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용사는 소꿉친구 검성이 무섭다-145화 (145/475)

〈 145화 〉 141화 : 산맥 너머로 (5)

* * *

여관 뒷마당에 세워져 있던 빨랫줄에 빨래들을 넌 후, 바닥에 앉아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에 여름해가 쨍쨍 비추고 있다.

참 빨래하기 좋은 날이야.

어젯밤엔 자기 전에 갑자기 비가 내려서, 빨래 말리는 건 위슨의 정령에게 부탁해야 하나 심각하게 고민했었다.

다행히 동이 트면서 바로 날씨가 개었고, 나는 무사히 일을 마칠 수 있었다.

이제 간만의 휴식을 만끽하면 되는데……

……빨래보다도 더 큰 고민거리가 생겨버렸다.

마음이 편해진 탓이었을까?

아니면 어제 저녁 때 봤던 메린의 웃는 얼굴 때문에?

어쩌면 목욕을 마친 그녀와 닿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근데 닿은 건 머리카락밖에 없는데.

라벤더 향이 은은하게 풍기긴 했지만 어쨌든 머리카락이라고.

그리고 별일도 아니었다.

그냥 메린의 머리카락을 자르고 끝을 다듬어주었을 뿐.

안 그래도 머리가 너무 길어서 한 소리 하려고 벼르고 있었는데, 마침 그녀가 젖은 머리카락을 바닥에 질질 끌며 다니는 걸 보고 말았다.

그래서 그녀에게 머리 좀 자르라고 했더니 단칼에 거절을 당했고, 설득하던 중에 그만 내 인내심이 터져버렸다.

그 결과, 내가 손수 칼 들고 그녀의 머리카락을 썩둑 잘라버린 것이다.

……물론 그 과정은 순탄하지 않았지.

­­싫어싫어싫어! 자르기 싫다고, 새꺄! 머리 자르면 못 땋잖아!

­­시끄러, 임마! 진작에 관리 잘하든가! 좋은 말로 할 때 가만히 있어라! 확 내 머리처럼 만드는 수가 있어!

­­아, 안 돼! 싫어, 카엘, 하지 마! 그것만은 안 돼! 흐윽, 싫어, 이런 거 싫어어……!

­­얌마, 그딴 소리 하지 마, 딴 녀석들이 오해하잖아! 으아악, 아니야! 그런 거 아니에요, 사제님, 철퇴 내려놓으세요, 꺄아아악?!

다시 떠올리기만 해도 식은땀이 흐른다.

후우…… 그땐 정말이지 죽는 줄 알았어.

어쨌든 내 계획은 허리까지만 오도록 자르는 거였다.

그러나 그녀가 울먹이면서 개지랄… 아니 완강히 저항하는 탓에, 할 수 없이 엉덩이까지만 자르는 걸로 합의를 해야 했다.

나 참, 왜 그렇게 길게 땋고 싶어하는 건지 모르겠네.

물론 잘 어울리고 청초해 보여서 예쁘긴 한데, 그렇게 길면 불편하지 않나?

아무튼 그 후, 나는 머리의 물기를 닦아주면서 그녀에게 잔소리를 퍼부어주었다.

그 다음 내 방으로 가서 잤는데……

……그대로 엄청난 꿈을 꾸고 말았다.

달콤한 향이 느껴지는 보드라운 살결, 붉게 상기된 뺨, 열띤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부르는 여자.

그런 그녀에게 홀린 듯이, 나는 그녀의 하얀 목에 입을 맞추고, 그녀의 숨결까지 마실 기세로 입술을 탐한다.

이윽고 마주한 것은, 물기어린 주홍빛 눈동자.

……쾌감에 녹아내린 얼굴로 야릇한 웃음을 짓고 있는 메린이었다.

그 눈을 마주한 순간 눈이 확 뜨였고, 나는 산뜻한 아침 햇살을 받으며, 침상 위에 무릎 꿇고 엎드려선 소리 없이 절규했다.

그리고 내가 빨래하겠다고 박박 우겼지.

“하아…….”

아직도 그 웃음이 아른거린다.

