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4화 〉 130화 : 산의 옛 주인 (5)
* * *
이름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게 가을 숲이 떠오르는 머리카락을 가진 엘프, 블루벨이 숲에서 넘어온 목적은 단 하나.
바로 용사를 죽이는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물론이고, 그녀에게 명령을 내린 엘프들조차도 용사가 어떻게 생겼는지, 심지어 남자인지 여자인지도 알 수 없었다.
그 때문에, 블루벨은 마을들을 돌아다니며 인간들을 관찰해야 했다.
그러려면 몇 날 며칠을 인간들 틈에 끼어 있어야 했고,자연히 숙식을 해결할 돈이 필요하게 되었다.
“……하지만 나에겐 인간의 돈이 없었어. 우리는 인간과 교류가 없으니, 내게 쥐어 줄 게 없었거든.”
“그래서 강도질한 거야? 아니, 왜 그 좋은 활솜씨로 몬스터 퇴치는 안 하고?”
크든 작든, 이 시대의 모든 인간 마을들은 다 몬스터 때문에 골치를 썩고 있다.
활뿐만 아니라 단검도 잘 다루는 거 같으니, 충분히 모험가인 척하고 몬스터 퇴치 의뢰를 받을 수 있었을 텐데.
아니면 얼굴은 그럭저럭 예쁜 편이니, 여관이나 술집에서 잠깐 일할 수도 있었을 거고.
평화롭고 공정하게 돈 벌 수 있는 방법이 얼마든지 있는데 대뜸 강도질을 하냐고.
나 참, 누가 누구에게 폭력적이라는 거야?
내 말에, 블루벨은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그런 방법이 있었구나. 몰랐어. 내가 본 건 이게 다였거든.”
“관찰 되게 못하네.”
그 외에 무엇을 보았냐고 묻자, 엘프는 여전히 앞을 바라보며 천천히 대답했다.
“골목에서 제 멋대로 욕정을 푸는 인간, 다른 사람의 물건을 훔치는 인간, 두들겨 패거나 죽여서 돈을 빼앗는 인간, 자비를 구하는 거렁뱅이를 걷어차는 인간. 형틀에 매였거나 밧줄에 묶인 인간에게 침을 뱉거나, 썩은 달걀을 던지는 인간들.”
“뭐 그리 편파적이야? 무슨 뒷골목만 보고 다녔어? 아이를 어르는 어머니나, 바닥에 떨어진 물건 주워 주는 사람도 있었을 거 아냐.”
진창에 빠진 이웃을 돕는 사람, 구걸하는 거렁뱅이에게 돈뿐 아니라 빵도 나눠주는 사람,
성실하게 일하며 가족을 사랑하는 사람.
이 엘프가 한곳에 며칠씩 묵었는지는 몰라도, 충분히 그런 사람들도 눈에 보였을 터.
……그런데도 블루벨이 인간에 대해 가지는 시선이 그 모양인 건,그런 놈들이 수두룩하다는 뜻이겠지.
하, 참 여러모로 슬픈 세상이다.
게다가 그런 피 튀기는 모습이 훨씬 자극적이니까 기억에 더 팍팍 꽂혔겠지.
내가 이따금 고향을 떠올릴 때마다, 제일 먼저 그 새끼가 생각나는 것처럼.
“아무튼 난 그냥 평범한 인간이야. 유별난 거 하나 없는 놈이라고.
댁이 본 그 파렴치한 놈들도 지들끼리는 하하 호호 웃으며 훈훈하게 지낼걸? 길고양이에게 우유 주고 있을지도 몰라.”
“……”
“멀리서 그냥 훑어보는 거랑, 가까이에서 직접 겪고 느끼는 거랑은 천지차이가 있지 않겠어?”
먼 곳에서 숲을 지켜보기만 해선, 그 안에 어떤 나무가 있고, 어떤 짐승이 살고 있는지 알 수 없는 법.
하다못해 손가락 한 마디 만한 개미들도 땅 속에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 잘 모르는데,
그보다 더 복잡한 존재인 인간을 그냥 훅 보는 것만으로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는가?
블루벨이 나를 보고 특이하다는 생각이 드는 건, 그저 직접 교류한 인간이 별로 없어서 그런 것일 뿐이다.
