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9화 〉 135화 : 해바라기의 고백 (2)
* * *
어렸을 때, 책을 읽으면서 상상해본 적이 있다.
내가 만약 사랑고백을 한다면 어떻게 할까?
책 속 주인공처럼 온갖 미사여구를 잔뜩 넣고, 스무 마디는 더 길게 쭉쭉 읊을까?
아니면 얼굴 마주하자마자 키스부터 할까?
장소는 어디가 될까?
우리집? 마을 광장?
아니면 빈 들판?
……그런 가슴 설레는 상상은 나이를 먹으면서 자연히 그만두었다.
내가 누군가에게 연정을 품는 일은, 절대로 일어날 리 없는 꿈이었으니까.
그런데 일어났다.
그것도 메린을 상대로.
게다가 좋아한다는 걸 깨달은 지 나흘만에 고백해버렸다.
이야, 어린 시절 때의 궁금증이 풀리긴 했어.
딱 한 마디 했네, 한 마디.
……근데 아무리 흐름을 탄 거라 해도 그렇지, 이거 너무 갑작스럽게 튀어나온 거 아니야?
내가 이렇게 충동적인 놈이었나?
이틀간 잠을 설치며 고민했던 건 진짜 뭐였던 걸까?
웃긴 건, 얼굴이 화끈거려서 그녀를 마주할 수 없긴 해도, 고백한 것이 조금도 후회스럽지 않다는 것이다.
그녀가 내 고백을 들은 뒤, 침대 옆에 등을 대고 쪼그려 앉아서 계속 침묵을 지키고 있지만, 그래도 후회는 전혀 없다.
정작 나는 저질러놓고, 베개로 얼굴을 덮고 소리없이 절규하면서 왼손으로 조용히 담요를 막 구기긴 했지만,
아무튼 거기에 후회는 없었다.
“……야, 카엘.”
홀로 조용한 몸부림을 마치고 멍청하게 천장을 쳐다보고 있을 무렵, 마침내 메린이 긴 침묵을 깨뜨렸다.
“……내가 뭘 어째야 되는 거냐?”
“어? 무, 뭐가?!”
침착해, 미친놈아!
목소리가 뒤집어졌잖아!
어차피 이제 무를 수 없어.
누구 말마따나 신분차이가 있어서 죄를 저지르는 것도 아닌데 그냥 당당하게 굴어, 당당하게!
“네가 그랬잖아. 날 여자로서 좋아한다며.”
“응. 좋아해.”
단호히 대답하자, 그녀가 흠칫 놀라는 게 보였다.
이윽고 그녀는 다시 침대에 걸터앉아, 그녀를 올려다보는 나를 마주보았다.
“……그럼, 벗어야 되는 거지?”
“으악, 아니야, 이 자식아! 단추 풀지 마! 거기서 손 떼, 임마!!”
아니 얘가 미쳤나, 갑자기 옷 벗으려 드네!
대체 내가 없을 때 뭘 보고 다닌 거야?!
“아니야? 너 나랑 섹,”
“돌려 말해!”
이 세상에는 절대로 입 밖에 내면 안 되는 말이 있다.
아무리 일상적으로 사용하고, 또 이따금 학술지에도 올라오는 단어일지라도, 입에 올리면 안 되는 말이 있는 것이다!
“돌려서? 아, 그래. 너 나랑 씨,”
“꺄아아악!!”
“이것도 안 되냐? 또 뭐 있더라……. 아, 맞아. 너 나랑 자고 싶다며.”
“안 했어……. 그런 소리 한 마디도 안 했다고…….”
아, 갑자기 울고 싶다…….
왜 부끄러움은 나의 몫인가?
왜 저런 소리를 하는 장본인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을 하고 있는 건가!
“남자가 여자를 좋아하면 같이 자는 거잖아. 아니야?”
“아니야, 임마! 아니라고! 너 이 자식, 대체 어디서 뭘 본 거야?! 너 우리 엄마한테 남녀관계 안 배웠어?! 남자와 여자가 서로 좋아하면 맺어진다고 안 그러시든?!”
“아니, 그러셨긴 한데……. 실제론 맘에 드는 여자 있으면 그냥 대뜸 박,”
“난 아니야!!”
