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9화 〉 125화 : 서쪽 끝, 마지막 왕국령 (4)
* * *
깃털 달린 시커먼 우박이 그친 뒤, 보호막 너머의 모습을 본 내 입에서 짤막한 감상이 흘러나왔다.
“완전 망했네.”
내가 생각하고, 동료들이 실행에 옮겨서 얻은 결과이지만 참 헛웃음 나오는 광경이군.
뭐, 목적 자체는 이루 말할 것 없이 완벽하게 달성했다.
저 하늘을 유유히 날던 검은 띠가 풀리면서, 정신 사납게 보호막을 두들겨대던 대머리 수리들까지 죄다 뭉개버렸으니까.
이 놈들도 귀가 있을 텐데 그걸 알아채지 못한 걸 보면, 하늘 위를 빙빙 돌던 놈들이 꽤 높은 곳에 있었던 모양이다.
아무튼 그 덕에 땅 위는 온통 검은 깃털이 뒤덮은 거나 마찬가지인데, 저 깃털덩어리에서 붉은 피가 줄줄 나오는 걸 보니……
음, 땅 속은 아마 질척거리고 있지 않을까?
시체가 한둘이 아니니까.
고블린이나 늑대도 한곳에서 많은 수가 한꺼번에 죽으면 치우기 힘들다.
근데 저 대머리 수리들은 고블린보다 열 배는 더 덩치가 크니, 저건 못 치운다고 봐야겠지.
치우지 못한 시체는 썩어버릴 것이고, 그에 따라 피가 잔뜩 고인 땅도 부패할 것이다.
농사는 이제 꿈도 못 꾸겠지.
괜히 ‘완전 망했다’고 감상이 튀어나온 게 아닌 것이다.
“하하, 내 손으로 동네 하나 숨통을 끊어버렸네.”
근데 이 꼴을 보고서도 죄책감은 생기지 않는다.
후회는커녕, 어쩐지 속이 후련해진 것 같아.
물론 아까는 엄청 빡치긴 했지만……
하아…… 나, 뭔가 많이 쌓여 있던 걸까……?
자조하며 완전히 죽어버린 땅을 보고 있는데, 로나가 키득키득 웃으며 말을 걸었다.
“아주 시원하게 저질러버렸네요! 히히, 그래도 괜찮아요, 카엘 님. 땅은 다시 살리면 돼요.”
“어…… 그래?”
“네.치유사제가 땅을 정화할 수 있어요. 여기 담당사제가 율리아 님께 보고해야 하겠지만요.”
기지개를 켜며 태연한 목소리로 말하는 로나에게,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여기 담당사제는 다른 보직이야? 어떻게 알아?”
“보호막을 보면 알아요. 저 같은 전투사제는 당연하고, 치유사제도 아까 그걸 버틸 정도로 강한 보호막을 펼치진 못하거든요. 여기 담당사제는 보호사제일 거에요.”
보직에 따라 같은 기도를 올리더라도 그 위력이 천차만별이라고 말하면서, 로나는 허리를 좌우로 비틀었다.
딱 봐도 체조하는 건데……
왜?
그렇게 잠시 몸을 푼 후, 그녀는 벽에 세워둔 철퇴를 손에 쥐고 나에게 다가와 생긋 웃었다.
“카엘 님, 슬슬 문을 열죠.”
“문? 신전 문? 아, 네. 잠깐만요.”
얼굴은 웃고 있는데 분위기가 장난이 아니야.
나도 모르게 존댓말이 튀어나왔어!
아직도 쿨쿨 자고 있는 메린을 조심스럽게 안아들고 신전에서 멀어졌다.
로나는 방실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더니, 신전 문을 손으로 쾅쾅 두드리며 외쳤다.
“저기요~ 다 끝났으니까 문 여시죠? 안 그러면 부숴버릴 거에요!”
“안 된다고 했잖아!!”
“아하하하! 그럴 줄 알았어요!”
쿠웅!
쥐고 있던 철퇴로 땅을 한 번 내려친 후, 그녀는 두 손으로 자루를 잡고 자세를 낮추었다.
암만 봐도 전력으로 후려칠 기세다……!
“나의 주인, 나의 아버지, 지고의 창조주시여! 길을 열어주소서!!”
투우웅!
로나가 휘두른 철퇴가 튕겨나가는 것도 놀랍지만, 그 반동으로 신전 건물 전체가 흔들리는 게 더 놀라웠다.
