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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사는 소꿉친구 검성이 무섭다-124화 (124/475)

〈 124화 〉 외전 2) 매여 있는 것 (Side : Witson) (1)

* * *

※ 105화 시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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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웅­투웅­

돌계단을 막 밟을 때의 툭, 소리가 사방에 퍼지면서, 전혀 다른 소리로 변한 채 암흑 속에 가라앉는다.

저 어두움 끝에서 이 소리를 듣는다면, 이게 발소리일 거라고는 도무지 예상도 못하겠지.

의지가 담기지 않은 발소리마저 스스로 변형되어 본질과 멀어진다.

그러니 의지를 담은 소리, 사람의 입을 타고 퍼지는 이야기가 본질을 완전히 비틀어버릴 수 있는 것도 당연할 것이다.

그 역시 마법이 아닐까?

위슨은 자신의 눈만큼이나 검은 어둠을 내려다보며 생각했다.

­아직도 마음에 두고 있구나.

머릿속에서 울리는 그 목소리에, 그는 조용히 동의의 뜻을 전했다.

그는 여전히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다.

이곳, 말리스라는 도시로 자신들을 이끈 그 아지트에서 맞닥뜨렸던 밀수꾼들의 시선.

대담을 마친 후, 조사 겸 밀수꾼들을 연행하러 온 병사들의 시선.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두려움에 가득 찬 시선을 받는 건 생전 처음인데.

그와 동시에 우습기도 했다.

‘그 놈들 앞에선 아무것도 안 했는데도 무서워했어.’

밀수꾼들 앞에서 무언가 한 기억은 전혀 없다.

다른 일행들이 마을로 뛰어드는 동안, 그는 겁탈당할 뻔했던 여자를 보호하느라 바깥에 남았었으니까.

아마 그 여자가 나중에 밀수꾼들에게 전한 것이리라.

그저 병에서 짐승을 꺼냈다고 두려워하다니.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오히려 아이들에게 들은 이야기가 더 충격이었다.

마녀는 아이를 납치해선 머리부터 와작와작 씹어먹는다더라,

피로 목욕한다더라,

매일 밤 악마와 춤을 추며 그 씨를 뱃속에 받는다더라…….

제대로 뜻도 모를 말들을 마구 쏟아내는 모습에 어지럽기까지 할 정도였다.

……그렇게 작은 일로 두려워하는 것, 그리고 그런 허황된 이야기가 마구 퍼져 있는 것이 의미하는 건 분명하다.

‘그만큼 마녀를 무서워한다는 거겠지.’

그 이유는 이미 들어서 알고 있다.

섬을 떠나기로 결심한 그에게, 새 수장이 된 마일린…… 네이멜이 이야기해준 것이다.

마녀들이 백여 년간 대륙에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를.

­­그러니 알아두렴. 너는 환영받지 못할 거란다.

……각오했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머리로만 알고 있는 것과 직접 경험하는 건 차원이 다른 모양이었다.

“계약자여.”

다리를 툭 치는 느낌에 시선을 돌리니, 한두 걸음 앞서 가던 플레마가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

어느새 발걸음이 멈춰져 있었던 모양이다.

‘괜찮아.’

생각으로 그에게 의사를 전달하며, 위슨은 웃으며 그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비록 세간의 취급은 나쁠지라도, 그는 이런 힘을 가진 것에 불만은 없다.

그가 지금 내려가고 있는 이 계단에는 그 흔한 횃불 하나 꽂혀 있지 않다.

몸을 지탱할 난간도 없으니, 발이 미끄러지면 그날로 그의 존재는 이 깊은 어둠 속에 삼켜질 터.

그런데도 두 손에 등불 하나 들지 않은 그가 잡생각을 하면서 내려갈 수 있는 건,

그가 계약한 불의 정령, 플레마가 주위를 환히 밝히고 있는 덕분이다.

설사 발이 미끄러져 떨어지더라도 물의 정령, 아쿠아가 그의 생명을 보호하겠지.

그러니 이 힘은 나쁘지 않다.

그가 태생적으로 가진 이 힘……

마법은 나쁘지 않은 것이다.

