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0화 〉 118화 : 등잔 밑 비추기 (4)
* * *
메린은 아연한 표정으로 나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여태껏 봐온 표정 중에서도 손에 꼽힐 만큼 경악해하고 있었다.
“……뭐?”
“춤추자고.”
“……왜?”
“여기 무도회장이라잖아. 춤추는 곳에 있으니 춰야지.”
야, 좀더 근사한 핑계 못 치냐?
마음속 목소리가 과자를 던지며 핀잔을 주는 것 같았다.
여전히 멍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며, 메린이 입술을 달싹였다.
“……안 추는 사람도 있는데?”
“추는 사람이 더 많아.”
“……너 춤출 줄 알아?”
“아니.”
“……근데 왜?”
“춤추는 곳에 있으니까.”
앗.
처음으로 돌아와버렸다!
……잠시라도 틈을 주면 기껏 내민 손이 도로 들어가버릴 거 같아서, 떠오르는 대로 막 내뱉고 있는 탓이다.
메린은 눈을 깜빡이더니,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굳이 나랑? 왜?”
“……”
음, 좋은 질문이군.
하지만 미안하게도 그 질문만은 곱게 대답해줄 수 없었다.
네가 추고 싶어하는 것 같아서, 라고 하면 죽자사자 아니라며 잡아뗄 게 뻔하니까.
그러니 다른 말을 해야 했다.
“……너랑 추고 싶어서.”
그 말이 자연스럽게 나온 건, 그 소망이 내 안에 희미하게 떠올라 있었기 때문일까?
그 의문에 눈을 돌리듯이, 나는 억지로 그녀의 손을 잡아 일으키며 말을 이었다.
“모처럼 차려 입었잖아. 이런 기회 또 언제 오겠냐? 할 수 있는 건 다 하고 즐겨야지.”
“……웬일이냐? 네가 그런 말을 다 하고.”
“차려 입어서 그래.”
네가 그렇게 아름답게 빛나고 있으니까 홀린 거야.
와인은 딱 한 잔 마셨는데도 이렇게 기분이 앞서는 건, 분명 네가 두른 향에 취해버린 거겠지.
“……나 어떻게 서는지도 몰라.”
“나도 모르는데. 그냥 딴 사람들 보고 대강 따라하면 되지 않겠냐?”
“그 다음은?”
“몰라, 그냥 돌면 되겠지.”
“푸핫, 나 참, 진짜 어이가 없네!”
기어코 웃음을 터뜨려버린 메린을 데리고, 가급적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서서 마주보았다.
주변 사람들이 하는 대로 왼손은 그녀의 손을 잡고, 그녀가 내 어깨에 손을 올리도록 한 후, 오른손으로 그녀의 등을 받쳤다.
그리고 들려오는 피들 소리에 맞추어, 그녀와 천천히,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분명 되게 어색하고 어설프겠지.
신기하게도, 지금은 그런 게 조금도 신경 쓰이지 않았다.
얼마간 그렇게 돌자, 메린이 킥킥 웃으며 말을 꺼냈다.
“너 처음 아닌 거 같아.”
“너야말로 구두 처음 신는 거 맞냐? 되게 잘 움직이는데.”
이 녀석, 폴짝폴짝 뛰다 못해 달리기도 할 수 있을 거 같은데.
“네가 잡아주니까 그렇지.”
“그럼 저렇게 돌아볼래?”
주변의 다른 한 쌍을 고갯짓으로 가리켰다.
느릿하긴 해도, 여자가 드레스를 펄럭이며 홀로 몸을 돌리고 있었다.
여전히 남자와 손 하나를 맞잡은 채.
“……그러다 네 발 밟으면?”
“상관없어. 자!”
그녀의 등을 받치던 손을 떼고, 맞잡고 있던 팔을 천천히 위로 올리면서 한 바퀴 돌렸다.
으앗, 하고 짧게 소리내면서 내가 돌린 방향을 따라 한 바퀴 돈 그녀를 다시 붙잡아주었다.
