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용사는 소꿉친구 검성이 무섭다-162화 (162/475)

〈 162화 〉 158화 : 그저 철저히 준비하고 싶었을 뿐 (3)

* * *

떨리는 손을 다잡고, 땋아 내린 머리의 앞부분을 약간 접으며 손에 쥐었다.

낮은 봉우리처럼 솟아오른 그 머리의 주변을, 나머지 머리로 빙빙 감았다.

그 다음, 쥐고 있던 봉우리의 틈으로 끝머리를 집어넣어 묶은 후, 머리핀을 꽂아 고정시켰다.

시험 삼아 이리저리 건드려봤는데, 홱 풀릴 거 같진 않았다.

“……음, 된 거 같은데.”

일단은.

“그래? 으음…… 하긴, 이러면 잡히진 않겠네.”

“그치?”

“근데 너무 설렁하게 묶은 거 아니냐? 움직이면 그냥 풀릴 거 같은데.”

“……그건 네가 알아서 개선해.”

평소에 막 움직여도 머리 안 풀리도록 땋고 다니니까, 알아서 더 튼튼하게 묶을 수 있겠지.

……나는 이미한계다.

그녀의 목덜미가 완전히 드러나 있는 탓에, 쳐다보는 것도 힘들어 죽겠다.

빨리, 됐다고 해줘……!

그녀는 내가 속으로 발을 동동 구르는 것도 모른 채, 느긋하게 거울을 비추어 살펴보고, 묶인 부분을 손으로 매만져보기도 했다.

그 후, 마침내 고개를 끄덕끄덕거렸다.

“대충 알겠어.”

“……그러냐, 그럼 난 간다.”

어떻게 무사히 끝났네…….

깊이 안도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문으로 향했다.

그러나 몇 걸음 안 걸어서 그녀에게 또 팔을 붙잡히고 말았다!

아아, 울고 싶다…….

“아, 왜. 이제 됐잖아. 대충 알았다며.”

그러니 제발 보내줘……!

그러나 메린은 뚱한 얼굴로 대꾸했다.

“내가 잘하는지 봐줘야 할 거 아냐.”

“어련히 잘하겠지! 야, 나 진짜……. 하…… 야, 너 일부러 그러는 거지? 나 지금 약올리냐? 어?! 지금 내 인내심 시험하냐고!”

“갑자기 또 왜 지랄이냐? 머리 묶는 거 봐달라는 게 뭐 어떻다고?”

아으으아으아아!!

속으로 절규하며 바닥에 엎드렸다.

고개를 들 수가 없다. 이 상황에서 그랬다가는 진짜 미칠 거야.

아래에서 올려다보는 거잖아.

실내복을 붕 띄우는 신체부위가 도드라지게 보일 거라고!

“……너 진짜 몰라? 얇은 옷차림의 여자가, 한밤에 남자랑 둘이서 방에 있으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고개를 바닥에 박다시피 한 채로 중얼거리자, 곧바로 그녀의 대답이 돌아왔다.

“침대에서 한 판 뜨겠지.”

“너 이 자식, 다 알면서 이러는 거야?!”

왠지 모를 배신감에 고개를 쳐들고 빽 소리치자, 어느새 내 앞에 쪼그려 앉아 있는 그녀가 어깨를 으쓱였다.

“넌 나랑 안 잔다며.”

“못 참고 덮치면 어쩔 거야?!”

“뭐……”

“할 수 없다고 할 거면 그냥 입 다물어!”

그리고 그녀는 정말로 입을 다물었다.

아, 머리야. 눈앞이 핑 돌며 고개가 푹 꺾였다.

그런 내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는 손길과 함께, 그녀의 목소리가 머리 위에서 떨어졌다.

“……있잖아, 카엘,”

무거운 말투로, 그녀가 말을 이었다.

“……내가 너 괴롭히고 있는 거지?”

“…………아니.”

힘겹게, 목소리를 쥐어짜서 대답했다.

“맞잖아. 너 지금 힘들잖아. 그 욕구 때문인 거지?”

“……”

그렇지. 눈앞에서 그렇게 발광하며 티를 다 냈는데, 영리한 네가 그걸 모를 리가 없지.

맞아, 나 힘들어.

네가 자꾸 건드는 거 참느라 죽을 거 같아.

……그러나 그 말을 할 수는 없다.

그랬다가는, 그녀가 나에게서 멀어져버린다.

“그래서 어제도 상태 이상했던 거지? 내가 너 괴롭히고 있는 거 맞잖아.”

“……아니야.”

“아니긴 개뿔.”

“진짜 아니라니까.”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내 머리카락을 만지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어딘지 침울한 눈빛으로 내 머리를 내려다보며, 그녀가 재차 입을 열었다.

“내가 어째야 되냐? 그냥 필요한 말만 하면 돼? 네가 고향에게 하던 것처럼.”

“……!”

나랑, 거리를 둔다고?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늘 하던 것처럼?

……안 돼.

안 돼, 메린.싫어.

싫어, 싫다고!

너까지……!

너한테까지 그러기 싫어!!

“아냐, 그러지 마. 그냥 너 하던 대로 해. 나 신경 쓰지 말고.”

