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2화 〉 138화 : 산맥 너머로 (2)
* * *
어째서 이 엘프는 나를 죽이지 않았는가?
나는 그걸 알고 싶었다.
블루벨이 메린을 날려버린 순간, 내 목숨도 거기서 끝난 거나 다름없었다.
오른팔은 맛이 갔지, 기력은 다 빠졌지…….
왼손으론 검을 제대로 다룰 수 없으니, 설사 내가 블루벨에게 맞섰다 해도 그대로 푹 찔리고 끝이었을 거다.
목과 양 손목을 지지는 끈?
애초에 그 고통을 감수하면서 나에게 달려든 것이다.
그 잠깐을 더 못 버텼을까?
팔다리가 아작이 난 지금도,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콧방귀를 마구 뀌어대고 있는데?
말도 안 되지.
이 엘프는 일부러 나를 죽이지 않은 거야.
그리고 그 행동엔 분명 무슨 이유가 있겠지.
그 이유가 무엇이냐에 따라, 이 엘프에 대한 처우가 결정될 것이다.
제일 좋은 처우는 아까 내가 슬쩍 말했던, 짐짝처럼 안장에 묶여 실려가는 것이다.
엘프의 숲에 도착할 때까지 계속 밧줄에 꽁꽁 묶여 있겠지만……,
뭐, 누구 제안처럼 밤마다 팔다리 으스러지는 것보단 낫지 않나?
제일 나쁜 건…… 글쎄, 뭐가 될지 모르겠네.
좋지 않은 일엔 항상 그보다 더한 상태가 있기 마련이니까.
땅 아래에 지하가 있고, 지하 속에 깊은 심연이 있으며, 심연 속엔 끝없이 끓어오르는 지옥이 있는 것처럼.
……아무리 적이라도 눈앞에서 끔찍한 꼴이 되는 건 싫다.
그걸 내 손으로 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한숨부터 나온다.
그러니 이 웃긴 엘프가 제발 좋은 대답을 해줬으면 좋겠는데.
“블루벨, 솔직하게 대답해. 왜 날 죽이지 않은 거지?”
“……뭔 개소리야, 난 네놈을 못 죽인 거야. 이 지랄 같은 끈들 때문에 너무 아파서 정신을 잃었다고.”
“웃기지 마. 너 메린 날려버린 뒤에도 단검 쥐고 얼마간 깨어 있었잖아. 왜 안 죽였어?”
바로 메린을 향해 튀어나간 탓에 부정확하지만, 나는 블루벨이 무어라 중얼거리는 것 자체는 들었다.
나를 죽일 절호의 기회를, 그녀 스스로 놓아버린 걸 기억하고 있다.
……내가 용사인 걸 알아차렸으면서도, 억지로 눈을 돌렸던 걸 기억하고 있다.
그러니 괜한 자존심 부리지 말고 제대로 말해줬으면 좋겠다.
성격이 괴상하긴 해도 나쁜 녀석이 아니란 건 아니까.
얼마든지 감안해줄 수 있다고.
“……끈들이 너무 아파서, 못 움직였을 뿐이야.”
그런데도 고집을 부리고 있다.
하…… 돌겠네.
내가 속을 직접 들어내줘야 하나?
“그래? 난 또 네가 일족에 의구심이 생겨서 안 그런 줄 알았는데.”
“…………뭔 헛소리야? 그럴 리가 없잖아.”
시선을 피하는 그녀를 빤히 쳐다보며, 나는 재차 입을 열었다.
“그 블랙펄이라는 미친놈이 ‘왕의 허락을 받았다’는 거에 엄청 충격받더만. 넌 ‘숲의 일족’이라는 거에 엄청난 자긍심을 가지고 있잖아?
네 말 들어보면, 그 ‘생명의 순환’을 어기는 건 엘프에게도 엄청난 금기인 거 같은데. 아니야?
그런데 엘프의 왕이라는 자가, 그 지도층들이, 손수 금기를 범하는 걸 허락했다? 나라면 따질 거 같은데.”
“……”
“너는 왜 엘프들이 용사를 죽이려는 건지 모른다고 했지. 블랙펄을 만나기 전까진 그 이유가 별로 궁금하지 않았을 거야. 안 그래?”
왕을 위시한 윗사람들이 지시한 거다.
분명 숲과 일족을 위한 어떤 뜻이 있을 거라고 막연히 생각했겠지.
속된 말로, 얘는 그냥 까라고 해서 깐 거다.
그러나 그 백발의 미친 엘프를 만나고, 놈이 밝힌 왕의 포부를 들어버렸다.
숲의 수호자가 아닌, 세상의 지배자로 서려 한다는 걸 알았다.
“너는 그때 처음으로 의심한 거 아냐? ‘왕이 왜 이 임무를 내린 것인가? 정말로 이 임무를 수행해야 하는 것인가?’ 라고.”
“……하, 망상이 심하네. 그래, 내가 진짜 그랬다 쳐. 결국 난 너에게 칼을 들이댔어. 그러니 그게 다 뭔 소용이야?”
