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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사는 소꿉친구 검성이 무섭다-138화 (138/475)

〈 138화 〉 134화 : 해바라기의 고백 (1)

* * *

일출과 함께 하루가 시작되어 일몰로 마무리되는 것처럼, 한 해는 봄으로 시작하여 겨울로 끝을 맺는다.

사람이 밤의 검푸른 장막 속에서 잠에 들듯이, 대지도 지친 몸 위에 하얀 이불을 덮고 쉬는 것이다.

……그리고 누군가는 그 휴식을 죽음이라 부른다.

열매도, 잎사귀도 전부 다 잃고 앙상한 가지만 남은 나무들,

말라 비틀어진 풀들,

새의 지저귐조차 들리지 않는 고요한 숲.

눈이라도 펑펑 내리는 날엔, 그야말로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침묵이 찾아온다.

그러니 쉬는 게 아니라 죽은 거라 해도 틀린 건 아니겠지.

철학적이면서 낭만적이다. 나쁘지 않아.

그 특유의 스산하면서도 평온한 분위기도 좋고, 뭣보다도 밖에서 일하지 않아도 된다.

몸 속까지 꽁꽁 얼어버릴 것처럼 추운 거랑, 매번 찾아올 때마다 부리는 심술만 없으면 좀더 좋아했을 텐데.

그래서 만약 ‘겨울’과 대화를 나눌 수 있다면 묻고 싶다.

대지에 죽음과 같은 휴식을 주는 건 좋은데,

……거기에 나는 자꾸 왜 같이 집어넣냐고.

겨울을 맞아 땅이 쉬는 것처럼, 나는 해마다 겨울이 되면 열병에 걸렸다.

얼마나 두터운 옷을 입든, 얼마나 집을 따뜻하게 데우든,심지어 밖에 한 번도 나가지 않더라도 피할 수 없다.

아무리 애를 써도 겨울이 오는 걸 막을 수 없는 것처럼, 나는 겨울마다 빼먹지 않고 앓아 누웠다.

그 시기는 항상 12월 말, 한 해가 끝나는 때.

병세는 해마다 약간 차이가 있다.

정신을 잃을 정도로 펄펄 끓을 때도 있고, 몽롱하게 눈 끔벅일 수 있을 만큼만 뜨거울 때도 있다.

그 하루이틀의 고비를 넘기면 열은 싹 내려간다.

미열조차 남지 않으니, 어제까지 죽을 거 같았던 게 꿈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

물론 고열로 몸의 기력이 싹 말라버리니, 그게 꿈이 아닌 건 바로 알 수 있지만.

그런데 왜 하필 연말에 앓는 걸까?

그렇게 내가 새해를 보는 게 맘에 들지 않았던 걸까?

차라리 이게 세상의 법칙이었으면 맘이 더 편했을 텐데.

‘겨울이 오면카엘 에스트렐은 열병에 걸린다’는 법칙이 작동하지 않으면 내년이 오지 않는다……

뭐, 그런 식의 법칙이 있는 거라면, 엿 같지만 어쩔 수 없다고 납득이라도 했을 텐데.

아무튼 나는 매 연말마다 쓰러졌고, 버텼으며, 무사히 새해를 맞이했다.

그러면 겨울이 다시 오기 전까지는 그만큼 심하게 앓진 않으니 그럭저럭 살 만은 했다.

메린에게 건강해짐을 당한 후에는, 과로만 안 하면 잔기침이나 가벼운 감기만 앓았고.

……그게 적잖이 맘에 들지 않았던 거겠지.

겨울은 손수건을 물어뜯으며 분통을 터뜨린 끝에, 계획을 바꾸기로 한 듯했다.

일 년에 한 번이 아닌, 두 번을 때리기로.

그 첫 시도가 올해 1월 첫 주였고, 효과는 굉장했다.

……메린이 없었다면 진짜로 성공했겠지.

