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8화 〉 154화 : “그냥 알고 싶어서” (4)
* * *
안팎으로 토로를 쏟아내며 그녀의 뺨을 어루만졌다.
조금이라도 그녀의 마음에 전해지길 바라며, 그녀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적어도 내가 그녀를 무척 소중하게 여긴다는 건 알아줬으면 좋겠는데.
그런 내 바람이 통한 건지, 풀이 죽었던 그녀의 얼굴이 조금 더 일그러졌다.
어린아이처럼,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듯한 표정이었다.
여기서 그녀가 울면 굉장히 곤란해진다.
그걸 보면 가슴이 아플 테고, 결국은 나도 눈물이 나와서 이 자리가 눈물바다가 되겠지.
다 큰 남녀 둘이 서로 우는 건 좀 그렇잖아.
그녀를 달래려고 끌어안으면, 서로의 온기를 받은 탓에 결국 감정의 둑이 무너져내리겠지.
그렇다고 울먹이는 그녀를 그대로 둘 수는 없었다.
……그래서 가만히 그녀와 이마를 맞대며 눈을 감았다.
그녀의 머리카락에서 풍기는 라벤더 향을 깊이 들이마시며,그녀가 여기 내 앞에 있음을 나 자신에게 각인시킨다.
그녀의 뺨을 어루만지며, 그녀에게 내 존재를 확인시켰다.
거리가 떨어져서 마음을 전하지 못한다 해도, 적어도 서로의 존재는 확실히 느낄 수 있도록.
……괜찮아.
나는 여기에 있어.
손길에 그 말이 담기기를 바라며, 뺨을 어루만지면서 속으로 되뇌였다.
입 밖으로 내보냈다가는, 그게 마중물이 되어서 감정이 흘러넘칠 것 같았다.
……이미 한참 전부터, 나는 한계에 다다라 있었다.
“……”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을 받아 괴로운 너.
그런 너를 보며 가슴이 미어지고, 애달파하는 나.
서로가 서로에게 고통을 주고, 그 때문에 서로를 보며 힘들어하는 우리.
둘 중 하나만 떨어지면 해결될 문제이다.
……그렇기에 절대로 해결되지 않는다.
너는 나를 지키고 싶어서, 나는 너와 함께 있고 싶어서 떨어질 생각을 안 하니까.
“……이해가 안 돼.”
불쑥, 그녀가 중얼거렸다.
어딘지 물기가 맺혀 있는 듯한 목소리로, 답답해 죽겠다는 듯이.
“누군가를 좋아하면, 그렇게 멍청해지는 거냐……?
……완전 물러터졌어. 등신 그 자체잖아.”
볼멘소리로 말하면서, 그녀는 제 뺨을 쓰다듬는 내 손을 잡고, 살짝 얼굴을 부볐다.
부드러운 감촉이 손바닥을 간질이는 듯했다.
왠지 나를 의지하는 것 같아 가슴이 벅차올라서, 그녀에게 대답하기 전에 목을 가다듬어야 했다.
“……나도 처음이라서 모른다니까. 그래도 바보가 되는 것 같긴 해.”
“바보가 아니라 멍청이야. 등신 호구에 얼간이에 구제불능인 멍청이!”
“시끄러, 임마. 그리고 호구 아냐!”
매섭게 쏟아붓는 그녀의 매도를 맞받아치며, 이마를 맞대던 걸 떼어내고 다시 그녀를 바라보았다.
울먹이는 건 사라졌지만…… 이젠 눈물 대신 욕을 쏟아낼 것 같았다.
그 역시 곤란하므로, 나는 뺨을 감싼 손을 들어 그녀의 머리를 슬슬 쓰다듬었다.
잔뜩 찡그려졌던 그녀의 얼굴이, 아주 조금씩 풀리는 것 같았다.
……이렇게 만질 때마다 느끼는 건데, 정말 머리 부드럽단 말야.
다른 여자들처럼 피나게 관리하는 것도 아닐 텐데.
밤새도록 만져도 안 질릴 거 같아.
“……후.”
……진짜 바보가 됐구만.
이 상황에 그런 생각을 하다니.
아까부터 실컷 맡은 라벤더 향에 취하기라도 한 것 같다.
취한 탓에, 절로 웃음이 나오고,
“……왜 웃냐?”
“내가 바보이긴 하구나 싶어서. 네가 그렇게 표정 구기고 있는데도 예뻐 보인다.”
