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7화 〉 133화 : 비틀린 존재 (2)
* * *
까마귀 악마 나베리우스.
그가 누구인가?
오랜 옛날, 마법사들이 살던 섬에 출몰하여 대현자 마일린에게 퇴치된 후,그 섬 묘지의 고목에 봉인되어 있던 악마이자,
백여 년 전, 여마법사 하나를 꼬셔 마녀가 되게 하여, 결국은 그 섬을 ‘마녀의 숲’으로 만든 악마…….
그리고 대충 한 달 전에 소멸한 잡놈이다.
내가 성검을 쥐고, 메린이 휘둘렀었지.
생각해보니 그때가 제일 위기였던 것 같다.
잠도 제대로 못 잔 상태에서 새벽부터 뛰고 구르고 날았으니…….
그때에 비하면 이 미친 엘프는 귀여운 수준이다.
아니, 불쌍하다고 해야 하나?
쾅! 콰앙!
벼랑에 울려퍼지는 굉음을 흘려들으며, 머릿속을 깔끔하게 비운 채 앞을 보았다.
작은 소녀가 휘두르는 철퇴가, 금빛 궤적을 남기며 마구 바닥을 때리고 있다.
그 육중한 쇳덩어리가 노리는 건 흰 머리 엘프.
비쩍 마른 생선 같은 그 몸뚱아리를 완전히 납작하게 만들 심산이다.
“으아아악! 말 끝나자마자 덤비기냐, 이 비겁한 년아!”
“입 닥치고 얌전히 처맞으세요!”
“……”
사실 저게 시작된 지 얼마 안 됐다.
흰 머리 엘프, 블랙펄이 자신을 나베리우스의 제자라고 하자마자 곧바로 로나가 튀어나갔으니까.
그래도 저 마른 해골이 아직 입을 나불댈 수 있는 건, 놈도 엘프는 엘프라고, 블루벨처럼 땅 위를 미끄러지듯이 빠르게 움직이고 있기 때문이다.
“끄르르르…….”
그리고 흉측한 몰골의 거대 그리폰은 그저 가만히 서서 괴상망측한 울음소리만 내고 있다.
엘프를 지킬 생각이 없는 건가?
아니면 그것도 명령을 내려야 되는 건가?
명령이 있어야 움직이는 거면, 지금 없애버리면 되겠군!
나는 칼자루를 쥐고, 여전히 내 팔을 잡고 있는 메린을 쳐다보았다.
“……언제까지 잡고 있을 거냐?”
“기다려.”
“뭐? 야, 너도 알잖아. 이 틈에 저 그리폰을 조각내야지!”
적어도 어디 못 튀게 날개를 뜯어버려야 한다.
언제 저 엘프가 빈틈을 노려서 올라타고 튈지 몰라!
메린도 분명 그걸 알고 있을 터.
그런데도 그녀는 고집스럽게 내 팔을 놓지 않으며, 덤덤하게 말할 뿐이었다.
“그건 위슨이 하겠지. 넌 아직 안 돼.”
“그래그래, 넌 나중에 껴들라고.”
그런 우리를 지나치며, 위슨이 병 세 개를 양쪽 바닥에 휙 던졌다.
거북이와 스라소니, 그리고 늑대가 나타나 거대 그리폰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거북이가 이전에 봤던 것처럼 머리와 발을 등껍질 속에 넣고 세로로 굴러가며 그리폰을 한 바퀴 뺑 돌았다.
“……”
반응이 없다. 놈은 거북이가 이따금 다리를 툭툭 쳐도 요지부동이었다.
자기방어조차도 하지 않는 건가?
진짜 그냥 움직이는 시체구만.
……그러니 더더욱 지금 합류해서 없애야 하는데, 메린은 여전히 내 팔을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그녀는 저 앞쪽에서 벌어지고 있는 싸움조차 흥미가 없는 듯, 어느 한 방향만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다.
그 시선 끝에 있는 건……
아직 충격이 채 가시지 않았는지, 제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는 블루벨이었다.
……그렇구나. 메린 녀석, 저 엘프를 경계하고 있는 거야.
근데 그럴 필요 없지 않나?