열병이 시작됐을 때는 기억나지 않는다.

중간은 기억이 어렴풋해서 확실하지 않다.

그저 여느 때처럼 침대에 누워 잠을 청했는데, 눈을 뜨니 온 몸이 쇳덩어리처럼 무겁고, 땀에 푹 절어 있으며, 정신이 몽롱했을 뿐.

하루 아침에 왜 이런 꼴이 되어 있는지 도통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침대 주변의 상황이 하나하나 보이기 시작하며, 차츰차츰 조각이 맞춰졌다.

침대 맡에 놓인 대야와 천조각, 약병.

……그리고 침대 옆 바닥에 주저앉아 흐느끼고 있는 메린.

단번에 깨달았다.

한 달 만에 또 쓰러졌다는 것을.

그리고그녀가, 또 다시 내 목숨줄을 붙잡았다는 것을.

………………

“……”

……천천히 눈을 뜨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통나무로 된 벽과 천장, 추위를 막을 겸 벽을 장식하기 위해 달린 작은 태피스트리.

침대 맡에 있는 약사발과 붕대, 그리고 약병.

굉장히 익숙하면서도 낯선 상황이다.

일단 담요 바깥에 놓인 오른팔에 붕대가 칭칭 감겨 있고, 온 몸이 마구 욱신거리며 뜨겁다.

게다가 우리집엔 태피스트리가 없었으니, 내가 지금 꿈에서 옛날 일을 보는 게 아니라는 건 확실하다.

뭣보다도, 메린이 무릎을 끌어안은 채 벽 쪽에 앉아서 땅만 쳐다보고 있다.

그녀 역시 이마와 팔에 붕대를 감고 있는 게 보였다.

“……메린……?”

공기 새어나가는 듯한 쉰 목소리였는데도, 그녀에겐 제대로 들린 모양이었다.

고개가 서서히 들리며, 놀라움에 차는 게 보였다.

“카엘……!”

속삭이듯이 내 이름을 부르며, 그녀는 거의 기어오다시피 다가왔다.

그리고 침대에 무릎 하나를 올리고 내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그녀의 주홍빛 눈동자는 그때처럼 눈물에 젖어 있진 않지만, 불안으로 떨리고 있었다.

……그때 뭐했더라.

그녀의 눈동자를 흔들리게 만드는 감정도, 내가 이 꼴이 되어 있는 원인도 그 겨울날과는 다르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건 동일하다.

그녀가 의식을 잃은 내 옆을 지켰다는 것.

그리고 그녀가 동요할 정도로 마음이 힘들었다는 것.

그러니 그때와 똑같이 해도 무방하겠지.

그러니까 그때 내가……

아, 그래. 생각났다.

“메린…….”

멀쩡히 움직이는 건 왼팔뿐이지만, 나는 천천히 그녀를 향해 팔을 벌렸다.

제대로 웃고 있는 거면 좋을 텐데.

“……이리와.”

“……”

조심스럽게 내 목을 끌어안는 그녀의 머리를 가만히 쓰다듬는다.

오른팔이 멀쩡했다면, 희미하게 떨리기 시작한 어깨를 다독이고, 등을 토닥여주었을 텐데.

그 아쉬움과 미안함을 담아, 조용히 속삭였다.

“미안…….”

걱정 끼쳐서, 네가 수고하게 해서 미안해.

“미안해…….”

불안하게 해서, 정말 미안해.

……어깨가 젖는 걸 느끼며, 그날처럼 그녀가 진정될 때까지 한 팔로 안아주었다.

진정된 후, 메린은 빨갛게 부은 눈을 대충 닦으며 자초지종을 이야기해주었다.

내가 낭떠러지에서 뛰어내려 그녀의 머리를 끌어안은 직후, 갑자기 밑에서 엄청나게 커다란 네발짐승이 튀어나와 우리 두 사람을 입에 물었다.