아으아아아……! 지, 진정, 진정하자.
큰 소리 낸다고 되는 게 아니잖아!
실제로 그렇게 사는 놈이 버젓이 있는데, 내가 아니라고 한들 얘가 그 말을 듣겠어?
창관에 창부도 있고, 사생아에 고아도 있는 세상이잖아.
……근데 진짜 이 녀석, 남녀관계 개념이 왜 이 따위가 되어 있지?
엄마가 저렇게 가르치셨을 리는 절대 없는데.
설마…….
“……”
“……카엘? 어…… 화 났어?”
아니라고 믿고 싶긴 한데……
설마고향의 남자 새끼들이 저 따위로 개지랄을 떨며 얘를 건들었던 건 아니겠지?
내가 아무리 마을에서 누구보다도 그녀와 자주, 꽤 오래 같이 있다고 해도, 하루 온종일 붙어 있는 건 아니다.
특히 밤에는 반드시 그녀 혼자 있게 된다.
그녀에 대한 호오는 어쨌든, 혼자 따로 살고 있으니까 쓰레기 새끼들이 몸을 노리고 들러붙었을지도 몰라.
그 새끼들이 메린에게 저딴 생각을 불어넣은 거 아니야?
“……너 그런 거 누구한테 들었냐? 누가 너한테 그 따위 망발을 했어?”
……그랬기만 해봐.
어떤 새끼가 그랬든, 몇 명이든!
전부 남김없이 죽여버릴 거야!!
“엉? 누가 나한테 그런 건 아니고, 그냥 여기저기서 주워들은 건데.”
“……진짜? 너한테 누가 그런 개소리하면서 추근댄 게 아니고?”
조용히 되묻자,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고개를 저었다.
……다행이다. 내 손으로 고향 끝장낼 뻔했네.
그렇게까지 지저분한 사람들은 아니었군.
“애초에 나랑 자고 싶다고 한 건 네가 처음이야.”
“내가 언제 그랬어?! 난 너 좋아한다고 했지! 너 임마, 딴 녀석들한테 내가 그랬다고 하지 마라!”
“입맞추고 품에 안고 싶다며.”
“끄으아아아……!”
이 놈의 주둥아리 진짜 돌아버리겠네!
이제 와서 그게 아니라고 할 수도 없고!
……아, 잠깐. 아니지.
이건 설득하고 납득시켜야 하는 게 아니잖아.
그냥 진정하고, 차분하게 이야기하면 돼. 차분하게.
음, 그러면 되고 말고.
누운 채로 이야기하긴 좀 그런 것 같아, 나는 왼손에 힘을 주며 몸을 일으키려 했다.
아으, 힘 너무 없는데…….
“일어나려고? 자.”
“으으…… 고마워…….”
메린의 도움을 받아 일어나 앉았다.
길게 숨을 내쉬고, 나는 그녀와 눈을 마주보며 천천히 말을 꺼냈다.
“후우우………… 메린, 잘 들어. 난 너 좋아해. 그래, 너랑 키스하고 야한 짓하고 싶어. 인정해.남자가 좋아하는 여자를 안고 싶은 건 당연한 본능이니까.
야, 내 얘기 안 끝났어! 움직이지 마!……크흠.
……메린,그래도 달라. 좋아하는 거랑, 그냥 몸 섞고 싶은 건 서로 다르다고.”
그녀가 점점 눈썹을 찡그리는 게 보였다.
이해가 잘 안 될 때 짓는 표정이다.
……알아. 이건 논리와는 동떨어진 이야기이지.
그래도 네가 완전히 모르진 않을 거라 믿고 있어.
설사 그 감정의 종류는 다를지라도, 너는 다른 사람을 위해……
나를 위해 울어주었으니까.
엄마의 장례식 때도, 그리고 그 겨울날에도.
……그리고 오늘도.
그러니 메린, 내가 너를 보며 무얼 느끼는지 그대로 말해줄게.
조금이라도 그게 네 마음에 전해졌으면 좋겠다.
“나는 말야, 네가 가능한 즐겁게 웃으며 살았으면 좋겠어. 가끔 불안하고, 무섭고, 슬퍼서 울고 화가 나더라도, 나머지 시간엔 환히 웃었으면 좋겠어.