근데 목 아래는 못 본 거 같은데, 제대로 본 적이 없어서 그런가?

아니, 그딴 거 알게 뭐야.

진짜 환장하겠네.

다른 꿈은 잠에서 깨면 금방 잊어버리면서, 이건 왜 아직도 생각나는 거야?

썩 물러가라, 더러운 음란마귀야!

웃긴 건, 저게 지금 그나마 잊어버리고 남은 부분이라는 거다.

아침에 막 방에서 나왔을 때는, 꿈 내용 때문에 그녀의 얼굴을 제대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근데 대련하면서 죄다 날아가버렸다.

내가 제대로 앞도 못 쳐다보는 거에 빡친 건지, 그녀가 정말 몬스터를 상대하듯이 살기를 내뿜으며 덤볐던 것이다.

부끄러움과 민망함 따위, 목숨이 간당간당한 공포 앞에선 아무것도 아니었다.

……후우, 진짜 무서웠어.

그래도 그 살기를 느끼자마자 반사적으로 곧장 대응한 걸 보면, 그간 개고생한 보람은 있군.

어쨌든 이번에는 물리적으로 잡념을 죽였는데, 야영할 때 또 이러면 어쩌지?

야영하면 대련 안 하는데.

나무나 바닥에 머리 박아서 될 것도 아니고.

솔직히 야한 꿈을 꾼 것 자체는 부끄럽지 않다.

물론 대놓고 떠들 수는 없지만, 자연스러운 거 아냐?

열 아홉 살의 건전한 남자가 밤에 그런 꿈을 꾸는 게 뭐가 잘못이겠어?

그것도 좋아하는 여자를 상대로.

……그러나 그게 여행에 지장을 준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오늘처럼 그녀의 얼굴을 제대로 마주하지 못하거나, 꿈이 자꾸 생각나서 행동이 굼떠지면 안 되잖아.

“하아아…….”

미치겠네. 이걸 어쩌지?

매일 욕구를 풀어야 하나? 근데 그건 불가능하잖아.

여관에 머물 때면 몰라, 야영 중엔 절대 못한다고.

천막 너머에 누가 있는 걸 뻔히 알면서 어떻게 해?!

다들 쓸데없이 귀가 좋단 말야!

게다가…… 그 과정 중에십중팔구 메린을 떠올릴 거다.

그러다 괜히 더 애달파지면?

……진짜로 미쳐버릴 거야.

결국 일을 저지르게 되겠지.

‘그리고 끝장날 거고.’

그래. 끝장날 거다.

설령 그녀가 괜찮고, 사제인 로나가 어깨를 으쓱이더라도.

내가, 나 자신을 끝장낼 거니까.

스스로가 한 말도 지키지 못하고, 욕망에 져서 그녀를 내 멋대로 다룬 걸, 나 자신이 용서할 리가 없다.

나는……

카엘 에스트렐은, 절대로 그 사도(??)를 용납하지 않는다.

그럼 품지만 않으면 되겠네.

이거 봐, 이거. 벌써 합리화하려고 하는 거 보라고.

돌겠네, 진짜.

그래, 뭐, 안 품으면 뭐 어쩔 건데?

그녀가……

……하, 됐다, 미친놈아.

참 쓰레기 같은 발상을 했구나.

젠장, 이게 다 아버지 때문이야.

성인이 된 기념이라면서 성인소설 필사를 시킨 탓이라고!

내 순수한 감성이 더럽혀졌잖아!

아니면 그녀 대신……

“됐다고! 사악한 음란마귀는 썩 떠나갈지어다!!”

고래고래 소리를 지른 덕분에 그 성가신 속삭임은 사라졌는데,

“음란마귀?”

“아.”

메린이 그걸 들어버렸다.

망했다.

이 세 글자가 내 머릿속에 하나씩 큼지막하게 쿵쿵 박히고, 그 배경에 술 취한 오르간주자가 건반 위에 엎드러져선 쿠우웅…… 하는 음을 울리고 있다.

어쨌든 망했다.

메린의 눈에는 내가 완전 미친 걸로 보일 거야.

빨래 널러 간 놈이 뜬금없이 음란마귀 어쩌고 하며 고함을 지르고 있으니까.