블루벨의 목과 양 손목엔 아직도 위슨의 명령이 걸려 있는 끈이 채워져 있다.
나나 위슨을 죽이려고 하면 끈이 살을 지져버릴 텐데.
“메린,”
“안 돼.”
무슨 말을 할지 이미 다 안다는 듯이, 메린은 단호히 내 말을 가로막았다.
“저 끈 달았다고 안전할 거라 믿는 거냐? 그건 안심이 아니라 방심이다. 고통 따위 이 악물고 견디면 그만이야. 굳이 활을 쏠 필요 없이, 단검 들고 돌격하면 된다고.
너 저 엘프 움직임 몰라? 내가 제때 막을 수 있을 거란 보장이 어디 있냐?”
“그건 그렇지만…….”
나는 다시 한창 싸우고 있는 앞쪽을 보았다.
블랙펄은 여전히 간발의 차로 로나의 철퇴를 피하고 있었고, 거대 그리폰은 양 날개에 스라소니와 늑대를 각각 하나씩 단 채 멍하니 서 있다.
거북이는 할 일이 없으니까 그냥 도로 들어간 듯했다.
그 녀석, 위슨의 다섯 정령 중에선 제일 놀고 있지 않나?
……그보다 저 날개, 생각보다 엄청 튼튼한 거 같은데.
스라소니가 아무리 발톱을 휘둘러도 털만 빠지고, 잘려 나갈 기미가 전혀 안 보여.
설마 일반 검이 안 먹히는 부류인가?
“블루벨! 도와줘, 블루벨!!”
미친 엘프의 간곡한 외침이 들리자, 메린이 비어 있는 왼손에 대거를 쥐었다.
오른손은 내 팔고 있느라 검을 못 뽑는 탓이겠지.
……나 어디 안 도망가니까 잠깐 놔도 되는데.
“네 친구가 부르는데?”
“……”
메린의 말에도, 블루벨은 묵묵히 고개를 떨구고 있을 뿐이었다.
“싸울 거면 덤비고, 아니면 어디 잠깐 꺼져. 빨리 정해. 이 녀석 말마따나 저 그리폰 빨리 토막내야 되니까.”
“……”
여전히 잠자코 있는 블루벨을 재촉하듯이, 블랙펄의 목소리가 재차 날카롭게 울렸다.
“블루벨! 설마 아직도 모르는 건 아니겠지! 네가 데려온 그 인간 놈은 용사다! 아니면 뭐, 그새 용사에게 붙어먹은 거냐?! 일족을 배신할 작정이냐, 블루벨!!”
배신.
그 단어에 블루벨의 뾰족한 귀가 움찔거렸다.
그녀는 떨구었던 고개를 천천히 들고, 얼음처럼 싸늘한 눈초리로 나를 보았다.
……역시 싸우는 건가.
저 바싹 마른 멸치 놈이 블루벨의 의욕에 불을 당긴 모양이다.
내 팔을 잡은 메린의 오른손에도 긴장이 약간 감도는 게 느껴졌다.
이윽고 블루벨의 입이 열리며, 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일족의 뜻을 따라라. 숲을 사랑하라. 그 모든 것이 돌에렛의 의지로다.”
어떤 선서문 같은 것을 읊은 후, 그녀는 다시 고개를 떨구며 크게 외쳤다.
“그러니 난 널 도울 수 없어, 블랙펄!너는 순리를 거스른 죄인이니까! 여기서 죽어야 돼!”
“블루벨! 일족을 배신하겠다는 거냐!”
“미안하지만 난 지금 용사를 공격하지 못하거든. 그러니 빠지겠어.”
그 말을 마지막으로, 블루벨의 모습이 눈 깜짝할 새에 사라졌다.
“블루베에에엘!!”
노기에 찬 블랙펄의 외침이 메아리치며 벼랑에 흩어졌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
일족의 뜻은 용사를 죽이는 것.
그러나 그녀는 목과 양 손목에 채워진 끈때문에 할 수 없다고 핑계치며 거부했다.
……혹시 엘프들이 강령술을 허락했다는 것, 그리고 생명의 순환을 경시한다는 것 때문에 의구심이 생기기라도 한 걸까?
