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7화 〉 153화 : “그냥 알고 싶어서” (3)
* * *
머리가 차갑게 식은 덕분에, 생각보다도 더 차분하게 말을 꺼낼 수 있었다.
그것도 다시 메린의 옆에 앉아서.
“……내가 봤을 때, 네가 누구와 야한 상상을 하건 아무 느낌도 없는 이유는 딱 하나야. 그런 감각을 느낀 경험이 없으니까, 떠올리지 못하는 거지.”
하늘을 날아본 적 없는 사람은, 꿈에서 훨훨 날더라도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다.
아무리 뛰어난 상상력을 지녔더라도, 경험한 적 없는 감각은 머릿속에서 만들어내지 못하는 것이다.
……요즘 내 꿈이 점점 더 생생해지는 것도 그런 연유이겠지.
메린은 내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감각? 아까 같은 거? 으음…… 그냥 간지러워서 놀란 거 아냐?”
“아니야. 내가 장담해. 아까 넌 약하긴 해도 느낀 거야.”
“그래……?”
“그렇다니까.”
그냥 놀란 거라면 내 머리가 터지려고 했을 리가 없잖아.
내가 아무리 경험이 없어도 그 구분을 못할까.
“……그럼 결국, 내가 아무리 열심히 생각해봐도 알 수 없다는 거 아냐. 경험이 없으니까.”
“음…… 그런 쪽으로는…… 그렇지……?”
“넌 그런 욕구를 어떻게 깨달은 거야?”
“나? 어, 음, 나, 나는 그, 남자잖아. 그냥 그, 동네 여자들 봤을 때……. 그랬지…….”
공연히 머리를 긁적였다.
진짜 별 얘기를 다 하고 있구만.
“……자연히 알게 되는 거구나.”
작게 중얼거린 후, 그녀는 땅이 푹 꺼져라 한숨을 쉬며 덧붙였다.
“……역시 내가 이상한 거구만.”
낮게 중얼거리는 그녀의 어깨는 축 늘어져 있었다.
실망한 것 같기도 하고, 어딘지 초연한 것 같기도 하다.
……금방이라도 바람에 날아가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너무나도 가냘퍼보였다.
“……”
그래서 그 어깨를 끌어안았다.
창문은 닫았지만, 갑자기 그게 활짝 열리면서 그녀가 빨려가버리면 어떡해?
……물론 말도 안 되는 상상이지. 알아.
하지만, 도저히 그 불안감을 웃어넘길 수 없다.
……뭣보다도, 그녀가 풀이 죽어 있는 걸 보고 있으니 가슴이 저미는 것 같았다.
뒤에서 그녀를 껴안으며, 나는 그 귀에 속삭였다.
“……이상한 거 아냐. 모를 수도 있지. 괜찮아.”
“……다른 사람들은 다 알잖아.”
“모르는 사람도 있을걸?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서로 부대끼면서 사니까, 그래서 알게 되는 걸 거야.
넌 우리 가족이랑 검술 사범님 말곤 가까이 지내는 사람이 없었잖아.”
그녀가 모르는 것도 당연하다.
달리 이 녀석이 무언가를 느낄 정도로 가깝게 지낸 사람이 없었으니까.
추파를 던지는 놈조차 없었던 거 같고.
그러니 그녀가 남녀에 대한 감정이 전혀 없을 수 밖에.
……가장 가까이에 있는 나조차, 그 부분은 영 아니었으니까.
“괜찮아. 모른다는 건, 언젠가 알게 될 수 있다는 거나 마찬가지야. 그러니까 기죽지 마.
그, 뭣하면 로나에게 물어봐도 될 거야. 걔가 어리긴 해도, 희한하게 아는 건 많더라.”
로나는 분명 내 기준으로 멀쩡한 대답을 하진 않을 거다.
하지만 그녀가 혼자 끙끙 앓는 것보단 훨씬 낫겠지.
“……사실, 한 번은 그 둘한테 물어봤어.”
“둘? 로나랑 위슨?”
“어.”
……그래, 네가 그래도 그 둘을 편하게 생각하는구나.
홀로 조용히 미소를 지으며, 나는 가만히 물었다.
“그래서 뭐래?”
“로나는…… 모르면 경험해보래.”
“……뭐?”
“그러니까, 내가 널 남자로 보는지 어떤지, 직접 경험해보면 알 거라고.”
크아아악!
이 사제님, 진짜 돌겠네!
그게 열 네 살이 할 소리냐고!
속으로 분통을 터뜨리는 순간, 내 머릿속으로 한 장면이 스쳐지나갔다.
싸늘한 눈으로 나를 보며, 깊은 한이 서린 목소리로 중얼거리던 로나의 모습이……!
……로나는 이 일을 기억해둘 거에요…….
로나 이 자식, 설마 내가 지 키 가지고 놀렸다고 지금 보복하는 거야?!
