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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사는 소꿉친구 검성이 무섭다-146화 (146/475)

〈 146화 〉 142화 : 산맥 너머로 (6)

* * *

다음날 아침, 예정대로 다시 길을 떠났다.

어제는 꿈도 안 꾸고 푹 잔 덕분에, 몸도 마음도 무척이나 상쾌하고 경쾌하다.

물론 그 일등공신자는 메린이다.

대장간에서 외상으로 산 (돌아올 때 값 치를 거니까 외상이다!) 검을 길들일 겸, 시간 때울 겸, 나를 훈련시키겠다며 진검으로 대련을 했던 것이다.

드디어 목검훈련을 졸업했다는 기쁨과, 이젠 진짜 훅 갈 수도 있다는 공포가 뒤섞인 순간이었다.

­­슬슬 진짜 날붙이로 훈련할 때가 됐지.

­­와아……

­­실제로 칼싸움도 했으면서 왜 눈이 죽는 거냐? 하여튼 쫄보 새끼, 겁부터 먹고……. 쯧쯔.

물론 나는 곧장 대들었다.

목검일 때도 이따금 생명의 위협을 느꼈는데, 이젠 매 순간마다 느낄 것이 아닌가?

그러니 이건 내가 겁이 많은 거랑은 전혀 상관없는 일이다.

그러나 그녀는 내 열띤 반박을 듣고도, “쌉소리 하고 있네, 내가 널 죽일 리가 없잖아.”라며 코웃음치기만 했다.

젠장, 그걸 누가 모르냐고. 그래도 무서운 걸 어쩌라고!

……아무튼 몇 배로 커진 두려움과 긴장 탓에, 그녀가 마침내 만족스러운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검을 거둘 땐, 나는 완전히 녹초가 되었다.

나 참, 잠을 못 잔 것도, 푹 잔 것도 전부 메린 때문이라니.

무슨 병 주고 약 주는 것도 아니고.

무심코 뒤에 있는 그녀를 힐끔 쳐다보자, 그녀가 가벼운 발걸음으로 걷고 있는 게 보였다.

이따금 말 귀를 건드리며 장난을 치고 있다.

엄청 기분이 좋은가보군.

행여나 눈을 마주칠까 싶어, 그녀가 나를 보기 전에 다시 앞을 보았다.

“……”

다시 검이 생긴 게 그렇게 좋은가?

어제 저녁에도 연신 싱글벙글거리고 말야.

다른 두 녀석은 모르는 듯했지만, 내 눈엔 확실하게 보였다.

그녀는 굉장히 기쁜 듯이 웃고 있었다.

느닷없이 나타난, 버섯 달린 곰 비슷한 놈을 해치울 때도, 골짜기에 진치고 있던 트롤 세 마리를 조각낼 때도, 그녀는 여느 때보다도 더 활기차게 움직이며 싱글거렸다.

아니, 적을 해치울 때마다 오히려 더 웃음이 깊어졌다.

좀 오싹할 만큼.

트롤을 처치한 후, 위슨이 놈들의 피를 뽑는 걸 기다릴 겸, 내 다리를 치료하기 위해 잠시 쉬기로 했다.

트롤이 생명력이 질기다더니 진짜였어.

설마 심장이 찢기면서도 나무를 뽑아 던져버릴 줄이야.

죽자사자 뛴 덕분에 납작해지는 건 피했지만, 그 틈에 다른 놈이 튀어나와서 내 다리를 몽둥이로 후려버렸고, 그대로 훌륭하게 꺾이고 말았다.

“염병할…….”

괴상한 방향으로 꺾인 두 다리를 내려다보며 투덜거리자, 메린이 어깨를 두드려주며 말했다.

“야, 그래도 그걸로 끝난 게 어디냐? 솔직히 네가 그 상태에서 피할 줄은 몰랐어. 그간 신나게 굴러온 보람이 있네.”

“나도 놀랐긴 한데, 애초에 이 꼴이 안 나야 되는 거 아니냐?”

“기습이었잖아. 어쩔 수 없지.”

그렇긴 하지만, 이번에도 부상을 당한 건 나 하나밖에 없다.

물론 다들 무사한 건 다행인데, 달리 말하면 내가 그만큼 바닥이라는 소리잖아.