그녀의 공격이 막혔다는 건, 신전 안에서 기도를 올리고 있을 사제가 이를 명백한 ‘침입’으로 인식한 것일 터.
그리고 이미 그걸 예상했다는 듯이, 로나는 당황해하긴커녕 오히려 더욱 환히 웃었다.
“후후! 후후후후!! 네, 그래야죠! 그렇게 나와야죠!!”
“……”
어째 좋아하는 것 같은데?
사제가 신전 문을 부수는 걸 좋아해도 되는 건가?
아, 혹시 이 안에 있는 사제와 마을 주민들을 잠재적인 이단으로 생각하고 있는 걸까……?
주민 중에 산신 어쩌고 한 놈들이 있었으니까.
투웅!
로나의 철퇴가 재차 신전 문을 향해 내리쳐졌고, 신전 문에 펼쳐진 보호막이 또 다시 철퇴를 튕겨냈다.
그리고 튕겨져 나가는 반동을 이용하여 몸을 회전시키며, 로나는 더욱 더 거세게 철퇴를 내리쳤다.
투웅! 투우웅!!
그렇게 악마와 이단척결이 주 업무인 전투사제와,
사악으로부터 주민을 보호하는 보호사제의 싸움이 시작된 것이다……!
겉보기에는 사제가 신전 문을 부수려 하고 있는 꼴이라서, 여러모로 가슴이 웅장해지는 광경이다.
나름 창조주를 믿는 신도로서, 차마 그 모습을 계속 지켜보기 힘들 정도로 웅장했다.
“하아…….”
뭐, 언젠간 끝나겠지.
메린이나 슬슬 깨워야겠다.
더 자게 해주고 싶어도 상황이 안 되겠네.
그녀를 안아 든 채로 조심스럽게 바닥에 앉았다.
자연히 그녀가 내 다리 위에 누운 꼴이 되었고, 나는 그런 그녀의 뺨을 살살 두드렸다.
와, 탄력 있네.
……아니, 이게 아니지.
“메린, 일어나.”
“우으응……”
그녀가 표정을 살짝 찡그리며 몸을 뒤척였다.
완전히 기진맥진해서 잠에 든 건데, 쉰 지 고작 삼사십 분 정도밖에 안 됐으니 당연히 못 일어나지.
그래도 깨워야 한다.
로나가 신전 문을 부수면 안에 들어가야 할 텐데, 이 녀석을 업거나 안은 채로 갈 순 없으니까.
……뭣보다도 그녀의 자는 얼굴이 너무 가까워서 내가 힘들다!
뒤에서 안고 있을 땐 얼굴이 안 보이니까 그럭저럭 괜찮았는데.
아으, 이건 얼굴을 거의 맞대고 있는 수준이잖아.
“후으……”
메린이 길게 숨을 내쉰 탓에, 자연히 그녀의 입술로 눈이 갔다.
살짝 벌린 입술에, 가느다란 목선…….
으아아, 빨리 깨워야 돼!
안 그럼 내가 정신 놓고 뭔가 저지를 거 같아!
“야, 그만 자고 일어나.”
제발……!
나 살리는 셈치고 일어나줘……!!
재차 뺨을 두드리며 흔들었더니, 그녀가 또 다시 얼굴을 찡그렸다.
아, 이제 일어나겠구나.
“……?!”
……일어나긴 개뿔!
메린이 몸을 틀더니 내 허리를 꽉 끌어안았다!
우아아아!
이 녀석, 혹시 베개 끌어안고 자는 버릇이 있었나?!
우와, 위험해.이건 진짜 위험해!
그녀가 내 허벅지를 벤 채로 허리를 끌어안고 있다.
그 자체만으로도 두근거려서 미칠 거 같은데,
그녀가 살짝 몸을 돌린 탓에, 뒷목으로부터 내려오는 등과 허리, 또 그 아래로 이어지는 곡선이……!
으아아아, 지금 어디를 보고 있는 거야, 상황만 더 악화되잖아!
안 돼, 떼어내야 돼!
아, 근데 잘못하면 바닥에 엎어질 텐데…….
아아아, 아무튼 당장 깨워야 돼!
더 열이 오르기 전에 얼른!!
“메린, 메린메린메린! 야! 이, 이거 놔! 팔 풀고 일어나! 으아아, 아니야, 여기서 팔 풀면 더 위험하잖아! 일어나, 제발! 얼른 일어나아아!”