“푸핫, 이게 되네.”
“내 그럴 줄 알았지. 발 밟아도 되니까 그냥 기분대로 움직여!”
춤이 별 건가?마음이 흐르는 대로 움직이면 되는 거지.
스텝이나 동작은 그 다음인 거다.
우리는 여기서 제일 어설프고 품위 따위 전혀 없겠지.
하지만 우리보다 더 즐기고 있는 한 쌍도 없을 거야.
내 팔을 움직여 유도하기도 하고, 때로는 그녀 스스로 손을 바꾸면서 홀로 빙글빙글 돌았다.
서로 어깨를 맞대기도 하고, 그녀가 팔을 꼬아서 내가 몸을 돌리기도 했다.
음악의 곡조가 바뀌면 바뀌는 대로, 발이 방향을 잡는 그대로 움직인다.
아무 생각없이 그러고 있는데도다른 누구와도 부딪치지 않는 것, 왠지 주변이 빈 것 같다는 느낌에 의문을 가지다가도, 다시 그녀의 손을 잡으면서 새까맣게 잊어버렸다.
……정말로 즐겁다.
그녀가 길다란 치맛자락을 나풀거리며 몸을 돌리는 모습을 보는 게,
불현듯 번쩍 들어올린 그녀가 꺄핫 소리내며 웃는 게,
나를 보며 환히 웃는 그 얼굴을 보는 게 즐겁다.
정말로, 꿈 속에 있는 것처럼.
“……아.”
……그렇게 방심한 탓에, 기습적으로 가까워진 그녀의 얼굴에 그만 또 굳어버리고 말았다.
별 생각없이 흉내 낸 동작,
뒤로 젖힌 그녀의 허리를 받치면서 내 몸을 굽히는 그 동작 그대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녀의 주홍빛 눈동자 속에 별하늘이 펼쳐져 있고, 쉴 새 없이 움직인 탓에 뺨은 발갛게 상기되어 있다.
살짝 벌어진 분홍빛 입술 사이로 새어나오는 숨결이 뜨겁다.
……무대에 흐르는 음악 소리가, 심장 고동에 묻혀 사라져갔다.
머리가 텅 비어서, 아무 생각도 할 수 없다.
그저 그녀의 눈동자를 좀더 가까이 보고 싶다.
그 안에 내가 담겨 있는지 알고 싶다.
빨려들 듯이 가까워지는 그녀의 눈동자가 살짝 떨리는 것 같았다.
그 얼굴이, 내 손을 지금도 굳게 잡은 그 모습이, 이렇게 가까워지는데도 가만히 나를 마주보는 그녀가,
……아아,사랑스럽다.
…………
………뭐……?
“…………!!”
지금 뭔 생각한 거냐?
뭘 하려고 한 거야, 카엘 에스트렐, 이 개잡놈 새끼야!!
분위기에 취해서 뭐? 사랑스럽다고?
네 주제에 어떻게 그녀에게 그딴 생각을……!
아냐아냐아냐, 안 했어.
그런 생각 안 했다고!
할 리가 없잖아!하면 안 되니까!!
황급히 그녀를 일으켜 세우고, 손을 놓았다.
의아하게 나를 보는 그녀의 얼굴을 마주할 수 없었다.
마음 한 구석에 찌그러져 있던 이성이 단번에 튀어나와, 그간 쌓인 울분을 토로하듯 마구 호통치고 있었다.
안 되지, 그럼. 그러면 안 돼.
나 같은 놈이 그녀에게 그래서는 안 되고 말고……!
‘그녀는 거부하지 않았어.’
그러니 떨어져야 돼.
지금이라도 이런 엿 같은 장난질은 당장 때려치워!
‘장난으로 한 거 아니잖아?’
난 지금 정상이 아니야.
당장 이 자리에서 나가, 더 늦기 전에!
‘그녀의 눈앞에서 도망칠 거야? 그리고이미 늦었어. 알잖아.’