그리고 가능하면, 그걸 내가 옆에서 보고 싶어.”
“……”
왼손을 그녀에게 내밀자, 그녀가 잠시 그걸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자신의 손을 뻗어왔다.
그 손등을 포개듯이 살며시 쥐었다.
그녀는 살짝 움찔거리긴 했지만, 뿌리치진 않았다.
“난 네 마음을 원해.”
“……마음? 나한텐 그런 거……”
“있어. 그러니까 날 걱정하지. 난 알아, 메린. 너한테도 마음이 있어. 네가 모를 뿐이야.”
단호한 내 말에도, 그녀는 눈썹을 내릴 뿐이었다.
그 모습에 가슴이 욱신거리면서도, 나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그럼 이렇게 말할까? 네가 날 좋아하지 않으면, 너와 밤을 보내지 않을 거야. 밤을 보낸다는 게 뭔 뜻인지 알지?”
“……섹, 아니, 안 잔다고?”
“그래. 안 잘 거야.”
그녀의 손을 조금 더 세게, 꼭 잡으며 말을 이었다.
“……솔직하게 대답해줘. 메린, 나 좋아해? 남자로서.”
“……나…는…….”
곤혹스러운 듯이, 그녀의 시선이 이리저리 움직이다가 다시 나를 향했다.
꼭 말로 해야 되느냐고, 그녀의 눈동자가 묻고 있었다.
“대답해줘. 중요한 거야.”
“……나는, 잘 모르겠어…….”
“그래.”
……그렇게 대답할 줄 알았어.
나도 안 지 얼마 안 되었는데, 넌 어떻겠냐?
그래도 아니라고 딱 잘라 말하지 않은 걸 다행으로 여겨야 되나?
……아니, 그건 너무 낙관적이지.
쓴웃음과 함께 잡념을 묻어버리고, 그녀에게 다시 물었다.
“아까 서슴없이 단추 풀려고 했지? 메린…… 나한테, 안기고 싶어? 나랑 입맞추고, 네 알몸 보여주고 싶어? 나랑 그런 거 하고 싶은 거야?”
“나는…….”
“내 의사는 상관없어. 메린, 네가 그러고 싶은 건지를 말해줘.”
나는 저리 두고, 너 자신이 원하는지를 말해라.
그렇게 미리 잘라버리지 않으면, 왠지 그녀는 ‘네가 원한다면 상관없다’고 말할 것 같았다.
……다른 사람이라면 ‘마음 한편에 그런 욕구가 있으니 괜찮다’는 뜻이겠지만, 그녀는 다를 거다.
아마 그 말 그대로, 그녀 자신은 원하건 말건 상관없다는 뜻이겠지.
그런 건 옳지 않고, 나도 싫고, 그녀에게도 하등 도움이 안 되는 짓이다.
하지만 만약, 그녀가 원한다고 대답한다면…….
……음, 솔직히 어떻게 될지 모르겠어.
메린은 눈을 살짝 가늘게 뜨며 맞잡은 손을 바라보다가, 다시 시선을 들고 나를 보았다.
감정으로 반짝이지도 않고, 텅 비어 있지도 않은 무덤덤한 눈.
그 고요한 주홍빛 눈동자 속에서, 그녀의 영혼이 살짝 엿보인 듯했다.
그녀의 입술이 천천히 열리며, 그 사이로 말이 새어나왔다.
“……모르겠어. 네가 남자이고, 내가 여자이고…… 그런 거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어서 잘 모르겠어.”
와, 차였다!그런데도 속이 아프지 않으니 신기하군.
술집에 가면, 이따금 실연당했다면서 술 퍼먹으며 꺼이꺼이 울고 있는 사람을 봤었는데.
나는 오히려 웃음이 나왔다.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다’는 거에 희망을 느껴서?
아니면, 그녀가 그렇게 말하면서도 내 손을 뿌리치지 않고 있어서?
아니면 누구 말마따나 내가 미친놈이라서?
……아마 그 어느 것도 아닐 거다.
특히 마지막 건 절대 아니야.
그저 기뻤다.
그녀가 얼버무리지 않고 솔직하게 말해준 게 기뻤다.