취한 탓에, 속마음이 술술 새어나왔다.
막아야 한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예쁘긴 무슨. 그때처럼 화장한 것도 아닌데.”
……그래, 내가 말을 잘못하긴 했네.
내가 머리를 쓰다듬어주니까 표정이 살짝 풀린 것도 그렇고,
지금처럼 한숨을 쉬며 시선을 피하는 것도 그렇고, 예쁘다는 것보다 훨씬 더 어울리는 말이 있긴 해.
“아, 진짜귀여워.”
“……뭐?”
“너 되게 귀엽다고.”
“……그거 애한테나 하는 소리 아냐? 내가 애 같다는 거야?”
“아닌데? 사랑스러운 사람한테 하는 건데?”
정말 취한 거 같아.
그녀의 눈동자가 나를 비추며 눈을 깜빡일 때마다,
그 주홍빛에 매료돼버린 내 혀가 말을 자아낼 때마다,
그 취기가 점점 더 강해지는 것 같다.
……아마 이 순간이 지나면, 나는 또 내 어리석음을 탓하며 바닥을 구르겠지.
하지만 지금은 그런 게 전혀 신경 쓰이지 않았다.
그 정도로, 나는 그녀에게 깊이 취해 있었다.
그녀가 의아한 듯이 나를 보며 눈을 깜빡거렸다.
“사랑…스럽다고? 뭐야, 그게.”
“그게 뭐냐면……”
말끝을 흐리고 말았다.
……이걸 말로만 전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
감정은 말로만 설명해서 되는 게 아니니까.
즐거운 게 무엇이고, 귀찮다는 게 어떤 건지 알려주었을 때처럼.
말뿐만 아니라, 행동으로 그 뜻을 보여주어야 한다.
하지만…… 괜찮을까?
그걸 보여주려면, 결국…….
나도 모르게, 그녀의 입술을 건드렸다.
아니, 오늘 메린이 내 방에 찾아온 게 그것 때문이긴 한데…….
‘그녀가 바라고 있어.’
그녀만 바라는 것도 아니고.
‘선을 넘는 게 아니잖아.’
이제 좀더 쉬워지겠지.
‘괜찮아.’저질러버려.
“……”
마음속이 심각하게 시끄러운데.
이거 진짜 그거인가? 천사와 악마?
아니, 둘 다 악마 같은데.
“카엘……?”
내 말이 이어지지 않는 것이 의아한 거겠지.
그녀가 나를 보며 고개를 살짝 갸웃거렸다.
눈도 아주 살짝 동그래져 있다.
……아, 미치겠다.
왜 이렇게 귀여운 거야.
왜 이렇게, 하, 사랑스러운 거야?
보이는 모든 곳에 죄다 키스하고 싶어지잖아.
“사랑스럽다는 게 뭐냐면……, 입을 맞추고 싶을 정도로, 예뻐해주고 싶다고 느끼는 거야.”
“그럼 네 말은…….”
“키스…해달라고 했지……? 아직도……, 내가 해줬으면 해?”
아까 내가 목을 살짝 만지고,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녀 나름대로 결론이 나왔을 터.
제대로 성감을 느끼는 그녀는, 이제껏 그걸 느낀 적이 없기 때문에 나를 남자로 보지 못한다.
……나를 걱정하며 지켜주려고 하지만, 그건 여자로서 애정을 품은 게 아닌, 그냥 가까운 사람을 아끼는 것일 뿐.
즉, 그녀의 목적은 이미 달성됐다.
알고 싶은 걸 알게 됐으니, 굳이키스할 필요는 없지.
그러니 그녀가 그냥 방에 간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심지어, 이제 남녀에 대해 생각 안 하겠다며 다 내던지더라도, 나는 전혀 상관없었다.
원래 그게 내 입장이었으니까.
……아니, 솔직히 그녀가 이대로 방으로 돌아갔으면 좋겠다.
이 흐름에서 그녀에게 키스했다가는, 이미 취할대로 취해서 마비된 정신줄이 뚝 끊어질지도 모르니까.
그런데도 그녀는, 늘 그렇듯이 나에게 일말의 자비도 베풀지 않았다.
잠시 무언가 생각하듯이 시선을 내리더니, 이내 나를 마주보며 고개를 끄덕인 것이다.
“그, 꼭 해야겠어?”
“애초에 그러려고 왔잖아. 으음…… 키스는 또 다를지도 모르고.”
시원시원하게 말하며, 그녀는 어깨를 으쓱였다.
