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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사는 소꿉친구 검성이 무섭다-126화 (126/475)

〈 126화 〉 122화 : 서쪽 끝, 마지막 왕국령 (1)

* * *

몇 시인지는 몰라도 아무튼 밤인 건 확실한 시간, 나는 천막에 누운 채 바깥의 모닥불 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었다.

타닥, 타닥하는 소리에 섞여, 이따금 파스삭, 하고 장작을 뒤적이는 소리도 들린다.

오늘은 그 두 가지만 들리는 걸 보니, 위슨 녀석이 물약 실험을 안 하는 모양이다.

“……”

타닥, 타다닥.

빨리 자라며 모닥불이 채근거리고, 내 몸도 일할 시간 끝났으니 쉬게 해달라며 마구 눈꺼풀을 누르고 있다.

그 뜻을 따라 눈을 감아보았지만, 얼마 안 있어 도로 확 뜨였다.

아까부터 이 반복이다.

“하…….”

천막 바깥으로 새어나갈까 싶어, 한숨의 대부분은 속으로 돌려보내고 남은 찌꺼기만 조용히 내뱉었다.

이것도 몇 번째 한숨인지 모른다는 이 상황에, 나도 모르게 또 한 번 한숨이 나왔다.

돌겠네, 진짜.

졸려 죽겠는데.

자야 되는데.

자려면 눈을 감아야 한다.

근데 눈을 감으면, 시야가 어두워지면서 떠올라버린다.

……그녀가 붉은 드레스를 입고 환히 웃던 모습,

달빛을 받으며 난간에 기대고 있던 모습.

……그녀의 손끝이 내 목을 스치던 느낌,

내 등을 털어준 후 지나칠 때 슬며시 코끝을 스치고 간 라벤더 향기,

재료 뭐 넣었냐며 그녀가 솥을 들여다보는 바람에 눈길이 잡혀버린 뒷목,

입가에 스튜 묻었길래 별 생각없이 닦아주다가 자연스럽게 건드려버린 입술의 감촉.

“…………….”

담요를 구겨 얼굴을 누르며 크게 소리질렀다.

왜 쓸데없이 그딴 걸 다 기억하고 있는 거야?

내가 이렇게 기억력이 좋은 줄은 진짜 몰랐네!

그나마 다행인 건, 스튜 그릇을 건네다가 손가락이 맞닿는 일은 없었다는 것이다.

애꿎은 음식까지 낭비했으면 더욱 더 처참했을 텐데 진짜 다행이지.

……아니, 지금도 충분히 처참한가?

파티 때보다는 덜해도, 기습적으로 홱 눈길이 사로잡히면서 지랄 발작하고 있잖아.

근데 웃긴 건, 낮에는 길을 가느라 바빠서 그런지, 별 의식을 안 했다는 것이다.

잠시 쉬는 동안, 여름 햇살이 따뜻하길래 누워서 졸았는데, 다시 출발하기 전에 메린이 내 등을 털어주었다.

그때는 별 생각없었으면서, 왜 이제 와서 그때 느낀 향기가 떠오르는 거야?

낮에는 가만히 있다가, 밤이 되니까 한꺼번에 상념이 몰아쳐온다.

무슨 빗물 새는 방에 통 뒀다가 비우는 것도 아니고, 이게 뭐 하는 짓이야?

나 스스로도 어처구니없어서 헛웃음이 다 나온다.

그래서 눈을 감을 수가 없었다.

이렇게 눈을 뜨고 있어도 그녀에 대한 생각이 계속 떠오르긴 하지만, 눈 감고 떠올리는 것보단 덜 심하니까.

……어쨌든 잠을 못 잔다는 건 똑같지만.

“……”

어젯밤은 그 파티가 있던 당일이었으니까, 그래서 아직 기억이 생생하니까 그런 거라고 생각했다.

근데 오늘은 이틀째잖아.

왜 여전히 잠에 못 드는 거야?

왜 아직도 그 일이 떠오르는 거야!

떠올리지 마!

“하……”

찌그러뜨릴 기세로 구겼던 담요를 조용히 펴서 다시 덮고, 똑바로 누운 채로 천막의 천장을 바라보았다.

바깥에선 여전히 장작이 타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온다.

타닥거리는 그 소리를 듣고 있으니, 어쩐지 소란스럽던 마음이 점차 잠잠해지는 듯했다.

“……”

진짜 반해버렸구나.

진짜로, 메린을 한 여자로서 좋아하게 된 거야.

어제까지는 내가 그런 생각을 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나 스스로가 무너지는 것 같은 충격이었는데.