마치 어미가 제 새끼를 옮기듯이 이빨 사이로 우리를 물더니, 그 짐승은 어느 산길 위에 우리를 던져버리고 사라졌다.

“정신이 없어서 그때는 잘 몰랐는데, 지금 생각해보니까 늑대였던 거 같아.”

“늑대? ……아, 그렇구나.”

우리를 구해줄 만한 늑대는 위슨의 정령밖에 없다.

그때 위슨은 우리와 좀 많이 떨어져 있었으니, 무슨 일이 생겼는지 바로 알아채기 어려웠을 텐데.

어떻게 제때 정령을 꺼낸 모양이지?

그리고 메린은 의식을 잃은 나를 업은 채, 어딘가 쉴 데를 찾아 산길을 올랐다.

늑대가 던졌을 때 바닥을 구른 탓에, 몸 여기저기가 욱신거려서 그다지 좋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래도 다행히 비탈 올라오니까 이 오두막이 있더라.”

“주인은?”

“……밖에 있어.”

짧게 대답하며, 그녀는 얼굴을 살짝 찡그렸다.

무언가 좋지 않은 느낌이 희미하게 느껴졌다.

“왜. 뭔 일 있었어?”

“……”

그녀는 내 시선을 피하며 대답하지 않았다.

……뭐가 있었구나.

그것도 굉장히 좋지 않은 게……!

그제야 나는, 그녀의 모습이 굉장히 흐트러져 있다는 걸 깨달았다.

비뚤어지게 끼워진 단추, 헝클어진 머리, 대충 묶은 허리끈.

“……!”

……설마.

아니, 아닐 거야.

아무리 다쳤다 해도, 얘가 당했을 리가 없잖아.

상대는 일반인이라고.

……하지만,

하지만 만약, 붕대와 약을 빌미로 협박을 했다면…….

아, 아냐. 그녀가 나 때문에 그렇게까지 할 리가 없어.

그래도 아까 깨어났을 때, 메린이 굉장히 어두운 얼굴을 하고 있었잖아.

아니야. 아닐 거야!

절대 그럴 리가 없어! 그런 일이 일어날 리가……!

그렇지만, 정황이……!

“……메린, 솔직히 말해줘.”

나 스스로 놀랄 만큼 건조한 목소리가 나왔다.

“……여기 주인이랑, 무슨 일이 있었어?”

듣고 싶지 않아. 들으면 안 돼.

죄책감으로 미쳐버릴 거야.

하지만 들어야 해. 이건 내 잘못이니까!

그녀를 지키지 못한 내 책임, 진작에 그녀를 놓아주지 않은 내 죄……!

……나도 모르게 왼손으로 담요를 꽉 쥐고 있었다.

그 힘을 풀 생각도 못하며, 나는 그녀의 말을 기다렸다.

“그…… 화 안 낼 거지?”

“안 내.”

네 잘못이 아니니까.

엿 같은 세상과 진작에 뒤졌어야 할 내 탓이야.

……마침내 그녀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너 여기 뉘인 다음에, 여기 주인이…… 붕대랑 약을 쓰고 싶으면, 나보고 몸을 대라고…… 안 그러면 네가 죽을 거라고…….

나중에 돈 내겠다고 했는데도, 당장 몸으로 갚으라고 달려들어서……”

“……윽.”

나도 모르게 이를 악물었다.

담요를 쥔 왼손에 더 힘이 들어갔다.

그조차 깨닫지 못할 정도로, 나 자신이 부숴지고 있는 기분이었다.

“그래서………………묻어버렸어.”

“씨발!! 메린, 이 바보야! 왜 나 같은…………

…………뭐?”

……너무 충격이 커서 잘못 들었나?

손이 저릴 정도로 담요를 꽉 쥐던 왼손으로 눈두덩이를 문지른 후, 나는 재차 물었다.

“……미안. 잘못 들었나봐. ……네가 그 놈을 어쨌다고?”

“묻었어. 땅에.”

