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6화 〉 132화 : 비틀린 존재 (1)
* * *
해골 직전인 엘프는 나를 향해 연신 히죽거리고 있었다.
“흐흐흐……! 마침내, 마침내 왔어! 마침내 복수의 때가 왔다아아!!”
“네? 아니, 보자마자 뭔 개소리신지…….”
……어라? 왜 존댓말이 튀어나오는 거지?
말을 해놓고, 나 스스로 조금 어처구니가 없었다.
아니 뭐, 저 엘프가 블루벨과 같이 학교를 다녔다고 했으니 백 살은 훌쩍 넘었겠지.
게다가 머리도 하얗고.
그래도 적이잖아?
적인데 나이가 많건 머리가 허옇건 뭔 상관이야.
내가 언제부터 적에게도 꼬박꼬박 존댓말을 했다고…….
……근데 또 저 몰골에 대고, 평소처럼 반말에 욕 섞으면서 막말을 퍼붓는 것도 마음이 불편하다.
초췌한 것도 정도가 있지.저게 뭐야, 대체?
진짜 가죽만 붙어 있는 수준이잖아!
괜히 더 기분 나빠!
그나저나 저 엘프는 날 알고 있는 모양이다.
희한하네, 아무리 봐도 처음 보는 얼굴인데.
내가 아무리 사람 얼굴 잘 까먹는다고 해도, 저 몰골은 절대 안 잊을 거 같은데.
고개를 갸웃거리자, 가죽 붙은 해골 엘프가 길길이 날뛰며 소리쳤다.
“날 모른다고?! ……아, 맞아, 그땐 잠깐 다른 놈의 몸을 빌렸었지.
그럼 이건 기억하겠지?! 네놈이 다짜고짜 쳐날린 주먹! 거기 망할 년이 무참히 죽여버린 내 귀여운 서펀트!!”
“음…….”
상당히 깊은 원한이 느껴지는 말투였기 때문에, 나는 팔짱을 끼고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다짜고짜 주먹을 날리고……
메린이 서펀트를 죽였다…….
음…… 으으으으음………….
“……”
…………어떡하지?
전혀 기억이 안 나!!
어이씨, 여기서 기억 안 난다고 하면 쓸데없이 화만 더 돋굴 거 같은데!
그래, 저 놈이 메린도 지목했었지?
메린은 뭐 기억하고 있을지도 몰라.
나보다 기억력 좋으니까.
그녀에게만 들리도록 슬쩍 속삭였다.
“너 뭐 기억나는 거 없냐?”
“글쎄…… 야, 카엘,서펀트가 뭐냐?”
“글쎄……, 뭐였더라?”
분명히 알았던 거 같은데.
이름 느낌상 몬스터인 건 확실하고…….
이번엔 슬쩍 뒤를 보며 물어보았다.
“서펀트가 뭔지 알아?”
“뱀인데요. 물에 사는 큰 뱀이요.”
물에 사는 큰 뱀?
그런 놈을 메린이 없앤 적이 있다고?
애초에 쟤가 물에 들어갔던 적이…………있다!
맞아, 마녀의 숲에 가기 전, 그 호숫가!
이게 왜 기억이 안 났지?
그때 내 입으로 그 아저씨가 서펀트를 부렸다고 위슨에게 말까지 했었는데.
메린에게 서펀트가 뭔지 알려주자, 그녀가 눈을 살짝 동그랗게 뜨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 뱀? 그게 서펀트였구나. 어쩐지 엄청 크다 했는데 몬스터였군.”
“……너 그게 일반 뱀으로 보였냐?”
“어.”
“……”
대체 얼마나 커야 이 녀석에게 몬스터로 보이는 걸까?
집 정도는 우습게 삼켜버릴 만큼 큰 놈이어야 하나?
아무튼, 그럼 그때 저 해골 같은 엘프가 그 아저씨의 몸으로 골렘을 소환했던 거군.
한 달 전이라면 딱 섬에 있었을 때니까 시간대도 얼추 들어맞아.
나는 놈에게 삿대질을 하며 호기롭게 외쳤다.
“호숫가 낚시꾼, 레이크 아저씨에게 붙어있던 놈이구나! 그때 된통 깨지고 여기 처박힌 모양이로군?!”
“……아니야.”
여전히 제자리에 못이 박힌 것처럼 우뚝 서 있으면서, 블루벨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넌 여길 빠져나간 적이 없어.한 달 전부터 계속 여기에 있었어.그렇지?”