……내 필사의 노력 끝에, 여러모로 몸이 더 뜨거워지기 전에 그녀를 깨우는 데에 성공했다.
후우…… 한동안 못 일어날 뻔했어…….
메린은 몸을 일으켜 앉긴 했지만, 아직 잠이 깨지 않는지 연신 하품을 하면서 살짝 꾸벅거리고 있었다.
와, 표정도 왠지 멍해서 귀여워…….
“……”
……나 너무 빠져 있는 거 아냐?
이젠 진짜 별 생각을 다 하네.
이게 다 잠을 잘 못 자서 그런 게 틀림없다.
근데 오늘밤도 못 잘 게 뻔하잖아?
난 이제 틀렸어. 꿈도 희망도 없어.
……하, 일단 정신차리자.
나 자신의 뺨을 세게 두드린 후, 그녀의 두 팔을 잡고 일으켜 세워주었다.
엉거주춤 일어난 그녀가 기지개를 켜며 두 눈을 슬슬 문지르기 시작했다.
이제 완전히 잠에서 깨어나겠지.
정말 힘든 싸움이었어…….
“……!”
그와 동시에, 무언가 깨지는 소리와 함께 폭음이 들렸다.
뒤를 돌아보니, 먼지구름이 마구 피어오르는 신전 앞에서 로나가 이마를 닦고 있었다.
……진짜 부숴버렸네.
전투사제 우승!
“카엘 니임~!”
로나는 환호성이라도 지르는 것처럼 팔을 휘저으며 나를 불렀다.
뭐…… 문이 열렸으니 들어가봐야지…….
“메린, 난 저기 들어갈 건데 넌 어쩔래?”
“우응…… 밖에 있을래…….”
웅얼거리듯이 대답한 후, 그녀는 크게 기지개를 켜며 하품을 했다.
그대로 눈을 몇 번 크게 깜빡이더니, 흠칫 놀라면서 눈앞의 광경을 빤히 보았다.
“우와, 시체밭.”
음, 정확한 표현이군.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럼 난 갔다 올 테니까, 너 저거 도축하지 마. 안 먹을 거야.”
“저기서 위슨이 이미 하고 있는데?”
“……”
어느 틈에?!
그보다 내 눈엔 안 보이는데!
제길, 대머리 수리들도 시커멓고 그 녀석 옷도 시커머니까 안 보여!
“……아무튼 고기 안 먹을 거니까 그런 줄로 알아! 아, 그리고 집도 털지 말고.”
“……”
“하지 마라. 전부 다 주인 있는 거다.”
죽은 사람이면 몰라, 멀쩡히 살아있는 사람의 집을 털면 그건 그냥 강도이다.
지금 돈이 궁한 것도 아니고, 설사 궁하더라도 강도 짓은 절대 할 수 없지.
내가 싫어하는 게 강도 새끼들인데, 그 놈들과 똑같은 짓을 하면 욕을 할 수가 없잖아.
그러자 메린이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입을 열었다.
“야, 카엘. 저번에 너랑 나, 그 복수초인가 뭔가 하는 사람 본거지 털었잖아.”
“근데.”
“왜 이건 안 되냐?”
“……”
간만에 찾아온 토의 시간.
지금 꼭 해야 되는가 싶지만, 귀찮다고 대강 넘어가면 나중에 나만 더 골치 아파진다.
그러니 말이 나왔을 때 바로바로, 확실히 해둬야지.
나는 팔짱을 끼며 대답했다.
“저 집주인들은 우리한테 아무 짓도 안 했으니까 털면 안 되지. 그때 그 본거지에 있던 놈들은 우리를 죽이려고 했었잖아.”
“아, 도적들 돈 뜯은 거랑 같은 논리냐?”
“그래.……그리고 돈 뜯은 게 아니라 배상금을 받은 거야. 놈들이 우리에게 피해를 입혔으니, 그 대가를 받은 거지.”
이곳 사람들이 신전에 우리를 들여보내주지 않는다는 천인공노할 짓을 하긴 했지만, 그 원한은 이렇게 마을이 다 박살난 시점에서 풀어졌다.
게다가 우리를 직접적으로 해하려던 것도 아니니, 그들에게 직접적인 피해를 주는 건 맞지 않지.
물론 거기까지 깊이 생각하고 저지른 건 아니지만, 아무튼 그렇다.
속이 후련해서 그런지 생각이 잘 돌아가는걸?
물론 그 부숴진 집들 중엔 이미 주인이 죽어버린 곳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마지막 양심인 걸까?
