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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사는 소꿉친구 검성이 무섭다-123화 (123/475)

〈 123화 〉 121화 : 해바라기의 토로 (2)

* * *

메린과 나는 고향에서 가까이 지내긴 했다.

그건 객관적으로 볼 때 나도 인정한다.

하지만 정말로 그게 다였다.

물론 간식거리를 얻으면 그 녀석도 좋아할 테니 좀 챙겨두기도 하고, 낚시가 잘 돼서 물고기가 잔뜩 잡히면 저녁 같이 먹자고 부르기도 했지.

하지만 그건 그냥…… 가까이 지내니까 그랬을 뿐이다.

먹을 게 생기면 원래 친구랑 나눠 먹는 법이잖아.

밥 같이 먹는 것도, 어렸을 때 우리 부모님이 그 녀석의 교육을 맡은 바람에 거의 일상이나 다름없었고.

……정말로, 그게 다였다.

마티아스는 사뭇 진지한 얼굴로 되물었다.

“여자로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다고? 정말로? 여자 취급한 적도 없고?”

“……여자애인데 당연히 여자 취급했지. 뭔 소리야.”

그래서 메린의 교육이 어느 정도 이뤄지기 전까지는 내가 진짜 돌아버리는 줄 알았다.

누가 보든 말든 호숫가에서 옷을 훌러덩 벗질 않나,

목욕하는 데 불쑥 들어오질 않나,

심지어 우리집에 묵을 때는 다짜고짜 내 침대로 기어들어오기까지 했다!

그래도 뒤의 두 개는 내가 싫어하니까 두 번 다시 안 했는데, 어째서 맨 처음 거는 지금도 안 고쳐지는 건지 진짜 모르겠다.

수치심이라는 감정은 그녀에게 아예 존재하지 않는 건가?

그러나 마티아스가 말한 뜻은 그게 아니었던 모양인지, 그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임마. 연애 대상으로 본 적 없냐고. 팔짱 끼고 산책하며 서로 귓속말 나누고 싶다, 뭐 이런 생각한 적 없냐고.”

“없어.”

내 목을 걸고 말할 수 있다.

메린을 다른 여자애들처럼 본 적은 맹세코 단 한 번도 없다.

물론 그 녀석은 예쁜 편이다. 안 꾸며서 그렇지.

가슴이 작은 것도 아니고, 검술로 몸이 단련되어 있으니까 허리도 늘씬하고.

그 정도면 몸매 좋은 거지.

하지만 녀석은 삐끗하면 사람 조져버릴 수 있고, 실제로 조지기도 한 애다.

또래 남자애들 중 그 녀석에게 맞고 기절 안 한 놈은 하나도 없을걸.

나 포함해서.

메린이 박살낸 건 애들뿐만이 아니다.

설령 어른일지라도 그녀의 힘 앞에선 속수무책이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녀는 어렸을 적에 우리 마을에 온 모험가를 반 죽여놓은 적이 있다.

그 이후에 우리 부모님이 그녀의 교육담당이 됐는데, 어쩌면 그 사건과 관련이 있던 건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녀가 날뛸 때, 옆에서 죽어라 말리고 진정시키는 게 내 역할이었다.

또래아이의 시점에서 마을의 규칙 같은 걸 가르치는 것도 내 일이었고.

그런 내가, 그녀에게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해버린 거다.

그녀가 머리부터 발끝까지 쫙 빼 입은 모습을 보고.

그게 너무나도 충격이었다.

그리고 더 충격인 건, 지금도 그 잔향이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옷 때문인 줄 알았는데 전혀 아니었어. 어제보단 낫긴 한데, 그래도 걔 얼굴 가까이에서 못 보겠고, 손이라도 닿으면 찌릿거려서 돌아버리겠어.”

아침에 그녀가 내 옷차림을 바로잡아줄 때 두근거렸던 건 시작에 불과했다.

빵을 집는 손이 겹칠 때 심장이 찌릿거리고,

내 앞쪽에 놓인 후추통을 그녀가 집어갈 때 눈에 들어온 그녀의 목덜미에 시선이 박혀버리고,

심지어 기지개를 켜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끌어안고 싶다는 충동까지 치밀어 올라왔다.