하지만 나는 그녀처럼 시원스럽게 결정하고 저지를 수 없다.
매사에 우물쭈물거리고 꿍얼거리는 것처럼, 재차 물어야 했다.
“너, 키스 처음 아니야?”
“그게 뭐. 넌 아니냐?”
“아니 나도 그렇긴 한데…….”
공연히 머리를 한 번 쓸어올려, 아까 죄다 써버려서 부스러기만 남은 용기를 주섬주섬 모은 후, 다시 그녀를 마주보며 물었다.
“……내가 해도, 진짜 괜찮아?”
“어.”
망설임없이 곧바로 대답하며, 그녀는 희미하게 미소지었다.
“너 까먹었냐? 이거 애초에 내가 널 남자로 보는지 아닌지 알려고 부탁한 거잖아.”
“……”
“그리고 이유는 나도 잘 모르겠는데, 음……,”
눈을 가늘게 뜨며, 그녀의 미소가 더 깊어졌다.
“……너라면 괜찮을 거 같아. 그냥 그런 생각이 들어.
응, 네가 해줬으면 좋겠어.”
“…………그래.”
내가 자신을 여자로서 좋아한다는 것도, 야한 꿈을 꿀 정도로 그 몸을 품고 싶어한다는 것도 알면서.
그런데도 이런 시간에 방에 찾아와서는, 내게 입술을 허락한다고 고한다.
누가 봐도 유혹하는 거지.
그 이상의 일을 당하더라도 불평 한 마디 못할 정도로 명백하다.
두 애늙은이도 결국 저지를 줄 알았다며 어깨만 으쓱이겠지.
선을 넘어도 할 수 없어.
……그래, 다들 그렇게 말할 거다.
어쩔 수 없다고.
하지만,
그건 그냥 죄의식을 덜려고 합리화하는 거지,
그래도 된다는 게 아니야.
애초에, 메린에겐 나를 유혹하려는 의도는 조금도 없다.
그녀는 내가 자신을 여자로서 좋아한다고 하니까, 그냥 그 마음에 답하려고 애쓰는 거겠지.
그간 배운 것처럼, 그저 ‘받은 대로 돌려주려고’ 하고 있을 뿐인 거다.
그녀가 그런 생각을 해준 것만으로도 충분해.
오늘 보여준 마음만으로도 충분히 기쁘다.
그러니 정말정말 자신 없지만, 그녀가 바라는 그 선에서 끝내자.
온 힘을 다해, 나 스스로가 한 말을 지키자.
나를 생각하는 그녀의 그 마음만 생각하자.
그 순수함이 더럽혀지지 않도록.
……그녀를 품은 내 마음이 망가지지 않도록.
머리를 쓰다듬던 손을 내려, 그녀의 뺨을 쓰다듬으면서 턱을 감쌌다.
손이 뺨에 닿을 때 살짝 감겨 있던 그녀의 눈이 다시 열리며, 나를 바라보았다.
그대로 천천히, 정말 조금씩 얼굴을 가까이했다.
조금이라도 더 빨리 움직였다간, 심장이 못 버티고 터져버릴 거 같았다.
“메린…….”
나도 모르게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확연히 열을 품은 내 목소리가, 내 귀에도 굉장히 애달프게 들렸다.
“……”
들어오라는 듯이 나를 부르던 주홍빛 눈동자가 천천히 감겼다.
나 역시, 그녀를 따라 서서히 눈을 감았다.
“메린…… 좋아해.”
가만히 속삭이며, 그녀에게 직접 그 말을 심어 넣듯이, 그녀의 입술을 살포시 덮었다.
“……”
촉촉하고 보드랍다.
입을 맞추기 전에 말을 해서 그런지 살짝 따뜻하기도 하다.
……마침내 닿았어.
그 강렬한 기쁨이, 찌릿하고 온 몸을 헤집고 머리 위로 빠져나가며, 오로지 하나의 생각만 품도록 강요한다.
좀더…… 좀더 깊이.
좀더 깊은 곳까지, 그녀를 느끼고 싶다.
이렇게 앉아서 입술만 느끼는 게 아니라, 그녀를 쓰러뜨리고, 껴안으면서.
그녀의 숨결마저도 내가 전부 삼킬 만큼 깊게.
그녀 자신조차도 알지 못하는 곳까지 전부 탐하며,
깊이, 아주 깊이 그녀를 느끼고 싶다.
아아, 이대로……
그녀를 내 것으로……!