이틀째 이러고 있어서 그런지, 이제는 그냥 덤덤한 사실처럼 느끼고 있다.

……어쩌면 아침에 머리 맞아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마티아스 그 인간, 좀 놀렸다고 술잔으로 때리고 말야.

혹 났잖아.

“……”

좋아한다……

내가, 메린을…….

어젯밤부터 그랬으니, 이제 이틀째인가?

왠지 아닌 것 같기도 하고…….

……근데 좋아하면 원래 다 이런가?

원래 잠도 못 잘 만큼 계속 생각나고, 그때마다 열이 오르는 거야?

달리 경험해본 적은 당연히 없고, 다른 누군가의 경험을 들어본 적도 없으니 알 수가 있어야지.

이야기책에도 이런 내용은 써 있지 않았다.

다들 첫눈에 반했다며 곧바로 사랑 고백하면서 입 맞추고, 그 다음 줄에선 결혼하고 있더라.

오히려 드래곤이나 다른 적과 싸우는 내용이 열 배는 더 길다.

로맨스를 다룬 책에선……

사랑한다는 걸 깨닫자마자 방에 쳐들어가던가?

그리고 다음날 아침에 둘이서 도망가더라.

어쨌든 거기 나오는 주인공들 중에 잠을 못 이룬 사람은 없었다.

여주인공들은 잠 못 이루는 밤을 여럿 보냈다며 고백하긴 했지만.

근데 난 남자잖아.

혹시 내가 이상한 건가?

“……고백…….”

……나 역시, 그녀에게 말해야 하는 걸까?

좋아한다고?

그런 감정을 그녀가알고있을까?

애정행각을 벌이는 남녀를 보면서도 하품이나 하는 애가?

“……”

물론 그녀는 남녀 관계에 대한 건 알고 있다.

그러니 마을 사람들이 결혼시키려 한다며 울적해했지.

……그러고보니 그때 메린 녀석,

내가 홧김에 내지른 청혼을 듣고,

몬스터들을 향해 돌진했었지.

나중에 왜 그랬냐고 물어봤더니 뭐랬더라?

화가 났던 거 같다고 그랬던가?

그건……

……전혀 생각도 안 드는 놈이 그런 말을 해서, 그랬던 게 아닐까?

그래, 그녀가 그런 마음이 들 리가 없지.

그녀와 가까이 지낸 지 십 년이 조금 넘은 건 이유가 안 된다.

어렸을 때부터 보고 자란 게 문제가 된다면, 우리 마을 같은 깡촌은 옛적에 멸망했을걸.

……진짜 문제는 따로 있지.

그녀에게 어떤 꼴을 보였는데.

메린은 어렸을 때부터, 내가 아플 때마다 간병했다.

당연히 얌전히 기침만 콜록거리진 않았다.

속 게워내는 건 기본이었지.

그뿐인가?

몸이 좀 좋아지기 전엔, 길게는 한 달을 누워 있기도 했다.

그만큼이나 침대에 사는 애를 돌보는 거다.

몸을 닦아준다는 걸 싫다고 발악하며 아웅다웅하는 건 귀여운 수준이지.

……그래, 정말로 못 볼 꼴은 다 보였다.

그런 놈이자신을 진심으로 여자로 본다고는 걸 알면,

그녀가 어떻게 할 것 같아?

타닥이는 소리에 맞추어 들리던 속삭임은 거기서 끊어졌다.

생각을 굴리던 내 머리가 멍해진 탓이다.

그녀가,어떻게 할 것 같냐고……?

어떻게……?

그야…… 당연히……!

‘그만.’

마음속에 목소리가 울리며, 막혀 있던 숨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다.

그새 악몽이라도 꾼 것처럼, 얼굴을 타고 식은땀이 흐르는 게 느껴졌다.

‘그 이상은 망상일 뿐.’

나 홀로 하는 상상,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

눈을 질끈 감았다.

더 이상 뜨여지지 않도록 팔을 뚜껑삼아 눈을 덮었다.

……검게 덮인 시야에는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다.

이제 잘 수 있는 걸까?

이대로 잠들어서내일 아침에 다시 눈을 떴을 때, 전부 예전처럼 돌아간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럼 이렇게 밤에 뒤척이지 않을 거 아냐.

……아니, 방법은 이미 제시되어 있다.

포기하면 되는 거다.

마음을 접으면 되는 거야.

하지만 어떻게?

“……읏.”

……가슴이 꽉 죄여온다.

손에서 놓기 싫다는 것처럼.