오오, 주여, 당신의 종이 이렇게 사악합니다!
메린은 내 속이 부글부글 끓는 것도 모른 채, 여전히 느릿느릿하게 말을 이었다.
“근데 넌 나랑 안 잔다고 했잖아? 그랬더니 로나가, 좀더 약한 건 괜찮을 거라더라.”
“……그래서 키스냐?”
그녀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사제님이 이래도 되는 거야?
얘가 충실한 신도인지는 일단 차치하고, 여자에게 정숙하라고 해야 할 사람이 되려 등을 마구 떠밀고 있네.
나 참, 기가 막혀서.
더 어이가 없는 건 무엇인지 아는가?
로나의 논리에는 틀린 점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돌겠네, 진짜.
메린은 여전히 바닥을 내려다보며 재차 말을 꺼냈다.
“그리고 위슨은, 자기도 잘 모르겠대. 주변엔 죄다 나이 엄청 많은 여자들밖에 없었고, 애초에 그 사람들과 피상적인 얘기밖에 못했다고.”
“……”
그를 키웠던 그 미친 마녀 때문이겠지.
그가 남자인 걸 들킬 걸 두려워한 나머지, 가능한 다른 사람들과 만나지 못하도록 차단했던 모양이다.
그녀가 문득, 내 어깨에 기대듯이 고개를 살짝 뒤로 젖혔다.
아직도 약간 촉촉한 그녀의 머리카락이 목을 간지럽히면서, 진한 라벤더 향기를 물씬 풍겼다.
……그럼에도, 희한하게 심장이 난리를 치지 않았다.
그저 차분하게, 그녀를 달래듯이 어깨를 토닥이며 다음 말을 기다렸다.
머리가 식어서 초연해진 걸까?
……어쩌면 그녀의 목소리가 약간 허망하게 들려서 그런지도 모른다.
“그 대신 정령의 이야기를 들려줬어.”
“정령?”
“네가 절벽에서 떨어졌을 때, 널 구한 정령.”
“아…… 테라? 나를 구하긴, 우리 둘을 구한 거지.”
“아냐.너를 구한 거야.난 네가 나한테 붙어 있었으니까 겸사겸사 같이 구해진 거고.”
그녀는 어깨를 살짝 으쓱이며 피식 웃었다.
……위슨에게 듣긴했다.
내가 메린을 쫓아 낭떠러지를 뛰어내렸을 때, 그의 정령인 늑대가 혼자서 냅다 튀어나갔다고.
“위슨이 그러더라. 좋아한다는 게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마 그 정령처럼 하는 게 아니겠냐고.
네가 웃으면 같이 즐거워하고, 네가 기운이 없으면 격려해주려 애쓰고, 네가 목숨이 위험해지면 앞뒤 안 가리고 지키려 하는 그런 게 아니겠냐고.”
몸을 섞는 건 그 부가적인 게 아니겠냐, 그렇게 덧붙였다고 한다.
……이거 열 다섯 살이 할 만한 소리가 아닌 것 같은데.
그 녀석도 사실 서른 다섯 살 아니야?
“……나와는 달라.”
목소리를 떨어뜨리며, 그녀는 속삭이듯이 말했다.
“너를 따라 즐겁다는 생각도, 축 쳐진 널 위로하고 싶다는 생각도 안 들어. 네가 죽는 건 싫으니까 지키려고 하고 있지만……. 그조차도 제대로 못하고 있어.”
“뭔 소리야? 지키고 있잖아.”
네가 몇 번이나 내 목숨을 구해줬는데.
그러나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여전히 고개를 떨군 채 중얼거렸다.
“계속 다치잖아.”
“……어쩔 수 없지. 기습을 당할 때도 있고, 단순히 수적으로 불리할 때도 많으니까. 너도 그렇게 말했잖아?”
아무리 그녀가 강하다고 해도, 그녀의 몸은 하나밖에 없다.
온갖 곳에서 튀어나오는 적을, 하나도 빠짐없이 몽땅 상대하는 건 불가능하다.
그러니 내가 공격을 받는 건 당연한 거다.
내가 다치는 건, 내 실력이 아직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녀가 나를 훈련시킨다며 마구 굴리는 거 아니겠나?
물론 하기 싫어 죽겠지만, 그래도 내가 도적들의 검을 피하고, 짐승의 발톱에서 벗어나고, 트롤의 몽둥이를 피할 수 있었던 건 다 그 덕분이다.
덕분에 어디 하나 잘려나가지 않고, 이따금 부러지거나 으스러지기만 하는 걸로 끝나고 있는 것이다.
그녀가 날 단련시키지 않았다면 진작에 죽거나 불구가 됐겠지.
로나는 납작해진 다리는 펼 수 있어도, 잘려나간 손가락을 붙일 수는 없으니까.