메린은 블루벨이 모습을 감춘 후에도 잠시간 대거를 쥔 채 신경을 바짝 세웠다.
이내, 그녀는 짧은 한숨을 쉬며 내 팔을 놓았다.
“안 느껴지는 건지 없는 건지 몰라도, 기척이 없어. 저 놈이나 족치러 가자. 대신 너, 위슨이랑 나한테서 너무 떨어지지 마라.”
“알았어.”
고개를 끄덕이고, 그녀와 속도를 맞추어 뛰어가며 검을 뽑았다.
검집에서 뽑혀 나온 것은, 어떻게 여기 들어가 있었나 싶을 만큼 널찍한 검신을 자랑하는 성검.
……뭐, 원래 꽂혀 있던 검이 성검으로 변한 거지만.
이게 튀어나왔다는 건, 역시 저 그리폰은 일반 무기로는 해치울 수 없다는 거겠지.
아니면 마녀들을 상대했을 때처럼, 저 미친 엘프를 조져버리라는 뜻일지도 모른다.
어쨌든,
“완전히 보내주마……!”
남의 동네에서 깽판친 대가를 받아낼 때가 왔다.
메린과 나까지 합류한 것을 본 블랙펄은, 이를 박박 갈며 피를 토하듯이 외쳤다.
“블루벨, 이 쓸모없는 년 같으니라고……! 두고 봐라! 용사를 죽인 후, 폐하께 네 년을 처형하라 주청할 테다!!”
목청은 여전히 팔팔했지만, 그동안 로나의 철퇴에 몇 번 스치기라도 했는지, 놈의 몸뚱이는 서 있는 게 고작인 듯했다.
게다가 가까이서 보니 양쪽 귀에서 피까지 철철 흘리고 있다.
안 그래도 몰골이 초췌해서 좀 그런데, 여기다 붉은 핏방울을 흩뿌리고 있으니 한층 더 기괴하게 보였다.
그리폰을 보고 있는 위슨에게 다가가자, 그의 어깨 위에 앉은 파랑새가 나를 향해 고개를 까닥였다.
“이야, 저 놈, 꼴에 귀쟁이라고 귀 터지도록 방해했는데도 잘도 피하더라. 너네 둘이 이 뒤진 그리폰을 해치워. 가까이에서 별 지랄을 해도 반응 없으니까 괜찮겠지. 위슨은 사제님을 도와야겠다.”
“알았어.”
로나 혼자서도 저 미친 엘프의 발을 묶었는데, 위슨의 정령까지 합세하면 금방 붙잡히겠지.
놈이 이 그리폰에 올라탈 걱정은 안 해도 될 듯하다.
그럼 다리부터 자르면 되겠군.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위슨이 손을 하늘로 쳐들었다.
그의 손이 그대로 작은 원을 그리듯 빙빙 돌다가, 블랙펄을 척 가리켰다.
그러자 그리폰의 양 날개에 붙어 있던 스라소니와 늑대가 일제히 바닥으로 내려와, 미친 엘프 쪽으로 바로 향했다.
……오오, 뭔가 멋있다.
아, 이럴 때가 아니지.
나는 심호흡을 한 후, 거대 그리폰을 향해 단숨에 뛰어갔다.
“……”
가까이 가니 하늘이 완전 덮이는 기분이 들었다.
태초의 그리폰이라고 할 만해.
나라도 그 옛날, 상태 멀쩡한 이 놈을 만나면 산의 신이라며 머리 조아리겠다.
그래도 지금은 그저 움직이는 시체일 뿐.
저 미친 엘프가 마지막 발악으로 명령을 내리기 전에, 죽이거나 무력화시켜야 한다.
나는 그리폰의 다리를 향해 힘껏 검을 휘둘렀다.
서걱!
빛의 궤적이 흐르며 앞다리 하나가 깔끔하게 잘려나갔다.
그래도 놈은 끄르륵하고 울기만 할 뿐, 몸부림 하나 칠 기미가 없다.
……생존본능이 전혀 느껴지지 않아.
어쩐지 마음이 무거워지는 모습이다.
한때는 신이라 추앙되고, 지금도 그 권능의 일부를 시현할 수 있는 존재인데.