“뭐? 계속 여기에 있었다니, 그럼 그 아저씨는 어떻게…….”
“이야~ 정말이지, 별별 걸 다 보게 되네요!”
내 말을 자르듯이 끼어들며, 내 뒤에 있던 로나가 나를 제치면서 앞으로 나섰다.
등에 매고 있던 철퇴를 두 손에 든 채로.
“자랑스러운 ‘숲의 일족’님이 어떻게 하면 이렇게까지 나락으로 처박힐 수 있는 건지 도통 모르겠어요! 용사를 죽이려고 하질 않나, 그렇게 좋아하는 순리를 어그러뜨리는 사술법사가 되질 않나……!”
“사술? 로나, 그게 무슨 소리야?”
로나는 한손으로 철퇴를 들어, 낄낄거리는 엘프의 옆에 선 거대 그리폰을 가리켰다.
“카엘 님, 저게 살아있는 걸로 보이세요?”
나는 그녀가 가리킨 거대 그리폰을 보았다.
당장이라도 거죽이 죄다 녹아서 흘러내릴 듯한 몰골, 멍청하게 벌어진 입, 털이 몽땅 빠져버린 머리.
그리고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돌아가 있는 눈동자.
……아무리 좋게 보더라도 살아있다고 할 수 없는 상태였다.
“아니, 전혀.”
짧게 대답하자, 로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저건 시체에요. 저 엘프가 다시 살린 거죠. 즉, 저 엘프는 소환사가 아니라강령술사에요.
그러니 호숫가의 그 아저씨에게 들러붙을 수 있었죠. 제 몸에서 영혼을 뺀 다음 그 아저씨 몸에 빙의하면 되니, 여기서 움직일 필요도 없고요.
그나저나 참 운도 좋네요. 고대종이라 했던가요? 시체 상태가 좋은 거 보니, 죽은 지 얼마 안 된 걸 찾았나보죠?”
“……아니야.”
그 말을 부정한 건 그리폰의 옆에 있는 해골스러운 엘프가 아닌, 블루벨이었다.
털썩, 힘없이 제자리에 무릎을 꿇으며,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죽은 지 얼마 안 된 게 아니야. 너…… 너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어떻게 네가 이런 끔찍한 짓을 저지를 수가 있어?!”
“흐흐, 흐흐흐흐……!”
“대답해, 블랙펄! 저걸 되살리는 데에 얼마만큼의 시체를 모은 거야?! 얼마만큼의 피를 먹인 거냐고!”
블랙펄?
흰 머리에게 검정색 이름이 붙다니, 굉장히 안 어울린다.
블루벨의 외침이 잔향을 퍼뜨리며 사라져갔다.
바람과 함께 찾아온 적막 속에서, 해골스러운 엘프는 두 팔을 활짝 벌리며 음산한 미소를 지었다.
“셋.”
“셋……?”
세 명……이란 건 아니겠지.
설마 세 마을……?!
경악하는 와중에, 놈의 미소가 품은 음산함이 더욱 더 짙어졌다.
“세 개의 숲. 세 개의 마을. 세 개의 성.”
“미친 새끼가……!”
마을로도 모자라서 성을 세 채나 쓸어버렸다고?
고작 저 괴조를 되살리려고?!
염병할 귀쟁이 새끼들이, 왜 하나같이 남의 동네에 지랄이야!!
곧장 튀어나가려는데, 옆에서 또 팔이 콱 잡혀버렸다.
뿌리치려고 해도, 하도 단단히 잡혀서 꼼짝도 하지 않는다.
답답함에 더 열불이 터져 고개를 홱 돌리자, 주홍빛 눈동자가 딱딱한 눈초리로 나를 쏘아보고 있었다.
“메린, 이거 놔. 저 새끼가 지금……!”
“함부로 튀어나가지 말라고 안 했냐? 머리 식혀, 등신아.”
“……”
머리에 열 올려서 네가 뭘 어쩌려고? 냉정하게 덤벼도 어려울 판에.
……그렇게 묻는 그녀의 눈동자에, 나는 차마 반박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녀의 시선을 피하며 분통 섞인 한숨을 쉬었다.
젠장, 저런 말을 듣고도 가만히 때를 기다려야 하다니.
울컥 솟아오른 분통은 좀처럼 사그라들지 않았다.
그러니 그녀가 아직 내 팔을 잡고 있는 거겠지.