그만큼 나에게 마음을 열고 있다는 사실에 가슴이 벅차오른다.
……아,진짜 나 머리가 이상해졌나봐.
그러나 메린은 시무룩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이거, 이상한 거지?”
“전혀 아니야.”
“……네가 말한 거, 이제부터 생각해야 되냐……?”
“아니. 그러라고 말한 거 아냐.”
나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억지로 그런 생각할 필요 없어. 물론 네가 생각하고 싶으면 해도 돼. 너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되는 거야. 난 네가 날 남자로 보든 말든 상관없어.”
그래, 상관없다.
지금까지 이 녀석 옆에 있던 건, 얘가 여자라서가 아니다.
얘랑 나중에 뭘 어떻게 하고 싶어서 같이 있던 게 아닌 거다.
그날 그 숲에서 날 붙잡고, 그 뒤로 십여 년을 가까이 지낸 소꿉친구가 어쩌다 보니 여자였고, 내가 그 소꿉친구를 좋아하게 됐을 뿐.
드레스 차림에 홀린 건 맞지만, 그때부터 좋아하게 된 건 아닌 거 같아.
……그럼 언제부터 좋아하게 된 걸까?
메린은 나에게 잡힌 손을 꼼지락거리며 입을 열었다.
“……그럼 너도 평소처럼 하는 거냐?”
“그럴걸.”
“……넌 그걸로 만족해? 결국 넌 아무것도 얻는 게 없잖아.”
“……”
와, 진짜 내가 얘를 많이 좋아하나보다.
그냥 확인하려고 묻는 거일 텐데, 날 걱정해주는 걸로 들리네.
만족…….
그냥 좋아한다고 고백하고 끝나는 걸로 괜찮은 걸까?
여기엔 자신 있게 고개를 끄덕일 수 있다.
얼떨결에 고백해버리긴 했지만, 그녀와 이어진다는 건 상상조차 안 되는 머나먼 꿈이다.
그녀가 질색해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고마워해야지.
애초에 나는,내가 그녀를 좋아해도 되는지를 고민했다.
나는 그녀를 불행에 빠뜨린 놈이니까.
내가 없었다면, 그녀는 진작에 마을을 나와서 마음 편히 살았을 거다.
나 자신이 사슬이 되어, 그녀를 그 마을에 묶고 있었던 거지.
지금이라도 그녀를 자유로이 놓아줄까?
그럼 그녀는 웃으며 살 수 있을 거 아냐.
……그렇겠지. 하지만 싫어.
그녀가 내 앞에서 영영 사라지는 건 싫다.
그녀를 속 편히 떠나보내기엔, 너무 늦어버렸다.
포기하거나 밀고 나가는 것, 이 둘 중 하나를 하셔야지, 싹을 자르시면 안 됩니다.
……피터 왕자님, 싹이 훌륭히 텄습니다.
그럼 이제 포기할지 말지를 선택하면 되는 건가요?
그럼 뭐, 결론이 나와버렸네요. 그렇죠?
“……”
살짝 시선을 떨군 그녀를 보았다.
좋아하는 마음을 어떻게 포기할 수 있는 건지, 나는 아직 모른다.
나중에 그녀가 마당에 묻은 그 추잡한 새끼한테 물어볼까 싶다.
……하지만 그녀에게 내 마음을 전하고, 이렇게 마주 앉아 있으니 확실히 알겠어.
마음을 포기하는 방법 따위 몰라도 상관없다.
알아도 써먹지 않을 거야.
그녀가 나 때문에 고향에서 그렇게 산 거라고 비난해도, 그래서 나를 거부하게 되더라도.
무슨 일이 일어나든, 나는 그녀를 계속 좋아할 테니까.
……설령 그녀가 다른 남자를 좋아하게 되더라도.
뭐, 그때는 다른 사람들처럼 술 퍼먹으며 질질 짜겠지만, 그래도 그녀가 그런 감정을 품게 되었다는 건 기뻐하지 않을까?
……그래, 난분명 기뻐할 거야.
그러니까 괜찮아.
“……어. 충분해.”
설령 오늘 내가 전한 말이 네 마음속에서 사라진다고 해도, 난 상관없어.
