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5화 〉 131화 : 산의 옛 주인 (6)
* * *
이윽고, 블루벨의 안내를 받으며 다시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이따금 발이 미끄러져서 구를 뻔하고,
바람이 마구 휘몰아치는 벼랑길을 지나느라 오금이 저리긴 했지만,
검을 뽑을 일 하나 없는 굉장히 평화로운 등산길이었다.
……산에 오른 지 한 시간만에 다이어울프들이 몰려왔고,
지금도 이 야영지 근처 느티나무 위에서 샛노란 안광이 번뜩이고 있는 걸 보면,
누군가의 의도가 다분히 느껴지는 상황이다.
“맞아. 그 다이어울프는 산신이 부린 거야. 저 부엉이도 산신의 부하이고.”
블루벨이 여전히 아무 감정도 비추지 않는 눈으로 모닥불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나는 눈썹을 살짝 찡그리며 그녀에게 물었다.
“어떻게 그것까지 아는 거야?”
“……그만 자. 내일은 산신을 만나게 될 테니까.”
내 질문에 대답하지 않은 채, 그녀는 모닥불 빛이 닿지 않는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무언가를 숨기고 있는 건지, 아니면 지금은 이야기할 때가 아니라는 건지…….
한숨을 쉬는 나를 향해, 위슨이 고개를 까닥였다.
[저 엘프가 이상한 길로 안내하고 있는 건 아니에요. 그건 안심해도 돼요.]
위슨은 주변 정령에게 묻기도 하고 자신의 정령에게 탐사를 시키는 등, 미리 여러모로 알아본 모양이었다.
“그럼 그 산신이라는 놈도 봤어?”
[아뇨. 희한하게 그건 안 보이더라고요.]
보이지 않는다니?
상대가 유령인 것도 아닐 텐데.
그는 눈을 동그랗게 뜬 나를 보며 어깨를 으쓱였다.
[글쎄요. 정령들이 말해줄 수도, 보여줄 수도 없대요. 그 산신이란 게 예사로운 놈이 아니긴 한가봐요.]
“흐음…….”
산짐승들을 맘대로 부리고, 벼락을 떨어뜨릴 수 있는 그리폰…….
확실히 예사로운 놈이 아니지.
이젠 그리폰이 맞는지도 의심스럽다.
아니, 어쩌면 그리폰이 아니라 그 옆에 붙어있을 엘프의 짓일지도 몰라.
놈이 그리폰 뒤에 숨어서 이리저리 술수를 부리며 산신이라 자칭하는 걸 수도 있잖아.
“하…… 그렇다고 뭔가 대비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래. 별 수 없으니까 얼른 들어가서 잠이나 자라. 너 눈 절반 감겼다.”
메린의 가시 돋힌 말투에, 나도 모르게 움찔 놀라며 그녀를 쳐다보았다.
……오오, 저 건조한 눈빛!
당장 안 들어가면 내 손수 네놈을 던져버리겠다고 말하는 저 눈빛을 보라!
……아니, 진짜로 저지를 거 같은데.
“아, 넵. 안녕히 주무세요. 내일 뵙겠습니다.”
“오냐.”
그런 짓을 당하면 여러모로 곤란하므로, 나는 얌전히 천막에 들어가 자리에 누웠다.
“……”
머리를 땅에 대자마자 눈꺼풀이 바로 스르르륵 감겨오기 시작했다.
꼭 장사 끝난 상인이 잽싸게 가게 문 닫는 것 같군.
그나저나 등산이 진짜 빡세긴 빡셌어.
와아, 오늘밤은 진짜 잘 자겠다!
……그렇게 채 생각을 마치기도 전에, 의식이 저 밑으로 가라앉아버렸다.
다음날, 블루벨은 우리 앞에 딱 한 걸음 정도만 앞서 가기 시작했다.
저만치 앞에 가서 우리가 오길 기다리던 어제와는 완전 딴판이었다.
한동안 묵묵히 침묵을 지킨 채 걷던 그녀는, 느닷없이 입을 열어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이 앞에 있는 엘프는 내 학교 동기야. 학교가 뭔지 알아? 여러 아이들을 한곳에 모아서 교육하는 곳이야. 나는 거기서 전투기술을, 그 애는 소환술을 배웠지.”
“소환술? 마법이야? 마법도 쓸 수 있어?”