소중한 보물을 빼앗기기 싫다는 것처럼.

……아무튼 잠자긴 다 틀렸구만.

덮인 시야에 무겁게 깔린 어둠을 보며, 그렇게 자조했다.

다음날 아침, 터덜터덜 천막을 나와, 근처 나무에 기대고 눈을 감았다.

서늘한 공기가 슬며시 몰려오며, 몽롱한 머릿속에 스며드는 것 같았다.

……결국 거의 밤을 새버렸다.

그 탓에 머리가 굳어서 잘 돌아가지 않는다.

눈을 다시 떴을 때, 방금 전까진 없었던 로나가 서서 내 얼굴을 물끄러미 보고 있는데도 놀라지 않을 만큼.

“괜찮으세요? 안색이 안 좋으신 것 같은데요.”

괜찮지 않다.

하지만 괜찮아야 한다.

이런 걸로 발목 잡을 수는 없지.

“괜찮아.”

“……”

로나의 눈썹이 움찔거리는 게 보였다.

……이런 것도 거짓말로 취급이 되는 건가?

그렇더라도 밀어붙여야 한다.

나는 한 번 크게 숨을 내쉰 후, 그녀가 무어라 입을 열기 전에 선수를 쳤다.

“어제까지 고~급 침대에서 잤잖아. 잠자리 바뀌어서 피곤한가봐. 출발할 채비하자.”

그리고 그녀가 대꾸를 하기 전에, 먼저 그 자리를 떠나버렸다.

등 뒤에 날카로운 시선이 꽂힌 게 느껴졌지만, 차마 뒤를 돌아볼 수는 없었다.

……하지만 정작 피해야 할 사람은 따로 있었다.

천막을 나와 기지개를 켜던 메린이, 나를 보자마자 곧바로 팔을 붙잡은 것이다.

“카엘 너, 어디 아픈 거 아냐?”

“……아니야.”

하씨, 등신아, 아니라고 할 거면 힘있게 하든가.

다 뒤져가는 닭마냥 축 쳐지게 말하면 누가 믿냐고.

예상대로, 그녀는 내 이마를 손으로 짚고 눈살을 찌푸렸다.

“열 조금 있는 거 같은데.”

“괜찮아.”

“어제도 얼굴빛이 안 좋았어. 더 쉬지?”

나는 고개를 저었다.

출발을 늦추면 기운이야 좀 차리겠지만, 그러다 버릇돼서 밤낮이 바뀌면 큰일이다.

차라리 몸을 혹사시킬대로 시켜서, 아예 오늘밤에 기절해버리는 게 더 낫지.

……그래야 쓸데없는 생각을 안 할 테니까.

“진짜 괜찮아. 그냥 출발하자.”

“야, 너 어제 그러지 않았냐? 여기서 좀 더 가면 웨셋인가 하는 마을이라고. 도착하면 그날로 바로 산 탄다고.”

“어.”

설령 채비하느라 오후에 출발하게 될지라도, 마을에서 묵을 순 없다.

왜냐? 내일 아침은 상태가 더 엉망일 테니까.

차라리 이대로 올라가서, 산에서 뻗는 게 낫지.

그러나 메린은 얼굴을 완전히 찡그렸다.

“우리 다 산행은 처음이야. 거기다 산에는 몬스터도 많다며?”

“아마도?”

“안 그래도 조심해야 할 판에, 그렇게 흐느적대는 꼴로 올라간다고?”

……아, 화내고 있다.

그럴 만도 하지.

난 지금 억지를 부리고 있으니까.

그녀에게 미안함을 느끼는 동시에, 그녀가 나를 걱정해주는 게 기쁘다.

……미쳤구나.

드디어 완전히 미친 거야.

자조하면서도, 또 다시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 움직이는 데에는 아무 문제없어. 그래, 뭣하면 위슨에게 물약 받을게.”

“……”

“……진짜 괜찮다니까. 내가 없는 소리하는 거 봤냐?”

“엄청 봤는데.”

그렇게 쏘아붙이면서도, 메린은 결국 한숨을 쉰 후, 뚱한 얼굴로 나를 보았다.

“너 이 새끼 올라가서 쓰러지기만 해봐. 뒤질 줄 알아.”

“……하하.”

그녀의 진심 어린 위협에, 나는 진땀을 흘리며 웃을 수밖에 없었다.

내가 선택한 강행군이다.

악으로 깡으로 버텨야 한다……!

홱 돌아서는 그녀의 뒤에서, 나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잘 넘어가지 않는 빵 대신 과일로 아침을 삼고, 후식으로 위슨의 기력회복제를 마신 후 출발했다.