“……아니. 넌 달라.”
“……”
음, 아무래도 이 엘프는 되게 고집이 센 거 같군.
가끔 있지.
자존심 때문에 자신이 틀렸다는 걸 죽어도 인정하려 들지 않는 사람이.
그리고 그런 사람은 대개, 굉장히 괴상한 이유와 근거를 대며 자신이 맞다고 끝까지 주장하곤 한다.
“넌 우리 숲으로 아이들을 찾으러 간다고 했어. 그 아이들 중에 네 피붙이가 있는 거야?”
“없는데.”
“그럼 왜 그렇게 신경 써? 다른 인간들, 심지어 그 아이들의 부모들도 찾고 있지 않잖아.”
……바로 이렇게.
난 또 뭔 소리를 하나 했더니…….
나는 한숨을 쉬며 손을 내저었다.
“그 애들 부모들은 안 찾는 게 아니라, 못 찾는 거야. 찾을 방법이 없으니까 발만 동동 구르고 있는 거지.
댁이 몰라서 그러는데, 그 부모들 대신에 지금도 열심히 애들을 찾는 사람들이 있어.”
그러고보니 그 귀족 양반들은 잘 합류했을까 모르겠네.
내 기록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됐으면 좋겠는데.
“아무튼 댁이 너무 나쁜 사례들을 본 거야. 어떻게 그딴 것만 골라서 관찰을 하냐?
그리고 나한테 그런 칭찬 늘어놔도 소용없어. 그 끈들 절대 안 풀어줄 거야.”
“……”
정곡이라도 찔린 건지, 블루벨은 그대로 입을 다물어버렸다.
여름의 활기를 받아 푸르게 물든 나무들을 멍하니 바라본 채, 무언가 생각에 잠긴 것 같았다.
나는 눈을 돌려, 메린과 위슨이 다이어울프 한 마리를 해체하고 있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딱 몸통 부분만 가죽을 벗겨버리고, 고기며 내장이며, 무언가 시뻘겋거나 길쭉하거나 거무튀튀한 것들을 마구 꺼내고 있다.
그리고 그 두 사람 근처에는, 로나가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서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
환장하겠네.
마을 사냥꾼에게 저 모습을 두루뭉실하게 전해주면, 아마 ‘헛허, 그 놈들 참 싹수 좋구만!’ 라고 웃으며 격려할 거 같아!
그보다 저 시체, 작업 다 끝나면 뼈랑 가죽만 남는 거 아냐?
하아……
빨리 끝났으면 좋겠다.
“……있잖아.”
할 이야기가 생각났는지, 침묵을 지키던 블루벨이 다시 조용히 말을 걸었다.
“네가 그랬지? 우리 일족이 인간 아이들을 데려가고, 산 아래 마을을 엉망으로 만들었다고.”
“어.”
“……그런데 왜 나에게 잘해주는 거야?”
……피곤한가? 아니면 몰래 술이라도 한 잔 한 걸까?
아직 해 지려면 멀었는데, 갑자기 왜 이리 감성적으로 나오지?
나는 눈을 깜빡이며, 있는 그대로 대답해주었다.
“잘해줘? 내가? 뭔 소리야, 끈 안 풀어준다니까?”
“저 인간 여자 검사한테 그랬다며. 내가 필요하다는 건 다 사주라고.”
“그거? 엘프 여자한테 뭐가 필요한지 모르니까 그랬지. 나중에 길바닥에서 곤란해지면 안 되잖아.”
그리고 ‘어지간하면 들어주라’고 했지, ‘다 사주라’고 한 적은 절대 없다.
난 그런 호구가 아니야!
“포로라면서 밧줄로 묶어서 끌고 가지도 않고.”
“그 대신, 말 안 들으면 지져버리는 끈들을 달았지.”
살을 지진다는 것만 빼면, 이보다 편리한 구속용 도구는 없다.
손발이 자유로우니까 적개심도 덜한 것 같고, 여차할 땐 활솜씨를 빌릴 수도 있고.
……살을 진짜로 지져버리는 것만 어떻게 할 수 있으면 좋을텐데.
