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용사는 소꿉친구 검성이 무섭다-155화 (155/475)

〈 155화 〉 151화 : “그냥 알고 싶어서” (1)

* * *

한차례 쭉 이야기를 마치고 개발연구소를 뒤로 하려는 순간,

“아.”

갑자기 메린이 뭐가 생각났다는 듯이 작은 소리를 내었다.

그런 후, 의아한 표정으로 눈을 깜빡이는 부아노를 향해 말을 꺼냈다.

“유니콘 뿔이 있는데, 그걸로 뭔가 할 수 있나요?”

“네? 유니콘 뿔이요?! 아니 그걸 어떻게 얻으셨어요? 설마 그것도 고향에서……?”

“아뇨. 부엉이탑 근처 숲에서요.”

화들짝 놀란 부아노의 눈은, 메린이 유니콘의 뿔을 얻은 경위를 설명하자, 거의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커질 대로 커져버렸다.

하긴 유니콘이랑 일대일 결투를 해서 이겼다는데, 그걸 듣고 안 놀래면 이상하지.

대부분은 아마 믿지도 않을 거다.

그러니 그가 아연한 표정으로 입을 떡 벌리고 있어도 어쩔 수 없는 것이다.

그는 메린의 말이 끝난 뒤에도 한동안 멍하니 눈만 끔뻑거리다가, 이윽고 천천히 입술을 달싹였다.

“그러니까…… 숫처녀이신 거네요? 이런 세상에…….”

“아니 그 부분에서 놀라신 거에요?!”

역시 이 사람도 맛이 간 사람이었어!

아니 유니콘이랑 한 판 떴다는 거에 놀란 줄 알았더니, 얘가 남자를 모른다는 사실에 경악하고 자빠졌네!

미쳤나, 진짜!

어처구니가 없어서 소리치자, 맛이 간 부소장은 나를 보며 웃었다.

“두 분 다 인간 기준으로는 나이 다 차시지 않았나요? 근데 같이 다니시니까 뭐…… 그런 줄 알았죠.”

“아잇, 진짜. 같이 다닌다고 무조건 그렇게 되는 건 아니에요!”

“하하, 죄송합니다. 음, 지금 주실 수는 없죠? ……예, 그럼 내일 아침에 가져다주세요. 아마 검의 재료로 활용할 수 있을 겁니다.”

하…… 괜히 내가 더 놀랐네.

친절하게 허허 웃으며 우리를 배웅하는 부아노를 뒤로 하고, 개발연구소를 나섰다.

그 다음은 은근히 빡센 일정이었다.

부아노의 말을 따라 이곳 ‘바위궁전’ 안에 있는 여러 포목점 중 한 곳에서 상담을 받았는데, ‘단열’ 부분에서 그 주인이 난처한 듯이 눈썹을 찡그리며 다른 포목점을 추천한 것이다.

그래서 그리로 갔더니, 이번에는 또 다른 부분에 대해 또 다른 포목점을 추천받았고, 또 그 주인이 추천하는 다른 곳에 또 가서 또 이야기를 듣고…….

아무튼 그런 식으로 빙빙 돌아다녀서 결국 모든 포목점을 다 들렀고, 결국 우리 넷의 옷은 한 사람당 한 포목점에서 담당하는 꼴이 되고 말았다.

또, 무구를 빌리는 것도 쉽게 끝나지 않았다.

주변 드워프에게 묻고 물어, 바깥에 있는 군 진영으로 찾아간 건, 뭐, 괜찮았지.

처음에 만났던 솔리도 중장…… 장군을 만나서 이야기를 전한 것도 별 문제없었고.

솔리도 역시, 덥수룩한 갈색수염을 쓰다듬으며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기꺼이 지원하고 말고! 용사님이 친히 귀쟁이 놈들 조지러 가신다는데 확실히 뒤를 밀어드려야지 않겠나!

­­그런 얘기 안 했는데요.

‘귀쟁이를 조진다’는 이야기가 나오자 주변의 다른 드워프 병사들의 눈이 반짝이는 게 부담스럽긴 했지만, 그래도 여기까진 썩 나쁘진 않았다.

­­그런데 말일세, 카엘,

장군이 갑자기 씨익 웃으며,

­­기왕 온 거, 자네들 실력 좀 보고 싶은데.

라는 말을 하기 전까진.

솔리도의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병사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일사천리로 움직였다.