“그래, 넌 날 공격했어. 굉장히 허술하게.”
정말로 나를 죽이고 싶었다면, 내가 그리폰의 공격으로 날아간 직후를 노렸어야 한다.
아니면 처음부터 블랙펄에게 가세하든가.
그러나 그녀는 구태여 일이 다 끝난 뒤를 노렸다.
그것도 자신에게 대응할 수 있는 메린이 내 옆에 있을 때.
……애초에 메린을 날릴 거였다면, 그녀는 내가 아닌 메린을 노렸어야 한다.
그래야 그 끈들이 아무 반응도 하지 않았을 테니까.
임무를 완수하고자 하는 의지로 불탄 거 치고는 너무나도 허술하기 짝이 없었다.
마치 크나큰 갈등 끝에, 억지로 몸을 움직인 것처럼.
“그냥 될 대로 되라고 저지른 거지?”
“……”
솔직히 말해.
날 죽이기 싫어서 안 죽인 거라고.
“아, 맞아, 아니야. 빨리 말해.”
“……아니야.”
고개를 떨군 채 중얼거리더니, 그녀는 갑자기 고개를 홱 쳐들고 소리쳤다.
“아니야! 착각하지 마, 용사! 네놈이 그때 완전히 힘이 빠졌으니까 노렸을 뿐이야! 그리고 알아서 낭떠러지로 죽으러 가니 그냥 내버려둔 거고!
의구심? 없어, 그딴 거! 설사 있다고 해도, 그깟 것 때문에 임무를 뒷전으로 미룰 리가 없잖아? 난 너처럼 한심하지 않거든.”
“진심이야? 정말로 날 죽이고 싶었다고?”
“그래. 인간 따위에게 속아넘어가기까지 했는데, 그걸 설욕하는 건 당연한 거 아니야? 저 년만 아니었다면 성공했을 텐데, 정말 분해!”
깊이 심호흡을 한 후, 재차 물었다.
“마지막으로 묻는다. ……그게 네 진심이냐?”
“……그래. 진심이야.”
“그래. 좋아. 알았어.”
멍청하긴.
끝까지 그렇게 주장하고 싶었으면, 고개를 돌리지나 말든가.
진짜 까다롭구만.
고기를 별로 안 먹고 살아서 그런가?
아니면 상체 중간 부분이 밋밋해서?
어쨌든 저렇게 어중간하게 뻗대니 할 수 없지.
투옥행이다.
나는 로나에게 블루벨의 팔다리를 치유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러자 곧바로 메린이 매서운 눈초리로 나를 쏘아보며 물었다.
“풀어줄 거냐?”
“내가 미쳤냐? 날 죽이려 드는 놈을 풀어주게.”
“그럼 왜 고쳐줘? 손발 자를 거냐?”
“아니.”
나는 위슨을 힐끗 보며 말을 이었다.
“밖에 데리고 다니는 것도 성가시니까,손발을 묶어서 위슨의 배낭에 넣으려고.”
“위슨 배낭에? 들어야 가겠지만…….”
위슨은 팔짱을 끼면서 나를 향해 눈을 깜빡였다.
“살아있는 걸 넣어본 적은 한 번도 없는데. 어찌될 지 몰라.”
“그래? 이 기회에 시험해보지, 뭐.”
“……진짜로? 쟤가 죽을 수도 있는데? 죽일 생각 없다며.”
“없어. 근데 뭐, 불의의 사고로 죽는다면 어쩔 수 없지.”
블루벨을 살린 채로 엘프의 숲에 데려가는 건, 그녀에게 임무를 내린 엘프를 찾아 항의하기 위해서이다.
그 편이 더 이야기가 빨리 진행될 테니까.
그리고 그녀를 데리고 있으면, 거기 가까이 가자마자 화살이 날아오는 일도 없겠지.
블루벨의 목숨 가치는 그게 전부이다.
별 거 아니라는 뜻이다.
얘가 죽는다고 엘프의 숲에 못 들어가는 것도 아니고.
아는 것도 하나도 없지, 꿋꿋하게 내 적으로 있으려 하는데 어떻게 더 귀하게 봐?
전에는 활솜씨라도 빌릴 수 있었지만, 이젠 그것도 없잖아.
호의는 이미 충분히 베풀었다.
기회를 제 발로 차다 못해, 대놓고 찢어버리는 녀석에게 더 줄 건 없다.
더는 안 봐줘.
“뭐, 어쨌든 솔직하게 말해줬으니, 배낭에 들어가기 전에 욕구는 풀어줄게.”
“요, 욕구?! 뭔 개소리야!”
“세상에, 겁탈당하는 게 취향이라니……. 이상성욕도 정도가 있지…….”
“뭐?! 야, 이 미친 새끼야!! 내가 언제 그랬어?!”
이제 와서 잡아떼네.
하긴, 떳떳하게 밝힐 건 못 되지.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어쩐지 나를 보며 아연해하는 세 사람에게 말했다.
“난 가서 그 놈한테 물어보고 올 테니까, 블루벨 묶고, 팔다리 치유해줘. 나 참, 진짜 별 사람을 다 본다. 하아…….”