­그대를 이리 만든 건 마녀임에도 원망하지 않는다? 그대의 영혼도 과연 그리 여길까?

‘나쁜 건 마녀이지, 힘이 아니야.’

물론 이렇게 생각할 수 있는 건, 그를 납치했던 마녀가 특이했기 때문일 것이다.

다른 마녀들이 모두 마법의 재능 때문에 아이들을 납치한 반면, 그 미친 마녀는 순전히 태생 때문에 그를 노렸으니까.

……그래, 나쁜 건 마녀이다.

그의 목을 태우고, 저주를 건 것은 마녀이지 마법이 아니다.

지하에 처박아서 살게 한 건, 해가 지기 전에 돌아가지 않으면 두들겨 팬 건, 정령과 놀았다고 하는 그를 위협한 건 그 마녀인 것이다.

남성으로 태어난 그를 부정하며 여성으로 만들려 한 건 그 미친 마녀,

원망스럽고 구역질 나게 끔찍하며 불쌍한 폴리의 죄인 것이다.

“……”

그 마녀의 죄는 깊다.

그의 부모를 죽여 그 피를 땅에 흘린 죄는, 마녀 자신의 피를 흘리는 걸로 갚을 수밖에 없으리라.

그러니 그 마녀는 죽어 마땅했으며, 그를 처형해야 할 사람은 당연히 위슨, 그가 되었어야 했을 텐데.

­­똑똑히 보고 기억해! 이 마녀를 죽인 건 위슨 네가 아니라 바로 나야!

그러나 그 역할을 보란듯이 빼앗겨버렸다.

……아니, 용사가 빼앗도록 내버려두고 말았다.

그 바로 직전까지 들끓는 감정에 맡겨 갈기갈기 찢어버리려 했었는데, 용사가 붙잡아버린 탓에 때를 놓치고 말았다.

마음에 쌓았던 분노를 다 쏟아냈더니, 깊숙이 숨어 있던 연민이 나타나버린 것이다.

그 미친 마녀는 정말 끔찍했지만, 이따금 무척이나 안쓰러웠다.

술에 취한 건지 달빛에 취한 건지, 그 마녀는 이따금 밤에 자신을 찾아와서는 엉엉 울며 중얼거렸다.

왜 나를 버렸느냐, 당신이 너무 보고 싶다, 아가야 미안하다……

위슨의 잠을 깨웠다고 격분하며, 마구 매도하는 에코에게도 엎드려 빌기까지 했던가.

그야말로 제정신을 놓은 사람의 모습이었지만……

위슨은 그 모습이 안타까워서, 마녀가 진정될 때까지 밤새 토닥이곤 했다.

……아마 그 작은 연민이, 그 자신도 모르게 마음에 쌓이면서 뒤엉켜버린 것이리라.

그 마녀도, 섬도 전부 다 부숴버리고 싶은 마음을 부정하는 동시에, 그 마녀를 보살피며 따르고 싶다는 마음도 부정하게 될 만큼.

그래서 그는 떠나지도, 그렇다고 곱게 앉아 있을 수도 없었다.

그 어느 쪽 마음에도 온전히 따르지 못한 채 갈팡질팡했다.

그 탓에 제 손으로 온전히 복수할 수 없었다.

마땅히 행했어야 할 처형을, 애매하게 끝내버렸다.

……아무 상관없는 용사에게 그 짐을 떠맡기고 말았다.

­그리고 그 중에 가장 속앓이를 한 건 바로 나일 게다.

머릿속에서 투덜거리는 에코에게, 그는 쓴웃음을 던졌다.

‘그 일은 미안하다고 했잖아.’

­지금도 이어지고 있고.

지금?

계단을 내려가던 발이 살짝 멈추었다.

위슨은 이제 소리의 정령이 싫어하는 일, 자신의 마음을 부정하는 짓은 하지 않고 있다.

그러니 에코가 속앓이를 할 일은 더 없을 텐데.

­그 자.

아하, 용사인가.

그는 피식 웃으며 다시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건 내가 미안할 게 아닌데?’

­그대가 그 자를 따르기로 하여 생긴 결과이니, 그대의 책임이 아닌가.

하지만 그건 어쩔 수 없었다.

