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4화 〉 140화 : 산맥 너머로 (4)
* * *
첫 번째 부락에서 출발해, 또 다시 표식을 따라 길을 걸었다.
벼랑길을 지나가다가 하피들이 튀어나와서 돌팔매질과 슬링을 쏘아야 했지만, 그 외에는 별일 없이 ‘2번대피소’라 적힌 팻말이 꽂혀 있는 오두막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리고 목도하게 된 광경에, 이번에는 진짜로 침울해지고 말았다.
무너진 건물들 중 한곳에, 완전히 썩은 시체들이 잔해에 파묻혀 있었기 때문이다.
“……”
그리폰이 이 산맥에 자리했을 때 산에 있었던 사람들이겠지.
어쩌면 비를 피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시체들이 있는 건물은, 이 대피소에서 가장 큰 건물이었다.
여기서 식사라도 같이 하면서 모여 있던 게 아닐까?
아무튼 이들은 죽었고, 이들이 어디 사는 누구였는지 알아볼 수 있는 사람은 이 지상에 없을 것이다.
가족에게 전해줄 유품이 있을지 모르겠네.
절로 깊은 한숨이 나왔다.
“……위슨, 테라 아직 힘들지? 어디 삽 없을까?”
“너 삽 있잖아. 왜, 이 인간들 묻어주려고?”
“봤는데 어떻게 그냥 지나쳐. 안 묻어주면 저주받을걸. ……그리고 야영용 삽으로 언제 파냐? 그거 거의 모종삽이구만.”
갑자기 죽은 것도 억울하고, 고향 땅에 묻히지 못하는 것도 원통한데, 이렇게 땅 위에 내팽개쳐져 있는 거다.
분명 원한이 깊게 서려 있을 거야.
근데 사람들이 자신의 시체를 찾았으면서, 이걸 안 묻어주고 그냥 휙 간다?
그날부터 매일 꿈에 나타나서, 피도 눈물도 없는 무자비한 놈이라고 마구 욕하면서 벼랑에서 굴러 떨어지라고 저주하겠지.
나라면 그럴 거야.
“카엘 님도 참! 사람의 영혼은 죽자마자 천상으로 가서 재판받잖아요. 근데 저주를 어떻게 내려요?
카엘 님의 그 풍부한 감수성엔 절로 따땃한 미소가 나오고, 저도 이 분들 묻어드리는 건 대찬성인데요. 그래도 아닌 건 아닌 거에요.”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로나에게, 나는 퉁명스럽게 물었다.
“저주 거는 원혼은 진짜로 있잖아. 그럼 그런 잡귀는 어디서 튀어나오는 건데?”
“일부는 재판 출석명령에 불복하고 튄 놈들이고, 일부는 지옥에서 빠져나온 놈들이에요.”
로나는 방긋 웃으며 그렇게 대답했다.
음, 신기하군.
권위 있는 사제님의 말씀인데 조금도 믿어지지 않아.
아니 재판 출석명령은 그렇다 치고, 그걸 튄다고? 어떻게?
창조주의 부름을 거부할 수 있는 거야?
전지전능한 신의 말씀을 거역할 수가 있다고?
말이 안 되잖아!
“…………너 농담한 거지?”
“아닌데요?”
“……”
로나는 왜 그런 걸 묻냐는 식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진짜 농담이 아니었나봐.
허, 언제 한 번 기회를 잡아서 창조주와 교리에 대해 이것저것 물어봐야겠어.
아무튼 잔해를 치우고 시체들을 그 안에서 끄집어내어, 조심스럽게 바깥에 눕혔다.
잔해를 치우자마자 지독한 냄새가 풍겼는데, 눈이 아찔해지자마자 코가 죽은 덕분에, 안 그래도 참혹한 현장에 내 비참함을 더하지 않을 수 있었다.
그렇게 꺼낸 시체는 대략 여덟 구.
다른 곳에도 누군가 파묻혀 있을지도 모르지만, 우리 힘만으로는 잔해를곱게치우기 어려우니 그냥 두기로 했다.