“……윽!”
시야가 일그러졌다.
휘청거리지 않도록 애를 쓰고는 있는데, 진짜로 효과가 있는지는 모르겠다.
머릿속에서 목소리가 엉망진창으로 마구 뒤엉키고 있다.
어지러워.
하지만, 쓰러지면 안 돼……!
“카엘……!”
나를 단단히 지탱하는 힘이 느껴졌다.
그 목소리에 의지하듯이 팔을 두르며, 겨우겨우 말을 짜냈다.
“미안…… 바람 좀…….”
“바람……? 아, 테라스! 응, 알았어!”
고개를 떨군 탓에 확실하지 않지만, 몸이 움직이고 있는 건 알 수 있었다.
……그런데 테라스가 이렇게 멀리 떨어져 있었나?
흐릿한 의문이 떠올랐다.
애석하게도 테라스엔 의자가 없는 탓에, 나는 난간에 고개를 대고 멍하니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멀미 났나?”
“소용돌이처럼 계속 빙글빙글 돈 건 메린 님이신데요? 그냥 기운을 다 쓰신 거 아닐까요?”
메린과 로나가 제멋대로 진단하는 소리가 조용히 들려왔다.
미안, 둘 다 틀렸어.
이건 그냥 정신이 나간 거야.
드디어 머리가 터진 거지.
“셋다 틀렸어. 심적 부담이 너무 심하니까, 생각을 더 못하도록 몸이 스스로 활동을 끊은 거야.
그러니 바람 쐬면 괜찮아지겠지.”
문이 끼익 열리는 소리와 함께, 위슨의 목소리가 밤하늘에 조용히 울려퍼졌다.
“귀족 아가씨는 볼 거 다 봤다고 왕자랑 먼저 돌아간대. 우리는 알아서 놀다가 오라더라.”
“와, 다행이네요. 아직 못 먹어본 요리 많이 남았거든요!”
“그럼 빨리 가야 될걸? 좀 있다가 저거 치우고 디저트 깐다던데.”
“네?! 절대 안 돼요! 아, 카엘 님, 천천히 쉬다 나오세요!!”
다급한 발소리와 함께, 로나의 목소리가 저편으로 사라졌다.
……쟤 진짜 먹으러 온 거구나. 허 참.
“너네 둘은 여기 있을 거지? 아니, 여기 있어라.”
“왜?”
대답할 겨를이 없는 나를 대신해 메린이 물었다.
“너네 지금 좀 화제야. 특히 메린 너, 지금 들어가면 딴 놈들이 춤추자며 바로 에워쌀걸?뭐, 그걸 원한다면 들어와도 되고. 그럼 위슨도 간다.
……아니, 잠깐만.야, 카엘.”
나를 콕 집어 부르는 소리가 들리더니, 멀거니 쳐다보던 밤하늘 대신 파랑새의 얼굴이 시야에 한가득 들어왔다.
“……작작해라, 등신아. 아니면 일부러 나 빡치라고 하는 거냐?”
이 새낀 뜬금없이 또 뭔 개소리야…….
“아니냐? 그럼 경고하는데,네 자신의 소리를 꺾고 죽이는 짓은 적당히 해라.그건나를 모욕하는 거다, 인간 새끼야.”
“……”
“……한낱 미물 주제에, 감히 영혼의 울림을 없애려 드느냐? 위슨은 나의 계약자이니 용납하였으나, 네놈은 아니다.
영혼을 기만하지 마라, 용사. 네놈의 오만을 참아주는 데에도 한계가 있다.”
파랑새의 말투가 돌연 진중해지면서, 녀석의 검은 눈 속에서 푸른빛이 일렁인 것 같았다.
평소에 짜증낼 때도 드러나지 않던 분노가 살짝 엿보인 듯했다.
……파랑새, 에코는 소리의 정령이라 했다.