그때 자신을 말리던 용사에게 말했던 것처럼, 지금이 섬 밖을 나가기엔 가장 알맞은 때였으니까.

실제로 그는 자신의 선택이 무척 만족스러웠다.

종류가 한정적이긴 해도 물약 실험도 할 수 있는데다 바깥 구경도 할 수 있고, 시험해보지 않은 부적과 마법도구도 써볼 수 있게 된 것이다.

물론 연구 자체는 섬에서도 할 수 있겠지만, 실전과 실험 없이 이론만으로는 발전할 수 없는 법이다.

뭣보다도, 이렇게 함께 다니는 중에 목을 고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뭐…… 그건 시작에 불과하지만.’

용사의 조언대로 에코의 목소리를 조정할 때, 그는 용사에게 물었었다.

남자로 보이지 않는 게 정말 목소리 때문이냐, 목소리만 고치면 되는 거냐고 진지하게 묻는 그를 향해, 용사는 굉장히 난감해하면서도 솔직하게 답해주었다.

­­입을 가려서 그런가? 딱 봤을 때 느낌이 뭔가 미묘해. 몸도 너무 가늘고.

너 그 외투 벗고 뒤에서 보잖아? 진짜 헷갈려. 어깨선도 그렇고…….

­­……

­­아니 솔직하게 말해달라며! 이 새끼들아, 그딴 눈으로 보지 마!!

……용사의 억울한 외침이 울리는 걸로 끝났긴 하지만, 위슨은 그 일로 깨달았다.

그 미친 마녀가 남긴 상흔이 목에만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설령 목을 고치고 입을 드러내더라도, 목소리를 내지 않는 한 그의 성별은 항상 의심받을 것이란 사실을.

설마 마녀가 십여 년간 먹인 그 물약이, 진짜로 효과를 나타내고 있었을 줄이야.

이것은 천 년 이상을 살아온 그 대현자도 몰랐을 것이다.

‘뭐, 이론상 가능하긴 하지.’

마법, 즉 마력을 움직여 현상을 일으키는 원동력은, 마법을 시전하는 자의 소망이다.

즉,간절히 원하기만 한다면 무엇이든 이룰 수 있다.

손끝에서 불꽃을 내는 건 물론, 공간을 이동하고 다른 사람의 의식까지 빼앗을 수 있을 뿐 아니라, 하늘을 덮어 밤처럼 만들 수도 있다.

그러니 한 사람의 성별을 바꾸는 것이 불가능할 리가 없다.

그저 그 뜻을 이루기까지의 시간이 오래 걸릴 뿐.

‘물약 형태로 마법을 담을 수 있을 줄은 아무도 몰랐을 거야.’

­흥, 그야말로 미친 자만이 이룰 수 있는 업적이지.

위슨은 동의한다는 듯이, 소리없는 헛웃음을 켰다.

악마를 물리친 후, 그는 집 터에서 그 미친 마녀의 일지를 찾았다.

거기서 알게 된 건, 그 마녀가 매일같이 먹였던 물약이 ‘페로몬 물약’이라는 것이었다는 사실이었다.

그때, 마녀가 괜히 암컷 냄새 어쩌고 하면서 먹인 게 아니었다며 얼마나 기가 막혀 했던가.

……그러나, 실상은 기가 막히는 걸 너머 정신이 아득해질 정도로 충격이었다.

물약에 담긴 마법이, 그의 몸을 점점 여자로 변화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그 마녀가 계속 그 물약을 먹인 건, 단순히 다른 마녀들을 속이기 위한 게 아니라……

‘……아니. 그건 아니야.’

그는 홀로 고개를 저었다.

아마 그 미친 마녀는 정말 단순히, 그냥 속임수를 위한 것이었으리라.

물약으로 몸에서 인간 여성의 고유 향내를 내게 하는 것도 어려울 텐데, 아예 몸을 변화시킨다니.

미친 사람이 그런 고도의 연구를 할 수 있을 리가 없지.

이건 그 마녀조차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을 거다.

“……”

그나마 몸의 선이 약간 변한 정도로 그친 건, 마녀들이 물약의 형태로 마법을 담을 수 있다는 사실 자체를 몰랐던 덕분이리라.