그런 거대한 존재의 말로가, 추악한 몰골로 멀거니 서서 맥없이 쓰러지는 거라니.
참혹하다.
“……”
나머지 앞다리도 잘라버린 후, 메린의 도움을 받아 양 날개마저 없애버렸다.
이제 남은 건 목을 치는 것뿐.
“끄르르…….”
그리폰은 양쪽 앞다리를 잃은 탓에 자연히 고개가 밑으로 꺾여 있다.
그 상태에서 나온 저 끓는 듯한 울음소리에는, 무슨 의미라도 담겨 있는 것일까?
블랙펄을 제자로 삼은 그 까마귀 악마, 나베리우스가 깨웠던 시체……
좀비가 문득 떠올랐다.
아무 의지없이 그저 우워거리며 산 사람에게 달려들던 그 모습.
그 놈들이 왜 생살을 뜯어먹고 싶어했는지는 모르나, 아무튼 놈들은 움직이기라도 했지.
이 그리폰은 그저 끄르륵거리기만 할 뿐이다.
아무리 조종했다고는 해도, 대상을 고르기까지 하며 권능을 시현한 그리폰이다.
……혹시지성이 살아 있는 게 아닐까?
거의 시체나 다름없는 자신의 모습에서 무언가 느낀 게 아닐까?
왠지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모습이, 죽여달라고 목을 내민 것처럼 보인다.
……뭐, 내 쓸데없는 감성이겠지.
“소원대로 해줄게.”
그 감성을 따라, 나는 놈의 목 옆에 서서 속삭였다.
……두 번 다시 이딴 모욕을 당하지 않도록 확실히 없애주마.
편히 가라.
성검을 하늘 높이 쳐들고, 있는 힘껏 휘둘렀다.
“안 돼애애!!”
팔은 이미 아래로 내려왔다.
은은하게 빛나는 검신이, 위에서 아래로 곧은 잔영을 그린 게 보인다.
일반적이라면 무엇을 해도 소용없는 상황인데, 인간과는 차원이 다른 엘프여서 그런 것일까?
“……?!”
눈도 깜빡이지 않은 그 짧은 새에, 내 앞에 흰머리 엘프가 나타나 있었다.
놈의 몸뚱이는 세로로 완전히 갈라져,성검의 힘으로 하얗게 불타올랐다.
그런데도,
놈은 눈을 부릅뜨며 입을 움직였다.
그 까마귀 악마처럼.
“날뛰어라!!”
“……!”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놈은 하얀 재가 되어 사라졌고,
“끄르르아아아아아!!”
마치 고통을 호소하듯, 그리폰이 하늘을 향해 목을 길게 뻗고 포효했다.
귀가 먹먹해질 것 같은 긴 포효가 벼랑에 울려퍼졌다.
놈은 뒷다리를 펄쩍펄쩍 놀리면서, 입가에 거품을 물며 계속해서 소리를 질렀다.
그냥 그렇게 몸부림을 쳤다면, 안타까워하며 놈에게 안식을 주고 싶다고 생각했겠지.
그러나 지금은 그런 동정심을 품을 틈이 없었다.
놈이 그 상태로 대가리를 마구 휘두르기 시작했으니까!
“카엘! 물러나!!”
메린이 외쳤지만, 나는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물러나기엔 늦었어!
본능아, 일해라!
‘왼쪽!’
뒷골까지 찌릿하게 올라오는 감각과 함께 마음속 외침이 들렸다.
널찍한 검신을 방패삼아 재빨리 왼쪽을 막자마자,
채앵!
“크윽?!”
엄청 묵직한 충격에 손이 징징 울리며 몸이 날아갔다!
안 돼, 망할! 멈춰야 돼!!
머릿속에서 그 생각이 번쩍이며 계속 경종이 시끄럽게 울리는 듯했다.
나도 알아, 날아가면 안 되는 거!
여기 절벽이니 떨어지면 끝장이라는 거!
근데 땅에 닿아야 뭘 하든가 하지!
에라, 모르겠다!
“박혀라아아!!”
온 힘을 다해 오른팔로 바깥쪽 바닥을 내려찍었다.
검 끝이 땅 속으로 푹 들어가며, 몸이 홱 뒤집어지는 동시에 팔에 격통이 느껴졌다.