“빨래 널고 대장간 같이 간다던 놈이 더럽게 안 오길래 와봤더만……. 야, 카엘, 너 괜찮냐?

너 그간 엄청 무리했잖아. 사실 열 나고 있는데 감추고 있는 거 아냐?”

그러나 그녀는 오히려 눈썹을 찡그리며 나를 걱정했다.

아아, 차라리 미친놈이라고 욕해줘!

그런 취향인 건 아니지만, 그녀가 걱정하는 걸 보니까 양심이 너무 아파!

“아냐, 그런 거…….”

“얼굴은 약간 빨간데. 뭐, 야한 생각했냐?”

“크헑?!”

너무나도 놀란 탓에 사레가 들러버렸다.

사레는 꼭 물 마시다가 걸리는 게 아니구나.

심장 철렁할 만큼 놀랐을 때 침을 넘기다가 걸릴 수도 있는 거야.

지식이 또 늘었는걸?

목이 터지는 거 아닌가 싶을 정도로 세차게 기침한 후, 내 등을 두드려주는 그녀에게서 세 발짝 정도 떨어져서 외쳤다.

“너, 너너너 그, 그그그게 뭔!!”

“음란마귀 어쩌고 했잖아.”

아으아아아악!!

속으로 온갖 비명을 지르며 그대로 땅바닥에 엎드렸다.

아…… 진짜 이게 뭔 꼴이야…….

그리고 그런 내 옆에 그녀가 쪼그려 앉았는지, 바로 옆에서 목소리가 들리며 내 어깨를 두드리는 느낌이 들었다.

“다 큰 놈이 뭘 그런 걸 가지고 그러냐? 남자가 야한 생각하고 그러는 거지.”

“……”

젠장, 저거 조금 전에 내가 했던 생각인데.

그녀가 그대로 읊고 있으니 굉장히 잘못된 것 같아.

하, 그녀는 내가 자신을 상대로 그런 뜨거운 꿈을 꿨으리라고는 전혀 생각도 못하겠지?

‘나를 좋아하기 전엔 품지 않겠다’고 호언장담한 놈이니까.

“왜 날 빤히 쳐다보냐? 내가 뭐 이상한 소리했어?”

“…………아니.”

“그럼 왜 그러는데? 아, 너 설마.”

그녀가 순식간에 얼굴을 팍 구겼다!

아아, 카엘, 이 등신 새끼야!

그렇게 티를 내고 싶냐?!

완전 망했어. 메린 녀석, 역시 불쾌할 거야.

날 완전 지저분한 놈으로 보겠지……!

아으, 이젠 말도 안 섞을지도 몰라!

“그 엘프 가지고 상상했냐?”

“……네?”

나도 모르게 얼빠진 소리가 나와버렸다.

그녀는 잔뜩 얼굴을 찡그린 채 말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너 그 엘프 처음 만났을 때부터 엄청 신경 썼잖아. 밥값에 숙박비까지 내주질 않나, 그 괴상망측한 식성에 맞춰주지를 않나, 목숨을 노렸는데도 설득하려고 아주 애를 쓰질 않나…….

너 사실 그 엘프 좋아하는 거 아냐? 내가 아니라.”

아니 어이가 없네.

왜 여기서 그 성격 괴상한 엘프가 나와?

너무나도 어처구니가 없어서 헛웃음이 다 나왔다.

“뜬금없이 뭔 소리야? 난 너 좋아한다니까.”

“그럼 그 엘프가 네 취향에 맞는 거겠지. 얼굴도 그렇고, 호리호리한 몸매도 그렇고.”

“아니거든?! 내가 왜 그딴 어린애 몸매를 좋아해, 난 그딴 변태가 아냐!! 이 자식이 사람을 뭘로 보고?!”

억울한 심정을 한껏 담아 외치자, 메린이 정말로 깜짝 놀랐다는 듯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니야? 너 처음에 로나에게 헤벌쭉하고, 위슨 알몸 보고 허둥대고, 그 도시에서 봤던 꼬맹이도 건드리고……”

“아니야!! 욕정 때문에 그 녀석들에게 그랬던 게 아니라고! 그리고 내가 언제 꼬맹이를 건들었어, 임마!”

