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8화 〉 144화 : 땅 속, 드워프의 나라 (2)
* * *
그래도 명색이 초대라고, 솔리도는 우리를 묶거나 하진 않았다. 땅딸막한 갑옷덩어리들이 둘러싸서 좀 덥긴 했지만.
인간과 드워프, 그리고 짐승이 섞인 이 괴상한 무리 중, 인간은 우리 넷 밖에 없다.
섀도워커를 비롯한 부족민들이, 그리폰이 정말 죽은 게 맞는지 확인하러 가겠다며 빠진 탓이다.
나는 그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거기가 어디인 줄 어떻게 알고요?”
“다 아는 수가 있어. 신경 쓰지 말고, 우리 갈길이나 가세.”
그리고 솔리도가 나에게 대신 대답하며 재촉했다.
마치 섀도워커가 쓸데없는 말을 하지 못하도록 가로막은 것처럼.
……아, 수상해.
그 밖에도 걸리는 건 또 있었다.
드워프들이 안내하는 길이, 통상적으로 쓰인 산길이 아니라는 점이다.
네 번째 부락까지 오면서 봤던 색깔리본도, 팻말도 하나 없는 아직 개척되지 않은 산길이었다.
그래, 뭐, 그냥 드워프들이 다니는 길로 안내하는 거겠지.
……하지만 우리를 쥐도 새도 모르게 없애려는 속셈일 수도 있는 거 아니겠어?
아니면 여기 어디에 다른 드워프들이 매복하고 있거나.
메린도 그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는 듯했다.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이따금 주변에 눈만 돌리며 살피고 있었다.
으으, 상대가 일반 인간이었다면 떠보기라도 했을 텐데.
“……”
……여든 살의 장군이라니, 그런 사람에게 내 떠보기가 통하겠어?
장군은 싸움만 잘해서 되는 게 아니다.
싸움 실력도 물론 중요하지만, 그보다는 상대의 생각을 읽고, 그 행동을 예상하는 능력이 더 중요할 터.
게다가 무려 팔십 살이다, 팔십 살.
거의 인간의 평생을 산 게 아닌가?
그런데도 머리와 수염의 색깔이 바래지 않았으니, 드워프에게 여든 살은 아직 창창한 나이라는 거겠지.
그런 사람에게 내가 무슨 수작을 부릴 수 있겠는가?
인생 경험이 확 차이가 나는데.
……근데 생각해보니까 희한하네.
지금 위슨의 배낭에 들어있는 엘프는 170살이잖아.근데 말단이야?
그보다 거의 절반을 산 드워프는 장군인데, 블루벨은 왜 말단밖에 안 되지?
수명 차이인가?
드워프 기준으로 여든 살은 중년이고, 엘프 기준으로 170살은 청년, 뭐 이런 건가?
아무튼, 내 어쭙잖은 떠보기는 십중팔구 통하지 않을 거다.
그럼 그냥 시덥잖은 이야기라도 나눠야지, 뭐.
명목상이나마 우린 지금 잡혀가는 게 아니라, 초대받아서 가는 거니까.
나는 내 말, 조지를 붙잡고 조심스럽게 가파른 비탈을 내려가면서, 저 앞에 가고 있는 장군에게 말을 걸었다.
“솔리도 장군님, 궁금한 게 있는데요.”
“그냥 솔리도라 부르게. 자네는 우리 일족도 아니고, 사절도 아니잖나? 그래서 뭐가 궁금한가?”
“여든 살이라 하셨는데, 햇수 세는 건 저희와 같죠? 드워프의 달력은 인간 것의 절반밖에 안 되거나 그런 건 아니죠?”
“당연하지. 자네 설마, 지금 우리가 키가 짧다고 달력도 짧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어허, 그거 종족차별적인 사고방식이야! 우리 달력도 자네들처럼 열두 장, 열두 개월에 365일일세!”
무사히 비탈을 내려온 것에 짧은 안도의 한숨을 쉰 후, 나는 하하 웃으며 재차 입을 열었다.
“불쾌하시게 할 생각은 없었습니다. 제가 드워프…… ‘산의 일족’은 잘 몰라서요.
저기, 혹시 산에서 일어나는 일은 다 알 수 있는 건가요? 누가 산에 들어오면 바로 알거나, 동굴에서 버섯 따는 소리를 땅 속에서도 들을 수 있거나…….”
내 말에, 드워프는 코웃음치며 손을 내저었다.
