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6화 〉 152화 : “그냥 알고 싶어서” (2)
* * *
의자에서 미끄러지지 않은 내가 자랑스럽다.
근데 이게 대체 뭔 상황이야?
영업정지를 선언한 탓에 새하얗게 텅 비어버린 머리에 채찍질을 가하며, 나는 지금 이 사태를 파악하려 애썼다.
일단 나나 메린이나 술 취한 건 아니야.
그러니까 얘는 지금 지극히 제정신이고 이성이 살아있는 상태에서‘키스해달라’고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내뱉은 거지.
알겠니?
“……”
알긴 개뿔!
그러니까 이게 대체 뭔 상황이냐고!
왜 쟤 입에서 ‘키스해달라’는 소리가 나와?!
도대체 뭣 때문에?!
어질어질한 머리를 부여잡으며 메린을 쳐다보았다.
……눈앞이 핑 돌 정도로 당황하는 내가 이상한 건가 싶을 만큼 굉장히 침착한 표정을 하고 있다.
음, 왠지 좀 억울해지는데.
왜 나만 매번 이렇게 허둥대는 거지?
이 자식, 그럴 리는 없지만 일부러 다 알면서 이러는 거 아냐?!
……속이 울컥하면서 머리가 약간 맑아지는 것 같았다.
자, 침착하자고, 카엘.
잘 생각해봐, 얘는 원래 이랬어.
원래부터 가끔 입과 손이 괴상한 방향으로 튀어나가는 애라는 거 잘 알고 있잖아?
그것도 저 나름대로 이유를 가지고 말야.
이번엔 어쩌다 보니까 그게 키스인 거야.
늘 그랬듯이, 이런 소리를 하는 이유가 반드시 있겠지.
그러니까 평소대로 하자고.
이유를 묻자.
늘 그랬듯이, 침착하게.
“가가, 갑자기 키, 키스해달라니 왜? 무, 뭣 때문에 그러는데?!”
성공이다! 굉장히 침착하게 질문을 던질 수 있었어!
목소리가 파들파들 떨리면서 뒤집어지고, 말까지 더듬었지만 소리 안 질렀잖아?
그럼 된 거야!
열심히 나 자신을 다독이면서 그녀의 대답을 기다렸다.
메린은 시선을 살짝 내리고, 발을 까닥이면서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때 이후로 계속 생각해봤는데, 도저히 모르겠어서.”
“야, 생략이 너무 많잖아.”
굉장히 간결한 대답에, 긴장과 동요가 싹 사라지면서 불평이 바로 튀어나왔다.
덕분에 그녀의 발언에 당황하느라 뒤죽박죽으로 얽혔던 머릿속이 싹 정리되는 듯했다.
그래, 이게 메린이지.
나는 한숨을 쉰 후, 그녀의 말에서 듬성듬성 빠진 부분에 대해 물었다.
“그때가 언제이고 뭘 생각해봤는데?”
“그, 네가 나 좋아한다고 했을 때. 그때 이후로 널 남자로 보는 거에 대해 생각해봤어.”
“……그런데, 모르겠다?”
그녀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구나. 음, 왠지 더 이해가 안 되는걸?
“결국 여전히 내가 남자로 안 보인다는 거 아냐. 근데 왜 키스가 나와?”
“으음…… 그러니까 그게……. 뭐라고 해야 되지…….”
말끝을 흐리며 그녀가 얼굴을 살짝 구겼다.
길게 푼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시선을 이리저리 부산스럽게 옮긴 끝에, 난처하다는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대신 찾아달라는 건가?
누구처럼 속마음을 읽을 수 있는 것도 아닌데, 내가 어떻게 해?
나는 팔짱을 끼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냥 너 생각나는 대로 말해봐.”
“그러니까…… 남자로 본다는 게 어떤 건지 모르겠어.”
그녀는 여전히 바닥을 내려다보며,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네가 내 손을 잡거나 끌어안는 건 아무렇지도 않아. 오히려 편해. 고향에 있을 때, 사범님이 어깨 두드리거나 머리 쓰다듬는 것도 별 느낌 없었고.
근데 왕자의 손을 잡는 것도, 그때 그 대피소 놈이 손을 댄 건 싫었어.”
아, 그런 건가.
무슨 이야기인지 대략 알 것 같았다.
즉, 그녀는,
“모르겠어. 누굴 남자로 본다는 건, 그 사람을 좋아한다는 건 대체 어떤 거냐……? 너랑 사범님은 무슨 차이가 있는 거지?”