그걸 노리고 싶은 마음이 조금도 일어나지 않는다.
이 사람들이 다른 곳에 가서 생활하려면 한 푼이라도 더 필요할 터.
어차피 망한 거라 해도 내 손으로 터전을 임종시켰는데, 그 마지막 구명줄까지 끊을 순 없어.
……메린에게는 그 말은 하지 않았다.
이건 내 개인적인 불편함, 물러터진 마음에서 오는 생각일 테니까.
“그럼 촌장 집은? 촌장 죽었잖아.”
“다른 가족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안 돼. ……메린, 그 이전에 우리 돈도 식량도 다 넉넉하거든? 더 있어봤자 짐만 되니까 그냥 둬.”
“흠, 그것도 그렇네.”
말리스의 무서운 누님들 덕분에, 한동안은 식량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된다.
매 끼니마다 솥에 둥실 떠 있는 고기가 수상해서 노려보지 않아도 되고,
블루벨의 그 괴상한 신념에 맞춰줄 수 있는 건 덤이다.
……내 배낭에 있는 보존식품, 이 여행 끝날 때까지 안 뜯을지도 모르겠는데?
메린은 납득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인 후, 어깨를 살짝 으쓱였다.
“알았어. 그럼 난 저기 가서 위슨 돕고 있을게.”
“그래. 아, 위슨한테도 꼭 전해! 고기 안 먹는다고!!”
“알았어, 임마.”
그녀가 검은 깃털덩어리들 쪽으로 가는 걸 지켜본 후, 나는 로나가 기다리고 있는 신전 앞으로 향했다.
로나는 잿빛 눈동자를 부릅뜬 채, 신전 안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시간이 좀 지났을 텐데 아직 한 사람도 바깥으로 나오지 않는 건, 아마 이 살벌한 분위기를 이겨낼 용기가 없기 때문이겠지.
“미안, 기다렸지?”
“아뇨, 괜찮아요. 메린 님께 무언가 하실 말씀이 있으셨던 거죠? 예를 들면, 가슴 속 깊~이 품고 있는 생각이요!”
“……아니, 집 털지 말라고 한 건데.”
“저런. 히히, 아쉽네요.”
“……”
이 자식이 이젠 대놓고 놀리네.
하아, 휘둘리지 말자.
“메린은 밖에 있겠대. 위슨은 한창 재료 수급 중이고. 블루벨은…… 어디 갔냐?”
“아, 그 건방진 엘프요? 인간의 신을 섬기는 곳 따위 안 들어간다면서 어디 갔어요. 감히 인간의 신이라니, 하하, 그 뾰족한 귀 깎아버리고 싶네요~”
“아, 그래.”
뒷말은 적당히 흘려들었다.
뭐, 종족이 다르면 안 믿을 수도 있는 거 아니겠나?
그 엘프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지만, 아마 적당히 주변을 서성거리고 있겠지.
“그럼 갈까요~”
로나와 함께 부숴진 문 안으로 들어가자, 곧바로 여기저기서 숨을 삼키는 소리와 공포에 질린 비명이 짧게 터져나왔다.
그 광경을 방긋 미소 지은 얼굴로 지켜본 후, 그녀는 완전히 뻥 뚫려버린 입구 바닥에 철퇴를 쾅 꽂아버리며 크게 외쳤다.
“다들 꼼짝도 하지 마세요!판정이 끝날 때까지 이걸 넘어서는 자는 전부 이단으로 간주합니다!!”
“히이익!”
“부, 부디 자비를……!”
“으아앙! 엄마, 무서워!!”
“……”
역시나 잠재적인 이단으로 보고 있구만!
그보다 말하는 내용은 사제가 맞는데, 말투는 왠지 강도 같다.
그 기묘하게 엇갈리는 느낌에 고개를 갸웃하며, 나는 안쪽으로 향하는 그녀의 뒤를 따랐다.
신전 안은 마을 사람들 전부 모인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사람들로 우글거렸다.
아이를 끌어안고 덜덜 떨고 있는 어머니, 그 둘을 가리듯이 앞에 선 남자, 얼이 빠진 채 바닥에 주저앉은 청년, 신전의 의자에 숨어서 열심히 기도를 올리고 있는 아낙네…….
……진짜 강도가 된 거 같아!
눈을 뜨고 있는 사람은 전부 우리를 두려워하며, 우리가 안쪽으로 한 발짝 나아갈 때마다 좌우 벽 쪽으로 스으윽 물러났다.