말을 많이 한 탓에 도로 기운이 떨어져 버렸다.
……아니, 맥이 빠진 건가?
아무리 자존심이 세도 그렇지, 사람이 기껏 여지를 만들어주는데 그걸 매몰차게 내쳐?
망할 귀쟁이 같으니라고.
살아있는 동안, 엘프의 숲에 도착할 때까지 실험체로 써먹어주마.
이건 내 마지막 호의이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오두막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그 삶아버릴 돼지새끼를 어느 별채에 뒀더라…….
“우와, 저 새끼 진심인가봐! 야, 카엘! 미친놈아, 거기 서!”
“카엘 님, 아니에요! 메린 님! 카엘 님 좀 막아주세요!”
“졸려서 대가리 굳었구만. 쯧쯔, 그냥 푹 자게 기절시킨다.”
으응?
뭐가 아니라는 거지?
갑자기 오두막이 시끄러워진 거 같아 걸음을 멈추고 돌아선 순간,
퍽!
“억.”
……그대로 의식이 끊어져버렸다.
다음날 아침, 나는 왠지 모르게 욱신거리는 뒷목을 매만지며 돼지새끼… 이 대피소의 관리인에게 돈을 지불했다.
붕대와 약초와 약, 그리고 어제 요리 재료로 쓴 것들에 대한 값이다.
이 놈이 아무리 파렴치한이라 해도, 쓴 물건들의 값은 제대로 치러야지.
우린 강도가 아니니까.
“금화 하나면 되죠?”
“다, 당치도 않습니다. 도, 도, 돈이라뇨. 마, 마땅히 제가, 보, 봉사해야 하는 것인데요!”
관리인은 무슨 병에 걸린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덜덜 떨며, 한사코 돈을 받기를 거부했다.
그러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얼굴이 순식간에 새하얗게 질리며 마구 딸꾹질을 해대기 시작했다.
음, 좋은 현상이군. 뼛속 깊이 교훈이 잘 새겨진 모양이야.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놈의 앞에 금화 한 닢을 툭 놓았다.
“얌전히 이거 받고, 물자 비축해두세요. 곧 다시 사람들이 산에 올 테니까요.
……행여나 또 시커먼 음심이 들거든, 댁 가랑이를 떠올려. 자연히 가라앉을 거다.”
“히이익……!!”
뒷말을 가만히 속삭여주자, 놈의 얼굴이 잿빛으로 변하며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
웃으며 그 어깨를 툭툭 두드려준 후, 나는 다른 일행들과 함께 대피소를 나섰다.
“야, 카엘.”
말을 끌고 막 출발하자마자, 메린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저 놈한테 뭐 했냐?”
“엉? 왜?”
“너랑 눈 마주치자마자 지린 거 같아서.”
“……아가씨, 제발 고운 말을 써주세요. 지리긴 뭘 지려, 임마. 그냥 겁먹었다고 해.”
“진짜 지린 걸 어쩌라고.”
……카운터에 가려졌을 텐데 그게 보였나?
상쾌한 아침을 망치지 않기 위해, 나는 그 놈이 구체적으로 뭘 지린 건지는 묻지 않기로 했다.
근데 얘 질문이 뭐였더라.
……아, 그래.
“관리인 새끼한테 뭐 했냐고? 그냥 혹주머니 잘라줬어.”
“혹주머니?”
“어. 자꾸 못된 짓을 하게 만드는 심술주머니가 달려 있더라고.”
“으응??”
비록 메린과 로나에게 호되게 당했다고 해도, 로나가 치유 기도를 해주면 아무 흔적도 남지 않는다.
때문에 나는 놈의 팔다리를 고치기 전에, 평생 지워지지 않을 교훈을 새겨주고 싶었다.
그래서 신체 구조를 공부했다는 로나와 함께, 놈의 알주머니 하나를 싹둑 잘라버렸다.
미수였으니까 이걸로 끝나는 거라고 으름장을 놓으면서.
“진짜 그런 게 달려 있었다고?”
눈썹을 일그러뜨리며 되묻는 그녀가 귀여워, 나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푸핫, 농담이야. 그냥 다신 못된 짓 하지 말라고 혼쭐을 내줬어.”
“못된 짓? ……아, 그거? 내가 땅에 묻었으니까 된 거 아니야?”
“그건 너만 된 거지. 내 몫이 남았잖아.”
내 말에, 그녀는 의아한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네 몫? 그게 뭔 소리냐? 그 놈이 나한테 덤볐지, 널 건드린 게 아니잖아.”
“내가 좋아하는 여자를 괴롭혔잖아. 나한테 해를 입힌 거나 마찬가지야. 그러니 갚아줘야지.”
“………………그런 거야?”
“그런 거야.”
음, 내가 맨 앞에 있어서 정말 다행이다.
메린에겐 내 뒤통수만 보일 테니, 내 얼굴이 살짝 화끈거리고 있는 걸 못 보겠지.
얼굴을 마주할 일이 생기기 전에 얼른 열이 식길 바라며, 나는 산길을 올라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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