로나는 맨 처음에 나를 ‘오빠’라고 불러서 얼이 나가긴 했다.

왜냐? 한 번도 그렇게 안 불려봤으니까!

고향에 있던 애들은 싸가지가 없어서 날 이름으로 불렀다고!

위슨 건도 억울하다.

내가 괜히 허둥댔나?

여자애인 줄 알았는데 몸이 남자였으니까 그랬지!

고작 그 두 건 가지고 내 취향을 그쪽으로 단정짓는 거야?

아니 진짜 어이가 없네!

‘진정하지?’

웃기지 마, 이걸 어떻게 진정해!

내가 어린애한테 침 흘리는 그딴 변태 새끼로 보인다는데!

진짜 생각할수록 기가 막힌다.

메린 이 자식, 내가 그 창관 주인, 베아트리스한테 처음에 정신 못 차리던 것도 봤으면서!

“똑똑히 말해줄 테니까 잘 들어! 내가 좋아하는 건 너고! 난 어린애도, 어린애 몸매 취향도 아냐! 너 이 자식, 어디 가서 또 그딴 소리하기만 해봐!”

“진짜 아니야?”

“아니라고! 호리호리한 몸매가 아니라 호리병 몸매를 좋아한다고! 너처럼 가슴 나올 거 다 나오고 허리 잘록한 몸매! 애초에 지 때문에 이러고 있구만, 알지도 못하면서!”

고향에서 알고 지내던 누나들 중 하나를 대면 몰라!

아니면 좀 미안하긴 하지만 옐리카를 대든가!

기억 각성 때문에 그랬긴 하지만, 어쨌든 반지 껴줬던 네이멜도 있구만!

‘또 자폭하겠는데.’

시끄러, 자폭은 뭔 자폭이야!

아, 진짜 열 받네, 어떻게 댈 게 없어서……!

왜 하필 그 엘프야?!

왜 내가 밋밋한 몸매가 취향인 걸로 오해를 받아야 돼?!

내가 뭘 어쨌다고, 이런 염병할!

“뭐? 나? 나 때문이라니? 날 갖고 상상했단 소리냐?”

“상상은 개뿔! 너랑 자는 꿈꿨다, 임마!!”

임마……임마……마아…………

목청껏 외친 목소리가 주변 산등성이에 부딪치며 멀리멀리 메아리쳤다.

“……”

“……”

…………

………………죽자. 안 되겠다.

한 번 죽어야지 정신을 차릴 거 같아.

어차피 방금 사회적으로 자살했으니, 뒤늦게 물리적으로 목숨을 끊더라도 죄가 안 되지 않을까?

“……미안해, 메린. 잘 있어. 고향에 계신 아버지한테도 죄송하다고 전해줘.”

“뭐?! 야, 야야! 야, 이 새끼야, 빨랫줄 가지고 뭐하는 거야! 하지 마, 임마, 빨래 떨어지잖아!”

“너 지금 빨래 걱정하냐?! 아, 몰라, 죽을 거야! 이런 수치를 안고 살 수 없어! 날 냅둬!”

“팔다리 분질러버린다, 새꺄!!”

……메린의 살기어린 협박에, 나는 얌전히 바닥에 주저앉았다.

무릎을 끌어안고, 고개를 푹 숙였다.

지난번부터 자꾸 말이 멋대로 튀어나오고 진짜 미치겠네.

흑흑, 얼굴을 못 들겠어…….

“……너 우냐?”

“안 울어…….”

그냥 죽고 싶을 뿐이지.

“메린, 나 좀 혼자 있게 해줄래……?”

“싫어. 빨래가 위험하잖아.”

망할, 나보다 빨래가 더 소중하다 이거야?

이런 매정한 자식 같으니라고!

하…… 어쩌다 내가 이런 애를 좋아하게 된 걸까?

어렸을 때 시달린 공포 때문에 머리가 맛이 간 게 아닐까?

뭐, 애초에 이 녀석이 그날 숲에서 날 끌고 나와서 살고 있는 거니 불평할 수 없지만.