어제 하루동안 길게 뻗은 산맥을 따라 내려왔으니, 이제 그 거대한 산으로 들어가듯이 달리면 도착이다.

연회색의 바위산들이 내려다보고 있는 곳,‘웨셋’은 말리스의 서남쪽에 있는 마을로, 이 대륙의 동서를 나누는 거대한 산맥의 입구이다.

웨셋이라는 그 이름답게, 이곳이 왕국의 가장 서쪽 끝임을 가리키기도 하다.

물론 이 마을을 거치지 않더라도 산맥을 넘을 수는 있다.

길 헤매다 죽어서 그렇지.

“그 마을은 입구라면서요? 어차피 산길을 걷는 건데, 똑같은 거 아니에요?”

“산 위의 부락들로 가는 길을 표시해놨는데, 그 길을 쭉 따라가면 서쪽으로 넘어갈 수 있대. 뭣하면 길잡이꾼을 고용할 수도 있고.”

아버지 말로는, 길안내 말고도 짐을 들어주기도 한다나?

하긴, 말은 어쨌든 마차를 쓸 수는 없으니, 짐을 들어줄 사람이 한 명이라도 더 있으면 좋겠지.

……잠깐, 근데 산맥 너머에는 인간 마을이 없잖아.

짐꾼이 왜 필요하지?

그 전에 길안내는 왜 필요해??

서쪽에 누가 넘어간다고???

설마 애들을 넘기려고……는아닐 거다.

숲에 틀어박혀서 안 나온다는 엘프가 직접 인간 도시에서 값을 치르고 있었다.

그 애들이 그 놈들에게 있어 귀한 상품이라는 뜻이겠지.

인간이 직접 산을 넘으려고 하면, 도중에 몬스터 등의 습격을 받을 건 불 보듯 뻔한 일.

분명 엘프들이 모종의 방법을 써서, 애들을 무사히 자신들의 숲으로 데려가고 있을 것이다.

……어쩌면 블루벨이 그 길을 알고 있을지도 몰라.

그건 어쨌든, 짐꾼 겸 길잡이꾼이 필요한 이유가 대체 뭘까?

산맥 너머에 있는 건 엘프랑 드워프인데…….

……드워프?

아, 그래.

그러고보니 피터 왕자가 그런 이야기를 했었지.

­­……그들 덕분에 조금이긴 해도 아직 드워프제 물품들이 들어오고 있고요.

드워프라…….

어쩌면 웨셋에서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드워프?”

“어. 메린 너도 들어봤지?”

“이름만.”

거참 희한하네.

분명히 그 내용을 같이 본 것 같은데……!

뭐, 마을에 도착하고 나서 이야기해주면 되겠지.

나는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나에게 시선을 슬쩍 주고서 도로 돌려버리는 메린,

하품을 하고 있는 로나,

멀거니 앞을 보고 있는 위슨……

……그리고 그게 끝이었다.

블루벨은 어디 있지?

그러고보니 그 엘프, 어제 낮에도 모습이 안 보였었어.

야영지에 슬쩍 나타나서는 밥만 먹고 휙 사라졌고.

무슨 특별한 기술을 쓰고 있는 걸까?

빛을 어떻게 해서 모습을 감추는 식으로.

“위슨, 블루벨은 따라오고 있는 거야?”

“어. 마을 도착하면 싫어도 보게 될걸. 안 나타나면 명령을 내려버릴 거거든!”

“……”

저 녀석 저거, 엘프 들으라고 하는 소리구만.

위슨의 명령을 따를 때까지, 그 얇은 끈이 채워진 목과 양 손목을 지져버린다고 했던가?

나 참, 저렇게 협박하는 건 대체 어디서 배운 건지…….

“너한테 배웠겠지.”

“마녀겠지.”

가당찮은 모함을 하는 파랑새에게, 단호히 대답해주었다.

그렇게 조금 더 달려서 도착한 웨셋은, 산맥 앞에 있다는 느낌이 별로 들지 않았다.

막상 안에 들어오니, 멀리서 보였던 뾰족뾰족한 봉우리들은 전혀 보이지 않는데다, 마을 바깥으로는 무척 완만한 언덕길이 쭉 뻗어 있다.

수직절벽, 아니면 그에 비등한 급한 경사길을 올라갈 줄 알았는데.

진짜 저 길을 따라 산맥을 넘어가는 건가?

그보다 막혔다더니, 길 다 뚫려 있는데?