그리고 곧, 직접 전투하는 사람이 아닌 위슨을 제외하고 (치사한 자식!),나를 포함한 나머지 세 사람에게, 드워프 병사들이 도전하는 방식으로 대전을 치르게 되었다.

왜 일이 이렇게 되냐며 절규했지만, 아무도 내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하, 이래서 전사들은……!

어쩔 수 없이 그 대전에 참가했는데, 드워프 병사들은 하나같이 나보다 더 오랜 세월동안 수련한데다 키까지 작아서, 상대하기 무척 어려웠다.

공격도 공격이지만, 날아드는 날붙이를 되받아치는 과정에서 발이든 검이든 자꾸 허공을 갈랐다.

그래도 어느 정도 감을 잡은 다음엔, 힘들긴 해도 상대는 할 수 있는 수준이었는데……

……감을 좀 늦게 잡은 탓에 얼마 못 가 지쳐버리고 말았다.

그래도 한 달 좀 넘은 실전 경험만 있는 내가 베테랑 전사를 넷이나 이겼으니, 그럭저럭 괜찮은 수준 아닌가?

음, 내가 한 것 치고는 나쁘지 않은 것 같은데.

그렇게 멍하니 생각하며, 메린과 로나가 만들어낸 무수한 시체……가 아니라 의식을 잃은 드워프들의 산을 쳐다보았다.

아무튼 그런 파란만장한 시간을 보낸 후, 솔리도는 다시 ‘바위궁전’으로 돌아가려는 우리에게, 의회에서 숙소를 준비해두었다고 알려주었다.

그는 그 숙소의 위치를 가르쳐주면서 덧붙였다.

“자네들 말과 엘크는 이미 거기에 두었네. 자네들이 이렇게 시간을 보내는 동안 다 정리가 됐을 거야.”

“우와, 숙소라니…… 굳이 그렇게까지 안 해주셔도 되는데요……. 그냥 여관에 묵으면 되는데.”

아무리 용사에게 협조하는 게 의무라고 해도, 무구를 따로 만들어주는 것만 해도 감지덕지인데 숙소까지…….

어우, 고맙긴 한데 좀 부담스러운걸.

내 말을 들은 솔리도 장군은 허허 웃으며 대꾸했다.

“여기 여관 없어.”

“……네?”

“누가 묵는다고 여관이 있겠나? 드워프는 다들 집이 있고, 인간은 여기 들어온 적이 없는데.”

바깥 인간들과는 이곳 ‘바위궁전’이 아닌 다른 곳에서 만나며 거래를 하고 있다.

때문에, 술집은 있지만 숙박업소는 하나도 없다며 그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 말은 즉, ‘바위궁전’에 방문할 뿐더러 하룻밤 묵기까지 하는 손님은 우리가 처음이라는 거다.

“……그럼 숙소는……”

“빈 집 하나 개조했지.”

“우와.”

“근데 솔직히 우리 일족은 인간에 대해서 잘 모르거든. 아마 불편할지도 모르네. 그건 좀 양해해주시게나.”

음, 드워프의 집을 개조한 거니 천장이나 문 높이가 낮을지도 모르겠군.

그래도 뭐, 누워서 잘 수 있으면 되지.

“잠자리를 마련해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한걸요. 불평거리는 속에 묻어버릴 테니 걱정마십시오.”

“허허! 그래, 무덤까지 가져가시게! 그럼 내일 보자고.”

솔리도와 병사들의 배웅을 받으며 우리는 다시 ‘바위궁전’으로 돌아갔다.

그가 알려준 대로 내부 승강기를 타고 ‘주택 층’으로 간 뒤, 거리 번호가 적힌 표지판들을 쭉 따라가며 숙소를 찾아갔다.

마침내 그 지점에 도착한 나는, 눈앞에 서 있는 건물을 보며 경악하고 말았다.

“……여기 맞지?”

“맞는 거 같은데.”

“……”

인간에 대해 잘 모른다고 하긴 했지.

그래도 이건 너무한 거 아닌가?

숙소가 좀 많이 큰 2층 저택인 건 과도한 친절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하지만 문이 내 키에 두 배 높이인 건 뭐야?!

문고리도 내가 팔을 쭉 뻗어야 겨우 닿는 높이에 달려 있고!

인간 만나본 거 아니었나?!