제 나름대로 생각해봤지만, 역시 감정이 없어서 알 수 없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그냥 직접 부딪쳐보자고 대뜸 내지른 건가?
나 참, 진짜 너답다.
정말 사람 놀래키는 데엔 선수라니까.
“간단한 거야. 그 남자랑 자고 싶냐, 아니면 꺼려지냐는 거지. 자고 싶으면 남자로서 좋아하는 거고, 자기 싫으면 남자로서 좋아하지 않는 거고.
물론 사람을 좋아하는 건, 내가 지난번에 말했던 것처럼 단순히 욕정하는 거랑은 다르지만…….
남자로 보이냐 아니냐에 대한 답은 결국 그런 욕구 쪽일 거야.”
남자로서 또는 여자로서 좋다고 하는 건, 결국 같이 침대에서 밤을 보내고 싶다는 걸 고상하게 표현하고 있을 뿐이다.
즉, 일단 몸은 합격이라는 거지.
다만 거기에 애정이 없을 뿐.
만약 인간에게 지성이 없었다면, 신체적인 조건만으로도 애정이 만들어졌을 것이다.
그러한 감정을 품는 건, 결국 내 자식이 굉장히 멀쩡하게 잘 자라도록 할 수 있는 상대를 찾기 위한 본능이니까.
그러나 창조주는 인간을 만들 때 지성을 심어버리셨고, 덕분에 인간은 단순한 종족번식 본능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그래서 아무리 봐도 힘들게 살 게 뻔한 상대에게도 애정을 품고, 심지어는 자식을 갖지 못하는 상대를 사랑하기도 한다.
……나는 어떤 경우일까?
평생 사랑을 모를 수도 있다는 너를, 나는 왜 좋아하는 걸까?
언제부터 이 마음이 시작된 걸까?
“……결국 성욕인가.”
“일단은. 근데 한 번도 생각 안 해봐서 모르겠다며.”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상상…도 안 해봤냐?”
“한 번 해봤는데…… 별 느낌이 없었어. 그냥 그야말로, 그런 그림을 보고 있는 느낌이던데.”
……상상 속의 자신조차도 다른 사람처럼 보이는 건가?
나는 관자놀이 부분이 살짝 지끈거리는 걸 느끼며, 재차 조심스럽게 물었다.
“사범님으로 해봐도?”
“누구든.”
“우와.”
이야, 내가 메린을 잘 알고 있어서 다행이다.
아니면 방금 그 발언에 엄청 상심했을 거 같아.
세상에, 누구랑 이런저런 짓을 하는 걸 상상하든 아무렇지도 않다니…….
왠지 무서운데?
……혹시 성욕이 없나?
아니, 없는 게 아니라 모르는 건가?
그걸 누가 가르쳐줬을 리가 없으니…….
“그…… 너 혼자 있을 때, 아, 이거 돌겠네. 막 가슴이 두근거리거나, 그, 몸이 달아오르거나 한 적 없어?”
“한 달에 한 번 아주 약간 열이 나긴 한데. 가슴이 두근거리는 건 없고.
……근데 왜 얼굴 덮고 물어보는 거냐?”
“민망해서 그런다, 임마! 으으…….”
힘내라, 카엘!
욕구가 있는데 아무 느낌 없는 건지, 욕구도 뭣도 없는 상태인지 알아야 되잖아!
하나만 더 물어보면 돼!
질러버려!
“너, 그, 아, 신이시여……!……너, 네 몸 만진 적 없냐?”
“씻을 때 만지잖아. 뭔 소리야?”
“……아니요. 그거 말고요. 야, 좀 봐줘. 너 지금 일부러 이러는 거지? 응? 다 알면서 일부러 모르는 척하는 거 아냐?! 내가 미치는 꼴이 그렇게 보고 싶냐?!”
“갑자기 왜 지랄이야. 네가 똑바로 말해야 알 거 아냐, 이 등신아!”
괜히 혼나고 말았다.
아, 이걸, 아, 진짜 내 입으로 말해야 되는 거야?
그냥 묻지 말까?
하지만 이걸 안 물어보면 모든 수고가 다 물거품이 되는데!
으으으……! 넌 용사야, 카엘 에스트렐!
용사답게 용기를 내서 질러버려!
‘용사 상관없잖아.’
나도 알아, 망할!
이딴 거에 용사 들먹이는 게 엄청 자괴감 든다고!
아무튼 그냥 확 질러버려!!
“……너 혼자서, 욕구 달랜 적, 없냐고.”