마음속에 품은 생각도 들린다고 했으니, 아까 내 머릿속에서 마구 얽히던 그 목소리들도 들렸겠지.
아무래도 이 녀석은 그게 굉장히 거슬린 모양이다.
“어. 존나 싫어.넌 아예 싹을 뽑으려 했잖아.고사(?死)시키거나 잘라내는 거면 몰라도, 네가 손수 뽑으려 드는 건 절대 못 봐줘. 명심해.”
……아까 낮에 들은, 두 번째 인생선배가 해준 조언과 비슷한 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녀석은 지금, 내가 메린을그렇게생각했다는 것을 인정하라고 하고 있는 건가.
“그래, 새꺄. 그 뒤에 네가 같잖은 핑계를 치며 개지랄을 떠는 건 상관없어. 솔직히 꼴받긴 하지만, 인간들이 원래 그 모양인 걸 어쩌겠어?
하지만 ‘그런 적 없다’고 잡아떼며 속이는 건 못 참아. 내가 들은 것만 이번이 세 번째야. 적당히 해라, 가만 안 둔다.”
“……뭐 어쩔 건데.”
“너 새끼 속마음 몽땅 밖에 울려버릴 거야.”
“……”
정말로 무시무시한 협박이었다!
진짜 그런 일이 벌어지면 쪽팔리는 게 문제가 아니야.
사회적으로 완전히 죽을 거다!
“난 경고했다. 알아서 처신 잘해.”
그 말을 남기고, 파랑새는 파다닥 날아가버렸다.
이윽고 문이 여닫히는 소리가 들린 후, 고요함이 잔잔하게 흘러 들어와 그 자리를 대신 채웠다.
“후우…….”
핑계…….
내가 그런 잘못된 생각을 품은 것에 뭔 핑계를 댈 수 있다고…….
……당연한 거에요. 본능이잖습니까?
본능, 인가…….
본능이라 하면, 그런 마음을 품는 게 허락되는 건가.
어쩔 수 없는 일이라며 넘어가는 건가?
그때, 갑자기 이마에 따스한 기운이 느껴졌다.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들자, 메린이 손바닥을 든 채 내 옆에 서 있었다.
“까, 깜짝 놀랐잖아.”
“열 있나 싶어서.”
열은 없더라, 그녀는 무던히 덧붙이며 난간에 기대었다.
테라스엔 별장 안의 불빛이 닿지 않는 탓에, 그녀에게도 여지없이 밤의 그림자가 살며시 드리워져 있었다.
어슴푸레한 달빛 아래에 선 그녀는, 화려한 조명 속에 있을 때와는 또 다른 느낌으로 잠잠히 빛나고 있다.
……그 이상 눈을 두었다가는 또 저질러버릴 것 같아, 나는 가만히 시선을 내리깔며 입을 열었다.
“……난 여기 있을 테니까, 넌 들어가.”
“나만 가서 뭐하냐?”
“춤추면 되지. 아까 보니까 너도 재미있어 하는 거 같더만. 위슨이 그랬잖아, 너 지금 들어가면 춤 신청 쇄도할 거라고.”
……설사 다른 사람이 메린과 춤을 춘다고 해도, 난 상관없었다.
그녀가 즐겁다면 그걸로 충분하니까.
“음…….”
고민하는 소리가 들렸다.
……가겠지. 내가 할 수 있는 건 다 하고 즐겨야 한다고 했으니까.
생초짜인 나와도 그렇게 즐겼으니, 분명 더 능숙한 사람과 짝을 지으면 한층 더 즐거울 테니까.
난간의 살대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간 건, 자꾸 몸이 바닥으로 내려가니까 그걸 받치고 싶어서 그런 거다.
……응, 그런 거야.
“싫어. 그냥 여기 있을래.”
“……뭐? 왜?”
“딴 사람은 신경 써야 하잖아. 힘 조절도 따로 해야 되고. 귀찮아. 그냥 여기 있을란다.”
“……그래, 맘대로 해.”