“세상에 그런 게 가능한 놈이 어디 있겠는가? 우리 눈코입은 자네들과 똑같아. 바로 주변의 것만 보고 들을 수 있네. 내 집무실에서 정찰나간 부하들이 뭘 하는지 모른다는 소리지.
그 탓에 쓸데없이 보고서를 줄창 읽고, 일일이 거기에 도장 찍어야 한다네. 여간 귀찮은 게 아냐.
근데 내 마누라는 내가 어디서 뭐하는지 속속들이 꿰고 있단 말야! 거참, 요상하기 그지없어! 그 비결을 안다면, 마누라 몰래 이런저런 재미를 볼 수 있을 텐데 말일세!”
그렇게 말하며, 솔리도는 크게 너털웃음을 지었다.
나 역시 그를 따라, 그 진담 같은 농담에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구나. 땅 속에 있으면서 땅 위를 아는 건 불가능하구나.
그리고 우리가 옆집 일을 알 수 없는 것처럼, 이 드워프들도 땅 속 일을 속속들이 아는 건 아닌 모양이다.
누가 말해주기 전까지는.
그럼 그리폰이 나타난 지 한 달이나 지나서야 대처하러 나오는 것도 말이 되기는 한다.
부락에 살던 부족민이 늦게 알렸을 수도 있고, 또 의회 어쩌고 했었으니, 거기서 무슨 회의 같은 것도 했겠지.
아마 의회에서 그리폰을 어찌해야 할 것인가 결정하느라 시간이 지체됐을 것이다.
……이들이 적이 아니라면 말야.
내가 말을 걸어서 그런지, 솔리도는 바로 내 옆으로 다가와서 걷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게 왜 궁금한가?”
“제 동료가 버섯이랑 약초에 아주 환장을 하거든요. 보이는 족족 따려 든다니까요. 근데 ‘산의 일족’이라 자칭하고 계시잖아요? 그건 이 산에 있는 건 전부 당신들 소유라는 뜻 아니에요?
그럼 분명 절도죄를 물어올 게 뻔하니, 미리미리 변명거리를 생각해두려고요.”
숲에 사는 생명체들을, 모두 자신들 부하로 생각하는 어떤 귀 뾰족한 미친놈들도 있다.
드워프도 그러지 않으리라는 법은 없지.
하지만 다행히도, 솔리도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헛웃음을 켰다.
“허이구, 괜한 걱정을 하는구만. 우리는 산에서 태어나서 살아가니 ‘산의 일족’이라 하는 거지, 산의 주인이라 그런 게 아닐세. 뭐든 좋을 대로 캐고 잡아도 상관없어.
아, 물론 ‘바위궁전’ 안에 있는 건 예외일세. 그건 엄연히 주인이 있으니까.”
“하하, 그야 물론이죠. 뻔~히 주인이 있는 걸 아는데, 설마 손을 대겠습니까? 응? 안 그러냐, 위슨?”
“……”
절도미수 전과가 있는 마법사 녀석은, 내 눈을 피한 채 대답하지 않았다.
위슨 이 자식, 손을 묶어놓든가 해야겠군.
그리고 내 눈은 뒤쪽에 있는 로나에게 슬쩍 향했다.
그녀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면서 걷다가, 나와 눈을 마주치고는 생긋 웃었다.
……치명적인 거짓말은 없다는 걸로 봐도 되겠지.
어쩌면 얘기를 안 듣고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로나는 거짓말을 알아차릴 수 있다.
진실의 일부만 말하지 않는 것도 그녀의 감지에 걸리게 된다.
사람이 거짓말을 할 때 무의식으로 흘리는 죄의식을 느끼는 거라고 했던가?
아무튼 로나는 솔리도가 거짓말을 했는지 여부를 알 수 있지만, 그걸 적극적으로 드러내며 나서는 일은 별로 없다.
이따금 이렇게 내가 눈짓으로 물으면, 애매모호하게 신호를 보낼 뿐.
……뭐, 나도 그녀가 일일이 구체적으로 알려주길 바라는 건 아니다.
그랬다간 로나에게 너무 의존하게 될 테니까.
그래도 가끔은 지름길을 가고 싶은 법이다.
머리 굴리는 건 피곤하다고.
안 그래도 신경 쓸 데가 많은데…….
“……”
속으로 한숨을 쉬면서, 방금 들은 말을 곱씹어보았다.
이윽고 내가 내린 결론은, 드워프가 적이 아니라고는 아직 확신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굉장히 애매모호하고 어중간해서, 속이 답답해진다.
그래도 그 거대 그리폰과 엘프의 편은 아니라는 건 확신할 수 있다.