“야, 카엘.”

“……왜.”

“내 몸이 취향이라고 했지? 그래서 좋아하는 거냐?”

“뭐?”

아니 이건 또 뭔…….

아아아, 침착해, 침착!

또 괜히 열 올라서 쓸데없는 말 할라!

“남녀가 좋아하는 건 결국 섹, 아니 애 가지는 게 목적이잖아. 그러니까, 결국 몸을 좋아하는 거 아니냐고.”

음, 지금 나를 몸만 보고 헤벌쭉하는 놈이라고 하는 거 같은데.

미치겠네, 내 평판 왜 이 모양이야?

하지만 또 성질을 부리기엔, 그녀의 표정은 굉장히 진지했다.

나는 내 무릎에 턱을 괴고 천천히 대답했다.

“아니야. 몸만으로 좋아하게 되는 거면, 넌 진작에 결혼했을걸.”

“내 몸이 일반적으로 호감을 사는 모양이 아닌가보지. 네가 특이한 거 아냐?”

“아니거든? 세상에 가슴 싫어하는 남자는 없어! 이건 내가 당당하게 외칠 수 있다!”

“그래? 그럼 넌 날 왜 좋아하는데?”

음, 핵심을 찌르는 질문인걸?

내가 이 녀석을 좋아하는 이유.

사실 조금 전에 한탄했듯이, 나도 잘 모르겠다.

이 녀석과 처음 말을 텄던 그날, 그 숲에서 만났을 때는 진짜 무서웠다.

그 뒤로 서로 이름 부르며 지냈지만 여전히 무서웠고.

그래도 왠지 모르게 나에게 들러붙는 이 녀석을 내치진 못했다.

매일매일 이 녀석 때문에 식겁하면서도, 매일매일 찾아주는 게 내심 고마웠다.

그날 로나에게 털어놓았듯이, 마을에서 날 찾아주는 건 이 녀석밖에 없었으니까.

하지만 그것 때문에 좋아하는 건 아니야.

그건 확실해.

그럼 뭐 때문에 좋아하는 거지?

……진짜로 드레스에 홀린 건가?

그것도 아닌 거 같은데.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몰라.”

“몰라? 이유도 모르고 좋아한다고? 뭐야, 그게? 원래 그런 거냐?”

“몰라, 나도 누굴 좋아하는 게 난생 처음이란 말야. 내가 봐도 좀 이상하긴 한데, 지금 내가 그 모양인 걸 어쩌라고.”

그녀를 좋아한다. 꿈에서 안을 정도로.

하지만 그 이유는 모른다.

계기라 할 만한 건 그 무도회 드레스밖에 없다.

……잠깐, 왠지 이거 그냥 겉모습에 반한 거 같지 않냐?

으아악, 아니야!

맹세코 그건 진짜 아니야!

정말 미모 때문에 좋아하는 거면 훨씬 더 옛날에 고백하……진 못했겠구나.

제 명에 못 살 놈이 감히 누굴 좋아하겠냐고 생각하고 있을 때니까.

뭐, 지금도 딱히 그 생각은 달라지지 않았지만, 이미 좋아하고 있으니 할 수 없는 거고.

근데 메린 녀석, 내 그 폭탄발언을 듣고도 태연하게 옆에 앉아 있네.

진짜 아무 생각도 안 드는 건가?

“……메린, 넌 아무렇지도 않아? 내가 그…… 널 상대로 그랬다는데.”

“뭐, 야한 꿈꾼 거?”

“아으…….”

도로 고개를 푹 숙였다.

얼굴이 활활 불타는 거 같아.

달걀프라이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녀는 자신의 발끝을 바라본 채 발을 까닥이면서 대답했다.

“……좀 놀랐어. 내가 그런 대상이 될 수 있을 줄은 전혀 몰랐거든.”

“왜? 네가 얼마나 예쁜데. 안 꾸며서 그렇지. 내가 널 좋아하는 건 얼굴이랑 몸 때문은 아닌데, 그래도 네가 예쁜 건 사실이라고.”

