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7화 〉 143화 : 땅 속, 드워프의 나라 (1)
* * *
나는 드워프의 장군, 솔리도에게 짧게 자조치종을 이야기했다.
산맥을 넘어가기 위해 웨셋에 온 것, 그리고 거대 그리폰과 그를 조종하던 엘프를 죽인 것…….
그는 이야기를 듣는 내내, 자신의 그 풍성한 수염을 쓰다듬거나 콧수염을 매만질 뿐, 한 마디도 끼어들지 않았다.
“……그렇게 된 겁니다.”
“흐음.”
이야기를 마치자, 그는 눈을 감고 콧수염을 만지작거리며 입을 다물었다.
수염 때문에 표정이 잘 안 보여서, 그가 내 말을 믿는 건지 안 믿는 건지 잘 모르겠다.
눈도 감아버렸고.
하…… 진짜 시간 아깝네.
아까 바로 출발했다면 지금쯤 산맥으로 나가는 길 1/4 정도는 갔겠구만.
슬슬 저 수염 당겨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쯤, 솔리도가 다시 눈을 뜨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자네들 넷이서 그 고대종과 엘프를 해치웠다……. 솔직히 믿기 어렵군 그래. 허나 그러지 않고선 여기까지 올 수 없단 말이지…….
내 생각은 이렇네. 자네들이 놈들과 한패인 게야. 그럼 말이 안 되는 것도 아니지. 어떤가?”
어떻긴, 엿 같지!
돌겠네, 그 시간을 들여서 나온 결론이 고작 그 따위……!
제길,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에 수염 당겨버릴 걸 그랬어!
아니 지금이라도 저질러버릴까?!
……아니야. 참아야 돼.
난 일행의 대표이자 유일한 상식인이잖아.
나까지 막 나가면 안 되지.
품위를 지키자고.
속으로 심호흡을 한 후, 나는 싱글거리고 있는 드워프에게 웃으며 대답했다.
“제 얘기가 아니라면 지당한 판단이라 박수를 쳐드렸을 겁니다. 그러지 못하니 유감이군요.
솔리도 장군님, 여기 있는 이 소녀는 교단의 정식 사제입니다. 교단 사제가 시체를 조종하는 놈과 행동을 함께하리라 생각하세요?”
설령 드워프가 창조주를 믿지 않을지라도, 인간과 교류를 하고 있으니 교단이 무엇인지는 알겠지.
내 추측대로, 솔리도는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말도 안 되지. 허나 그처럼 어린 것이 사제라는 게 더 말이 안 되지 않나?내가 아직 여든 밖에 안 됐긴 한데, 그처럼 어린 사제는 머리털 나고 처음 보네.
산 아래 인간들은 어떨지 몰라도, 나를 비롯한 ‘산의 일족’은 물론이고, 여기 섀도워커와 그 부족들도 교단과는 하등 관계없어. 그러니 무조건 믿을 거란 기대는 말게나.”
우와, 이거 로나가 제일 싫어하는 말인데!
그러나 내 걱정과는 달리, 로나는 여전히 방실 웃을 뿐, 그 얼굴에 화를 품고 있는 것 같진 않았다.
……교단의 영향력 밖에 있는 사람들이 저런 얘기를 하는 건 상관없다는 건가?
로나는 심지어 드워프에게 동의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네, 알아요! 당신들은 교단의 보살핌을 받지 않지요. 그러니 의심하는 것도 당연해요.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저에겐 이 증표와 옷 말고는 달리 증명할 방법이 없네요.
히히, 그래도 부족분들은 제가 사제라는 걸 충분히 믿고 계신가봐요.”
“……”
그녀의 말이 정곡을 찌른 건지, 부족민들이 일제히 눈썹을 찌푸렸다.
개중에는 이를 드러내며 위협하는 사람도 있었다.
“아까부터 진~하게 노려보시고, 말도 안 들어주시고……. 히히,저희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으셨나봐요?”
……노려보고 있던 거였구나.
그냥 빤히 쳐다보고 있는 건 줄 알았는데.
솔리도는 로나의 말에 뒤쪽을 쳐다보더니,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크하하! 정말이군! 이들의 코는 정말 기가 막히거든. 사제복을 입지 않은 사제도 찾아낼 수 있을 정도라니까.
어찌나 사제를 싫어하는지, 찾기만 하면 바로 골짜기 아래로 던져버린다네. 빨간 옷을 입은 사제는 아예 머리를 잘라버리던걸?
하하하, 굉장히 골이 깊은 사이 같지 않나? 필시 이 산의 어떤 골짜기보다도 깊을 게야!”
아무 상관없는 제3자라 그런지, 드워프는 정말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는 듯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어떤 악의도 없이, 당사자들 앞에서 태연하게 저런 소리를 하고 있다.
냉혹한 건지 그냥 맛이 간 건지…….
나 참, 진짜 어이가 없네.
……혹시 드워프도 인성 개차반인 거 아냐?
맹약서 그냥 찢어버릴까?
하도 어처구니가 없어서 한숨조차 새어나오지 못할 만큼 말문이 막혀 있는데, 부족민 하나가 로나를 향해 으르렁거렸다.