나 역시 굳이 그녀의 손을 풀려 하지 않았다.
그리고 블랙펄, 이라 불린 우라질 엘프는 흐느적거리는 몸짓으로 그리폰에게 다가가, 그 몸통을 쓰다듬었다.
……손이 가는 데마다 깃털이 우수수 떨어지는 게, 정말이지 섬찟하기 그지없다.
“그럼에도 부족하다. 보다시피 뇌는 다시 살려냈으니 몇 가지 능력은 쓸 수 있는데 말이야. 몰골이 영~ 말이 아니란 말이지? 권위 있는 목소리도 못 내고.
하지만 괜찮아. 괜찮고 말고. 이 상태로도 충분히 용사를 죽일 수 있을 테니……!”
“……날 우습게 보는구만? 그래, 해보자고. 저 반 살아난 그리폰은 어쨌든, 반 뒤져가는 댁은 내가 손수 마저 죽여줄게.”
그때도 골렘이 문제였지, 저 놈이 수작을 부리던 그 아저씨는 전혀 문제가 안 됐다.
내가 칼자루를 쥐고 노려보자, 블랙펄은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씨익 웃었다.
……우와, 소름 돋아!
진짜 지금이 낮이라서 천만다행이다.
저녁이었으면 보기만 해도 정신력 깎였을 거 같은데.
“하, 지금은 좀 달라졌다 이거냐? 크크, 크흐흐……! 그래봤자 한 달! 조무래기가 발전해봤자 얼마나 발전했겠나!
……게다가 나 혼자도 아니고 말이지? 안 그러냐, 블루벨? 내 절친한 친구여.”
뼈의 윤곽이 훤히 보이는 손을 내밀며, 가죽만 붙은 해골이 블루벨을 보았다.
바닥에 힘없이 주저앉아 있던 블루벨은, 그 말에 천천히 일어나더니,
놈에게 활을 겨누었다.
“허? 무슨 속셈이지?”
“대답해. 왜 이런 끔찍한 짓을 저지른 거지?”
“끔찍한 짓이라니? 뭐가?”
“저 고대종을 되살린 거 말고 뭐가 있어?! 태어난 생명은 다시 죽어서 땅으로 흩어지는 게 순리야!! 인간이면 몰라, ‘숲의 일족’의 일원이 그 순리를 거슬러?! 감히 그 순환에 끼어들어?!”
그녀의 분노 섞인 목소리가 메아리치며 주변에 울려퍼졌다.
그럼에도 주눅드는 기색 하나 없이, 블랙펄은 그 섬찟한 미소를 계속 짓고 있었다.
팽팽하게 활 시위를 당긴 채, 블루벨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그래, 넌 내 친구였어. 그러니 이유는 들어줄게. 그 다음은 돌에렛의 이름으로 네놈을 처단하겠다!”
“돌에렛…… 흐흐, 간만에 듣는 이름이군. 그러고보니 폐하는 잘 지내시나 모르겠네.”
“헛소리하지 말고 대답이나 해!”
“흐흐, 이유를 듣고 싶다고? 좋아, 들려주지.”
근처 바위에 턱 걸터앉고, 블랙펄은 고개를 까닥이며 말을 이었다.
“너도 알다시피 난 세계에 아직 고대종이 남아있을 거라 믿었어. 그래서 70여년간 세계를 돌아다녔지. 그 결과가 어땠을 거 같냐?
없어. 아무것도 없었다고! 말라 비틀어진 시체조차 남아있지 않았지!
……이 놈 하나 빼고는. 뭐, 내가 찾았을 땐 뼈밖에 없었지만 말이야. 그래서 되살렸어.”
음? 내가 깜빡 졸았나?
중간이 훌쩍 날아가버린 거 같은데.
뼈를 찾은 것까진 알겠는데, 왜 거기서 되살린다는 결론이 나오지?
어떻게 돼먹은 사고방식이야?
나만 그런 생각을 한 게 아닌 듯, 뒤에서 위슨이 크게 소리쳤다.
“어미 뒤진 귀쟁이 새끼야! 물 빠진 뼈다귀 찾은 거랑 너 새끼가 거기다 생명력을 먹여서 살 붙인 거랑 대체 뭔 상관이냐, 이 노망난 새끼야!”
“……?!”
어, 어미 뭐?!
충격적인 호칭에 뒤를 돌아보자, 위슨이 재빨리 고개를 젓더니 어깨 위의 파랑새를 가리켰다.