만약 알았다면, 위슨은 스스로가 남자라는 걸 깨닫기 전에 완전히 여자가 되어 있었겠지.

마녀의 무의식에 흘러 넘치던‘위슨이 여자가 됐으면 좋겠다’는소망이 아주 약간 물약에 섞인 정도라서, 그 영향도 적었던 모양이다.

그러니 목을 고친다면, 그 다음은 몸을 돌려놔야 한다.

어느 정도로 뒤틀렸는지를 먼저 알아야 하겠지만, 아무튼 그는 이 여행이 끝나더라도 심심할 일은 없을 듯했다.

“계약자여, 그대가 타인의 시선을 그리 개의하는 줄은 몰랐구려. 혹은 그에 연연하는 별난 연유가 있소?”

천천히 앞서 가고 있는 플레마의 물음에, 위슨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 마녀의 흔적을 다 지워버리고 싶어.’

책과 같은 물건들은 죄다 태웠으니, 손이 닿는 흔적들은 죄다 없애버린 줄 알았다.

목의 상처는 그가 어떻게 할 수 없겠지만, 몸에 걸린 마법은 그의 힘으로 없앨 수 있겠지.

눈에 보이는 흔적들은 하나도 남김없이 다 없애야 한다.

그 마녀를 되새길 흔적을 가능한 없애야, 기억 위에 쌓일 세월의 무게가 더 가벼워질 테니까.

­그 뿐인가?

조용히, 에코가 묻는다.

단지 그 이유뿐이냐고.

……목소리를 낼 수 없는 그를 대신하기 위해, 그의 영혼에 찰싹 달라붙은 소리의 정령은, 절대로 속일 수 없다.

‘태어난 그대로의 내 모습이 어떨지 궁금해.’

그 마녀는 분명, 단순히 위슨이 여자가 되길 바란 게 아닐 것이다.

마음속에 ‘이상적인 딸’의 모습을 그리고 품어왔을지도 모른다.

그 소망 역시 물약에 담겼을지 누가 알겠는가?

어쩌면 검은 머리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얼굴이 좀더 길쭉했을지도, 아니면 아예 두꺼비를 닮은 얼굴이었을지도 몰라.

그게 어떠한 형태이든, 그게 바로 ‘위슨’이라는 존재가 가지도록 정해진 본연의 모습일 터.

그를 직접 확인하길 원하는 건, 지성체로서 당연한 게 아닐까?

“흐음, 그게 그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다시 바꾸면 되지!’

그는 유쾌하게 웃었다.

확인하고 싶다고 했지, 그대로 살고 싶다고는 안 했다.

­그전에 그 자를 정직하게 만드는 물약부터 찾거라. 자백제라는 걸 먹이거나.

‘안 돼. 자백제는 너무 위험해. 설령 잘 되더라도 나중에 잔소리 엄청 먹을 거야. 그 형 잔소리 엄청 긴 거 알잖아. 차라리 술을 먹이면 몰라.’

­그럼 이 일을 마치면 그 술이라는 걸 그 자에게 먹여라. 그러하지 않으면 조만간 내가 참지 못하리라.

되돌아온 에코의 목소리엔 미세하긴 해도 분노가 어려 있었다.

짜증은 내더라도 좀처럼 화를 품지 않는 그가 분노하다니, 이례적인 일이다.

위슨은 잠시 걸음을 멈춘 채, 놀란 눈을 깜빡였다.

‘그 정도로 심해?’

­의식적으로 부정한 건 단 한 번이나, 무의식적으로는 이미 세는 걸 포기했다. 그 자는 생각이 피어나기 전에, 무의식적으로 그 싹을 짓밟아 없애고 있다. 용납할 수 없는 폭거야.

‘무의식…… 메린 씨에 대해?

­그래.

소리의 정령인 에코에겐 사람의 마음속 소리가 들린다.

의식적으로 떠올리는 생각이건, 무의식에 스쳐 지나가는 사념이건, 이 정령에게는 모두 들리는 것이다.

그러니 그 생각들을 부정하고 없애는 것에 화를 내는 것도 당연하다.

그건 에코 그 자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나 다름없으니까.