마치 드워프가 그 이야기를 꺼내길 기다렸다는 듯이, 그는 낮은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깊고 말고. 저 아래 카우스트의 목구멍보다도 깊다! 이 산, 이 대지에는 오랜 세월간 내 형제자매들이 무참히 흘린 피가 흐르고 있다. 그들이 지른 비통을, 토해낸 탄식을 기억하고 있다!
그 혼령들을 위로하려면 네놈들의 피로 카우스트의 목구멍을 채워도 모자라리라!”
오우, 여태 참고 있었던 거구나.
교단과는 상관없는 나까지 긴장할 만큼 명백한 적의가 느껴졌다.
보통 사람이라면 긴장하거나 냉담하게 맞받아쳤겠지.
그러나 우리 사제님은 조금 많이 특이한 사람이란 말이지.
나는 가만히 로나를 돌아보았다.
응, 늘 보는 얼굴이군.환하게, 방실방실 웃는 얼굴.
지금 우리 머리 위에 펼쳐져 있는 푸른 하늘과 같은 맑고 밝은 웃음이다.
그리고 술집에서 소란을 피우던 취객들을 보던 때와 같은 표정이기도 했다.
……정색하는 척이라도 하는 게 낫지 않나?
아니면 그럴 가치를 전혀 못 느끼는 건가?
이게 강자의 여유라는 것인가!
여유 가득한 웃음을 띈 채, 그녀는 자신을 쏘아보는 부족민을 향해 조곤조곤하게 말했다.
“맞아요, 저도 들었어요! 여기 전투사제들이 굉장히 자주 왔다면서요? 당신들 부족민들이 이단에 홀리고, 악마에게 의식을 올려서요!
마르바스, 스톨라스, 비프론스, 벨리알……. 헤헤, 실제 악마만 넷이었으니, 허상의 것은 셀 수도 없이 많았겠죠.”
손가락을 꼽으며 한차례 말을 마친 로나는, 깊은 한숨을 쉰 후 재차 말을 이었다.
“정말이지……. 당신들이 늘 하던 대로 얌전히 자연만 숭배했다면 흘리지 않았을 피인데 안타까워요. 당신들의 그 자연 숭배는 저희의 관심거리가 아니거든요.
창조주의 검은 오로지 이단과 악마에게만 향한답니다.”
……이 녀석 사실은 조금 불쾌한 게 아닐까?
은근히 시비를 걸고 있는데?
역시나, 그녀가 말을 맺자마자 부족민이 인상을 한층 더 구기며 크게 고함쳤다.
“허튼 소리! 그건 네놈들이 방해물들을 치우려는 구실이라는 걸 모를 줄 아느냐?!
선한 영혼도 악한 영혼도 모두 자연의 일부이다! 악마이니 이단이니 하는 건 네놈들의 세를 불리기 위한 속임수일 뿐!
허상? 하! 네놈들이 말하는 악마, 지옥, 천상! 그것들이야말로 허상이다!”
아, 끼어들고 싶다.
악마가 허상이라니, 알지도 못하면서 개소리 하지 말라고 소리치고 싶다.
저 사람 원한이 엄청나게 깊은 건 알겠는데, 그래도 없는 말을 하면 안 되지!
우리 네 사람 전부 악마한테 몸소 시달렸는걸!
저렇게 악마가 허상이라고 외친다는 건, 직접 본 적이 없다는 소리겠지?
와, 진짜 부럽다.나는 한 달 좀 넘은 기간동안 악마를 벌써 셋이나 봤는데 말야.
대체 내 팔자가 얼마나 꼬였길래……
아, 맞다. 용사라서 그런 거였지! 하하, 내 정신 좀 봐!
……염병할.
나 자신의 가혹한 팔자를 되새기며 속으로 한탄하고 있는데, 옆에서 부드러운 웃음소리가 들렸다.
“후후.”
웃었다.
사제라면 절대 넘길 수 없는 신성모독을 들었으면서도, 로나는 웃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보았다.
그녀의 잿빛 눈동자에 불꽃이 지핀 것을.
즉, 빡쳤다!
그녀는 얼굴만큼은 여전히 환한 미소를 머금은 채, 큰 목소리로 말했다.
“허상! 허상이라고 하셨나요? 아하하! 당신은 여태껏 악마도, 그를 섬기는 놈들의 털끝 하나도 보신 적이 없나 보네요!
그래야죠! 당연히 그러셔야죠! 당연히 무지하셔야죠! 강림하기 전에, 실현되기 전에 처리하고 재발할 여지를 없애는 게 우리 전투사제의 일이니까요!
아아, 정말 기뻐요! 제 선배님들이 무척 일을 잘하셨군요! 그것들이 허상으로 보일 정도로,하나도 남김없이! 모조리 싹 다 치워버리셨으니까요!”
“……뭐야?!”
저 하늘에 뜬 태양보다도 밝게 웃으면서, 로나는 두 팔을 벌리며 소리 높여 외쳤다.