“뭐? 욕구? ……아, 그거 말하는 거냐? 자,”
“그래, 임마, 그거! 한 적 없냐고!”
흑흑……, 결국 물어봤어.
여자에게 이딴 걸 물어봤다는 게 알려지면 난 끝장이야.
숲 속 깊은 곳에서 혼자 나무 때면서 살다 죽어야 할 거라고.
‘이야, 저걸 제정신으로 물어보네.’
시끄러! 어쩔 수 없잖아!!
아…… 지금 당장이라도 땅 속으로 꺼지고 싶다.
그렇게 절망하며 의자에 축 늘어져 있는 나와 달리, 정작 이딴 질문을 받은 메린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 왠지 되게 열받는데.
“글쎄……”
잠시 뜸을 들인 후, 그녀가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가슴은 만져봤는데, 별 느낌 없던데.”
“……그러냐.”
“어렸을 때도 그렇고, 이따금 뒷골목 같은 데서 일 치르는 사람들 봐도 별 생각 안 나고.”
“……”
성욕이 진짜 없는 건가?
아니 그보다 얘는 왜 그딴 걸 보고 다닌 거야?
아니아니, 그 전에……!
“잠깐, 뭐? 어렸을 때 봤다고? 밤에?”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등줄기에 서리는 싸늘한 느낌에, 자연히 내 목소리가 살짝 떨리며 가라앉았다.
“……어릴 때면 너 고아원에서 살 때잖아.”
“어. 딱 한 번 봤어. 사제랑 어떤 언니랑 그러고 있더라.”
“……”
그 미친 악마 새끼, 사제인 척한 걸로도 모자라, 고아원 운영하면서 그런 개지랄을 떨고 있었구나.
정말 훌륭한 악마였군.
내 손으로 없애지 못해 아쉬운걸?
“……그 새끼가 혹시 너도……?”
“뭐, 손댔냐고? 아니, 난 다락에서 몰래 잤거든. 다들 밤마다 내가 어디서 자고 오는지 모르는 거 같더라.”
“그래…….”
……다행이다.
어렸을 때도 그렇고, 커서도 그렇고, 진짜 아무 일도 안 당했구나.
“……너 그거 다른 어른들한테 말 했었냐?”
“아니. 아무도 안 물어보는데 내가 굳이 뭐 하러 하냐?”
“……뭐, 그것도 그렇네.”
하아…… 그런 꼬라지인 줄 알았으면 집에서 재웠을 텐데.
뭐, 본인은 그에 대해 별 생각이 안 든다고 하니, 내가 이런 식으로 미안하게 생각하는 건 오지랖이겠지.
아무튼 그녀는 그런 욕구를 품은 적이 한 번도 없다는 결론이 나왔다.
하…… 나 자신이 엄청나게 강한 자괴감을 느꼈다는 거 말고는 얻은 게 없네.
그럼 더 확인해봐야지.
더…….
이 이상 뭘 더……?
정말 욕구가 없는 건지, 아니면 단순히 느껴본 적이 없어서 모르는 건지…….
지 몸을 만져도 별 느낌 없다는데 그걸로 끝 아닌가?
남의 손길은 다른 법이잖아?
그렇긴…… 한데…….
……근데 그걸 확인한다는 건, 내가 얘를 만진다는 거잖아.
그런 감각이 있는지 확인하려고 만진다고?
아니 뭔 성인소설도 아니고 그게 무슨 발상이야?!
우와, 밤이라고 별 미친 생각이 다 드네!
그딴 걸 왜 굳이 확인해?!
‘‘그딴 것’이 아니야. 중요한 거라고.’
우와, 이번엔 다른 쪽에서 속삭임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드디어 내가 맛이 갔나 봐!
‘그냥 모르는 건지, 정말로 아예 없는 건지 확인해야 한다니까!’
아으…… 하지만……!
‘그녀가 혼란스러워하고, 골치 아파하고 있는데, 안 도울 거야?’
이거 진짜 내 마음속 목소리 맞나?!
망할, 이렇게 약한 부분만 콕 집어서 지적하는 걸 보면 나 자신의 속마음이 맞는 거 같긴 한데!
“……”
고개를 다시 들고 그녀를 보았다.
도로 바닥으로 시선을 향한 채, 가만히 침대에 걸터앉아 있다.
어딘지 조금 가라앉은 듯한 분위기를 풍기면서.
……도와주고 싶긴 한데.
그렇다고 그녀에게 손을 대는 건…….
‘되새겨.’
……아, 그래.