꼭 호수에 뜬 풀잎을 헤치며 가는 기분이었다.
“응……?”
앞을 막던 사람들이 물러나자, 신전 맨 안쪽 제단 앞에 누군가가 쓰러져 있는 게 보였다.
짙은 푸른빛의 사제복을 걸치고 있는 걸 보니, 이 신전을 담당하는 사제인 게 분명했다.
로나는 주저없이 그 사제에게 가까이 다가가더니, 뺨을 찰싹찰싹 치기 시작했다.
……뺨에 손자국이 날 정도로!
“잠깐잠깐, 로나! 로나 사제님! 너무 세게 치시는 거 같은데요?!”
“으응~ 근데 그냥 기절한 게 아니라서요. 기도가 깨진 충격을 받은 거라…….”
“아니 그래도 너무 세잖아. 말 걸면서 좀 살살 해!”
저러다 이빨 나가겠다!
“말 걸면서요? 흐음……사제님! 정신 좀 차리시죠? 사제님~!”
찰싹찰싹찰싹.
……힘 줄인 건가?
소리는 별로 변한 게 없는 거 같은데.
멍하니 그 모습을 보고 있는데, 벽 쪽에 물러나 있던 주민 한 명이 진땀을 흘리면서도 용기 있게 앞으로 나섰다.
“이, 이 녀석! 사, 사제님께 무슨 짓이야! 그만 못해?!”
“형제님? 물러나시죠?”
“그만하지 않으면 가만 안 두,”
“물러나세요!!”
“……!”
로나의 고함이 신전 안에 울려퍼지는 순간, 갑자기 몸에 힘이 빠지며 다리가 풀렸다.
그녀를 막으려던 주민도, 벽 쪽에 물러나 있던 다른 주민들도 모두, 스르르 무너지듯이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이건 큰 소리에 놀란 게 아니야.
무언가 특별한 힘이 발휘된 게 분명해.
로나의 두 눈이 금빛으로 빛나고 있는 게 그 증거다……!
“로나…… 너 뭐한 거야……?”
“아, 맞다. 이거 목소리 들리는 사람에겐 다 통하는 거였죠. 헤헤, 죄송해요, 카엘 님.”
그녀는 평소처럼 그렇게 헤실헤실 웃으면서, 다시 쓰러진 사제의 뺨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자아, 자아, 당신 때문에 일이 자꾸 늘잖아요, 얼른 일어나세요! 심문해버리기 전에!”
“우으…….”
약한 신음소리를 내면서, 쓰러져 있던 사제가 비실비실 몸을 일으켰다.
입은 옷 모양을 보니 여자 사제로군.
여사제는 한쪽 머리를 부여잡으며 일어나 앉아,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라…… 살아 있나……?”
“네. 아직은요.”
“꺅?! 누, 누구세요?!”
소스라치게 놀라면서도, 여사제는 벌떡 일어나 곧바로 제단을 지키려는 듯이 그 앞에 섰다.
그 상태로 이리저리 바쁘게 굴리던 시선이, 마침내 로나에게 우뚝 멈춰 섰다.
“그, 그 복장은……! 저, 전투사제?!”
“알아보는 거 보니 교단 소속은 맞나보네요. 안녕하세요, 사제님? 지고하신 창조주의 5798번째 검, 로나랍니다. 여기 담당사제님이시죠?”
로나의 말에, 여사제의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크게 떠졌다.
“오…5798번째?! 어어, 그럼 당신이……!”
“아하하, 담당사제님이시냐고 여쭌 거 같은데요.”
“아, 어어, 네! 마, 맞아요! 저, 전지전능하신 창조주의 2556번째 방패, 보호사제 밀리아입니다. 웨셋에 온 걸 환영해요, 로나 사제님!
어어, 그럼 저 분이……?”
보호사제 밀리아, 그렇게 자신을 소개한 여사제의 눈이 나를 향했다.
“맞죠? 저 분이 그 요,”
“그건 됐고요. 여쭤보고 싶은 게 있는데요.”
생긋 웃는 얼굴로 단호히 말을 자른 후, 로나는 신전 안에 모여든 사람들을 한 번 돌아보며 물었다.
“여기에 이단이 있습니까?”
작은 체구에서 나오는 거라고는 믿기 어려울 만큼, 그녀의 목소리가 신전 안을 쩌렁쩌렁 울렸다.
미소를 잃지 않는 어린 사제의 두 눈은, 여전히 금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