“네! 그러니 당신들이 이렇게 항상 저희에게 핏대를 세우며, 되도 않는 핏값을 요청하는 거겠죠! 형제자매의 피라니, 아하하하!
당신의 형제는 제 자식의 피로 제단을 물들이던 자인가요? 당신의 자매는 제 몸을 바쳐, 그 태반에 검은 씨를 품던 여자였고요?
아니면 제 가족과 이웃의 심장을 모조리 바치며, 이미 죽은 어머니를 갈구하던 아이였나요?
위대한 자가 되겠다며 수십 명의 목숨을 바쳤던 족장은 어때요? 이들이 모두 당신의 형제이자 자매인 거죠?
아하하핫!저라면그것들을 절대로 형제자매라고 부르지 않을 텐데요! 사람이 아니니까요!”
부족민의 얼굴은 분노인지 두려움인지 모를 색으로 물들어갔다.
그러거나 말거나, 로나는 까르르 웃으며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히히, 하지만 괜찮아요. 당신들만 저희를 원망하는 건 아니거든요. 네, 아무도 모른다 해도 상관없어요. 저희는 오히려 그걸 바란답니다.악마의 실재를 아무도 모르게 하는 것, 그게 저희의 목표이거든요!
아, 그렇게 생각하니 오히려 감사 인사를 드려야겠네요! 히히, 감사합니다!제 선배님들이 정말 자랑스럽네요!
앞으로도 그렇게 돌과 나무를 숭배하면서 저희를 미워하세요! 여기 찾아오기 번거로우니까 악마에게는 빌지 마시고요!”
“……이 미친년이……!!”
으아악! 부족민이 눈을 부라리며 창을 꼬나쥐었다!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닌데 그래도 싸움은 말려야 돼!
그러나 그가 로나에게 창을 채 겨누기도 전에, 솔리도의 우렁찬 목소리가 빈 터에 메아리쳤다.
“자중하시게, 섀도워커! 우린 자네들의 해묵은 통한을 풀러 나온 게 아니네!”
……단순한 큰 소리가 아니었다.
그건 포효였다. 적을 발견한 거대한 곰이 내지르는 것과 같은 포효.
뼛속에 강제로 두려움이 우겨 넣어지는 듯한, 그런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그 포효에 직격타를 맞은 부족민, 섀도워커는 어느새 창을 떨어뜨리고 바닥에 엎드려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작게 한숨을 쉰 후, 드워프는 로나를 향해 고개를 저었다.
“나 참, 인정하겠네. 자네, 정말로 사제 맞군. 허 참, 어려도 빨간 사제라고 한 마디도 지지 않는구만! 자네도 자중하시게. 공연히 분란을 일으킬 필요는 없잖은가?”
“아하하, 죄송해요! 저도 모르게 그만…….”
솔리도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을 이었다.
“뭐, 좋네. 자네들의 이야기를 믿도록 하지. 그래도 아직 문제는 남아 있네. 그게 뭔지 아는가?”
“아, 또 뭐가 있다고……그러시는지요?”
휴, 위험했다.
평소대로 빽 소리지를 뻔했어.
진짜 요즘 자제심이 떨어진 거 같아.
후우, 침착하자. 침착.
“더더욱 이대로 못 보낸다는 걸세.”
“아, 진짜 너무하시네!!”
앗, 이런.
결국 터져버렸다.
그러나 드워프는 별안간 터진 내 짜증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말을 이었다.
“그러니 자네,우리와 같이 ‘바위궁전’으로 가세나. 고대종이 없어진 축하연을 겸해, 자네에게 답례를 해야 하니까.”
“예? 아, 됐어요. 답례는 무슨……!”
“마땅히 해야 하고 말고! 고대종은 우리 일족에게도 큰 골칫덩이였거든. 우리 의회에도 보고해야 하는데, 나보다는 고대종을 직접 해치운 자네가 이야기하는 편이 훨씬 낫지 않겠나?
그리고 뭐, 어차피 지나가는 길이라며? 그냥 쉬다 가는 셈 치고 같이 가세나.”
아니 얘기가 또 이렇게 되네. 물론 드워프들의 대표도 만나러 가야 하니, 용사로선 그를 따라가도 되긴 하다.
하지만 로나에게도 말했듯이, 나 자신에겐 엘프 쪽을 처리하는 게 더 급하다.
그러니 나중으로 미뤄야 돼.
나는 고개를 저으며 정중히 사양하려고 입을 떼었다.
“죄송하지만 저희는……”
“카엘.”
그러나 도통 표정이 보이지 않는 드워프 장군은, 빙긋 웃으며 내 말허리를 썩둑 잘라버렸다.
……그래도 눈을 뜨고 있으니 어느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수염이 풍성한 이 드워프의 입은 미소를 짓고 있다.
하지만,
“애써 사양할 필요 없네. 우리는 그런 예절은 좋아하지 않아.
……부디, 초대에 꼭 응해주었으면 하는군.”
……하지만 그의 눈은, 조금도 웃고 있지 않았다.
초대는 개뿔, 연행이겠지!
더럽게 귀찮게 됐구만.
속으로 깊이 한숨을 쉬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