물론 그 역시 알고 있다.

인간을 비롯한, 육신을 가진 지성체는 이따금 제 목적을 위해 영혼을 외면한다는 것을.

그러니 불쾌하기는 해도, 그 역시 어쩔 수 없는 섭리라며 체념하고 있을 터인데.

그런 그가 용사에 대해 분노를 품고 있다.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을 해내다니, 역시 그는 용사가 맞다.

……연정을 부정하며 이루었다는 게 좀 그렇지만.

위슨은 쓴웃음을 지으며 걸음을 이었다.

‘그 형, 무의식적으로 없애고 있어서 그게 되는 거구나.’

­흐음?

‘끌어안거나, 마차에 나란히 앉아 가면서 어깨를 감싸는 거. 남녀 사이에 아무 생각없이 그러는 건 힘들거든.’

남매 같은 사이라면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위슨이 목격했던, 여관 복도에서 포옹하던 그 모습에선 우정이나 친애의 분위기를 전혀 느낄 수 없었다.

최소한 용사 쪽은, 그 무시무시한 검사에게 특별한 감정이 있는 게 분명하다.

‘그렇구나. 무의식…….’

용사가 무의식적으로 그 감정을 눌러버리고 있는 거라면, 그 무의식을 깨부술 만큼 큰 충격이 필요할 터.

드레스를 골라야 한다는 말에 사제가 굉장히 강한 의욕을 보이며 검사를 끌고 간 건, 용사에게 그런 충격을 주려는 의도인 걸까?

‘근데 사제님은 왜 그 둘 사이에 끼어드는 거지?’

­그대가 원한다면 들려줄 수 있다.

‘음…… 아니야. 이런 건 직접 물어봐야지.’

남의 속마음을 함부로 들으면 안 되지.

용사의 목소리로 울리는 그 생각에 또 다시 웃음 지으며, 그는 계속 걸었다.

‘겨우 끝이네.’

심연까지 이어질 것 같은 긴긴 계단이 끝나고, 마침내 평탄한 길이 나타났다.

정말로 빛 한 줄기 허락하지 않겠다는 철저함이 느껴진다.

그는 이곳을 만든 주인의 얼굴을 떠올리며 고개를 저었다.

계단에서 이어지는 길에도 역시 횃불 하나 달려 있지 않았다.

플레마가 밝혀주는 길을 따라, 그는 거침없이 성큼성큼 앞으로 나아갔다.

얼마 걷지 않아, 돌로 된 벽과 바닥 이외에 다른 것이 보이기 시작했다.

얼음처럼 싸늘하게 식은 쇠창살로 이루어진 방들과 그 안에서 썩어가고 있는 뼈들.

또는 아직 뼈가 되지 않은 살덩어리들.

썩기 시작한 게 없는 걸 보면, 이 감옥은 그리 자주 사용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렇다. 그는 지금 감옥 안을 걷고 있었다.

그것도 그를 포함한 용사 일행이 머무는 대저택의 주인, 옐리카 바실리예프가 직접 고안해서 만든 감옥이다.

안내역도 마다하고 그가 홀로 이곳에 내려온 이유는 단 하나, 용사에게 약속한 비밀병기를 마련하기 위함이다.

“……호흡이 들리오.”

나지막이 중얼거리며, 플레마는 불의 밝기를 약간 낮추었다.

목표한 곳에 거의 다 왔다는 뜻이겠지.

이윽고 플레마의 걸음이 어느 창살 앞에 멈추었고, 위슨 역시 그 옆에 나란히 서서 창살 안을 바라보았다.

“……윽…… 콜록콜록…… 뭐야……?”

별안간 비추인 불빛에 신음하며, 창살 속 거주민은 몸을 꿈틀거렸다.

먼지와 습기로 엉망이 된 모습을 무던히 바라보며, 위슨은 에코의 목소리를 빌어 말을 걸었다.

‘안녕, 엘프. 몸은 좀 어때?’

“아직 숨통 안 끊어졌냐, 귀쟁아? 존나 살 만한가보네.”

가시 돋힌 말에 엘프가 홱 고개를 돌리며 얼굴을 구기는 모습에, 그는 쓴웃음을 지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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