“씨…바……!”
더럽게 아파……!
제길, 이대로는 칼자루 놓칠 거 같아……!
고통 따위 이 악물고 견디면 그만이야.
“그만은 개뿔! 으으으윽……!!”
쓸데없이 떠오른 그녀의 말에 반박하면서도, 나는 이를 악물며 왼손까지 칼자루를 쥐었다.
칼자루가 더 깊이 땅에 박히며, 몸이 밀려가는 속도가 확연히 줄어들기 시작했다.
……근데 이거 버티는 건 좋은데, 이러다 벼랑 끝까지 가면 그냥 떨어지는 거 아냐.
그냥 개고생에 헛짓으로 끝나는 거잖아?
씨발, 그딴 식으로 끝나기만 해봐?!
의식 잃기 직전까지 저주할 거야!
부조리하고 염병할 세상이라고 팍팍 저주해줄 거라고!!
그러나 정말 다행스럽게도 그런 빡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쭉쭉 밀려가던 내 몸이 마침내 멈추면서, 칼자루를 잡은 자세 그대로 땅 위에 풀썩 엎어졌다.
……발 쪽엔 아무것도 안 닿는 게 조금 많이 싸하긴 한데, 아무튼 멈췄으니 됐어.
가끔은 이렇게 세상에 대고 공갈협박을 해줘야 하는구나.
“하아, 하아… 허… 케흑…!”
근데 죽을 거 같아…….
오늘도 잠은 되게 잘 자겠구만.
“하……윽……!”
호흡이 정돈되자마자 오른팔에서 통증이 느껴지며 숨이 덜컥 막히는 듯했다.
부러졌는지 빠졌는지, 아무튼 눈앞이 아찔할 만큼 아파!
그보다도 안 움직여!
아니 신이시여, 이게 뭐죠?
혹시 떨어지면 세상에 저주할 거라고 해서 그런 겁니까?!
저 오른손잡이인데 이러시면 곤란한데요!
“카엘!”
무언가 땅에 끌리는 소리와 함께, 머리 위에서 메린의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만 겨우 들어 올려다보니, 메린이 굉장히 당황한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가쁜 숨을 내쉬는 그녀의 얼굴엔 땀방울이 맺혀 있다.
아마 내가 날아가자마자 뛰어온 거겠지.
……역시 와주는구나.
누구보다도 제일 먼저.
몸을 일으킬 기운은 없는데 웃음은 잘도 나왔다.
힘을 따로 쓰나봐.
“너, 너 괜찮냐?!”
보기 드물게 어쩔 줄 몰라 하는 그녀를 안심시키고 싶었지만, 아쉽게도 괜찮다며 허세를 부릴 여유도 없었다.
“아니, 전혀……. 아, 야, 야야야, 파, 팔 건드리지 마! 크윽…….”
“어? 어느 쪽? 아, 오른쪽. 할 수 없어. 조금만 참아, 팔 떼야 되잖아.”
“아으아가아아아악?!”
……건드리기만 해도 격통이 느껴져서 그렇지, 그녀는 나를 살살 다룬 셈이다.
더럽게 아프긴 해도 기절하진 않았으니까.
축 늘어진 나를 일으켜 앉힌 후, 그녀는 내 옆에 쪼그리고 앉았다.
“너 진짜 큰일날 뻔했어. 뒤에 봐라.”
“……”
와, 두 걸음만 더 갔으면 낭떠러지였는걸?
진짜 뒤질 뻔했네.
헛웃음을 켜며 성검을 땅에서 뽑아낸 후, 메린의 부축을 받고 벼랑 안쪽으로 조금 갔다가 도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야.”
“하……미안, 못 걷겠어…….”
나도 더 안쪽으로 가고 싶은데, 걸을 때마다 오른팔 쪽이 흔들려서 장난이 아니었다.
차라리 기절했으면 더 나았겠네.
“하아…… 할 수 없지. 저거 끝나면 로나에게 와달라고 해야겠네.”
저거……?
아, 맞다. 그리폰.
아직 남아 있었지.
나는 고개를 들고 저만치 앞에 있을 그리폰을 보았다.