“이상한 명령 내리지 말라고 하고. 숲 짐승이 아닌 다른 고기로 밥 챙겨주고.”
“……쓸데없이 괴롭히지 말라는 게 뭐가 특이해? 그리고 고기는 있죠, 댁 때문이 아니라 나 먹으려고 챙긴 거에요.”
아니 대체 인간을 뭘로 보는 거야?
고기는 어쨌든, 사람 함부로 괴롭히지 말라고 하는 놈도 하나 없을 줄 아나?
“그러니까 이상하다는 거야. 내가 밉지 않아? 나도 엘프잖아. 너희 인간들을 괴롭힌 엘프.”
“안 미워. 하지만 좋아하지도 않아.”
나 죽이러 온 놈을 좋아하면 그건 이상한 걸 넘어서 변태 아니냐?
‘빨리 나를 죽이러 오라’면서 기다리는 변태에 미친놈.
자꾸 주변에서 나를 오해하는데, 난 지극히 평범하고 일반적인 상식을 지니고 있다.
그냥 호구 같이 생긴 거지, 호구도 아니고 미친놈도 아니야!
“왜 안 미워? 원한을 품은 집단에 속해 있으면, 설사 그 사람이 잘못을 저지른 게 아니더라도 미운 법이잖아.”
뭐, 그렇기는 하지.
아무리 머리로는 그 사람 개인에겐 죄가 없다는 걸 이해해도, 감정이 그걸 용납하지 못하는 일이 많다.
그래서 원한이 무서운 거지.
……아, 그래서 이 엘프가 끈질기게 나보고 특이하다고 하는 거구나.
엘프가 인간에게 해를 끼친 걸 알면서도, 내가 자신에게 보복하려 하지 않으니까.
이해는 가지만 여전히 틀렸어.
나는 고개를 저었다.
“내가 댁을 미워할 이유가 없어. 말했다시피, 그 애들은 내 피붙이가 아니야. 그딴 짓을 꾸민 놈이면 몰라도, 단지 같은 종족일 뿐인 댁을 미워하기엔 원한이 부족해.”
만약 그 애들 중에 내 동생이나 친척이 있었다면, 지금쯤 이 엘프를 개처럼 끌고 다니고 있었겠지.
그 애들 부모 앞에 블루벨을 던지면, 음, 처참한 꼴이 되지 않을까?
하지만 나는 그 애들과 아무 상관도 없다.
얼굴도 모르는 그 애들과, 그 가족들을 대신해 엘프에게 분노를 쏟을 정도로 정의로운 성격은 못 된다.
……그러니 이야기 속 주인공 같은 영웅이 되지 못하는 거겠지.
그리고 그게 별로 아쉽지 않다는 점에서, 영웅이 될 소양은 개미 눈알만큼도 없는 게 분명하다.
그런 놈이 용사가 되어선 가끔 성검 휘두르고 있으니, 참 기가 막힐 노릇이야.
원래 이런 건 영웅이 하는 거잖아.
“이해가 안 돼.”
고집스러운 엘프는 나를 보며 눈썹을 찌푸렸다.
“어떻게 그렇게 딱 구분 지을 수 있는 거야? 원한은 없어도, 못마땅하게 보는 법이잖아. 내가 저 마녀를 싫어하는 것처럼.”
“못마땅해. 물고기까지 거부하는 그딴 거지 같은 신념이 되게 거슬려.
그래, 말 나온 김에 묻자. 숲의 생명은 이웃이니 해칠 수 없다? 그래, 그건 좋다 쳐.
그럼 씨, 대체 버섯은 왜 먹는 거야?! 그게 번식을 돕는 것도 아니잖아! 버섯은 생명도 아니라 이거야? 지금 버섯 차별하는 거냐!”
숲에 사는 모든 생명체는 이웃 어쩌고 하면서 말야!
숲 속에 호수와 강이 있다는 이유로 물고기도 안 먹으면서!
버섯은 왜 먹어, 왜?!
버섯도 생명이야, 생명!!
“……그 얘기를 꼭 지금 해야 돼? 다른 게 중요하다는 생각 들지 않아?”