“넌 어쨌든, 나한텐 큰 의미가 있었거든.”
“……의미?”
그녀가 매일매일, 성실하게 걸고 있는 펜던트의 장식을 가만히 어루만졌다.
은방울꽃.
새하얗고 순수해 보이면서도, 한순간에 죽음으로 이끄는 맹독을 가진 아름다운 꽃.
왠지 그녀와 닮은 것 같아, 가게에서 보자마자 사버렸었지.
……게다가 마침 이 꽃엔, 내가 그녀에게 품고 있던 것과 딱 맞는 소망이 담겨 있었다.
‘반드시 행복해진다’, 그게 이 꽃의 꽃말이었던 것이다.
“……”
나, 진짜 전부터 얘 엄청 좋아하고 있었구나.
드레스 차림에 빠지기 전부터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니.
펜던트를 놓고, 그녀를 향해 웃었다.
왠지 좀 겸연쩍어서, 나도 모르게 살짝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어. 굉장히 크고 중요한 의미가 있었어.내가 먼저 널 떠나는 일은 없을 거라는 걸 알았거든.”
……나는네가 행복하면 돼.
그 행복이 누구나 인정할 수 있는, 평범하고 일반적인 행복이라면 더더욱 좋아.
그리고 아주아주 작은 가능성이겠지만……
만약에 만약, 내가 너의 행복이 될 수 있다면 조금 더 좋을 거야.
“……그러니 충분해. 대만족이야.”
누군가는 이런 나를 보고 등신 호구새끼라며 비웃겠지.
하지만 어쩔 거야.
누구 말마따나 바보에 멍청이인 걸…….
호구는 결단코 아니지만!
“……그걸로 충분하다고?”
“그래. 그러니까 얼굴 펴. 내 걱정 말고.”
그렇게 말하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침울하게 보일 정도로 가라앉아 있던 그녀의 표정이 차츰차츰 밝아지고, 희미하게 미소를 짓는 게 보였다.
……그래, 이런 걸로 충분해.
너무 많이 욕심을 부리면 탈이 나는 법이야.
여태껏 그랬던 것처럼, 이렇게 가까이 있을 수 있으면 된다.
지금의 그녀와는, 그걸로 충분하다.
잡고 있던 손을 놓고, 태연하게 말을 걸었다.
“좀 출출한데. 뭐 먹을 거 없을까.”
“창고에 이것저것 있더라. 으응……그러고보니 나도 배고프네.”
“뭐 안 먹었어? 나 꽤 오래 쓰러져 있던 거 아냐?”
정확히 얼마동안 의식을 잃고 있었던 건지는 모르지만, 한두 시간은 결코 아닐 터.
내 질문에, 그녀는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왠지 배가 안 고프더라고. 근데 갑자기 고프네.”
“……그래.”
“그럼 대충 만들어올 테니까 쉬고 있어. 아, 너 씹을 수 있냐?”
“……야, 나 이빨도 턱도 안 빠졌다. 행여나 죽 쒀오지 마라.”
퉁명스럽게 쏘아붙이자, 그녀는 대답없이 킥킥 웃으며 방을 나섰다.
“……”
쉬고 있으라고 한 그녀의 말을 따라, 얌전히 담요를 덮고 도로 누웠다.
음…… 고백했으니, 이제 메린 생각으로 밤새 고민하는 일은 없어지나?
속을 다 털어놔서 그런가, 일단 지금은 마음이 굉장히 편하긴 한데.
그녀의 손을 잡았던 왼손에, 여전히 그 부드럽고 따뜻한 감촉이 남아 있는 것 같다.
약간 욱신거리는 오른손으로, 나도 모르게 그 왼손을 감싸며 눈을 감았다.
……그러자 덮인 눈꺼풀 위에, 부엌에 선 어느 여인의 뒷모습이 떠올랐다.
그게 메린인지, 아니면 엄마인지,그것도 아니면 내가 모르는 다른 사람인지 알 수 없다.
그럼에도 자연스럽게 그녀의 이름을 입에 올린 건, 내 개인적인 바램 때문이겠지.
내 부름에 돌아서서 환히 웃는 모습을 보며, 나는 가만히 미소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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