뭐, 답답하면 꿈에 나와서 알려주겠지.
“여기엔 삽 하나밖에 없나보네.”
메린이 어깨를 으쓱이며, 나에게 삽을 넘겨주었다.
으, 나 혼자 여덟 구 다 묻으라는 건가?
“너 혼자서 하면 어느 세월에 끝나겠냐? 로나가 야전삽 있다니까 난 그거 빌릴 거야.”
“……”
천막 칠 때 희한하게 생긴 삽을 쓴다 싶었는데, 그거 야전삽이었구나.
아니 뭔 병사도 아니고…….
아, 전투사제니까 교단 입장에선 병사인가?
그렇게 생각하니 왠지 또 말이 되는 것 같았다.
아무튼 나와 메린 둘이서 각각 하나씩 들고 땅을 파서, 시체들을 하나씩 고이 묻어주었다.
그 후, 로나를 불러 위령 기도를 함께 올린 다음, 모닥불을 쬐었다.
요리용 솥을 금지당한 위슨이, 프라이팬으로 용케 스튜 비슷한 걸 만들며 고개를 까닥였다.
“먹을 거지?”
“당연하지.”
좀 마음이 무겁긴 해도, 내가 아는 사람들이 죽은 게 아니니 밥은 넘길 수 있다.
생판 모르는 사람 죽은 거에도 일일이 목 메이면 이 험한 세상 못 살지.
타닥거리는 모닥불을 빤히 보는데, 메린이 나를 톡 건드리며 말했다.
“무릎베개 해줘?”
“아으…… 그거 농담이었다고……. 제발 잊어줘…….”
다른 의미로 머리를 감싸며 번민에 빠진 밤이었다.
이윽고 두 번째 부락에 도착하고, 그 다음 또 다른 대피소에 들른 후, 세 번째 부락으로 향했다.
대략 나흘의 이 여정 중에,
벼랑에서는 하피와 알 수 없는 새떼를 만나고,
평지에선 오우거가 동굴에서 튀어나왔으며,
숲에서는 다이어울프와 거대 곰이,
동굴에선 흡혈박쥐와 슬라임과 맞닥뜨렸다.
아니 여태껏 조용하다가 갑자기 왜 마구 튀어나오고 지랄인 건지, 원.
그리고 이 모든 전투에서, 메린은 대거 한 자루만으로 대처해야 했다.
블루벨 때문에 벼랑에서 떨어지면서 검을 잃어버린 탓이다.
“오우거가 들고 있던 몽둥이라도 쓰지 그래?”
“어휴, 됐어.”
손사래를 치며 고개를 젓는 그녀에게, 나는 재차 물었다.
“왜? 대거보다는 사정거리가 길잖아. 더 낫지 않아?”
“싫어. 얼굴에 살점 튀잖아. 기분 나빠.”
그렇게 말하는 그녀는, 방금 오우거가 뿜은 따뜻한 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는 내 머릿속에서, 온갖 말들이 휘리릭 지나갔다.
그냥 베는 게 더 좋아서 그러는 거 아니냐, 얼굴에 피 튀기는 건 기분 안 나쁜 거냐, 혹시 그게 네 피부에 잡티가 없는 이유인 거냐 등등, 입 밖에 냈다간 한바탕 벌어질 말들.
그 말들 중에서 가장 짧은 한 마디를 골랐다.
나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그녀에게 그 말을 던져주었다.
“……아, 그래.”
정말 나 자신이 자랑스럽기 그지없었다.
참고로 블루벨은 정기적으로 위슨의 배낭에서 꺼내어 상태를 확인하고, 위슨이 그 경과를 기록하고 있다.
일단 확인된 건, 들어갈 때의 기억은 없다는 것.
게다가 사흘이나 꼬박 지난 다음에 꺼내도, 여전히 배가 고프지 않다는 것이다.
뭣보다도, 블루벨은 처음 배낭에 들어간 뒤로 일주일 가까이 지났다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그녀를 꺼낼 때는 항상 낮이었던 탓에, 하루도 채 지나지 않은 줄로 알고 있는 것이었다.