……그걸 참느라 애쓴 탓에, 하루가 시작한 지 아직 서너 시간밖에 안 됐는데도 피로감이 장난이 아니었다.

“푸핫, 완전 푹 빠졌구만.”

“웃을 일 아니야.”

난 심각해 죽겠는데, 이 아저씨는 뭐가 재미있는지 연신 실실대고 있다.

역시 이게 얼마나 큰 문제인지 모르는 거야.

나는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

“이대론 야영지에서 수프 건네주다 손가락 닿으면 그릇 엎어버릴 거 아냐! 아깝게시리.”

“……그게 문제야?”

“먹을 건 소중히 여겨야 한다고!”

“나 참, 미친놈 아니랄까봐 관점 자체가 다르네.”

말을 쭉 한 탓인지 왠지 모르게 갈증이 밀려와, 나는 눈앞의 술잔을 들고 쭉 들이켰다.

그나마 남아 있던 주저함도 술에 풀려버린 건지, 불쑥 말이 튀어나왔다.

“……마티아스.”

“매트.”

“……뭐요?”

“매트라 부르라고. 술잔 나누고 있잖아.”

……뜬금없네.

좀 황당하긴 하지만, 본인이 그러라고 하니 그냥 어울려주기로 했다.

“매트.”

“왜.”

“……갑자기 이렇게 될 수도 있는 거야?”

화창한 날씨에 산책하다가 갑자기 벼락을 맞으면 이런 기분이 들 거 같아.

메린을 고향에서 데리고 나올 때만 해도, 내가 이럴 줄은 진짜 꿈에도 몰랐다.

이따금 그녀를 보며 속이 간질거리거나 막히는 느낌이 들긴 했지만, 그건…….

잘은 모르겠지만, 사랑스럽게 보이거나 하는 감정과는 동떨어진 것이었는데.

……그랬을 텐데.

“갑자기? 갑자기는 무슨……. 뭐, 그래, 갑자기 그럴 수 있지. 한눈에 반한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잖아.”

웃음 섞인 목소리로, 마티아스는 말을 이었다.

“여태껏 보지 못한 만큼, 그 아가씨가 여자로 보인 거에 대한 충격도, 그 효과도 큰 거겠지. 너 여자 경험 별로 없지, 안 그래? 그럼 내성도 없을 테니 더 그러겠지.”

“……하아………….”

다시 카운터에 엎드렸다.

옆에서 마티아스가 무어라 중얼거린 것 같았지만, 한숨을 쉬는 소리에 묻혀서 들리지 않았다.

“말이 되냐고. 하……. 계속 같이 다녀야 되는데. 게다가 하필 나 같은 놈이 그러면 안 되는데…….”

꿍얼거리는 내 뒤통수가 갑자기 뜨거워지면서 눈앞이 번쩍였다!

곧바로 뚱한 얼굴로 나를 보는 범인 놈에게 버럭 외쳤다.

“왜 때려?!”

“네 사고방식이 글러먹어서 쳤다. 불만이냐?”

그렇게 말하는 마티아스의 표정은 무척 진지했다.

“갑자기 알게 돼서 혼란스러운 건 이해해. 근데 뭐? 안 돼?

네가 연정을 품으면 왜 안 돼? 네가 뭐 교단의 성자라도 되냐? 아니면 뭐, 그 아가씨랑 신분차이라도 나? 똑같은 시골 평민끼리 안 될 게 어딨어?”

“……난 자격이 없잖아. 어울리지도 않고.”

“이건 또 뭔 소리야, 네가 뭐 어때서? 아, 뭐, 네가 좀 많이 미친놈이긴 해. 근데 그건 이거와는 전혀 상관없잖아.”

뒷말이 더럽게 거슬렸지만, 지금 그게 중요한 건 아니니 관대히 넘어가기로 했다.

“……봐서 알잖아. 당신 말마따나 비리비리하다고. 지금은 희한하게 그런 낌새가 없지만, 원래는 조금만 무리하면 다음날 반나절은 그냥 날렸어. 이건 뭘 해도 나아지질 않았고.”

누구에게도 말한 적 없지만, 그렇게 앓으며 누워 있을 때마다 내심 생각했다.

나, 진짜로 제 명대로 못 사는 게 아닐까, 하고.

……실제로 지난 겨울에는 진짜 죽을 뻔했고.