“……그러고보니 그때 네가 그랬었지. 세상 어떤 보석도 빛을 잃을 정도로 아름답다고.”

“하으으…….”

제기랄, 그걸 기억하고 있네!

아, 쪽팔려. 이렇게 열이 느껴지는데, 왜 지금 당장이라도 잿더미가 되지 않는 거지?

타 버려! 그냥 홀라당 다 타버리라고!

“그때 그 섬에서 날 더듬은 마녀도, 요전번 대피소의 그 놈도 날 그런 눈으로 봤겠지?”

“……그렇겠지.”

메린은 나처럼 무릎을 모으더니, 그 위에 턱을 괴고서 중얼거렸다.

“……그땐 소름 돋고, 싫었어.……대피소의 그 놈, 네가 말했던 것처럼 처음엔 손만 으스러뜨렸어. 그랬더니 가만 안 두겠다고, 널 죽이겠다고…….”

“그래서 묻었냐.”

“그래야 아무 짓도 못할 거 아냐. 나한테도, 너한테도.”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옆얼굴은 그저 덤덤하다.

하지만 어쩌면……

“……혹시 무서웠어?”

조심스럽게 묻자,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싫기만 했어.”

“……그래.”

무섭지 않았다면 다행이다.

공포만큼 오래오래 사람을 괴롭히는 건 없으니까.

……생각해보면 나도 그 둘과 같은 입장인가?

내 멋대로 그녀에게 여러 마음을 품고 있으니까.

본의가 아니긴 했지만, 나 역시 그 두 놈과 같은 짓을 한 셈이지.

“……미안, 메린. 그런 꿈을 꿔서. 일부러 그런 건 아니지만, 그, 역시 싫지?”

씁쓸히 웃으며 사과하자, 그녀는 중얼거리듯이 대답했다.

“……아니.”

“…………뭐?”

“잘 모르겠는데……아무튼 싫진 않아. 그건 확실해. 네가 사과할 건 없어.”

“……”

이걸, 나는 대체 어떻게 해석해야 되는 걸까?

내가 남자로 보이지 않아서 아무 생각도 안 든다?

아니면…… 혹시…………?

아아, 아니야. 혼자 앞서가지 말자.

아무리 내 좋을대로 해석한다고 해도 정도가 있지.

나는 고개를 젓고, 자리에서 일어서서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가자. 대장간.”

“어? 어, 응.”

그녀를 일으켜 세우고도, 나는 그 손을 놓지 않았다.

도리어 꼭 잡은 채, 그녀를 데리고 가듯이 앞서 걷기 시작했다.

“저기, 카엘.”

몇 발자국 떼고나서, 그녀가 말을 걸었다.

“남자는 쌓인다며? 야한 꿈을 꿀 정도면 엄청 쌓인 거 아냐?”

“……그딴 걸 왜 묻냐?”

또 뭔 소리를 하려고…….

걸음을 멈추고 그녀를 빤히 보자, 그녀가 조금 뜸을 들이더니 입을 열었다.

“혹시 내가 뭐 할 거,”

“없어.”

딱 잘라 대답해주었다.

“어…… 그래?”

“어. 네가 신경 쓸 필요 없어. 하나도 없어. 그러니까 다신 묻지 마.”

……젠장, 어떻게 그녀 입에서 저런 소리가 나오게 하냐?

하, 난 진짜 한심한 놈이야.

살짝 올라오는 분을 삭히며, 다시 걷기 시작했다.

“……내가 또 이상한 소리한 거냐?”

“아니.”

이상한 소리는 아니지.

“엄청나게 위험한 소리였지.”

“엉? 뭔 위험?”

“그런 게 있어. 넌 몰라도 돼.”

“으응??”

얼굴 한가득 물음표를 띄우고 있을 그녀와 시선을 마주하지 않도록, 나는 꼿꼿이 앞만 보며 걸었다.

절대로 놓치지 않도록, 손을 꽉 잡고서.

……적어도 대장간에 도착할 때까진 절대 안 놓을 거야.

어느새 옆에 나란히 선 그녀의 손을 묶듯이 깍지를 끼며, 굳게 다짐했다.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