해버려.
……하지만,
쓰러뜨려. 키스만 하면 되잖아?
……안 돼.
해버려. 아무도 탓하지 않아.
……그녀조차도.
안 돼.
절대로, 안 돼……!!
“……”
……온 힘을 다해 입술을 떼었다.
쪽, 하는 소리에 섞여, 어딘가에서 혀를 차는 듯한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후으……”
그녀의 입김이 살짝 새어나오며 내 입술을 적셨다.
“…………”
아직 잠잠해지지 않은 충동이, 울컥, 또 다시 솟구쳐올랐다.
오, 주여, 내게 힘을 주소서……!
이를 악물고 그녀를 떼어낸 다음, 홱 돌아앉아버렸다.
절로 고개가 푹 숙여졌다.
“……”
해버렸어. 진짜 저질러버렸어.
진짜로, 키스해버렸어……!
하, 아으, 심장이 터질 거 같아.
얼굴도 완전히 활활 타는 것처럼 뜨겁다.
그 연구소 로비에 있었을 때보다도 더……!
심장이 마구 뛰는 탓에 호흡이 가빠져서, 숨소리가 굉장히 시끄럽다.
아, 이거 들리고 있는 건 아니겠지?
얼굴 새빨개진 채로 크게 헉헉대고 있다니, 완전 변태 아냐!!
진정해야 돼. 하지만 좀처럼 진정이 되지 않는다.
몸이 따라주지 않고 있어.
이유는 어쨌든, 메린과 입술을 맞댔다고 머릿속이 시끄럽게 떠들며 계속 열을 내뿜고 있다.
게다가……
아아, 그 감촉이, 입술에 들러붙은 것처럼, 가시지 않아……!
……잠깐, 혹시 또 나만 이러고 있는 거 아냐?
그러면 진짜 세상 억울할 거 같은데.
시선만 겨우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앞을, 내가 아닌 그 너머를 멍하니 바라보며, 손가락으로 입술을 더듬고 있었다.
“…………”
……아, 나 오늘 죽을 거 같다. 심장이 폭발해서.
그 원인은 물론 키스이다.
좀더 구체적으론, 내 키스를 받은 그녀를 보다가.
아니 이야기 속 공주님은 키스를 받고 잠에서 깨어나거나 저주가 풀리더만.
근데 나는 죽는 거냐? 장난해?
아무리 내가 공주가 아니로서니 그거 너무한 거 아니냐!
심장아, 버텨라.
이대로 죽으면 쪽팔리니까 제발 버텨!
악으로 깡으로 버티라고!
막히기 직전인 숨을 고를 겸, 이미 막혀버린 말문을 뚫으려 심호흡을 한 후, 그녀에게 물었다.
“아, 그, 어, 어땠…어?”
“음…… 따뜻…했어. 네가 항상 그런 것처럼.”
그렇게 말하며, 그녀는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약간 기쁜 듯하면서도, 어딘지 슬픈 듯한 웃음.
보고 있으면 왠지 모르게 가슴이 애달파지는 웃음을 띄우며, 그녀가 가만히 중얼거렸다.
“그래서 그런가? 네가 날 끌어안았을 때처럼 편안해. 원래 그런 건지, 너라서 그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 두근거리지는 않고?”
“두근? 으응…… 그러고보니 좀 빨라진 거 같은데.”
“………그러냐.”
편안하다. 조금 두근거렸다.
설레는 기색 하나 없이 그런 소리를 하고 있는데도, 내 입은 곧바로 실룩거렸다.
마구 두근거리는 심장에 더해, 가슴 속이 뭉클해지는 거 같았다.
조금 빨라졌다고?되게 부럽네.
난 죽을 거 같구만.
“너는 어땠냐?”
평온한 목소리로 묻는 그녀의 얼굴엔 여전히 희미한 미소가 걸려 있다.
아까 살며시 손을 댔던 가느다란 목선과 쇄골이 눈에 들어와, 도로 고개를 돌려버렸다.
……옆에 앉아 있으니까 더한 거 같은데.
하지만 자리를 옮길 수 없다.
그러기에는, 이미 몸에 너무나도 많은 열이 올라와 있었다.
“……내 꼴 보면 몰라?”
“모르겠는데.”
“모르면 말아.”
내 지금 상태를, 내 입으로 털어놓는다?
스스로 목을 조르는 거나 다름없잖아.
난 그런 변태가 아니야.