내가 더 잘할게.

네가 조금도 눈치채지 못하도록, 완벽하게 잘 숨길게.

그러니까 그러지 마. 제발.

“계속 너 괴롭히라고? 싫어.”

“메린,”

제발, 멀어지지 마……!

“너 나 안 괴롭히고 있어. 정말이야. 단 한 번도, 네가 날 괴롭힌다고 생각한 적 없어.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 거야.

그러니까 그런 소리하지 마. 평소처럼 나랑 지내줘. 설사 내가 그런 꼴을 보여도 신경 쓰지 말고. 응? 부탁이야.”

이제 와서 거리를 둔다고 잠잠해질 거 같아?

아냐, 그건 절대 아냐.

오히려 더 심해질 거야!

거리가 멀어진 게 답답해서,

손이 닿지 않는 게 애달파서,

그녀가 그런 생각을 품도록 만든 나 자신이 한심하고 비참해서,

정말로 미쳐버릴 거다. 미쳐버릴 거라고.

될 대로 되라며 다 놓아버릴 거야.

네 마음도, 내 소망도 전부, 내 손으로 부술지도 몰라!

……나는 이미,헤어나오지 못할 정도로 그녀에게 푹 빠져 있다.

그 사실을 절절히 통감했다.

“……너, 울 거 같아.”

“안, 울어. 안 울 거야.”

“카엘,”

나지막이 나를 부르며, 그녀가 내 머리를 감싸안았다.

“울지 마.”

“안 운다니까. 안 울어. 안 울게.”

중얼거리며, 그녀의 등에 팔을 두르고 힘껏 안았다.

아니, 안은 게 아니라 매달린 건지도 모른다.

“진짜로 나, 평소대로 해도 되냐? 진짜 너 괴롭히는 거 아니야?”

“어. 아니야. 진짜 아니야. 신경 쓰게 해서 미안해. 미안해, 메린.”

“……”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불안감이 치솟아오른다.

설마, 내 말을 못 믿는 건가?

진심이었는데. 진짜로 그녀가 날 괴롭히는 게 아닌데.

미치겠네, 어떡하지?

내일부터 멀어지기라도 하면……!

“정말이야. 믿어줘. 메린, 제발,”

“카엘,”

다급히 말을 꺼내던 나를 제지하듯이, 그녀가 나를 껴안은 팔에 더 힘을 주었다.

“평소대로 할게. 나 하던 대로, 지금처럼 너 껴안고 싶을 때 껴안고, 짜증나게 기어오르면 한 방 먹여주고 그럴게.

그러니까 진정해. 괜찮아. 울지 마.”

“……안 운다니까.”

그녀가 무언가 물기를 느낀다면, 그건 눈물이 아니라 땀이다.

이런저런 이유로 몸이 더워졌으니까.

지금도 여전히 심장은 빠르게 뛰고 있다.

그러나 마음은 편안하다.

나를 감싼 그녀의 따스한 온기가, 평정을 잃고 흐트러진 마음을 달래고, 가다듬어주고 있었다.

“……”

그러고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모르겠다.

어느새 마구 일렁이던 마음이 잔잔해지고, 엉망진창으로 뒤얽혀 있던 머릿속도 뒤따라 조용해져 있었다.

긴장을 풀듯, 나는 긴 숨을 내쉬었다.

‘겨우 진정됐네.’

……알아. 또 혼자 막 나갔지.

차분해지자마자 들리는 속삭임에, 그렇게 중얼거렸다.

또 감정을 주체 못하고 주절주절 늘어놓고 말았다.

냉정하고 침착해야 하는데.

또 제대로 제어를 못하고 휩쓸리고 말았다.

“메린.”

그녀를 안은 팔의 힘을 빼고, 토닥이듯이 가볍게 두드렸다.

“미안. 이제 괜찮아.”

“……”

“진짜야. 답답하니까 좀 놓고.”

팔의 힘을 푼 그녀를 살짝 밀어내며, 그녀와 마주보았다.

살짝 찡그린 얼굴로 나를 빤히 보던 그녀는, 이내 덤덤한 눈으로 나를 보며 다시 내 머리를 만지작거렸다.

“……혹시 모르니까 다시 묻는다. 진짜로 나 평소처럼 해도 되냐? 진짜로 나, 너 괴롭히는 거 아니야?”

“어. 정말로 아니야. 평소대로 해.”

그 손을 살며시 잡으며, 똑바로 대답해주었다.

감정에 휩싸이지 않은, 멀쩡한 목소리와 눈으로.

이윽고 고개를 끄덕이는 그녀의 얼굴엔, 희미하게 미소가 걸려 있었다.

“그럼 머리 봐주는 거지?”

“……뭐? 나 참.”

진짜 어이가 없네.

평소대로 하랬다고 바로 평소처럼 들이대고 있다.

좀 우물쭈물거리기라도 해야 되는 거 아니야?

헛웃음을 켜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녀가 여전히 웃음기를 머금은 얼굴로 눈을 감는 모습에, 또 웃음이 새어나왔다.

나 참, 턱 쓰다듬으면 가르릉거리는 거 아닌가 몰라.