“……”

제대로 들은 거였구나. 그렇구나.

내 귀와 정신은 아직 멀쩡하구나.

“……있잖아, 메린. 그냥 묻는 건데, 너 옷은 왜 흐트러져 있냐.”

“엉? 이거? 붕대랑 연고 바르느라. 어차피 오늘 여기서 잘 거니까 그냥 대충 여민 건데.”

“그렇구나…….”

굉장히 하찮은 이유였다.

젠장, 쓸데없이 사람 놀래키긴!

하아……

그나저나 땅에 묻은 건가…….

메린이 몹쓸 짓을 당하지 않은 건 다행인데, 어쨌든 나 때문에 괜히 손에 피를 묻힌 거다.

물론 여긴 산 속이고, 방금 전까지도 그 엘프가 깽판치고 있었으니, 여기에 다시 외부인이 오려면 한참 걸릴 터.

즉, 나만 입 다물고 있으면 된다.

그러면 메린이 이 오두막의 주인을 죽인 건 아무도 모르겠지.

그래도 만에 하나 누군가 문제를 삼는다면……

……이건 내가 짊어져야 할 죄이다.

적어도 그녀와 같이 벌을 받아야지.

“……역시 화났지?”

“……아니야. 화 안 났어. 네가 무사해서 다행이야. 그래도 죽인 건 잘했다고는 못하겠다.내가 손 부러뜨리라고 했잖아. 죽이면 안 되지.”

씁쓸히 웃으며 그렇게 말하자, 그녀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안 죽였는데.”

“……엉? 땅에 묻었다며. 죽인 거 아냐?”

그녀는 고개를 젓고, 자신의 손날로 목 언저리를 스윽 그으며 말했다.

“여기까지 오도록 묻었지. 어어, 목만 땅 위에 나오도록.”

“……”

“그, 걱정 마. 나도 알아. 소리지르면 뭐가 올지도 모른다는 거. 그래서포대자루 하나 비워서 얼굴에 씌워놨어.

아, 물론 숨구멍도 하나 뚫어놨고! 그러니 괜찮을 거야.”

말없이 빤히 쳐다보는 걸, 그녀는 내가 마뜩잖게 생각한다고 착각한 듯했다.

괜히 허둥대며 묻지도 않은 세부사항까지 쭉 읊고 있었다.

아니 뭐, 마뜩잖긴 한데……

……이 녀석은 대체 그딴 짓을 어디서 배워먹어서 저지르는 걸까?

새하얗게 비워진 머릿속에, 그 생각만 조용히 떠올랐다.

“……너 진짜 화 안 났지?”

“안 났어…….”

그냥 질색했지.

실시간으로 넋이 나가는 게 느껴졌다.

현황을 파악한 다음엔 목표를 설정해야 한다.

지금 당장의 목표는 딱 하나.

위슨과 로나, 두 사람과 합류하는 것이다.

그를 위한 선택지는 두 개이다.

하나는 이 오두막 주인인 그 염병할 미친 개새끼를 조진 다음, 이 산에 있을 부락으로 가서 두 사람을 기다리는 것.

또 하나는 그 찢어 죽여도 시원찮을 주인 새끼의 가랑이를 짓뭉개버린 다음, 우리가 떨어졌던 그 벼랑을 다시 찾아가서 흔적을 살피는 것.

어느 길을 고르든, 일단은 나나 메린이나 몸을 돌봐야 한다.

제일 좋은 건 그 두 사람이 여길 찾아오는 건데, 그게 될까 모르겠네.

“……라는 건데, 메린, 넌 괜찮아? 붕대 감고 있잖아.”

그렇게 묻자, 메린은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난 여기저기 쓸린 거랑 타박상밖에 없어. 너도 팔 빼고는 다친 데는 없는 거 같던데.

아, 오른팔 어떠냐? 너 의식 잃은 틈에 끼웠는데.”

