보며 고개를 까닥였다.

“왕자님이 보검이 가짜라고 할 때, 카엘 님만 안 놀라셨잖아요.”

“너무 놀라서 오히려 멍해진 거야. 나도 깜짝 놀랐어.”

거짓말은 아니다.

보검의 진위를 어떻게 가릴지 궁금했는데, 설마 그냥 잡기만 하면 될 줄은 몰랐으니까.

왕족이 검을 잡으면 그 수호석이라는 보석이 빛나게 되어 있다니…….

진짜, 사람들이 성검이라 생각할 만하네.

“수상하지만…… 하아, 어쩔 수 없네요. 측정치 기준 미달이니까 넘어가드릴게요.”

“……”

무슨 기준으로 뭘 측정하는 거지?

모르는 게 좋을 듯하니 그냥 묻지 않기로 했다.

“오, 춤춘다.”

위슨이 음식을 우물거리며 고갯짓했다.

그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리자, 방 중앙에 남녀 둘씩 짝을 짓고 모여서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마치 미리 맞추기라도 한 것처럼 질서 있고 정갈한 움직임이다.

저렇게 계속 돌면서도 한 쌍과 다른 쌍 사이의 거리까지 딱딱 유지하고 있으니 참 대단하군.

“저게 왈츠라는 건가?”

가만히 중얼거리자, 메린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알아?”

“귀족들은 저런 거 춘다더라.”

그리 느린 박자는 아니지만, 마을 축제에 비하면 현저히 얌전하고 느긋한 춤이었다.

남녀가 서로 한 손을 맞잡고, 박자에 맞춰 빙글빙글 돌고만 있는 게 다이니까.

하긴, 가볍게 폴짝 뛰기에는 악기도 하나 부족하고, 무엇보다 박자가 너무 느리다.

딴 건 몰라도 백파이프의 고양시키는 그 음색이 있어야 뛸 기분이 나지!

“……”

왈츠를 추는 상류층 한 무더기의 중앙엔 피터 왕자와 옐리카가 자리하고 있다.

거리가 떨어져 있으니 안 보이지만, 아마 저 조명만큼이나 환하게 웃고 있겠지.

보검의 행방을 알 수 없게 됐으니 여전히 골치가 아프기는 해도, 적어도 오늘밤만큼은 아무 걱정할 필요 없을 테니까.

빙글빙글 도는 그 모습들을 보다가, 문득 메린을 힐끗 돌아보았다.

“……”

의외로 그녀도 다른 사람들처럼 방 중앙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언제나 그랬듯이, 흥미는 모래알만큼도 보이지 않는 덤덤한 표정이다.

……그러나 못이 박힌 것처럼 고정된 그 눈 속에는, 어떤 감정이 희미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내가 함부로 이름을 붙일 수 없는, 그런 소박한 빛이.

어쩌면 내가 잘못 본 건지도 모른다.

그냥 조명 빛을 반사한 건데, 나 홀로 분위기에 취해서 착각했는지도 몰라.

아까 그녀도 그랬잖아.

춤 안 춰도 돼서 다행이라고.

그러니 그냥 둬!

……그렇게 만류하는 목소리를 듣기엔, 이미 나는 그녀 앞에 서서 손을 뻗은 뒤였다.

아니, 말릴 거면 더 빨리 하든가.

속으로 퉁명스레 쏘아붙이며, 의아한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는 메린에게 말했다.

“……한 곡, 추시겠습니까?”

“엥?”

어색한 인사에 걸맞은 벙벙한 대답이 돌아왔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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