‘숲의 일족’이라고 자칭할 정도이니, 정령이나 자연물들을 다루는 능력만 있을 줄 알았는데.
그러고보니 위슨이 살던 섬에서, 정령들이 옛 기억을 보여줬었지.
대현자 마일린의 제자들이 섬 바깥 여기저기로 나갔다고 했어.
그 중 엘프도 있었으니, 제 고향에 가서 마법을 전수했는지도 모른다.
“아니.”
……그러나 블루벨은 내 추측을 단칼에 부정해버렸다.
흑, 그럴싸한 추측이라 생각했는데.
“마법은 마녀들이 자연을 제멋대로 일그러뜨리고 비트는 수상쩍은 힘이잖아. 우리가 쓰는 힘은 돌에렛…… 어머니 나무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순리라고.”
우와, 뒤쪽에서 엄청난 시선이 느껴져!
내 등에 꽂히는 건 아닌데, 그래도 엄청나게 이글거리고 있어!
슬쩍 돌아보니 위슨이 굉장한 눈초리로 이쪽을 빤히 보고 있다.
……어우씨, 쟤 초점 없어진 거 같은데.
어지간히 녀석의 신경을 건드는 말이었던 듯했다.
적개심의 대상인 블루벨 역시 그 시선을 알아차렸지만, 그녀는 뒤를 힐끔거리며 콧방귀 한 번 뀔 뿐, 별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소환술은 ‘숲의 자녀’들에게 어머니 나무의 표식을 새겨 두고, 그들이 필요할 때 불러내는 힘이야. 켄타우로스를 불러서 전령으로 쓰거나, 바르그를 불러서 무언가를 찾거나…….”
“……말 끊어서 미안한데, 어디가 순리라는 거야? 서로 합의라도 해?”
아무리 봐도 그냥 냅다 불러내서 일 시키는 분위기인데.
아니면 뭐, 위슨의 정령처럼 계약이라도 해서, 그 증표로 표식을 새기는 건가?
“숲은 어머니 나무에게서 태어나, 그 품에서 자라. 그리고 우리 엘프는 어머니 나무의 적자로서 지성을 갖고, 그들을 이끌도록 만들어졌어.그들이 우리의 지시를 따르는 것 자체가 당연한 이치이자 순리야.
원래는 표식 같은 것도 필요 없었어. 그런데 세대를 거치면서 문제가 생긴 건지, 말만으로는 우릴 따르지 않게 됐거든. 그래서 만들어진 게 소환술이야.”
“그렇구나.”
왜 쓸데없이 콧대가 높은 건가 했는데, 조상 대대로 내려져 온 콧대였구나.
엄청 거슬리는군.
그보다 저 말, 어디서 들은 적 있는 거 같아.
……아, 그래. 옛날에 어떤 귀족이 그랬었지.
자신에겐 푸른 피가 흐르고, 이것은 영지민을 지배할 자격이 있는 귀한 자라는 증표이니, 잠자코 자신에게 복종하라고.
그리고 그 귀족은 결국, 교단 사제가 이끄는 반란군에게 죽었다고 한다.
반란군 대부분이 사제였는데, ‘푸른 피가 흐른다’는 말이 사제들의 신경을 건드렸다고 했던가?
“아무튼 그 애는 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여행을 떠났어. 세계에 아직고대종이 남아 있을 거라면서.”
“고대종?”
“이천 년 전까지만 해도 이 세계엔 숲이 가득했어. 어머니 나무 외에도 곳곳에 생명수가 있었고.
뭐, 산 아래쪽에 있던 건 너희 인간들의 손에 하나 둘 불타고, 지금은 남아 있지 않지. 맘에 안 들지만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야.
너희 입장에선 몬스터를 계속 만들어내는 나무이니까, 없애고 싶었겠지.”
아무런 감정도 담기지 않은 목소리로, 그녀는 계속 덤덤히 말을 이었다.
“고대종은 그런 생명수들의 힘을 독보적으로 받은 자녀들이야. 너희 말로는 ‘태초의 몬스터’라 하면 되겠네. 이따 보게 될 산신도 그 고대종, 그리폰의 원조이지.”
“잠깐, 블루벨.”
나는 걸음을 멈추었다.
그러자 한 걸음 앞서 가던 블루벨도 발을 멈추고, 나를 살짝 돌아보았다.
“……어제는 답을 못 들었지. 다시 한번 묻겠어. 당신, 어떻게 거기까지 알고 있는 거지?”