짤막하게 대답과 함께 새어나온 한숨엔, 나 자신도 알 수 없는 안도감이 섞여 있었다.
한동안 그렇게 말없이 밤 공기를 마시고 있는데, 별안간 메린이 혼자 웃음을 터뜨렸다.
자연히 그쪽으로 눈을 돌리자, 어둑한 빛깔로도 덮을 수 없는 그녀의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진짜 신기하지 않냐? 내가 이런 옷을 입고, 이런 데에 오다니,고향에서 나올 때만 해도 정말 상상도 못했어.게다가 너랑 춤까지 추고. 후후, 춤이라는 거 의외로 재미있구나.”
“그러게 진작에 축제 좀 오지. 맨날 빼먹고 말야.”
“경비 서야 되니까 그랬지. 그리고 축제 안 가도, 네가 거기 음식들 가져와줬으니 간 거나 마찬가지였고.”
“다 노는데 넌 일하는 게 불쌍해서 챙겨준 거야. 나 참, 정식 자경단원도 아니면서 맨날 자원하고 말야. 너 말고 딴 사람들이 서도 되는 건데.
……그리고 뭐가 간 거나 마찬가지냐? 모닥불 돌면서 춤추는 게 축제의 꽃이니, 그걸 해야 축제에 간 거지.”
나는 매년 메린에게 같은 이유를 대며 축제에 가자고 권했고, 그때마다 그녀는 매번 같은 이유를 대며 고개를 저었다.
“시끄럽잖아. 그런 거 싫어.”
시끄러운 건 싫다, 그게 그녀의 이유였다.
그러면서 내가 가져온 축제 요리에 기뻐하며, 마을 광장에서 붉게 타오르는 모닥불을 물끄러미 바라보곤 했다.
……아까 전, 춤을 추는 사람들을 바라보던 그 눈빛으로.
혹시 그때도 내가 메린의 손을 잡아 끌었다면, 그녀는 나를 따라서 와주지 않았을까?
쓸쓸한 외곽이 아닌 떠들썩한 광장에 같이 섞여서, 즐겁게 웃으며 모닥불 주위를 돌지 않았을까?
좀더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은 내 잘못이다.
그러나 정작 내 입 밖으로 나온 말은, 사과가 아닌 반박이었다.
“여기도 소란스러운데 잘만 있잖아.”
“여기 사람들은 나를 모르잖아.”
메린은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리듯이 말을 이었다.
“그러니 내가 있어도 전혀 신경 쓰지 않지.”
“……”
시끄러운 게 싫다는 건 그런 뜻이었구나.
불온한 분위기로 수군거리는 게 싫은 거였어.
……멍청이, 축제에서까지 그러는 놈은 하나도 없는데.
너 만나기 전의 나도 축제에선 애들이랑 잠깐 놀았을 정도라고.
작년엔 튜르 그 빌어먹을 새끼랑 건배도 했단 말야.
다들 분위기에 들뜨고 취해서, 평소의 원한 관계는 다 잊어버리고 신나고 즐거운 생각밖에 안 하는데, 그것도 모르고 바보같이……!
역시 내가 억지로라도 끌고 갔어야 했다.
두들겨 맞는 한이 있더라도 데려갔어야 했어……!
달빛 아래에서 미소 짓고 있는 그녀는 아름답다.
절벽에 홀로 피어난 꽃처럼 강인하고, 생명력이 넘치며……
……무척이나 애달프다.
나는 가만히 그 어깨를 감싸며, 살포시 끌어안았다.
따스한 체온이 전해지면서 목이 메여왔다.
“……응? 뭐냐, 갑자기?”
“……추워 보여서.”
조금이라도 틈이 생기면 사라져버릴 거 같아, 그녀를 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의아해하는 그녀의 목소리가 품속에서 내 심장을 울리며 들려왔다.
“안 추운데?”
“……그럼 내가 추운가봐.”
이렇게 네 온기를 더 느끼고 싶은 걸 보면.