안 그래도 진정이 안 되어서 미칠 거 같은데……
“히이익?!”
갑자기 내 목에 그녀의 손이 닿았다!
“우와, 너 엄청 뜨겁다! 맥박도 무지 빠르고! 얼굴 빨개보이는 게 아니라 진짜 빨간 거였네?”
“가가가, 갑자기 어딜 만지는 거야?!”
“목 만진 걸로 뭘 그래? 너도 만져 놓고.”
“난 너한테 허락 받았잖아?!”
아으으…… 진짜 울고 싶다.
이대로 있으면 내 심장이 결국 못 버티고 터져버리거나, 아니면 못 볼 꼴을 다 보였다는 수치심에 정신이 나가버릴 거야!
얼른, 얼른 얘를 내보내야 돼!!
“이, 이제 다 됐잖아! 어, 얼른 가서 잠이나 자!”
“갑자기 왜 화 내냐?”
“화난 거 아니야, 짜샤! 됐으니까 얼른 가라고!”
“화났구만……. 알았어, 갈게.”
옷이 스치는 소리와 함께, 고개를 숙인 내 앞으로 그녀의 옷자락이 하늘거리며 지나가는 게 보였다.
배웅하고 싶은데, 그녀를 붙잡고 싶다는 충동을 억누르느라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그럼 적어도 잘 자라는 인사라도 해야 할 텐데, 도저히 입을 뗄 수가 없었다.
……입을 열면, 분명 다른 말이 튀어나올 테니까.
하아…… 난 진짜 한심한 놈이야.
감정 하나 제대로 제어 못해서, 사람이 간다는데 그냥 이렇게 멍청히 앉아서 보내고 자빠졌네.
재차 한숨을 쉬는데, 멀어졌던 그녀의 발소리가 우뚝 멈추더니 갑자기 다시 가까워졌다.
아까 봤던 그녀의 실내복 옷자락이 다시 보이며, 내 앞에 우뚝 멈춰 섰다.
아직 뭐가 남았나……?
“야, 카엘.”
“어……?”
어딘지 웃음기를 머금은 목소리가 머리 위에서 울렸다.
그 목소리를 향해 천천히 들리던 내 고개가, 불현듯 강한 힘에 붙잡히며 위로 홱 젖혀졌다.
이윽고,
“으읍……?!”
입이 막혀버렸다.
무척이나 보드랍고, 감미로운 무언가에.
저거, 속눈썹, 메린이잖아.
그럼, 이건……!
내 입을 막은 그것이 무엇인지 깨닫기 전에, 떨어져버렸다.
“하아……”
아주 약한 열기를 띤 입김이, 입 안으로 흘러들어오고,
“후후.”
충격으로 굳어버린 내 시야를, 고혹적인 웃음을 지은 그녀의 얼굴이 가득 채우면서, 간드러진 속삭임이 들려왔다.
“……돌려준 거야.”
“……”
“히히, 진짜 갈게. 잘 자.”
아무 대꾸도 하지 못했다.
그녀의 얼굴이 사라지고 발소리가 멀어지는 동안에도, 나는 고개를 내릴 생각도 못한 채, 완전히 석상처럼 굳어 있었다.
철컥, 문이 닫히면서 마침내 마비가 풀렸다.
그제야 멈추었던 숨을 길게 토해낼 수 있었다.
그리고 그대로 침대 위에 쓰러져버렸다.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메린이 방을 나가려다 다시 돌아왔고, 나를 불렀고, 그리고…….
얼굴이 갑자기 홱 가까이 오면서, 입이 꾹 막혔지.
뭘로?
그녀의 입술로.
………
……………
“?!!!?!??!?!”
꺄아아악!!
덮쳐졌어! 덮쳐졌다고!!
내가 메린한테……! 메, 메린이, 나한테……!
우와아아아악?!
아니 왜 이런 것까지 돌려주는데!!
하으, 이제 이걸, 아, 내일부터 진짜, 아아아아, 어떻게 얼굴을……!!
아으아아하악!!
‘이건 진짜 맛이 가겠는데.’
마침 베개를 쥐어짜듯이 끌어안고 있는 그 순간, 마음속에서 그렇게 중얼거린 것 같았다.
그 의미를 깨닫기도 전에, 별안간 몸에 힘이 쭉 빠지며 눈꺼풀이 내려와버렸다.
‘수고했어. 푹 쉬어.’
……의식이 멀어지기 직전, 그런 속삭임이 들린 것 같았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