두 앞다리와 날개를 잃은 그리폰은, 여전히 미친듯이 소리를 지르며 날뛰고 있다.
왠지 머리가 움푹 들어가고 부리가 홱 돌아간 것 같은데, 아무튼 여전히 대가리를 마구 휘젓고 있었다.
하, 이제 저걸 어떻게 끝장내지?
난 날아가는 거 서느라 기운 다 쓴 데다, 오른팔 때문에 검을 휘두르긴커녕 걷는 것도 못할 거 같은데.
어쩌지?
“아, 그래…….”
마침 딱 좋은 게 있지.
불.
불을 붙여버리자.
물론 저 놈은 태양빛에 버티고 있으니, 평소에 보던 좀비와는 원리가 다를 것이다.
그래도 어쨌든 시체잖아.
일단 태우면 되지 않을까?
마침 저~기 불의 정령님도 계시고.
주변에 나무가 많다면 곤란했겠지만, 여기는 돌바닥밖에 없는 뻥 뚫린 벼랑이다.
뭐, 설사 불똥이 튀어서 어디 불이 난다고 해도, 스라소니가 잘 수습하겠지.
“위스은! 그냥 태워버려어!”
내 목소리가 메아리치며 웅웅 울렸다.
음, 이상한 목소리군.
어쨌든 내 말은 무사히 전해진 듯했다.
위슨이 손짓하더니, 스라소니가 불꽃을 뿜어내기 시작했으니까.
그러나 화력이 부족한지 그리폰의 몸엔 불이 전혀 붙지 않았다.
곧 늑대와 파랑새의 모습이 사라지며, 스라소니의 덩치가 두 배는 더 커졌다.
그는 재빠른 몸놀림으로 그리폰의 머리를 딛고 하늘 높이 뛰어올라, 땅을 향해 시뻘건 화염을 토해냈다.
그리폰은 온 몸이 화염덩어리가 되자, 서서히 움직임을 멈추기 시작했다.
옆에서 로나가 폴짝폴짝 뛰는 걸 보니 일이 잘 되어가는 모양이었다.
역시 불꽃 정화가 최고야.
그리고 그걸로 일이 다 끝났다는 듯이, 성검은 일반 철검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이거 진짜 어디 눈 달린 거 아니야?
고개를 갸웃하며 검을 거두고, 그리폰이 활활 타는 모습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저거 끝난 거지?”
“아마도…….”
“그럼 로나 부를………읏?!”
갑자기 메린의 얼굴빛이 돌변하며, 검을 쥐고 내 앞을 가로막았다.
채앵! 퍼억!
“아윽?!”
“메린?!”
둔탁한 소리와 함께 메린의 몸이 하늘 높이 솟아오르며 뒤로 날아갔다!
“!!”
그 방향엔 아무것도 없다.
발을 디딜 땅도, 묘기를 부리며 뛰어오를 벽조차 없다.
있는 거라곤 오로지 허공.
거기에 던져진 자가 할 수 있는 건 오로지 떨어지는 것뿐.
……그리고 방금까지 메린이 서 있던 곳에, 이를 악물며 미간을 찌푸리고 있는 엘프가 있었다.
치이이익!
“예상, 대로야. 크읏! 네가, 막을 줄 알았어.”
……그리고, 너도.
지글거리는 소리에 섞여 엘프가 중얼거렸던 것 같다.
자조하는 듯한 웃음도 들린 것 같지만 정확하지 않다.
메린이 날아간 방향을 보자마자, 나는 그 자리를 박차고 달리고 있었으니까.
눈앞에 펼쳐진 풍경도, 뚝 끊긴 벼랑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오른팔에서 일어나는 격통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보이는 건 오로지 하나, 머리를 가득 채운 생각도 단 하나뿐이었다.
메린.
그녀를 따라가야 한다.
그녀를 붙잡아야 한다.
그녀를 잃을 수는 없다……!
“메리이이인!!”
벼랑 밑으로 사라져가는 그녀를 쫓아, 망설임없이 낭떠러지 아래로 뛰어내렸다.
경악에 찬 주홍빛 눈동자를 품에 안으며 눈을 질끈 감았다.
……그대로 의식이 뚝 끊어져버렸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