대체 어떤 인간을 만났길래 감각이 이래?!

“이야, 죄다 더럽게 높네.”

위슨이 멍하니 중얼거렸다.

그럴 만해. 숙소의 현관문뿐 아니라, 다른 모든 문도 죄다 이 모양으로 높게 만들어져 있으니까.

그나마 가구 높이는 아주아주 약간만 높으니 천만다행이지.

아마 인간들과 앉아서 차를 마시거나 한 적이 있는 듯했다.

……근데 문은 왜 이 따위야?

밑에서 올려다본 탓에 너무 높아 보였나?

나는 숙소 안을 살피면서 한숨을 쉬었다.

“나 참, 이거 로나는 절대 못 열고 다니겠는데.”

“아니거든요?! 뛰어서 열면 되거든요?!”

앗, 이런.

마침 근처에 있었는지, 로나가 곧바로 빽 소리지르며 반박했다.

뛰어서 문을 연다고?

……그러고보니 고양이들도 뛰어서 문고리를 열 수 있다고 들었는데.

로나가 바닥에서 폴짝 뛰어올라서 문고리를 여는 모습을 상상해보았다.

“푸흡.”

“……”

“앗, 아니에요, 사제님! 불경한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그거 내려놔주세요!”

싸늘한 눈으로 철퇴를 만지작거리는 그녀에게 잽싸게 고개를 숙였다.

덕분에 내 몸이 납작해지는 것도, 모처럼 드워프들이 준비해준 숙소에 구멍이 생기는 일도 피했지만, 그녀는 여전히 꽁한 눈으로 나를 쏘아보았다.

하아…… 오늘 저녁은 무언가 단 거라도 만들어서 먹여야겠다.

식자재 창고에 호박 있던데, 파이라도 만들어야겠네.

“……로나는 이 일을 기억할 거에요…….”

“……”

……오오, 한이 서려 있는 목소리야!

평소보다도 달게 만들어야겠군.

싸늘한 눈으로 낮게 중얼거리는 로나를 보며 굳게 다짐했다.

숙소는 족히 열 명은 머무를 수 있을 정도로 넓은 데다, 그냥 하루이틀 묵는 것 치고는 굉장히 많은 시설이 갖춰져 있었다.

부엌, 거실, 식당, 독서실은 물론, 침실별로 욕실까지 하나하나 다 딸려 있고, 심지어는 악기실까지 구비되어 있었다.

혹시 어디 귀족 저택을 참고했나??

그러나 그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호화로운 구조보다도, 우리는 부엌과 욕실에 설치된 설비에 더 깜짝 놀랐다.

먼저 부엌. 겉으로 슥 보기엔 우리가 늘 보던 것과 별 다를 바 없다.

그러나 우리가 쓰는 화덕이 땔감을 넣고 불을 피우는 방식인 반면, 여기에 설치되어 있는 건 달랐다.

화덕 안에는 땔감 대신 시커먼 돌이 들어 있고, 근처에 달린 끈을 당기면 불이 뿜어져 나오며 그 돌을 달구는 방식이었다.

게다가 조리대 근처 벽에는, 수도 근처 여관에 묵을 때 봤던 그 밸브가 달려 있었다!

구조도 좀더 매끄럽게 생겼고, 재질도 나무가 아니라 금속으로 되어 있다.

어쩌면 그 밸브는 드워프들의 것을 흉내낸 건지도 모르겠어.

그리고 이 밸브는 욕실에 실컷 달려 있었다.

커다란 목욕통에도, 세면대 위에도, 물을 쓸 만한 곳엔 빠짐없이 달려 있었다.

그것도 하나가 아닌 두 개나!

“하나는 뜨거운 물, 다른 하나는 그냥 물인가보네. 이야~ 굉장한데?”

“부엌은 어차피 물 끓이는 곳이니까 하나만 달았나봐요. 우와아, 저 이런 거 처음 봐요!”

밸브를 처음 보는 로나와 위슨이 눈을 반짝거리며 재잘거렸다.

그 밖에도 목욕통과 세면대가 고정되어 있고, 또 각각 바닥에 구멍이 나 있는 것도 특이했다.

근처에 마개가 있는 걸 보니, 구멍을 막아서 물을 받아 쓴 뒤, 마개를 열어서 물을 버리는 방식인 듯했다.

용변기는 일을 본 후 끈을 당겨서 물을 흘려보내는 방식이었다.