웃긴 건, 파랑새도 날개를 펼쳐서 위슨을 가리켰다는 거다.
……둘 중에 누군가는 거짓말을 하고 있어!
뭐, 나한테 한 게 아니니 누가 했든 상관없지만.
“뭔 상관이냐고? 이미 다 죽었다면 되살리는 게 당연한 거 아니냐? 몇 백, 몇 천의 생명을 바치게 되더라도! 고대종이 되살아날 수 있다면 희생할 가치가 있고말고!”
“너 그거 진심으로 하는 소리야?! 블랙펄, 미친 소리 그만하고 지금 네 꼴을 봐. 누구보다도 아름다웠던 네가, 순환에 개입한 저주를 받고 어떤 꼴이 됐는지 보라고!
도무지 이해할 수 없어! 대체 왜 그렇게까지 고대종에 집착하는 거야?!”
팽팽하게 당겨진 활 시위를 붙잡은 채, 블루벨은 갈라진 목소리로 소리쳤다.
엇나가버린 친구에 대한 분노, 안타까움, 그리고 슬픔이 한데 섞여 있는 목소리였다.
그러한 격정이 휘몰아치는 목소리를 듣고도, 블랙펄은 느긋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어쩐지 여유까지 느껴지는 모습이었다.
“상관없어. 아름다움? 그딴 거 얼마든지 잃어도 돼. 저주? 얼마든지 오라지!
……아아, 그렇구나. 네가 날 이해 못하는 것도 당연해. 블루벨, 너에겐 내 목표를 말해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지. 안 그러냐?”
바위에서 몸을 떼고 꼿꼿하게 서서, 영락한 엘프는 두 팔을 활짝 벌렸다.
“이제 알려주지. 너도 들으면 날 이해할 수 있을 거다.
블루벨, 내 목표는 단 하나야. 그때도 지금도 변함없지. 바로 복수하는 것……!”
“복수? 누구한테?”
“누구긴, 인간 놈들이지. 놈들에게 불태워진 생명수들, 쓰러진 나무들, 꺾여진 꽃들, 터전을 잃고 쫓겨난 숲의 자녀들……!
너도 알지? 우리 일족이 옛 영광을 잃은 건 놈들 때문이라는 걸! 놈들이 생명수들을 불태운 탓이라는 걸!
그러니 복수해야지. 우리의 인내가 한계에 달했음을 보여줄 때다!”
남의 교육 내용에 대해 무어라 하고 싶진 않지만, 소리 높여 외치고 싶은걸?
지랄하네, 개소리 까지 마라!
……라고.
왜냐?
난 그 생명수라는 걸 지금 처음 들었으니까.
그 말은 즉,인간이 생명수를 불태웠다는 건 역사서나 성서 어디에도 기록이 되어 있지 않다는 뜻이다.
어쩌면 수도의 왕립도서관이나 왕실기록소에는 한 줄이라도 기록이 남아있을지도 모르지만, 아무튼 나는 모른다.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인간은, 전혀 모르는 일이라도 해도 좋을 거다.
애초에 우린 초대 국왕이 언제 등극했는지도 모르는구만.
지금 국왕이 13대손이라니까 대충 계산해서 육칠백 년 정도 전이라고 추측하는 정도이지.
한 달 좀 전까지만 해도, 난 내가 사는 나라 이름도 몰랐는걸.
이게 다 대충 이백 년 전에, 어떤 미친놈이 책은 불경하다며 왕실기록소를 홀라당 태워버린 탓이다.
그 놈 때문에 왕실의 족보는 물론, 이 대륙의 역사나 설화 등등, 여러 기록들이 소실되고 말았다.
물론 그 놈은 이미 뒈졌지만, 왕국의 모든 지식인은 여전히 정기적으로 그 놈의 영혼이 지옥불에서 계속 헤엄치고 있기를 기도하고 있다.
나도 그 중 하나이고.
아무튼 그 생명수라는 게 그렇게 대단하다면, 분명 없앨 때마다 기록이 남았겠지.
아니면 할머니의 옛날이야기나, 동네 축제 노래에서라도 그 흔적을 찾을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숲에 둘러싸인 깡촌 중의 깡촌인 내 고향, 놋지빌에도 그런 이야기는 전해져 내려오지 않는다.
어쩌면 초대 국왕이 있기 전에……
……아니야. 말이 안 돼.