우리가 그리폰을 없앴다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감사의 절을 올린, 그 부족민들과 함께 있었으니까.
하지만 다른 엘프들과는 어떨까?
명백히 산맥을 넘나들면서, 인간의 어린애들을 제 숲으로 데려가는 엘프들과 과연 아무 관계가 없을까?
만약 드워프가 산에 일어나는 일들을 전부 알 수 있다면, 나는 이들도 엘프들과 어떤 동맹을 맺은 게 아닌지 의심했을 거다.
그러나 그런 감지능력은 없다고 하니……
이들이 정말 모르고 있을 가능성이 생기고 말았다.
안심? 설마.
더 성가시게 됐다.
더 생각해야 되고, 계속 의심해야 하니까.
“……”
하…… 이런 건 골치 아파서 역시 싫어.
그냥 덮어 놓고 믿을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어차피 상대가 작정하고 속이려 들면 속을 수밖에 없잖아.
“아까부터 뭘 그렇게 고민하냐?”
“……안 하고 있는데.”
“하는 거 같은데.”
“안 하고 있다니까.”
메린은 어깨를 으쓱인 후, 다시 앞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뭐, 너무 고민하지 마라. 너 머리만 빠진다.”
“……”
하, 이 녀석, 고민 안 한다니까 거 되게 안 믿네.
……꼭 이런 것만 잘 알아차리고 말야.
너무 고민하지 말라고?
그래, 넌 고민할 필요 없겠지.
독을 먹이는 게 아닌 이상, 속아 넘어가더라도 얼마든지 상대를 조져버릴 수 있으니까 말야.
하……힘이 모자라면 머리가 고생하는 법이다.
“카엘, 나도 하나 물어봄세.”
“그러시죠.”
딱 봐도 올라가는 길이 없는 듯한, 어느 까마득한 높이의 수직절벽 아래로 향하며, 솔리도가 느릿하게 말을 꺼냈다.
“자네들 인간의 왕이 있는 곳…… 미드랜드랬나? 거기 있는 성을 본 적 있는가?”
“아, 왕성…… 랜드스타요? 예, 봤죠. 정말 눈이 부실 정도로 빛나더군요.”
“하하, 그야 당연하지! 우리 일족이 지은 건데! 내 조부님이 그 건축에 참여하셨다네. 정말 굉장히 자랑스러워하셨지. 거기 천장에 달린 등도 봤나?”
천장에 달린 등?
내가 고개를 갸웃하자, 메린이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샹들리에 얘기 아냐?”
“샹들리에? 그런 게 있었나?”
“창문이랑 같은 높이로 달려 있었는데? 못 봤냐? 달빛만으로도 불이 켜진다고 공주가 얘기했었잖아.”
“그때 내가 정신이 없어서…….”
음, 전혀 기억이 안 나!
그때는 곧 있을 선포식 때문에 잔뜩 긴장했던 탓에, 무엇이 있었고 무슨 이야기가 오갔는지 전혀 기억이 안 난다.
국왕이 굉장히 우람했다는 것, 그리고 성검이 공중에서 빛을 뿜고, 어쩐지 불안해지는 종소리가 웅웅 울렸다는 건 기억이 나긴 한데…….
메린은 그런 나를 보며 한숨을 쉬었고, 솔리도는 그런 우리를 보며 또 다시 호탕하게 웃었다.
“저런, 그거 참 안 됐군! 그 샹들리에도 한 예술하거든. 물론 여기 ‘바위궁전’이 훨씬 더 아름답지.
거기 메린이라고 하셨나? 랜드스타의 샹들리에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을 걸세. 내 장담하지!”
그렇게 말하며, 솔리도는 거의 바위산이라 해도 좋을 수직절벽 아래에 섰다.
그리고 문을 노크하듯이, 주먹으로 툭툭 바위벽을 두드리며 외쳤다.
“솔리도 마소 중장, 임무완료 후 복귀 신고합니다! 문 열어라, 짜식들아!”
그러자 갑자기 수직절벽 면에, 푸른빛의 선으로 그려진 그림이 떠올랐다.
가장자리에는 알 수 없는 문자들이 가득 적혀 있고, 별과 달 등, 어떤 상형들이 그 사이사이를 채우며 은은하게 빛나고 있는, 커다란 양문 그림.
우리 중에 눈을 동그랗게 뜨지 않은 사람은 없었는데, 그 중에 위슨이 가장 크게 뜨고 있었다.
그는 바위벽에 떠오른 문 그림을 보며 속삭였다.
“룬……?!”