……쓰고 버리는 물도 그렇고, 죄다 어디로 흘러가는 건지 모르겠네.

연구소에 물어보면 알려줄까?

마법이 들어간 기술이 아니라면, 왕국에서도 어느 정도 활용할 수 있을 거 같은데.

……그렇게 최신 기술들에 감탄하면서 저녁식사를 마친 후, 우리는 각자 방으로 올라갔다.

“후우…….”

뜨끈한 물에 몸을 담궈 묵은 피로까지 말끔히 씻어낸 다음, 평소대로 수첩에 이것저것 적어두었다.

나중에 이거 책으로 펴내면 굉장할 거 같아.

물론 율리아 공주가 예전에 밸브 부숴먹은 것도 빠짐없이 적어놨으니, 정말 큰 화제거리가 되겠지.

홀로 웃음을 띄우며, 나는 창 밖을 내다보았다.

“……”

바깥은 그야말로 밤거리의 풍경이었다.

집집마다 작은 불빛이 들어와 있고, 거리에는 띄엄띄엄 가로등이 길을 밝히고 있다.

그 불빛 너머에는 검푸른 밤자락이 짙게 드리워져 있고, 그 속에서 연한 녹색의 빛 알갱이들이 떠다니고 있었다.

모르는 사람이 이 풍경을 본다면, 거리가 밤의 그림자에 포근히 잠겨 있고, 그 사이를 반딧불이들이 자유롭게 거닐고 있다고 생각하겠지.

나도 일순 여기가 지하라는 걸 깜빡했을 정도로, 지상의 밤과 쏙 닮아 있었다.

……나 참, 대체 어떻게 이 풍경을 만든 거지?

아직 낮처럼 환한 거리도 남아 있긴 했다.

그러나 관리인인 듯한 사람이 그 거리를 다니면서 가로등을 만지작거리자, 등 위를 무언가 덮으면서 불빛이 사라졌다.

그리고 노란빛의 환한 불빛이 사라지자마자, 그 주변을 검푸른 빛이 바로 감싸버렸다.

음, 저 검푸른 빛이 이 지하세계의 원래 빛깔인가본데.

어쩌면 저것도 야광석이었나?

그 빛일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이런 식으로 낮과 밤을 구분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이들이 사는 곳은 어두컴컴한 지하인데다, 평소에는 야광석이라는 걸로 낮처럼 환히 밝히고 있다.

이렇게 강제로 불을 꺼서 어둡게 만들지 않으면, 아무리 시계가 있다고 해도 시간개념이 희미해지겠지.

너무 밝아서 잠도 제대로 못 잘 테고.

……그러고보니 그 돈독 오른 도시, 말리스에 사는 사람들은 밤에 어떻게 자는 거지?

특히 길거리에 집이 있는 사람들…….

한밤에도 되게 밝고 시끄럽던데.

똑똑.

“……?”

꽤나 정중한 노크였다.

로나 아니면 위슨이겠구만.

근데 갑자기 뭔 일이래?

고개를 갸웃하며, 창문을 닫고 문을 열었다.

끼이익, 문이 열리면서 나는 흠칫 놀라고 말았다.

문 앞에 서 있는 건 로나도 위슨도 아닌, 바로 메린이었다.

덤덤한 표정으로 서 있는 그녀는, 얇은 실내복을 걸치고 땋은 머리를 풀어서 길게 늘어뜨리고 있다.

그머리카락에는 아직 물기가 서려 있고, 뺨도 약간 상기되어 있었다.

아하, 목욕 마치고 온 거구나. 그렇구나.

……왜?!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뜬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며, 고개를 까닥였다.

“들어가도 되냐?”

“어어………… 왜?”

“할 말 있어서.”

“어……. 그, 그래. 들어와.”

내가 봐도 굉장히 얼빠진 목소리를 내며, 그녀에게 문을 열어주었다.

그녀의 발소리가 방 안쪽으로 향하는 게 들리자, 가슴이 쿵쾅거리면서 머릿속이 뒤죽박죽 꼬여갔다.

할 말? 무슨 할 말?!

이 밤에 방까지 찾아와서 일대일로 할 얘기가 뭐가 있는데?!

혹시 내일 일정 때문인가? 아니면 밸브 부수기라도 했나?

아니면 아까 먹은 저녁메뉴에 대한 감상평?