근데 진짜 신기해. 어떻게 거기서 몸을 굴릴 수 있었지?

양 다리가 맛이 간 상태로 바닥에 쓰러져서 정신이 얼얼했는데.

덕분에 놈은 나를 끝장낼 기회를 놓쳐버렸고, 직후 메린에게 목이 따였다.

……생각해보면 항상 아슬아슬하게 위기를 넘기는 것 같아.

그래도 위기에 빠진다는 것 자체가, 아직 내가 한참 멀었다는 뜻이겠지.

에휴…….

“자, 이거 입에 무세요.”

한숨을 쉬는 나에게 로나가 헤실 웃으며 무언가를 건넸다.

가죽을 돌돌 말아서 꿰맨…… 덩어리?

이걸 입에 물으라고? 왜?

의문을 품으면서도, 나는 시키는 대로 그 가죽덩어리를 입에 물었다.

……진짜 개가 된 기분인데.

“꽉 무셔야 돼요~ 갑니다~”

“……? 므으으으읍!!”

아프다는 말로는 부족했다.

오른팔이 빠졌을 때보다 더 심한 격통이 느껴졌다.

눈앞이 번쩍거리며, 일순 흐릿해졌다.

뿌얘진 시야로 다리를 보니, 로나가 비틀린 다리와 발을 만지작거리며 방향을 똑바로 맞추고 있었다.

로나는 내 강렬한 시선을 눈치챘는지, 나를 힐끔 보더니 방글방글거리며 말했다.

“아프시죠? 죄송해요. 그냥 치유 기도를 올려도 되긴 한데, 이렇게 맞추고 하는 편이 더 빨리 되거든요. 음, 이 정도면 됐겠네요.”

“크흐읍…….”

말이라도 하고 하든가!

하씨, 죽는 줄 알았네…….

로나의 기도가 시작되고,통증이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했다.

나는 입에 물고 있던 가죽덩어리를 바닥에 내려놓고, 내 다리를 보며 여전히 싱글거리고 있는 메린에게 물었다.

“……그렇게 좋냐?”

“엉? 네가 아픈 게 좋냐고? 아니?”

“검 말야, 검.”

“검? 아니, 고향에서 쓰던 것보단 별로인데, 없는 것보단 낫지.”

“아니, 너 어제부터 엄청 좋아하고 있잖아. 검이 생긴 게 그렇게 좋냐고.”

그러자 그녀는 소리내서 웃으며 대답했다.

“당연하지. 검이 있으면 널 더 확실하게 지켜줄 수 있잖아.”

“……아, 그래.”

“그리고 역시 대거보다는 검이 훨씬 베는 맛이 있고!”

“아…… 그래…….”

얼굴에 열이 오르려다가 도로 식었다.

……뭐, 본인이 좋다면 됐지.

킥킥 웃는 그녀의 앞머리를 가볍게 쓸어주었다.

흙먼지 털어준 거지, 그녀의 웃는 얼굴이 귀여워서 그런 게 절대 아니다.

아무튼 그렇게 다시 순조로운 산행이 이어졌다.

도중에 비를 피하느라 이틀이나 걸려 도착한 ‘3번대피소’.

누군가의 다리 뼈만 덩그러니 남아있었다.

그 후, 길 가다가 위슨이 재료 줍겠다며 동굴에 돌진하는 바람에, 역시 이틀이나 걸려 도착한 마지막 부락인 ‘4번마을’.

텅 비어 있었다.

……비유가 아니라,정말 말 그대로 ‘4번마을’이라는 팻말과 통나무집 하나만 덩그러니 남아있었다.

“이건 또 뭔…….”

완전히 박살이 나고 풍화됐다고 하기엔 땅바닥이 너무나도 깔끔하다.

짐승들이 물어간 흔적도, 새들이 습격한 흔적도 없다.

물론 핏자국도 없고.

통나무집 안도 깔끔하게 텅 비어 있고.

집이라곤 한 채밖에 없는 걸 보면, 이 부락은 거의 대부분이 천막 생활을 했던 모양이다.

아, 우물과 텃밭들은 남아있었다.

산양이 한 텃밭에서 순무 잎을 우적우적 씹으며 우리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이건 거의 이사 간 수준인데?”