누구 지키는 사람도 없고.

“나도 너희랑 같이 넘어가야 돼?”

어느새 모습을 드러낸 블루벨이 퉁명스럽게 물었다.

“당연하지. 댁은 포로야, 포로.”

“쳇.”

혀를 차는 엘프에게, 나는 조금 전에 떠올랐던 의문을 꺼내보았다.

“엘프들이 산맥 넘을 때 쓰는 길이 어디인지 알아?”

“뭔 소리야. 우리가 산을 왜 넘어.”

……어라?

이런 대답이 나올 줄은 예상 못했는데.

블루벨은 정말로, 나를 이상한 사람으로 보는 듯한 눈으로 보고 있었다.

“인간 애들이 엘프의 숲에 가려면 여길 넘어야 되잖아. 길이 따로 있을 거 아냐.”

“너 지금 시비거는 거야? 인간 꼬마들이 우리 숲에 왜 와.”

“……”

……어라라라??

이 엘프, 혹시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건가?

슬쩍 로나를 보았더니, 그녀는 나를 향해 어깨를 으쓱였다.

거짓말은 아닌 모양인데.

그럼 뭐야, 진짜 모르는 거야?

……이 엘프, 완전 말단 아냐?

나는 한숨을 쉬었다.

“그건 됐고. 댁이 산을 넘을 때 쓴 길 알려줘.”

“그런 거 없는데.”

“뭐? 아니, 길을 따라 넘어왔을 거 아냐.”

“그냥 똑바로 뛰었는데? 한 두 시간 걸렸나?”

“……”

아니 진짜 도움이 하나도 안 되네!

그보다 그냥 똑바로 뛰어왔다니, 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이 엘프가 지금 인간 놀리나?

낭떨어지 만나면 굴러 떨어져서 끝장일 텐데, 그게 된다고?

내 의문에, 블루벨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떨어져?”

“……”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그러네? 왜 떨어질까?

왜 공중에 뜨질 못하는 걸까?

몸무게 때문에?

근데 블루벨도 몸무게 나갈 거 아냐.

그럼……

지상에 발을 붙이며 살도록 정해져 있는 생물이니까?

이건 그냥 대충 때우는 거 같은데.

……와, 진짜 모르겠다.

왜 떨어지는 걸까?

하늘에서 땅으로 떨어지는 건 당연한 거니까 ‘왜’를 붙여본 적은 한 번도 없는데.

새가 하늘을 날고, 물고기가 물 속을 헤엄치는 것과 같다.

당연한 것이지만, 어떻게 그게 되는지는 아무도 모르는 거지.

“그럼 넌 안 떨어지냐?”

넋이 하늘 저 멀리 날아가버린 나를 대신해 메린이 눈을 깜빡이며 묻자, 엘프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당연하지. 볼래?”

블루벨은 으슥한 데에 자란 나무 위로걸어 올라가더니, 가지에 턱 걸터앉았다.

절로 입이 떡 벌어지는 광경이었다.

땅에서 타고 올라간 게 아니라,말 그대로 그냥 걸어 올라갔다!

무슨 길 걷듯이 그냥 걸어갔다고!

나무줄기에 붙은 것처럼 서서 걸어갔어!

“이 가지 밑을 밟고 거꾸로 서 있을 수도 있지만, 보는 눈이 있을지도 모르니 그건 넘어갈게.”

“……세상에.”

차원이 달라도 너무 달라.

진짜 나랑 같은 세상에 사는 생물인가?

“말했잖아. 귀쟁이들은 형체 있는 순수 자연물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다고. 나뭇잎으로 과일도 깎아먹을 수 있을걸.”

파랑새의 비아냥섞인 말투에, 블루벨은 기가 막히다는 듯이 콧방귀를 꼈다.

“나 참, 어이가 없네. 뭐하러 그런 짓을 해? 그냥 손대면 알아서 벗겨지는 걸.”

“……그게 왜 돼?”

“그게 왜 안 돼?”

멍하니 묻는 말에 되돌아온 건, 도통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하…… 돌겠네, 진짜.

나는 욱신거리는 관자놀이를 누르며 말을 꺼냈다.

“……일단은, 이 마을 촌장이나 만나러 가자…….”

말리스에 괜히 산맥이 막혔다는 소문이 퍼지진 않았을 터.

정말 지금 산에 올라갈 수 있는 건지, 올라갈 수 있다면 필요한 게 무엇이 있을지 알아봐야 한다.

한숨을 쉬며, 나는 일행을 데리고 촌장이 있을 곳을 향해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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