즉, 그녀는 나를 지키고 있는 거다.
더할나위 없이 훌륭하게.
“……하지만,”
그럼에도 그녀는, 다시 고개를 떨구며 중얼거렸다.
“……하지만 낭떠러지에서 떨어지게 했어.”
“야, 그건,”
내가 그냥 미쳐서 저지른 거야.
네 잘못이 아냐. 네가 부족한 게 아니라고.
그렇게 말하고 싶었는데, 그녀가 고개를 저으며 내 말을 막아버렸다.
“나 때문에 뛰어내린 거잖아.”
“……”
“그, 대피소에서……네가 정신을 잃고 누워 있는 걸, 가까이서 볼 수 없었어. 도저히, 못 보겠더라.
물론 알고 있었어. 네가 죽은 게 아니라는 것도, 갑자기 죽지도 않을 거라는 것도, 곧 깨어날 거라는 것도.
그래도…… 그땐 이유를 몰랐지만, 네가 나 때문에 뛰어내린 거 자체는 확실했잖아. 나 때문에, 네가 그렇게 누워 있다는 게, 너무……
……너무 무서웠어.”
……그래서 그렇게 표정이 어두웠구나.
내가 깨어난 걸 깨닫자마자 황급히 다가온 것도, 네 눈동자가 불안에 떨고 있던 것도, 그 때문이었구나.
너를 무섭게 한 건, 다름아닌 나였구나.
그때의 일을 떠올린 건지, 그녀의 어깨가 희미하게 떨리고 있는 게 느껴졌다.
“……미안. 미안해. 정말 미안해.”
힘껏 껴안으며, 다시 한번 사과의 말을 담았다.
“……다시는, 그러지 마.”
내 손을 잡으며, 그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마음 같아서는 ‘다신 그러지 않겠다’며 그녀를 안심시키고 싶다.
“……”
하지만 못해. 지키지 못할 약속을 할 순 없다.
그건 그녀에게 거짓말을 하는 거니까.
나는 그녀에게 가능한 솔직하고 싶다.
로나의 말대로, 나와 교감하는 걸로 그녀의 마음을 채울 수 있다면, 가능한 순수하고 깨끗한 걸로 채워주고 싶다.
……기만과 위선을 먼저 배워버린 그녀가, 자신이 본래 가지고 있는 이 따스함을, 이 이상 잃지 않도록.
그래서 나는 솔직하게 고개를 저었다.
“미안. 난 분명 같은 일이 벌어지면, 또 뛰어내릴 거야.”
“……”
“내가 죽는 게 싫다고 했지? 나도 네가 죽는 게 싫어. 없어지는 게 싫어. 널 곧장 따라가지 않더라도 아마 나중에 뛰어내릴걸?”
“……결국 내가 널 죽이는구나.”
“메린.”
끌어안던 팔을 풀고, 그녀의 몸을 돌렸다.
여전히 축 쳐진 어깨를 붙잡고, 한손으로 그녀의 뺨을 감쌌다.
“나를 봐.”
“……”
내 바람대로 고개를 드는 그녀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나는 또박또박 말해주었다.
“설령 내가 그 때문에 죽더라도, 네가 죽인 게 아냐.내가 너에게 바친 거지.
내가 이렇게 여기 있는 게 누구 덕인데? 너는 그때 숲에서 나를 살렸고, 내가 자랄 때까지 지켜줬어. 무투회 때도 나 대신 싸워줬고, 내가 그 악마를 물리치도록 도와줬어. 그 까마귀 잡놈을 잡을 땐 또 어땠고?
……메린, 난 어차피 죽을 놈이었어. 그걸 네가 여태까지 살도록 해준 거야. 그러니 네가 날 죽이는 거란 소리하지 마.
널 구하다 죽는다면 아무 후회도 없어. 오히려 바라던 바야.”
……하지만 만약, 너를 구하지 못하고 나만 살아남는다면, 나는 아마 세상을 저주해버릴 거야.
깊이깊이 저주하면서 스스로 목숨을 끊겠지.
네가 없는 내 삶 따위, 아무 가치도 없으니까.
네가 없는 세상 따위, 내겐 아무 의미없으니까.
……나 정말로 너를 많이 좋아하나봐.
너에 대해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점점 더 깊어지는 거 같아.
이래도 되는 걸까?
네가 네 마음을 온전히 찾기 전에, 내 욕망이 널 집어삼키면 어떡하지?
그런 건 싫어. 진심이야.
그러면 떨어져야 하는데, 그만 좋아해야 할 텐데,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겠어.
계속 이렇게 있고 싶어.
널 좋아하는 걸 멈출 수가 없어.
멈추기 싫어.
메린…….
나 진짜, 어떻게 해야 되냐……?
미처 전할 수 없는 말들을 속으로 삼켜버리며, 나는 가만히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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