아예 서쪽으로 넘어갔나?

……아니지, 그 그리폰이 친 영역표시 같은 게 있었잖아.

그거 나갈 때도 적용됐을 거 같은데.

아무튼 이곳은 그냥 공터나 다름없다.

나 참, 드워프에 대한 작은 정보라도 얻을 줄 알았는데.

산맥 바깥으로 나가는 중에 아무것도 보지 못한다면, 드워프에게 잠깐 들르는 건 포기해야 할 듯했다.

그러자 위슨이 나를 보며 고개를 까닥였다.

“내려가다가 테라한테 봐달라고 하든가.”

“엉? 깨어났어?”

독단적으로 실체화해서 나와 메린을 구하고 잠들었던 땅의 정령, 늑대가 드디어 깨어난 듯했다.

근데 웬일로 안 나온대?

내 작은 의문에, 위슨이 재미있다는 듯이 웃으며 대답했다.

“너 보기 쪽팔리대.”

“……”

“걔가 좀 꿍하잖냐. 그래도 일할 땐 할 거다.”

아니 쪽팔릴 게 뭐가 있다고…….

나 참, 진짜 희한한 정령이야.

어째 나까지 좀 쑥스러워지는 것 같았다.

그렇게 황량하면서도 겸연쩍은 밤을 보낸 후, 다음날 아침.

나를 잠에서 깨운 건 화창한 햇살도, 느닷없이 지붕을 두드리는 빗소리도 아닌, 파랑새의 부리였다.

“빌어먹을, 오늘 일진은 망했어…….”

“닥치고 빨리 옷 입고 나와. 손님이다.”

“손님?”

웬 손님? 적을 말하는 건가?

파랑새의 말투가 침착하기도 하고, 뭣보다 집 밖이 조용한 걸 보니 적습은 아닌 것 같은데.

서둘러 옷을 입은 후, 문을 열고 나가기 전에 창문으로 바깥을 힐끗 살폈다.

통나무집 앞에 메린과 로나, 그리고 위슨이 나란히 서서 맞은편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내 듬직한 동료들이 대치하고 있는 건, 투박한 천옷 위에 두툼한 털가죽 망토를 두른 다부진 체격의 남녀 여럿이다.

제각각 활과 창을 들고 있는 걸 보니, 이 산에 살던 부락민들인 듯했다.

역시 어디 피난을 가 있었구나.

저쪽에서 먼저 만나러 온 거라면 대환영이다.

드워프에게 안 들르고 엘프의 숲으로 곧장 가도 되겠군.

“……”

근데 좀 분위기가 험악한 것 같은데…….

우릴 경계하고 있는 건가?

나는 조심스럽게 통나무집의 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갔다.

끼익, 문이 열리는 소리에 부락민들이 움찔거리는 게 보였다.

……역시 경계하고 있다.

나는 가만히 메린에게 다가가 물었다.

“……무슨 일이야?”

그녀는 여전히 앞쪽에 시선을 고정한 채 대답했다.

“동이 트면서 갑자기 몰려왔어. 우리 정체를 밝히라던데.”

“그럼 밝히면 되잖아. 왜 이렇게 험악해?”

되묻는 나를 향해, 로나가 꼿꼿하게 앞을 본 채로 대답했다.

“저희 말을 안 믿어서요. 특히 제 말은 아예 들으려고 하지를 않아요. 정말 이유를 모르겠다니까요~”

네가 어려서 만만해 보이는 게 아닐까?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아슬아슬하게 올라왔지만, 열심히 도로 눌러서 집어넣었다.

후우, 아침부터 뼈 부숴질 뻔했네.

아무튼 사제의 말을 듣지 않는다는 건, 부락민들은 교단을 따르지 않는 뜻이다.

음, 그래서 나를 서둘러 깨운 거군.

메린은 과묵하고, 위슨은 파멸의 주둥아리를 지닌 파랑새를 통해서만 의사소통을 할 수 있다.

이들도 마녀에 원한이 있을지도 모르는데다, 애초에 글자를 알고 있을지도 불분명하니 문자 마법은 쓸 수 없겠지.

즉, 이들과 대화를 시도할 수 있는 사람은 이제 나밖에 없다.