“배웠어.”
“배웠다고? 그 학교라는 곳에서?”
살짝 돌아본 그 자세 그대로,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오륙백 년 전, 이 산엔 확실히 그리폰의 고대종이 살고 있었어. 그리고 너희 인간들이 신으로 숭앙하다가, 쫓아냈지.
웃기지 않아? 멋대로 흘러 들어와서 살기 시작한 주제에, 멋대로 신으로 숭배하다가, 멋대로 악마이니 이단이니 생난리를 쳐서 쫓아내다니. 그 고대종은 그냥 산에 살고 있었을 뿐인데.”
빈정거리는 듯한 말투에, 내 뒤쪽에 있던 누군가가 작게 웃음을 흘리는 게 들렸다.
무척이나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은 듯한 웃음소리였다.
참고로 아까 느꼈던 그 이글거리는 적개심은, 여전히 활활 타오르고 있다.
하아…… 나 왜 하필 중간에 서 있는 걸까?
괜히 내가 긴장되잖아. 돌겠네, 진짜.
나는 바싹 마르는 듯한 목을 애써 움직여, 목소리를 꺼냈다.
“오륙백 년 전이라며. 그런 옛날 일이 기록으로 남아 있는 거야?”
“당연하지.우리에겐 고작 한 세대 전 일이니까.”
“……!”
오륙백 년이, 한 세대……?!
그렇게 오래 사는 종족이, 숲에만 틀어박혀서 나오지 않는다고?
인구 문제 같은 거 없는 건가?
아니, 그보다도……
“블루벨, 당신 몇 살이야?”
“170살.”
“우와.”
그만큼이나 살면서 전투기술을 갈고 닦았으니, 한 번에 화살 세 개씩 쏘는 건 식은 죽 먹기이긴 하겠네.
블루벨이 메린과 비등하다고 할 게 아니라,메린이 이 엘프에 뒤지지 않는다고 놀라야 했던 거구나.
그보다 170살이면, 마녀들이 생기기 전부터 살았다는 거잖아.
……아, 그렇구나.
블루벨이 마녀들을 싫어하는 건, 단순히 동족을 납치했다는 말만 듣고 그런 게 아니었어.
“당신, 마녀들이 숲에 쳐들어온 걸 본 적이 있구나.”
“그래, 맞아. 나에게 마법이란 걸 쏴대고, 내 눈앞에서 동족을 납치해갔지. 그 마녀들이 끌고 간 건 어린애뿐만이 아니야. 막 결혼식을 올리려는 신부도 사라졌지.
……그 꼴을 이 두 눈으로 똑똑히 봤는데, 어떻게 용서할 수 있겠어?”
분노 어린 시선이 번뜩이며, 여전히 적개심으로 이글거리는 위슨을 사납게 노려보았다.
두 시선 사이에 불꽃이 튀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금방이라도 터질 듯한 긴장이 감돌았다.
“잠깐, 위슨은,”
“알아. 쟤는 그냥 피해자겠지. 그래도 마법을 쓰잖아. 거슬리는 건 어쩔 수 없다고. 난 너처럼 그렇게 딱 구분지을 수 없어.
아니, 그게 되는 네가 이상한 거야.”
“……”
괜히 끼어들었다가, 아무 죄 없는 나만 이상한 놈 취급을 받고 말았다.
이 녀석이 어제 산에 오르기 전에 했던 것처럼, 그게 왜 안 되냐고 받아치려다가 쓸데없이 얘기가 길어질 것 같아 그만두었다.
그 대신, 나는 손을 내저으며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아무튼 소환술은 표식을 남긴 짐승이나 몬스터를 불러오는 거지? 산신이 그 고대종일지 어떻게 알아? 당신 동기가 뒤에서 술수를 부린 것일지도 모르잖아.”
“간단해. 소환사는 벼락을 내릴 수도, 보호막을 펼 수도 없어. 하지만 고대종은 가능해. 자연을 휘두를 권능이 있으니까.”
정령을 이용한다면 엘프도 흉내낼 수 있긴 하다.
그러나 지금의 엘프는 정령에게 그런 명령을 내릴 수 없다.
위슨의 정령을 보듯이, 지금의 정령은 엘프를 고분고분 따르지 않는다며 그녀는 씁쓸히 웃었다.