그러니 더 깊이 끌어안는다.
“추우면 들어가자.”
“……조금 더 있다가.”
추운 것 같다는 내 말을 듣고, 그녀가 내 등을 감싸는 것에 왠지 울컥 솟아오르는 눈물을 참는다.
……미안해.
내가 너무 약해빠진 놈이라서, 네 고집 하나도 못 꺾었구나.
항상 너한테 도움받으면서, 정작 나는 너에게 아무것도 못 해줘서 미안해.
그리고 있잖아,
“……메린.”
“엉?”
“고마워.”
……아직도 이런 놈의 곁에 있어줘서.
미안함과 고마움을 한껏 담아,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
“……춤춰 준 거에 대한 감사 인사야.”
“아, 그래?”
대강 둘러대자, 그녀가 내 얼굴을 잡고 고개를 살짝 숙이게 하더니,
곧바로 이마에 보드랍고 촉촉한 감촉이 느껴졌다.
“어, 으……?!”
“히히, 네 덕분에 춤춘 거니까 나도 해야지! 즐거웠으니까!”
“……”
……내가 내 무덤을 팠구나!
또 다시 달아오른 뺨이 들키지 않도록, 그녀의 얼굴을 다시 품에 덮어버렸다.
저택에 돌아온 후, 나는 자정이 넘도록 잠들지 못하고 몸을 뒤척거렸다.
따뜻한 물에 몸을 데웠는데도 좀처럼 잠이 오지 않는다.
돌아오는 마차에서 너무 푹 자버린 걸까?
“……”
몇 시간 전의 일을 다시 떠올려보았다.
보석처럼 빛나는 메린을 보고, 그녀와 함께 마차를 타고,
맛있는 음식을 먹고, 손을 맞잡고 함께 춤을 추었다.
그리고, 은빛 달이 뜬 테라스에서……
“……으.”
……아침이 되면, 메린은 드레스가 아닌 셔츠를 입고 나올 것이다.
이렇게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도, 얼굴이 달아오르는 일도 이젠 없겠지.
여태까지 그랬던 것처럼, 아가씨가 아닌 그냥 가까운 소꿉친구가 될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니 어쩐지 속이 아려오는 것 같았다.
……대체 난 뭘 하고 싶은 거야?
모르겠어.
……정말로 모르겠어.
그렇게 거의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고 맞이한 아침, 짐을 들고 바깥으로 나오는 중에 메린과 마주쳐버렸다.
평소처럼 한 가닥으로 길게 머리를 땋아내리고,셔츠에 가죽조끼, 그리고 바지를 입은 자유분방한 차림.
잠이 덜 깨서 그런 건지 몰라도, 진짜로 아무 느낌 없었다.
……역시 그건 옷차림 탓이었던 건가?
뜻 모를 무거운 마음을 저 안으로 밀어넣으며, 나는 메린에게 인사를 건넸다.
“……잘 잤냐?”
그러자 그녀가 내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눈썹을 찡그리며 말을 꺼냈다.
“난 되게 잘 잤는데, 넌 엄청 아닌 거 같다. 얼굴이 죽었어, 임마. 출발할 수 있겠냐?”
“……어.”
뭐, 정 안 되겠으면 가다가 쉬면 되지.
크게 하품을 하며 기지개를 켜는데, 갑자기 그녀가 불쑥 내 앞으로 다가왔다.
“야, 진짜 잠 덜 깼구나. 단추 밀려 끼웠네.”
놀랄 틈도 없이,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내 셔츠 단추를 하나 풀고 목깃을 바로잡았다.
그러다 그녀의 손끝이 내 목을 스친 순간,
“……!”
또 다시가슴이 두근거리며, 내게 종말 선고를 내렸다.
‘이미 늦었어.’
더는 모르고 있을 수 없어.
이제 똑바로 볼 때야.
마음속 속삭임을 들으며, 나는 눈을 감았다.
……아아, 진짜로,
망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