“이야, 이거 굉장히 흥미로운데. 배낭에 들어가면 겨울잠이라도 자게 되나?”
사흘만에 바깥 공기를 쐰 엘프를, 오 분만에 다시 배낭에 집어넣으며 솔직하게 감탄했다.
그러자, 자신의 수첩에 실험내역을 기록하던 위슨이 어깨를 으쓱였다.
[겨울잠은 아닐걸요. 그거 중간에 깨어나서 배 채우고 도로 자거든요. 저건 존재 상태를 정지…… 아니, 존재 자체가 변하지 않도록 고정시키는 거 같아요.]
잘은 모르겠지만, 배낭에 들어간 시점의 상태 그대로 유지된다는 것 같았다.
“이거 만들 때 뭔 마법 썼는지 몰라?”
[몰라요. 위슨은 딴 거 준비하느라 바빴거든요. 이제 일주일 뒤에 꺼내 보면 되겠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일주일 뒤에도 멀쩡하다면, 이제 엘프의 숲 근처에 도착할 때까지 넣어둘 생각이었다.
그런 식으로, 산맥을 넘어가는 여정은 순탄하게 착착 진행되었다.
중간중간 전투가 벌어지긴 해도 굉장히 만족스러운 수준이다.
……도중에 다른 사람을 한 명도 만나지 못한 것만 빼면.
“……여기도 아무도 없구만.”
‘3번마을’, 세 번째 부락에 도착한 나는 곧바로 한숨부터 쉬었다.
그래도 이전에 들른 두 부락보다는 훨씬 양호하다.
아니, 최고로 좋은 상태라 해도 되겠지.
건물은 모두 멀쩡하고, 바닥에는 어떤 얼룩도 묻어 있지 않다.
……다만 사람이 없을 뿐.
“……”
이전에 들렀던 두 번째 부락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곳은, 나에겐 완전히 부숴진 첫 번째 부락보다 훨씬 끔찍했다.
무너진 건물은 없어도 내부가 완전히 엉망진창이었다.
가재도구들은 붉게 물든 채 박살이 나 있고, 바닥과 벽에도 진한 얼룩이 묻어 있었다.
그 얼룩의 정체가 무엇인지는 굳이 머리를 굴릴 필요도 없었다.
집 바로 앞 돌바닥에 똑똑히 새겨져 있었으니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머릿속에 생생하게 그릴 수 있었고, 나는 그날 저녁을 먹자마자 기절한 듯이 곯아떨어져버렸다.
……식사 전까진 눈이 말똥말똥했으므로 다른 녀석들이 또 몰래 약을 먹인 게 분명했다.
하지만 그 이유가 대강 짐작이 가니, 그냥 궁시렁거리기만 하고 적당히 넘어갔었지.
그에 비하면, 여기는 그냥 단체로 집 비우고 여행 간 거다.
놀러간 게 아니라 목숨을 부지하기 위한 피난길이라서 그렇지.
먼지로 뒤덮인 탓에 잿빛이 된 집 안을 둘러보며, 나는 안타까움을 느끼는 동시에 깊이 안도했다.
“어. 피난간 거 맞는 거 같아. 보존식품만 없어.”
“……메린, 집 뒤지지 말라니까. 우리 식량 많잖아.”
“냅둬봤자 썩잖아. 그래서 채소만 가져가려 했지. 근데 다 썩었어. 텃밭은 죄다 파여 있고.”
짐승들이 파먹었나봐.
그녀는 그렇게 투덜거리며 먼저 집 밖으로 나가버렸다.
하아…… 쟤는 진짜 어디 가도 굶어 죽을 일은 없겠어.
나는 씁쓸히 웃으며 고개를 살짝 저었다.
언제, 어디로 피난을 갔는지는 몰라도, 어쨌든 여기 살던 사람들은 무사하다.
문을 꼭 닫아 둔 덕분에 짐승들이 집 안을 헤집지 못했으니, 여기 주민들은 다시 돌아오기만 하면 이전처럼 살아갈 수 있겠지.
텃밭은 망했지만.