초대 국왕이 뭐하던 사람인데?
내가 이번에 잡아야 하는 그 드래곤을 봉인시켰던 다섯 명의 영웅 중 하나잖아.
그리고그 드래곤 이전에도, 인간들은 드래곤들 때문에 곤란을 겪은 적이 있다.
그걸 돕다가 대현자 마일린이 엘프들에게서 쫓겨나, 그 섬에 정착하게 된 거였지.
기록으로 남지 않은 그 과거의 이야기를, 나는 정령 덕분에 확실히보았다.
……그 때문에 느낄 수 있었다.
무언가 이상해. 맞지 않아.
어디가 안 맞는지는 모르겠는데, 저 엘프의 말에 아주 강한 위화감이 느껴졌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블루벨의 분통에 찬 목소리가 다시 울렸다.
“아무도 너에게 그런 부탁을 하지 않았어! 아무도 너에게 순환을 깨면서까지 복수하라고 하지 않았다고!”
“흐흐, 그래서 블루벨, 날 쏘겠다고?”
“그래! 설령 내가 널 내버려둬도, 루 메호의 장로들이 네 꼴을 알면 널 죽이려고 할 거야. 어차피 죽을 거, 네 친구로서 내가 직접 안식을 내려주겠어!”
결의에 찬 그녀의 목소리가 벼랑에 울리자마자, 곧바로 광기 어린 웃음소리가 그 목소리를 덮어버렸다.
우스워 죽겠다는 듯이, 블랙펄은 허리를 굽히면서 숨 넘어갈 듯이 마구 웃음을 터뜨려댔다.
“날 죽이려고 해? 크크, 캬하하하! 아니, 네가 틀렸어. 루 메호는 날 죽이지 않아. 왜인 줄 알아?
그 장로들이 허락했기 때문이지!”
“뭐……?”
팽팽하게 당겨졌던 활 시위가 느슨해지며, 놈을 겨누었던 활이 천천히 바닥을 향했다.
블루벨은 내게 등을 돌리고 있는 탓에, 그녀의 표정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멀거니 선 그녀의 뒷모습에서 대강 추측은 할 수 있다.
아마 머리에 벼락을 맞은 듯한, 굉장히 텅 빈 표정을 짓고 있겠지.
“내가 이걸 보고하지 않았을 거 같냐? 내가 고대종을 찾길 누구보다도 간절히 바란 게 그 장로들인데! 흐흐흐!
딱 한 마디. 그 양반들이 딱 한 마디 하더군. ‘수고해라’.”
“……말도 안 돼…….”
“이게 지금의 루 메호다. 순리? 생명의 순환? 크크, 크흐흐! 그 따위 고리타분한 걸 주장하니까 우리가 이런 꼴이 된 거다! 방관자를 자처한 끝에 대륙 구석에 처박혔지!
……그러한 시대는 이제 끝났다. 우리가 이 대륙, 이 세계의 진정한 주인으로서 군림할 때가 왔어. 그 첫걸음으로,인간의 신이 택한 용사를 죽인다!
블루벨, 그게 폐하의 오랜 결단이야. 나는 그 뜻에 따라, 일족을 위해 헌신했을 뿐이다.”
블루벨은 그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죽은 자를 다시 살리는 사술을, 자신의 일족이 허용했다는 것에 큰 충격을 받은 듯했다.
그럼 이제 우리 차례인가?
로나는 나에게 발언권을 양보한다는 듯이, 나를 보며 어깨를 으쓱였다.
참 고맙기도 하지.
“연설 잘 들었고, 궁금한 게 있는데.”
“곧 죽을 놈이니, 특별히 대답해주지.”
“너 그 시체 살리는 능력 누구한테 배웠냐?”
빙긋.
놈은 그 보기만해도 섬찟해지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깊고 깊은 밤의 귀인. 끝없이 타오르는 화염의 바다에서 올라오신 분.”
마치 노래하며 춤을 추듯이, 놈은 이리저리 흐느적거리면서 두 팔을 벌리고, 하늘을 향해 고개를 쳐들었다.
“순환이라는 거추장스러운 사슬을 끊으신 위대한 분! 흐흐, 그 이름 앞에 엎드려라, 무지몽매한 놈들아! 나는 블랙펄, 위대한나베리우스의 제자이니라!!”
“아는 놈이구만.”
……나도 모르게 심드렁하게 대꾸해버렸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