뭔 소리야, 감상평이라니!

‘진정해.’

……그래, 진정해야지, 응.

그냥 심심해서 왔을 수도 있잖아.

어쩌면 아까 했던 대전에 대해 이야기하러 왔을지도 모르고.

그래, 일단 얘기를 들어보자.

심호흡을 한 후, 문을 꽉 닫고 뒤를 돌아보았다.

그녀가 그새 침대에 걸터앉아 있었다.

“……”

오우, 도저히 저 옆엔 못 앉겠는걸?

긴장 때문에 뻣뻣해진 다리를 겨우 움직여, 창가에 놓인 의자에 걸터앉았다.

목이 갑자기 확 막혀서, 말을 꺼내기 전에 헛기침으로 목을 가다듬어야 했다.

“……할 말이 뭔데?”

“부탁이 있어.”

“부탁?”

이 야심한 시각에 이 녀석이 방에 찾아오기까지 하면서 할 만한 부탁이…… 뭐지?!

전혀 모르겠어!

먹을 거 관련한 거면 아까 저녁 먹으면서 그냥 했을 텐데!

그녀는 잠시 뜸을 들인 후, 나를 똑바로 마주보며 입을 열었다.

“키스해줘.”

“………………”

………………

어, 얘가 지금 뭐라고 한 거지?키스?

혹시 나 지금 또 꿈꾸고 있나?

아, 그래. 꿈일 거야.

목욕물이 뜨뜻해서 그만 잠이 들어버린 거지.

하하하……

……그런 거면 얼른 깨!!

제길, 뺨을 때려도 안 깨어나!!

기도라도 외워야 되나?!

“……너 뭐하냐?”

“꿈에서 깨려고.”

“뭔 개소리야, 술 취했냐?”

……오오, 메린의 저 눈빛.

‘뭐하냐, 등신아’라고 똑똑히 말하는 저 눈을 보니 이건 꿈이 아니군.

진짜 현실이야.

그럼 뭐야, 이 녀석, 진짜로 대뜸 그런 말을 입에 담은 거야?

술 먹고 돌았나?

“하…… 야, 너 솔직히 말해. 나 몰래 술 마셨지?”

“나? 아니.”

“그러냐. 그럼 내가 아까 저녁 먹고 취했나보네. 헛소리가 들려.”

고기요리 때문에 포도주를 썼는데, 술기운이 다 날아가지 않고 남아 있었나보다.

그래, 이 녀석이 나한테 키스 어쩌고 할 리가 없지.

가슴 만지게 해준다고 한 게 은근히 충격이 컸던 모양인걸?

하아…… 정신 차리자.

나는 고개를 세차게 흔들고, 그녀에게 물었다.

“미안, 메린. 다시 말해주라. 부탁이 뭐라고?”

메린은 눈썹을 살짝 찡그리며 대답했다.

“키스.”

“…………뭐?”

“키스해달라고.”

“………………”

제기랄, 제대로 들은 거였잖아!!

아니 얘가 미쳤나, 진짜 오늘 왜 이래?!

뭔 유혹하는 것도 아니고, 미치겠네!

저렇게 유혹하는 게 잘못 아니냐?

그냥 저질러버려!!

닥쳐!!

아아아! 진정해진정해, 진정!

키스가 그 키스가 아닐 수도 있어!

그래, 키스라는 게 꼭 연인끼리 하는 것만 있는 게 아니잖아!

그래그래, 그렇고 말고!

“……자, 잘 자라고 뽀뽀라도 해달라는 거야?”

물론 여태껏 그런 걸 한 적은 한 번도 없다.

하지만 아까 뜬금없이 격려한다며 볼에 뽀뽀한 녀석이니까 충분히 가능성은 있어.

받은 대로 돌려주라고 배웠으니까, 그녀가 갑자기 나한테 뽀뽀를 요구해도 이상하진 않아.

아니, 누가 봐도 엄청나게 이상하지만 메린에겐 지극히 당연한 일인 것이다.

그 달밤 아래 발코니에서, 춤을 춰준 답례라는 핑계로 그녀의 이마에 키스한 나에게, 똑같이 이마에 키스하는 걸로 돌려주었던 것처럼.

“아니.”

그러나 그녀는 잔인하게도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고,

“남녀가 하는 키스.”

……그렇게 말하며 자신의 입술을 가리켰다.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