“그러니 그 애가 같이 있는 ‘산신’은 진짜 고대종이야. 어떻게 지금까지 살아있는 건지 모르겠지만, 뭐, 고대종은 수명에 한계가 없으니 어디 잘 숨어 있었겠지.
……왜 독수리(vulture)들을 데리고 있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말야. 보통은 매나 수리(eagle)를 데리고 있어야 할 텐데. 뭐, 곧 알게 되겠지.”
더 물어볼 거 있어?
그렇게 덤덤하게 묻는 블루벨을 보며, 나는 자연스럽게 떠오른 질문을 고스란히 입 밖에 내었다.
“왜 그걸 다 알려주는 거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묵묵히 길안내만 해도 됐을 텐데.
그랬다면 우리가 상황을 파악하는 데에 시간을 더 쏟고, 어쩌면 이길 기회를 놓쳤을지도 모르는데.
그런데도 블루벨은 묻지도 않았는데 먼저 이야기를 꺼내고, 내 질문에도 꼬박꼬박 성실하게 대답해주었다.
밥을 준 거에 대한 보답인가?
“……”
블루벨은 천천히 몸을 돌렸다.
비탈진 길에 서서 나를 똑바로 내려다보며, 그녀는 입을 열어 대답했다.
“나는 너에게 숨길 게 없으니까.”
진한 녹색 눈동자가, 무언가 의미를 품은 채 나를 비추었다.
“하지만 넌 아니지? 나에게 할 말이 있지 않아? ……뭐 숨기고 있는 거 없어?”
“……”
……알았구나.내가 용사라는 걸 눈치챘어.
그 생각이 아침 안개처럼 조용히 피어올라, 내 머릿속에 자연히 스며들어왔다.
뭐, 바보가 아닌 이상 자연히 깨닫겠지.
산신과 엘프가 용사를 노린다고 말한 건 다름아닌 나다.
그런데 바로 그 엘프가 블루벨에게 연락을 한 거다.
길을 안내하겠다고 자처한 걸 보면, 우리를 데려오라고 그 엘프가 부탁이라도 한 거겠지.
용사를 죽이려는 놈이 어떤 인간을 데려오라고 한다.
그것도 다분히, 그 인간을 죽이려고 다이어울프를 보낸 다음에.
……여기서 나를 의심하지 않으면, 이 엘프는 인생 허투루 산 거지.
물론 그 밖에도 블루벨 나름대로 다른 근거들이 있을 거다.
어쨌든 그녀는 내 정체를 알아차렸고,그런 그녀가 내게 묻고 있다.
뭐 숨기는 거 없냐고.
어째서 즉각 달려들지 않고, 저렇게 간접적으로 묻는 건지는 모르겠다.
뭐, 지금이라도 솔직하게 말해주면 용서라도 해주겠다는 심산인가?
아니, 말도 안 되는 소리.
내가 용사라는 걸 고백하는 순간, 블루벨은 즉각적으로 나를 적대할 것이다.
그게 그녀의 임무이니까.
“숨기는 거? 당연히 있지.”
“뭔데?”
나는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안 알려줘. 댁한테 그걸 알려주면 숨기는 의미가 없잖아.”
“……”
솔직하게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그녀에게 거짓말을 할 수는 없었다.
무슨 뜻에서 그런 건지는 몰라도, 어쨌든 저 고집스러운 엘프는 숨기지 않고 전부 이야기해주었으니까.
그런 사람에게 ‘숨기는 거 없다’고 속이는 건 도리가 아니지.
“나도 하나 묻겠는데.”
여전히 나를 내려다보는 그 눈을 마주보며, 나는 그녀에게 물었다.
“용사에게 개인적인 원한이 있어서 죽이려는 거야?”
“……아니. 그냥 임무일 뿐이야. 하지만,”
잠시 끊긴 그 틈 사이를 한숨으로 메우며, 그녀는 나지막이 말을 이었다.
“……하지만, 곧 원한이 생길지도 모르겠어.”
“……”
그 말을 마지막으로, 그녀는 다시 몸을 돌리고 천천히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 뒤를 따르려는데, 갑자기 팔이 붙잡혀버렸다.
고개를 살짝 돌리자, 메린이 살짝 눈썹을 찡그리며 나를 보고 있었다.
“……카엘.”
내 이름을 부르는 그녀의 작은 목소리엔, 아주아주 희미한 불안이 섞여 있다.