그리고 우리 역시 오늘은 야영을 하지 않아도 되니 얼마나 좋은가?
이 부락엔 이제 쓸쓸한 바람만이 남아있지만, 오늘 저녁은 여느 때보다도 마음 편히 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조심스럽게, 하지만 단단히 문을 닫으며 집을 나섰다.
텅 빈 부락을 대강 둘러본 후, 우리는 이 작은 마을의 여관에 머물기로 했다.
아무리 주변에 위험이 없다고 해도 만약을 위해선 한곳에 뭉쳐 있어야 하는데다, 말 셋에 엘크 하나를 먹이고 재울 큰 마구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메린이 녀석들에게 줄 건초를 찾는 동안, 나머지 셋이서 여관을 살펴보았다.
“우와, 여기도 먼지 장난 아니네요!”
로나가 객실 여기저기에 소복이 쌓인 먼지를 보며 눈을 깜빡였다.
나는 먼지가 피어오르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방에 들어가, 침대를 슬쩍 살펴보았다.
벌레 하나 먹지 않은 이불 위에, 먼지가 켜켜이 쌓여 있다.
숨을 참고서 가만히 이불을 만져보자,그럭저럭 푹신함이 느껴졌다.
음, 쓸만하군.
다시 조심스럽게 방 밖으로 나왔다.
“후…… 위에 우리 거 침구를 깔고 자면 되겠어. 여기에 청소도구가 있을 테니 대충 치우고 쓰자.”
“그래, 그럼 위슨이 우물 확인할 겸 물 길어올게.”
그는 내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훌쩍 나가버렸다.
뭐, 우물 상태가 영 좋지 않다면 정화하거나 정령을 꺼내겠지.
전에 마셔본 적이 있는데, 물의 정령이 만드는 물은 굉장히 맑고 시원하다.
……거북이가 입으로 물을 뱉어서 그렇지.
나 참, 진짜 내 동료들은 하나같이 ‘겉으로 판단하지 말라’는 교훈을 굉장히 빡세게 주는 것 같아.
아무튼 이 여관엔 장작도 충분히 준비되어 있다.
오늘은 정말 제대로 먹고 푹 쉴 수 있겠지.
슬슬 빨래도 해야 하니, 출발은 모레 하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어.
저녁을 먹으면서 그렇게 말하자, 다들 반기는 눈치였다.
메린은 아예 활짝 웃기까지 하고 있었다.
하긴, 따끈한 물에 목욕한 지도 꽤 됐으니 반갑겠지.
“잘 됐네. 안 그래도 여기 대장간 있더라. 검 하나 골라갈 수 있겠어.”
“……”
“뭐. 도둑질 같아서 그러냐? 산맥 넘었다가 여기 다시 올 거잖아. 그때 주인 있으면 돈 내면 되지.”
“그건 그런데…… 아니, 네 말이 맞아. 그래. 그렇게 하자.”
목욕할 수 있다는 것보다 검이 다시 생기는 걸 더 좋아하는 걸 보니, 저 녀석은 진성 검사가 맞다.
……뭐, 어때.본인이 저렇게 좋아하면 됐지.
그녀의 웃는 얼굴이 예뻐서 그런 건 절대 아니다.
그나저나 이렇게까지 한 사람도 만나지 못할 줄은 진짜 몰랐다.
그 돼지새끼…… 1번대피소 관리인은 어떻게 무사할 수 있었나 모르겠네.
이럴 줄 알았으면, 그 놈한테 웨셋의 밀리아 사제에게 연락 취하라고 할 걸 그랬어.
“걱정 마세요, 카엘 님.”
한숨을 쉬는 나를 향해, 로나가 말을 걸었다.
“밀리아 사제님은 이미 마을 주민들을 데리고 다른 마을로 가셨을 거에요. 그리고 생각해봤는데요. 웨셋도 그렇고, 여기 산에 사는 사람들도 그렇고, 다들 드워프와 연락하고 살았겠죠?”
“웨셋은 어쨌든, 여기 살던 사람들은 그럴걸? 활기차게 교류하진 않았더라도 모르고 지내진 않았을 거야.”