고개를 저으며, 나는 다른 손으로 그녀의 머리에 꽂았던 핀을 뽑았다.

“오냐, 봐준다, 봐줘. 하, 참, 진짜 어이가 없네. 쓸데없이 귀여워선.”

“내가 뭐.”

“아, 됐으니까 얼른 다시 묶기나 해.”

그렇게 말하며 머리핀을 내밀자, 그녀가 키득거리며 내 손에서 머리핀을 받아 쥐었다.

땋았다기보다는 밧줄처럼 꼰 머리를 풀고, 대강 손으로 빗어내린 다음, 그녀는 리본을 덧댄 채 빠르게 다시 머리를 땋아갔다.

이윽고 보게 된 그녀의 올림머리는 정말이지 잘 어울렸다.

마무리 짓는 방식을 조금 바꾸었는지, 내가 했던 것보다 한결 말끔할 뿐더러 훨씬 안정감 있어 보였다.

“잘했네. 예쁘다.”

자연스럽게 그 말이 튀어나왔다.

“그래? 그럼 계속 이렇게 다닐까?”

“근데 너 땋아내린 머리도 잘 어울리는데.”

앞으로 그걸 못 보는 건 좀 아쉽다.

이따금 그녀가 손가락으로 머리를 만지작거리는 모습이 이상하게 눈이 갔는데.

또 맨날 올리고 다니면, 땅에 닿는다는 핑계로 만질 수도 없잖아.

메린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둘 중에 뭐가 더 나은데?”

“몰라. 둘 다 예뻐.”

“뭐야, 그게.”

어처구니없다는 듯한 말투이지만, 그녀의 입은 웃고 있었다.

예쁘다는 내 말이, 무척 기쁘다는 듯이.

……정말로 기뻐하는 걸까?

그랬으면 좋겠는데.

“……그럼 나 진짜 간다.”

“응.”

자리에서 일어나, 문 밖으로 향하는 나를 그녀가 불러세웠다.

돌아보자, 그녀가 생긋 웃는 얼굴로 성큼 다가오더니,

두 팔을 활짝 벌리며, 또 다시 나를 끌어안았다.

“고마워.”

“……”

“머리핀이랑……, 여러가지로 고마워.”

이상한 소리를 하네.

고마운 건 나인데.

가슴팍을 누르는 굉장히 부드러운 무언가에 또 다시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또 열기 때문에 정신을 놓을 순 없다.

그런 추태는 하루에 한 번이면 충분하다.

침착하고 차분하게, 나 역시 다시 그녀를 끌어안았다.

품속에 집어넣을 양 깊이 끌어안고 싶은 격정을 꾹 눌러버리고, 부드럽게 그녀의 등을 감쌌다.

……그녀에겐 내 심장 소리가 다 들리고 있겠지.

그런데도 그녀는 정말평소대로,전혀 신경 쓰지 않고 저 하고 싶은 대로 나를 껴안고 있다.

진짜 어이없네.

“……야, 너 솔직히 말해. 너 사실 나 시험하고 있는 거지?”

“무슨 시험? 성욕에 대한 네 인내심? 그거 시험할 거면 벌써 옷 벗었지.”

“미쳤나, 다 큰 아가씨가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뭐라는 거야?!”

진짜 할 거 같아서 더 무섭다!

우와, 그 날엔 진짜로 누구 말마따나 어디 머리 박고 기절할 거 같아!

질겁하는 내가 우스운지, 그녀가 키득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를 따라 웃으며, 그 귓가에 속삭였다.

“……고마워, 메린.”

이틀 연속으로 정서불안처럼 난리를 피우는 것도 모자라, 오늘은 정신줄까지 놔버렸는데도 질색하긴커녕 달래줘서.

내 부탁대로, 평소처럼거리낌없이 대해줘서 고마워.

“우는 거 달래는 건 원래 하던 건데, 새삼스럽게 고맙긴.”

“안 울었는데.”

……이런 나를 가까이해줘서 고마워.

정말 좋아해.

감사의 마음을 담아, 그녀의 머리에 입을 맞추었다.

……내일은 또 여러모로 힘들겠지.

어쩌면 목숨이 위험할지도 몰라.

나는 그녀가 지켜주겠지.

그러나 그 반대는, 정말로 분하지만 안 될 것이다.

그러니 적어도, 그녀의 머리 빛깔과 비슷한 것에 내 소망을 담아주고 싶다.

……그녀의 머리에 꽂혀 있을 머리핀이, 그녀를 지켜주는 부적이 되기를.

늘 그랬듯이, 이번에도 무사하기를.

그 바램을 담아 한 번 더 머리에 입을 맞춘 후, 그녀와 마주보며 웃었다.

“잘 자!”

“어. 잘 자.”

활짝 웃으며 배웅하는 그녀를 향해, 나 역시 웃음으로 답해주었다.

그리고 방에 돌아온 나는,

“하아…… 아으…….”

……확 끓어오른 열이 식을 때까지, 한동안 침대에 뻗어 있어야 했다.

푸슈욱, 어디선가 김이 빠지는 소리가 들린 듯했다.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