“으응…… 좀 욱신거리긴 해도 움직이는 거 같은데. 일단 손가락은 다 움직인다.”

“그래…….”

안도하듯이 짧은 한숨을 쉰 후, 그녀는 곧바로 매서운 눈초리로 나를 쏘아보았다.

……윽. 드디어 올 것이 왔나!

“근데, 너 아까 그거 뭔 지랄이었냐?”

“……뭐?”

“절벽에서 뛰어내린 거. 뭐냐고.”

아으, 눈 싸늘한 거 봐.

차마 마주볼 수 없어서 시선을 피해버렸다.

“……사, 살았으니 됐잖아.”

“뭐야?!”

역시 안 되는구나!

어물쩡 넘어가려 했지만, 오히려 그녀의 신경만 더 건드리고 말았다.

얼굴 안 봐도 알겠어!

지금 메린 녀석, 엄청나게 살벌한 눈으로 노려보고 있어!무서워!

“그 늑대 아니었으면 너나 나나 뒤졌어! 야, 이 미친놈아, 네가 정신이 있냐?! 내가 떨어진다고 너까지 뛰어내려?! 네가 뭐 날 수 있기를 해, 뭐 어쩌려고 그딴 짓을 저질러?!”

“……”

“씨발, 진짜 생각할수록 빡치네. 야, 이 등신 새끼야, 어떻게 너 죽이려 드는 놈을 앞에 두고 등을 돌리냐?!

일단 그 엘프를 먼저 처리했어야 할 거 아냐!그 새끼가 네 등 찔렀으면 넌 바로 끝이었어! 알아?!”

아무런 반박도 할 수 없다. 죄다 맞는 말이니까.

그저 시선을 내리깐 채, 묵묵히 그녀의 일갈을 들었다.

……얘가 쌍욕까지 할 정도로화내는 건 처음이라, 뭘 어찌해야 할지 모르는 것도 있지만.

“내가 신경 쓰이면 위슨한테 말하든가! 그게 안 되면 어쩔 수 없는 거지, 어떻게 거기서 뛰어내릴 생각을 하냐?!

게다가 넌 용사야! 드래곤 잡으라고 뽑힌 용사! 그런 놈이 함부로 목숨 버릴 짓을 해?!”

“으…….”

“너 대체 왜 그랬냐? 너 같은 쫄보 새끼가 괜히 그 지랄을 했을 리가 없어.

……솔직히 말해. 너 용사고 뭐고 죄다 내던지고 싶었던 거지? 진짜 말 그대로 뒤지고 싶었던 거 아냐?!”

“……그런 거 아니야.”

저 깊고 깊은 바닥까지 가라앉은 마음을 간신히 끌어올려, 말을 짜냈다.

“그럼 왜 그랬는데?”

“……”

무심코 달싹이려던 입술을 황급히 닫았다.

……무슨 정신으로 그랬는지 명확하게 기억하고 있다.

의식이 끊어지는 순간까지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마음속으로 외쳤으니까.

하지만 그건, 그 생각의 기저는…….

대답을 망설이는 사이, 그녀의 분노 어린 목소리가 또 터져 나왔다.

“왜 말을 하려다 마냐, 새꺄! 뭐, 나한텐 말할 가치도 못 느낀다 이거냐?!”

“아, 아냐. 그런 거 진짜 아니야! 내가 그런 생각하겠냐!”

“그럼 빨리 말 안 해?!”

“으…….”

뭐라고 둘러대야 되지? 까먹었다?

아잇, 까먹다니 그딴 어줍잖은 거짓말이 통하겠냐!

그냥 모른다고 할까?

나도 모르게 그냥 몸이 움직였다고?

어느 정도는 사실이긴 한데, 이걸로 넘어가질까?

아으, 빨리 대답 안 하면 이 녀석이 도로 내 팔 빼버릴지도 몰라!

그냥 이걸로 가자!