무려 드워프제 물건들 때문에 상단이 오가던 곳이다.
‘네 개의 부락들을 쭉 따라가면 산맥을 넘을 수 있는 구조’로 되어 있는 걸 보면, 아마 네 번째 부락 너머에 드워프들의 터전으로 가는 길이 있겠지.
그러니 여기 세 번째 부락까지의 사람들은, 설령 직접 드워프를 보진 못했더라도 그들의 존재 자체는 알고 있었을 것이다.
어쩌면 정기적으로 방문했을지도 모른다.
땅 위와 땅 밑이긴 해도, 한 지역에 같이 사는 이웃이니까.
로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재차 말을 꺼냈다.
“혹시 이 부락에 있던 분들은 드워프들을 찾아간 게 아닐까요? 그게 아니면 짐승들을 피할 방법이 없으니까요.”
“흠…… 그럴싸한데.”
“그러니 카엘 님, 바위궁전으로 먼저 가시는 게 어때요? 어차피 거기도 가야 하니까, 겸사겸사 소식도 전하고, 피난민들이 있는지도 확인하죠!”
음…… 순서는 상관없다고 했으니 드워프들을 먼저 찾아가도 되긴 하다.
만약 로나의 추측대로 피난민들이 거기 있다면, 그들에게 이제 부락이 안전해졌다고 전해야 되기도 하고.
……그러나 그럴 순 없다.
로나는 내가 고개를 젓자, 의아한 얼굴로 눈을 깜빡였다.
“잠깐 들러서 소식을 전하는 거면 몰라도, 거기서 지체할 순 없어. 엘프들을 처리하는 게 먼저야.”
“아이들 때문에요?”
“응.”
놈들의 미친 짓을 하루라도 빨리 막아야 한다.
지금도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경로를 통해, 애들이 끌려가고 있을지도 몰라.
……생각 같아서는 빨래 같은 것도 내팽개치고, 쪽잠 자면서 강행군하고 싶다.
하지만 그렇게 몸을 혹사시키면, 정작 나서야 할 때 제대로 힘을 낼 수 없을 터.
어쩌면 나중에 ‘너무 늑장부렸다’면서 자책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건 나중의 내가 감당해야 할 일이야.
지금의 나는, 지금 당장 최선으로 여기는 대로 움직일 뿐이다.
“으음…… 카엘 님 뜻이 그러시다면 어쩔 수 없지만, 여길 너무 오래 내버려두면 몬스터나 짐승들이 차지해버릴 텐데요.”
“일단 마지막 부락에 가서 생각해보자. 어쩌면 드워프를 만날 수 있을지도 몰라.”
내 말에, 로나는 방긋 웃으며 알겠다고 대답했다.
드워프라…….
거의 대부분이 술고래에 성격 호탕하며 다혈질이고, 자존심이 엄청나게 세다던가?
그런 양반들이 피난민들 잘 받아주었을지 모르겠다.
신비롭고 지혜로운 인상인 엘프 놈들도, 실상은 인성이 개차반인데.
……순간, 피난민들에게 채찍을 휘두르며 노역을 시키는 우람한 난쟁이의 모습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에이, 설마. 아니겠지.
고개를 세차게 흔들어 지워버렸다.
“……”
인간, 마녀…가 아니라 마법사, 엘프, 인어, 그리고 드워프.
이 다섯 종족은 이 대륙의 대표적인 지성체들이다.
먼 옛날에 함께 대재앙을 물리치고, 또 다시 재앙이 오거든 힘을 합치리라고 맹세한 종족이기도 하다.
근데 지금 인간을 뺀 네 종족 중 절반이 망했단 말이지?
하나는 본의 아니게 개판이 되어 있었고, 다른 하나는 지금 배신을 때린 상황이다.
여기에 드워프까지 쓰레기라는 게 밝혀지면, 맹약서이고 뭐고 그냥 찢어버릴 거 같아.
……제발멀쩡한 사람들이었으면 좋겠다.
그렇게 바라며, 나는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