그러니 마을 어른들이 우리에게 그런 기대를 하지 않았던 거겠지.

언젠가,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마을 사람도 그랬었다.

­­저 둘? 말도 안 돼. 에스트렐 씨네 꼬맹이 녀석이 오래 못 갈걸.

……그건 그 사람 한 명만의 생각이 아니었을 거다.

혹시 마을 사람들이 메린을 촌장님 아들 새끼와 결혼시키려 한 것도 그런 이유가 아니었을까?

그런 놈이 다른 누군가에게 연정을 품어도 될 리가 없다.

게다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메린에게 그런 마음을 품는다니 정말 안 될 일이지.

“……그러면 꼭, 흑심이 있어서 이때까지 돌본 것 같잖아. 그런 거 아닌데.”

빠악!

……뒤통수에 한 대 더 맞았다.

이전 것보다 훨씬 더 아팠지만, 나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옆자리 친구의 분노 섞인 목소리를 들었다.

“네가 허약해서 오래 못 사니 누굴 품으면 안 된다고? 그럼 이 자식아, 나나 다른 놈들은 뭔데? 애들만 남기고 죽은 부모들은?

네 말마따나 몇 년 못 사는 게 정을 통할 자격이 없는 거면,이 왕국엔 전부 자격 없는 놈밖에 없어!지금 이 시대에 늙어 죽는 사람이 얼마나 된다고 그딴 소리를 지껄여?!”

지금도 어디서 누군가는 몬스터의 뱃속에 들어가고 있을 것이다.

누군가는 병상에서 숨을 거두고 있겠지.

펜허스트 백작의 부하 중 일부는 모이트에 묻혔으리라.

어쩌면 그 자신도, 오늘밤에 갑자기 죽을지도 모른다.

제 명대로 살지 못하는 게 당연한 시대인 것이다.

마티아스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그래도 난 후회 없어. 아내를 안고 자식을 얻은 것에 일말의 후회도 없다고. 넌 그저 스스로에게 자신이 없을 뿐이야. 그걸 감추려고 핑계를 치고 있는 거지! 네 그 알량한 핑계 때문에 내 인생을 욕보이지 마라.”

“……”

“그래, 너 약해. 푹 삶은 시금치처럼 흐느적거리지. 근데 그게 뭐? 그 아가씨 눈엔 다 똑같을 거 아냐. 임마, 나도 쪽도 못 쓰고 당했어.그 아가씨가 보기엔 너나 나나 똑같은 비실이라고.

아니면 뭐, 그 아가씨가 너한테 비실대서 싫다고 한 적 있냐?”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보니 그 녀석은 단 한 번도 나를 싫어한다고 한 적이 없다.

잔소리에 짜증을 내고 화를 낸 적은 많다.

바닥에 패대기쳐지거나 막대기로 맞은 적도 많고.

하지만 아무리 화가 났더라도, 나를 싫어한다는 말을 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럼 아무 문제없네.”

“아냐……. 있어. 있다고……. 큰 문제라고……. 계속 같이 다닌다고 했잖아. 내가 미쳐서 일 저지르면 어떡해.”

“네가? 하하, 그거야말로 말이 안 되지.”

진짜 우스운 이야기를 들었다는 듯이 웃는 마티아스를 보자, 왠지 속에서 울컥 솟아올랐다.

“……아~ 내가 쫄보라서 손도 못 댈 거다?”

“아니, 넌 술에 떡이 돼도 손 안 댈 놈이야. 자격 어쩌고 하며 헛소리하는 놈이 함부로 손을 댈 리가 없지. 넌 그렇게 되기 전에 바닥에 머리 박고 기절할 게 뻔해, 이 미친놈아.”

“……”

오히려 저쪽이 널 덮치는 게 더 빠르겠다, 그는 코웃음치며 말한 후 술잔을 기울였다.

“문제는 딱 하나야. 네 그 글러먹은 정신머리. 하…… 생긴 건 정말 멀쩡하고 순한데, 왜 알맹이는 맛이 갔을까? 너무 병약해서 그런가? 근데 또 용사란 말이지. 하…….”

……듣자 듣자 하니까 웃기네.

내 정신이 뭐 어떻다고?

왜 이 아저씨도 그렇고, 딴 사람들도 그렇고, 죄다 날 미친놈이라고 하는 거야?