“모, 몸이 그냥 나갔어. 정신을 차리니 이미 뛰어내렸다고. 진짜야. 거짓말 아니야.”

“……뒤지고 싶었다?”

“진짜 그런 거 아니라니까!”

고개를 마구 저으며 강하게 부정하자, 그녀의 노기가 아주 조금 사그러든 것 같았다.

……여전히 활활 타고 있긴 했지만.

“……그럼 뭐, 곤란을 겪는 사람을 보면 도와주고 싶은 그런 거냐? 그냥 구하고 싶었다?”

“그건…….”

“네가가끔 떠는 그 오지랖이냐? 그냥 평소처럼 호구 짓한 거야? 똑바로 말해야 내가 알 거 아냐!”

오지랖……? 호구……?

이 자식이 진짜……!

아무것도 모르면서!!

“그딴 거 아니야, 멍청아!”

……속에서 울컥 솟아오른 감정을 참지 못하고 쏟아내버렸다.

“멍청한 건 너지, 이 등신 새끼야! 그딴 게 아니면 뭔데!”

“너 없어지는 게 싫어서 그랬다! 내 눈앞에서 사라지는 게 싫었다고! 그냥 보고만 있을 수 없었어!”

그러자 둑이 터진것처럼, 속에서 끊임없이 격정이 치솟아 올라왔다.

말을 하면 할수록 더 힘을 받고 올라오는 듯했다.

이성으로 그 세찬 물결을 틀어막기엔, 몸이 너무 지쳐 있었다.

“그건 또 뭔……! 아니 내가 없어지는 거랑 네가 그걸 따라오는 게 뭔 상관이 있냐?!”

“상관이 왜 없어, 이 자식아! 아주 크게 있는데!”

“야, 이 새꺄, 억지부리지 마! 그게 뭔 상관이,”

“내가 너 좋아하니까!!”

“……뭐?”

마구 소리를 지른 탓에 숨이 턱까지 차 있었다.

숨을 돌리며, 얼굴을 찡그린 채 굳어버린 그녀를 보았다.

……아아, 또 저질러 버렸구나.

하지만 이미 쏟아버린 말은 다시 담을 수 없다.

지난번처럼 홧김에 튀어나온 말이니, 진심이 아니라고 얼버무릴 수도 있겠지.

‘또 그럴 거야?’

……아니, 이번엔 달라.

내가 이 여자를 좋아하는 건 진심이니까.

순간의 어색함과 민망함을 피하려고, 이 마음에 거짓을 묻힐 수는 없다.

“……너, 지금 뭐라고 했어?”

멍하니 중얼거리는 그녀를 보며, 나는 입을 열었다.

……의외로 굉장히 매끄럽게 말이 나왔다.

“내가, 너 좋아한다고. 좋아해서 그랬다고.”

“좋아…한다……? 그거냐? 친구가 아니라,”

“그래.”

“그러니까, 너 나랑 섹,”

“그래, 임마! 널 여자로 보고 있다! 한 명의 남자로서, 여자인 너를 좋아한다고! 입맞추고 품에 안고 싶다고!”

그녀의 말을 막으려고 되는대로 지껄였다.

근데 왠지 더 엄청난 소리를 한 거 같아!

뒤늦게 찾아온 부끄러움에 얼굴이 활활 타는 걸 느끼면서도, 나는 그녀에게 눈을 떼지 않았다.

“……”

조금 전까지 가득했던 분노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그녀는 그저 놀란 얼굴로 멍하니 나를 보고 있었다.

그 얼굴에 대고, 나는 한 마디 한 마디, 또박또박하게 말했다.

“좋아해, 메린. 진심이야.”

“……”

주홍빛 눈동자를 똑바로 바라보며, 온 마음을 담아서.

그간 고민했던 건 뭐였나 싶을 정도로 거리낌없이.

“……메린 소더, 너를 좋아해.”

……깊고 깊이 품고 있던 말을 전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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