책에서…… 맞아…….
나는 재차 크게 심호흡을 한 후,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메린. 저기, 내가 너 목 좀 만져도 되냐.”
“목? 왜?”
“아니, 그…… 그런 쪽 감각도 없나 싶어서.”
“그런 감각……? 으음……, 아, 성적인?”
이제까지 한 이야기 흐름에서 파악한 거겠지.
굉장히 고맙게도 그녀가 바로 내 말뜻을 알아차렸다.
와, 다행이다.
안 그래도 지금 머리 터질 거 같아서, 그런 쪽 말을 한 마디라도 더 했다가는 진짜 정신줄 끊어질 거 같은데.
그녀는 나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보통 가슴 아니냐? 아니면 아래,”
“아으아아아! 좀 봐달라니까아아!!”
“……왜 네가 난리냐?”
아, 진짜 울고 싶다.
왠지 엄청나게 괴롭힘 받고 있는 기분이야.
그보다 이 녀석은 왜 이렇게 태연한 거야?
나처럼 허둥대는 것까진 바라지 않으니까, 좀 시선을 살짝 피하거나 뭐, 그런 거라도 해줬으면 좋겠다!
나만 이상한 거 같잖아!!
손으로 얼굴을 덮은 채 속으로 훌쩍이며, 그녀에게 다시 물었다.
“아무튼, 목, 만져도 되냐고.”
“그래라.”
“……”
진짜 되게 태평하네.
하, 얘가 뭔 잘못이겠어?
엄밀히 따지면 그냥 나 혼자 생난리 피우는 거지.
……아니, 오히려 이런 상황까지 와서도 이성을 유지하고 있는 내가 대단한 거 아니냐?
그냥 예쁜 여자도 아니고, 좋아하는 여자인데.
“후우…….”
……좋아.
아무튼 메린도 승낙했으니까, 마음 굳게 먹고, 정신 다잡고 하자.
나는 완전히 굳은 다리를 억지로 움직여, 그녀의 옆에 가서 앉았다.
눈을 감고 재차 심호흡을 한 후, 그녀를 마주보았다.
“……그럼, 만진다. 그, 뭔가 느낌이 와도, 참지 마라.”
“응.”
그녀의 하얀 목을 향해, 검지와 중지를 천천히 뻗었다.
아무 힘도 들어 있지 않은 손가락이, 그녀의 턱부터 시작해, 서서히 목선을 따라 아래로 내려갔다.
……아, 매끄럽다.
보기보다도 훨씬 더 매끄럽고, 부드럽다.
침을 삼키는 건지, 이따금 그녀의 목울대가 꿀렁거린다.
손끝이 목 가운데를 타고 내려가며, 그 움직임이 여실히 느껴졌다.
아, 왠지, 목이 타는 거 같아.
나도 모르게, 입 안에 모이지도 않은 침을 꼴깍 삼켰다.
“……”
음, 왠지 그녀가 살짝 움찔한 것 같은데, 착각일까?
목선을 타고 내려온 내 손가락이, 그녀의 도드라진 쇄골을 스윽 어루만졌다.
그 순간,
“흐읏……!”
“…………”
그녀가 확실하게 몸을 움츠리며 신음을 흘렸다.
스스로도 놀랐는지, 그녀는 곧바로 눈을 동그랗게 뜨며 나를 쳐다보았다.
“어어…… 나 지금……?”
“옙. 수고하셨습니다.”
확인 끝.
축하합니다!
방금 생애 처음으로 야릇한 감각을 느끼셨군요!
그런 의미에서 전 잠시 머리 좀 식히고 오겠습니다.
……곧바로 욕실로 가서, 목욕통의 밸브 밑에 머리를 대고 물을 끼얹었다.
차가운 물이 마구 머리를 때리며, 눈앞이 어지러워질 정도로 뜨거워진 열을 식히기 시작했다.
하, 진짜 힘들었어…….
그래도 어떻게, 정신줄 안 끊어지고 버텼구나. 흑흑.
“……야, 너 뭐 하냐?”
“아, 신경 쓰지 마. 금방 다시 갈 테니까, 잠깐만 기다리고 있어.”
……하지만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녀가 여기 온 목적은, 아직 달성되지 않았으니까.
알아서 납득하고 방에 돌아가겠다고 해주면 좋으련만.
“어……, 알았어. 앉아 있을게.”
“……”
어림도 없는 소리……!
머리를 때리는 물소리에 섞여, 누군가가 낄낄거리며 웃는 것 같았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