“생명보다 중요한 게 어딨어?! 잘 들어, 이 나쁜 엘프야! 생명엔 귀천이 없어! 맘대로 차별하지 마!
그 잘난 신념 관철하고 싶으면 얌전히 풀이랑 과일이나 먹어! 버섯에 손대지 말고!”
“……너 혹시, 내가 어제 송어에 있던 버섯 먹어서 이래?”
“내가 그거 구우면서 얼마나 기대했는데! 이 나쁜 차별주의자!”
제길, 다시 생각해도 열받아.
이 사악한 엘프는 어젯밤, 내가 열심히 송어와 버섯 굽고 잠깐 자리를 비운 틈에 버섯만 쏙쏙 골라서 다 처먹어버렸다.
그냥 버섯이어도 빡치는데 무려 송로버섯을……!
맨날 딴 짐승들이 파먹어서 보기 힘든 버섯인데!!
“그러면서 미워하지 않는다고? 도와줘서 고맙다는 말이 나온다는 거야?”
“빡치긴 하지만, 그래도 겨우 버섯이잖아. 그걸로 사람을 미워하겠냐? 그리고 고마운 건 고마운 거지.”
“……더더욱 이해가 안 돼. 어떻게 꼬투리 잡지도 않고 그렇게 딱 잘라버릴 수 있는 거야?”
“……”
바로 대답하지 않고, 나는 블루벨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눈이 가는 곳은 여전히 한창 고기 해체작업이 진행 중인 현장.
검 휘두를 때보다도 더 골똘히 작업에 몰두하고 있는 그녀, 메린을 바라보았다.
……너는 나와 같은 마을에서, 같은 세월을 보냈지.
너나 나나 그다지 행복하다고는 할 수 없는 어린 시절이었어.
메린, 이 엘프가 나보고, 어떻게 개인의 잘못을 집단에 돌리지 않을 수 있냐고 묻는다?
나는,
“그냥 버릇이야.”
……나는 그래야 했어. 그런 버릇을 들여야 했어.
뒤에서는 싸늘한 말을 던지는 어른들이, 앞에서는 서글서글 웃는 거에 질색할 수 없었고,
나에게 아무 관심이 없는 애들을, 나를 비웃고 괴롭히던 놈들과 같이 취급할 수 없었어.
“……몇 명이 잘못했다고 다른 사람들까지 미워하면, 이 세상 어디에도 발붙이고 살 수 없어.”
……절대로 마을을 증오할 수는 없었어.
나는 그 안에서 살아가야 하니까.
내 힘으로는 거기서 벗어날 수 없으니까.
그렇잖아.
안 그러면 마을이랑 숲을 싸그리 불태워야 하는데.
……근데 촌장 아들새끼 하나 때문에 불타 죽어야 한다면 다들 억울하지 않겠어?
숲에 사는 놈들, 아니 늑대들만 봐도 말야.
그냥 평소처럼 인간 여자 하나 물어갔을 뿐인데, 싹 다 불타 죽으면 어이없을 거 아냐.
그건 옳지 않아.
저울이 맞지 않아.
……나는 살기 위해 그렇게 타협해버렸어.
하지만 메린, 너는?
“……”
너는 왜 안 한 거야?
너에겐 충분히 자격이 있는데.
……얼굴 외우기도 전에 부모를 빼앗은 숲도, 너를 거부한 마을도 전부 태워버릴 자격이 있었는데.
내 말 따위 무시해버리고 확 저질러버려도 됐을 텐데.
어차피 아무도 너를 못 막잖아.
너는 나와 달리, 언제든 마을을 떠나 자유롭게 살 수 있었어.
막말로 어디 산적 두목이라도 돼서, 온 왕국을 벌벌 떨게 만들며 살 수 있었을 텐데.
……그런데 왜, 너는 그렇게 묵묵히 견디고 있었던 거니?
너를 거기 붙잡아 둔 내 잘못인 걸까?
네가 마을에서 살았으면 좋겠다는 내 비루한 욕심이, 너를 불행에 빠뜨렸던 걸까?
……이런 내가, 너를 좋아해도 되는 걸까?
“……”
눈을 질끈 감아, 불현듯 찾아온 욱신거림을 흘려보냈다.