아니, 나처럼 정신 멀쩡한 놈이 또 어디 있다고!

“아, 내 정신이 뭐. 지금 그 녀석 때문에 좀 이상한 건 나도 아는데, 그거 아니면 난 지극히 상식적이고 평범하다고.”

“상식 다 죽었냐? 절대 아니니까 어디 가서 그런 소리하지 마라.”

“……”

이 사람은 내가 뭘 어쨌길래 이렇게까지 날 미친놈 취급하는 걸까?

혹시 그때 밧줄로 묶은 것 때문에 아직도 토라져 있는 걸까?

그땐 나쁜 놈인지 아닌지 분명하지 않으니까 어쩔 수 없었던 건데.

하아…….

상식적으로 행동해도, 그게 상대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미친 짓이 되는구나.

슬프기 그지없다.

잠시 이야기가 끊기고, 술을 목 너머로 삼키는 소리만이 홀 안에 울렸다.

조용히 잔을 내려놓으며, 나는 중얼거리듯이 말을 꺼냈다.

“……이제 어째야 되는 거야?”

“그건 네가 결정해야지.”

“……”

옐리카는 말했다.

그 사람에 대한 내 감정을 확실히 정하라고.

피터 왕자는 무슨 감정을 느끼든 부정하지 말라고 했다.

포기하거나 밀어붙이는 것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고도 했지.

파랑새는 지 혼자 빡쳐서는, 나에게 영혼을 기만하지 말라며 왕자와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이 친구는, 내가 메린을 여자로 보는 게 무슨 문제냐며 일축해버렸다.

굳이 꼽자면 내 자격지심이 문제라고, 그는 내 뒤통수를 후려갈기며 일갈했다.

근데 있잖아.

만약……

정말 만약에 내가 메린과 그런 사이가 된다고 해도, 지금 이 상황에서 그래도 되는 건 아니잖아?

내가 지금 견문 넓히려고 여행하는 거면 또 몰라.

그러니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이 감정을 빨리 놓아야 할 것이다.

왕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포기하는 게 맞는 거겠지.

……하지만 어떻게?

어떻게 해야 감정을 포기할 수 있는 거야?

감정도 포기가 되는 거야?

매일 그녀와 얼굴을 마주하고 있는데, 애초에 그게 가능하긴 한 거야?

“하아………….”

“그래, 고민해. 죽을 힘을 다해 고민해라.”

도로 엎드린 내 어깨를 두드리는 마티아스에게, 나는 문득 떠오른 질문을 던졌다.

“……근데 당신, 처자식이 있다고? 나랑 나이 차이 별로 안 나지 않아?”

“내 나이가 스물 셋인데 당연히 있지. 열 여섯 살 때 약혼하고, 성인 되자마자 결혼했단다. 무려 아이가 둘이나 있는 아버지란다, 얘야.”

아니 뭔 약혼을 그렇게 빨리……

……아, 맞다.

이 사람 귀족이지.

하도 편하게 이야기해서 잠시 깜빡하고 말았다.

그나저나 스물 셋이라니, 세상에…….

“우와…… 서른인 줄 알았는데……. 수염 좀 깎으세요, 아버님. 그러고 있으니까 진짜 나이 들어 보입니다. 딴 사람이 보면 당신이 내 아버지인 줄 알겠어요.”

나는 진심을 담아 충고해주었고,

“……”

딱!

애 둘이나 있는 아버님은, 곧바로 빈 술잔을 들어 내 머리를 두드려버렸다.

머릿속에 뒤얽힌 상념들을 단숨에 치워버릴 정도로 경쾌한 울림이 아닐 수 없었다.

“아으으…….”

“하…… 진짜 이 놈이 왜 용사일까…….”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마티아스는 건조한 눈으로 나를 보았다.

고통 어린 신음과, 한탄 섞인 한숨이 고요한 여관의 홀 안에 은은히 퍼졌다.

그 소리가 어디까지 흘러갈 수 있었는지는 모른다.

아마 카운터에서 묵묵히 술잔 닦고 있는 여관 주인도 모르겠지.

적어도 내 머릿속에서는 끊임없이 울리고 있다.

……죽을 힘을 다해 고민하라.

그저 그 한 마디가 계속,

메아리처럼 울리고 있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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