룬? 룬이라면, 마법사들이 쓰는 글자잖아.
어, 그럼 이게 마법이라는 건가?!
아니 물론, 갑자기 돌에 그림이 떠올랐으니 마법 비슷한 거긴 하겠지만!
아연한 얼굴로 그 절벽 면을 쳐다보고 있는데, 수직절벽에 그려진 푸른빛 문이 그 모양 그대로, 정말 문처럼 활짝 열렸다.
땅에 끌리는 진동도 하나 없이, 굉장히 조용하고 매끄러운 움직임이었다.
근데 화려하게 문이 열린 것 치고는, 안에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텅 빈 공간이 있을 뿐이었다.
……속았나?
혹시 우리가 저 안에 들어가면 가둘 생각…인 건 아닐 거 같은데.
“뭘 그리 서 있나? 들어오시게!”
솔리도가 부하 몇 명과 함께 먼저 안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어이씨, 저렇게 먼저 가는 걸 보면 함정은 아닌 거 같은데.
고개를 갸웃하며 그 뒤를 따라 들어갔다.
인간 넷과 말 셋, 그리고 엘크 하나와 더불어, 드워프들이 전부 수직절벽 속에 들어가자, 활짝 열렸던 문이 다시 꾹 닫혔다.
그와 동시에, 절벽 안이 순식간에 환해졌다!
“……?!”
그 불빛의 정체는 벽마다 달려 있는 노란색 등이었다.
촛불은 아닌 거 같은데, 뭐지?
“밝지? 야광석이라네.”
“야, 야광? 그게 뭐에요?”
“빛 없는 데서 빛나는 돌.”
“예에?!”
세상에 그런 게 있다고?!
내 충격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아니, 거기서부터 시작이었다.
이번엔 갑자기 바닥째로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한 것이다!
“우와아아?!”
“크하하! 이 어린 친구, 반응이 굉장히 좋군! 아주 맘에 들어!”
솔리도가 크게 웃으며 내 팔을 툭툭 쳤지만, 나는 그걸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가만히 있는데 아래로 내려가고 있어!
아으, 느낌 이상해!
뭐야, 이거?!
놀란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로나는 당황한 얼굴로 내 다리를, 나는 메린의 팔을, 메린은 내 어깨를 잡았다.
그리고위슨이 말고삐들을 잡은 채, 굉장히 어처구니없다는 눈으로 우리를 보고 있었다.
……뭔가 불공평한데.
“너 이 자식, 왜 혼자 태연해?”
“위슨? 옛날에 바람 타고 놀아서.”
“……”
뭘 어떻게 놀았길래……?
빗자루 없이 급강하라도 했나?
잠시 후, 움직이는 바닥이 멈추었고, 또 다시 주변이 캄캄해지면서 앞쪽에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솔리도가 킬킬 웃으며 부하들과 함께 문 안으로 나아갔고, 우리는 주춤거리며 그 뒤를 따라갔다.
이윽고, 나는 눈앞에 펼쳐진 풍경에 눈이 튀어나올 듯이 커졌다.
천장은 한없이 높은 곳에 있고, 우리가 방금 나온 커다란 문 양 옆에는 그를 지키듯이 거대한 드워프 석상이 서 있다.
우리가 나온 곳에서 양 옆으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고, 그 계단은 커다란 광장으로 이어져 있다.
그리고 광장 너머에는, 바위로 된 거대한 도시가 있었다.
맨 안쪽에는 어쩐지 점성 있어 보이는 두 개의 붉은 폭포가 있고, 그 사이에는 ‘성’이라고밖에 부를 수 없는 커다란 건물이 세워져 있다.
그 성으론 굉장히 튼튼해보이는 다리로 갈 수 있는데, 다리의 양끝에는 우리 근처에 있는 것보다는 훨씬 작은 석상들이 서 있다.
그리고 다리가 시작되는 부분을 기점으로, 반원형으로 가장자리를 뺑 두르듯이, 크고 작은 건물들이 지어져 있었다.
그 반원형의 중앙에는 검을 하늘로 쳐든, 왕관을 쓴 석상이 있는 분수대가 물을 내뿜고 있다.
……땅 밑에, 이런 곳이 있다니.
압도적인 풍경에 넋을 잃은 내 귀에, 솔리도의 우렁찬 목소리가 들렸다.
“이곳이 내 고향이자 ‘산의 일족’의 요람, ‘바위궁전’일세! 그대의 방문을 마음 깊이 환영하는 바이오,용사여!”
“……?!”
다른 의미로 충격에 빠진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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