조용히 상념을 가라앉히고 있는 내 귀에, 블루벨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가 나를 미워하지 않는 건, 산 밑의 마을을 망가뜨린 엘프와 내가 아무 상관이 없어서 그런 거다?”
“그래. 댁이 저지른 짓이 아니잖아. 이런 짓을 동족이 저질렀다는 것도 몰랐고.”
게다가 우리를 도와주기까지 했다.
이 웃긴 엘프가 아니었다면,우린 아마 보호막 안에서 밤새도록 시달리다가 꽤 무모한 짓을 저질렀겠지.
우리가 아무 상처 없이 그 새들을 한꺼번에 해치울 수 있었던 건, 순전히 그녀 덕분인 것이다.
블루벨은 여전히 앞을 바라보며, 조용히 입술을 움직였다.
“그럼 상관이 있다면?”
“……무슨 소리야?”
그녀의 진한 녹색 눈동자가 천천히 나를 향했다.
“안내할 수 있어.”
“어디를? 엘프의 숲?”
가만히 고개를 저은 후, 블루벨은 천천히 나를 올려다보았다.
“산신과 함께 있는 엘프에게, 안내해줄 수 있어.”
“……!”
놀라는 나를 보는 엘프의 두 눈엔, 아무 감정도 떠있지 않았다.
블루벨이 이 일을 꾸민 장본인에게 안내할 수 있다.
그 소식을 듣자마자, 위슨의 눈이 서늘한 빛을 띄며 가늘어졌다.
“함정이네. 여기 오기 전까지는, 산에 다른 귀쟁이가 있는지도 몰랐던 년이잖아.”
“다이어울프들을 잡는 중에 연락이 왔대.”
“근데 그걸 순순히 따라가자고? 죽으러 가자는 거야? 놈이 뭐 깜짝 환영파티라도 열어줄 거 같냐?”
음, 어느 의미로는 깜짝 환영파티이나 마찬가지이다.
블루벨이 제 입으로 비밀을 밝혀서 그렇지.
“연락을 받았다고 했죠? 뭐라고 연락을 받았나요?”
로나의 질문에, 블루벨은 덤덤한 얼굴로 대답했다.
“저쪽 절벽 위에 있으니 그리로 오라고.”
“그게 다인가요?”
“믿기 싫으면 관둬. 내가 말해줄 건 이게 다야.”
“……”
로나는 싱긋 미소를 지으며 그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나를 바라볼 뿐이었다.
고개를 젓지도, 끄덕이지도 않으면서.
“메린, 너는?”
그녀는 내 얼굴을 힐끔 보더니, 갑자기 기지개를 켰다.
그리고는 태연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넌 이미 결정했잖아. 근데 뭘 묻냐?”
“네 의견 듣고 싶어서.”
“내가 뭐라고 할지 알잖아?”
심드렁하게 묻는 그녀를 보며, 나는 피식 웃었다.
“대충.”
나와 근거는 다를지라도 결론은 같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이 이야기를 꺼내는 즉시 반대했겠지.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두 눈에 못마땅하다는 기색을 한가득 품고 있는 위슨에게 말했다.
“어차피 찾아갈 거였는데 잘됐지. 길 헤맬 필요도 없잖아. 따라가자.”
“우와, 아무 생각없는 거냐? 그렇게 멍청한 놈 아니잖아.”
“위슨아, 때로는 함정인 걸 알면서도 뛰어들어야 할 때가 있단다.
하나는 함정 같지도 않은 함정일 때고, 또 하나는 함정을 무릅쓸 가치가 있을 때이지.
마지막 하나는 어떤 때일 것 같으냐?”
검은 눈동자 속에는 질색해하는 빛이 살짝 섞여 있었다.
그는 나를 뚱하게 쳐다보며,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달리 방법이 없을 때?”
“아니.”
고개를 젓고, 나는 진지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조져버리고 싶은 새끼가 손수 초대했을 때다!”
“그래, 도발 걸렸구나. 역시 미친놈이야. 믿고 있었다고!
……아니, 위슨, 너도 작작해. 물들었냐?”
어처구니없어 하는 파랑새의 눈빛을 받으며, 위슨은 나를 향해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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