“……”

심호흡을 한 후, 다른 동료들의 딱 한 발짝 정도만 앞에 나가서 입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여기 사시던 분들이십니까?”

“……”

“저희는 그저 산맥을 넘어가려는 나그네입니다. 그렇게 경계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친절하게 웃으며 말을 건 게 무색하도록 아무 반응도 돌아오지않았다.

아니 그냥 서서 노려보기만 하면 뭐 어쩌라고.

답인사를 하든가, 아니면 꺼지라고 욕하면서 무기를 겨누든가, 뭔가 반응을 해야 할 거 아냐.

그 뒤로도 대강 몇 마디 말을 걸어보았지만, 여전히 반응은 없었다.

시간 아까워 죽겠네.

……그냥 내 쪽에서 시비를 걸어버릴까?

으, 아냐아냐.

내가 뭔 깡패도 아니고, 뜬금없이 시비를 왜 걸어?

하지만 이 이상 정중하게 대할 맘은 없어지긴 했다.

나는 한숨을 쉬며 재차 말을 꺼냈다.

“대체 원하는 게 뭐요? 할 말 없으면 우리 바쁘니까 길 비키시고! 아니 뭔 말을 해야 알지, 그렇게 우두커니 서 있기만 하면 뭐 어쩌라는 거야?!”

“네놈들, 어떻게 여기까지 왔지? 이 산은 산신님이 보호하고 계실 텐데.”

……산신님? 산신‘님’?!

설마 산신을 섬기는 놈들인가!

어쨌든 좋아, 드디어 반응이 돌아왔군.

나는 살짝 긴장하며 놈들에게 대답을 들려주었다.

“산신은 개뿔, 반 뒤져가는 거대 그리폰이겠지. 어떻게 왔냐고? 뻔하지.그 그리폰을 죽이고 왔다.”

“산신님을…… 죽였다고……?!”

험악하게 말을 걸던 놈의 표정이 충격으로 굳는 게 보였다.

나는 가만히 검집을 쥐었다.

누구처럼 눈 깜짝할 새에 검을 뽑는 건 못하지만, 그 시간은 메린과 로나가 충분히 벌어주겠지.

아니, 이 두 사람만으로도 저들을 해치울 수 있을 거다.

그래도 역시 싸움이 벌어질 거라는 사실에,손에 진땀이 배기 시작했다.

……이건 진짜 익숙해지질 않네.

그래도 상관없어. 덤빌 테면 덤벼!

잔뜩 긴장하고 있는데, 갑자기 놈들이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오오, 큰 은혜를 입었습니다! 절 받으십시오!”

“네?”

뭐야, 갑자기?

산신 섬기는 놈들이 아니었나?

어리둥절해하고 있는 내 귀에, 굉장히 호탕한 웃음소리가 왕왕 울렸다.

그 웃음소리의 주인은 바닥에 납작 엎드린 사람들을 헤치며 모습을 드러냈다.

내 키의 딱 절반 정도 될까 말까 한 작은 키,얼굴의 절반을 덮은 덥수룩한 진한 갈색수염, 그리고굉장히 튼튼해 보이는 금속판금 갑옷을 입은 남자였다.

그 한 명만 특이하게 키가 작다고 하기엔, 그의 뒤를 따라 비슷한 키를 가진 다른 병사들이 걸어나왔다.

그렇다면 이들의 정체는 분명하다.

깜짝 놀란 탓에 말문이 막혀버린 나를 향해, 옆구리에 투구를 낀 남자는 나머지 손으로 풍성한 수염을 슥슥 쓸어내리며 크게 웃었다.

“이거이거, 어린 인간에게 재미를 빼앗겼구만! 보기와 달리 대단한 전사인가보지?”

“어어……”

“이런, 내 정신 좀 보게! 나는 솔리도. 대지가 빚고, 불의 강이 연단한 ‘산의 일족’의 장군 중 하나일세. 아, 그래. 인간들에겐 이 편이 더 익숙하겠지.

흠흠…… 산 아래 ‘바위궁전’에 사는 드워프이자 장군을 맡고 있는 솔리도라 하네. 만나서 반갑네, 어린 인간 전사여.”

드워프는 정중히 허리를 굽혀 인사한 후, 나를 향해 씨익 웃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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