블루벨의 저 말에서 무언가 불온한 느낌이라도 받은 모양이었다.
가만히 그 손을 잡고, 빙그레 웃어주었다.
“괜찮아. 어차피 머지않아 일어날 일이었잖아. 싸우게 되겠지만, 네가 있으니 어떻게 되겠지.”
“……그거 말고.”
“엉?”
전투 말고 얘가 걱정할 만한 게 있나?
아니 뭐, 절벽이 있는 곳으로 올라가는 거니까 떨어지는 게 걱정이라면 걱정이겠지만…….
고개를 살짝 갸웃거리고 있자, 내 팔을 쥔 그녀의 손에 힘이 살짝 들어가며, 마침내 그녀의 입에서 대답이 흘러나왔다.
“……너, 욕 먹는 거에 약하잖아.”
“……”
…………
……놀랐어.
설마 메린의 입에서 저런 말이 나올 줄이야.
그녀가 어떤 이유 때문에 그걸 걱정하는 것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상관없어. 궁금하지 않아.
평생 몰라도 돼.
그 생각을 했다는 것 자체가 이렇게 기쁜데, 그딴 게 무슨 상관이야?
그녀의 손을 더 힘있게 쥐었다.
나 지금 굉장히 멍청하게 풀어진 얼굴을 하고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머릿속 한편에 희미하게 떠올랐다.
“괜찮아. 진짜야.”
어차피 저 엘프에게서 무슨 말을 듣던, 어릴 적에 들은 그 말들과는 종류부터 완전히 다르다.
적에게 듣는 비난과 원망 따위는 그냥 다른 귀로 흘려버리면 되는 건데.
그녀는 내가 그 말들을 마음에 담아둘 줄 아는 모양이다.
그 귀여운 착각이 재미있고, 그녀가 나를 생각해주는 게 너무 기뻐서 절로 웃음이 나왔다.
“가자.”
“……”
천천히 팔에서 떼어낸 그녀의 손등을 감싸쥔 채, 블루벨의 뒤를 따라 먼저 걷기 시작했다.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는 중에, 그녀의 손가락들이 내 엄지손가락을 살며시 감싸는 게 느껴졌다.
간질거리는 느낌과 함께, 왠지 모르게 내 속에 은근히 자리잡고 있던 불안이 밀려나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지금은 괜찮아.
그녀는 내 손을 뿌리치지 않아.
……아마 나는 그녀를 불행에 빠뜨리는 죄인일 거다.
언젠가는 그녀가 그 사실을 내게 들이밀며, 나를 거부할지도 몰라.
하지만 적어도 지금은, 그런 음울한 생각은 털끝만큼도 떠오르지 않는다.
손 안에 느껴지는 이 따스함이 나를 단단히 잡아주고 있으니까.
그러니 이 앞에 뭐가 있든 상관없다.
산신이든 엘프든 뭐든,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헤쳐나갈 수 있어.
반드시 헤쳐나갈 거야.
몸이 너덜너덜해지도록 구를지라도, 반드시.
그녀의 손을 굳게 잡으며 다짐했다.
비탈길을 올라, 잠시 숨을 돌린 후, 또 다시 작은 언덕길을 올라갔다.
뻥 뚫린 시야에 펼쳐진 광활한 하늘과, 그 밑에 깔려 있는 나무 꼭대기들.
그리고 눈앞에는, 아무런 장애물도 없이 평평하게 펼쳐진 땅이 있다.
평소라면 그 탁 트인 시야에 펼쳐진 풍경에 숨을 삼켰겠지만, 안타깝게도 다른 게 눈에 들어오는 바람에 감탄할 틈이 없었다.
우리가 방금 올라선 그 평탄한 땅에, 굉장히 인상적인 게 있었던 것이다.
“블루벨.”
“……”
“블루벨?”
음, 그대로 얼어붙은 듯이 서 있기만 하고 아무 대답이 없다.
아무래도 저 광경은 전혀 예상을 못한 모양이군.
뭐, 그렇겠지.
이걸 누가 예상할 수 있을까?
“흐, 흐흐, 으흐흐흐……! 드디어 왔구나…… 용사……!”
거의 해골이나 다름없을 정도로 비쩍 마른 엘프와……
“끄르르르…….”
……그 옆에서 거죽이 흘러내리고 있는, 거대한 그리폰의 모습을.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