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3화 〉 159화 : 왕에게 안내하라 (1)
* * *
다음날 아침, 우리는 동이 트는 시간에 맞추어 ‘바위궁전’에서 출발해, 엘프들의 집인 거대한 숲을 향해걸어갔다.
말을 타더라도 엘프들에게 우위를 가지지 못할 테니, 말들은 그냥 두고 가기로 한 것이다.
어차피 여기 다시 돌아올 거니, 잠깐 맡겨도 되겠지.
그렇게 숲을 향해 걷고 있는 우리의 차림새는……
글쎄, 평범한 나그네처럼 보이진 않을 거 같다.
양 손목에는 ‘손목 갈고리’를 차고, 어깨에는 짙은 녹색 망토를 걸친 다음 후드까지 깊이 눌러쓰고 있다.
망토가 크니까 손목은 안 보이겠지만, 후드를 쓴 시점에서 되게 수상해보이지 않나?
하지만 ‘되도록 눈에 띄지 않는 게 좋을 것’이라는 드워프 장군의 조언을 따르려면, 반드시 후드까지 써야 했다.
그래야 머리부터 발목까지 망토의 색깔인 녹색으로 뒤덮여서, 초원을 대놓고 다녀도 잘 분간이 안 될 테니까.
그건 그렇고…….
“……”
내 뒤쪽이 굉장히 소란스러운데.
아니, 실제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데, 시선이 무지하게 시끄러워.
특히 빨간 옷을 입은 어느 꼬맹이님이 계속 히죽대기까지 하고 있는 것 같다.
“야, 이 자식들아, 뭐가 그렇게 웃긴데?!”
결국 못 참고, 뒤돌아서 소리쳐버렸다.
“아뇨~ 메린 님, 머리 모양 바꾸셨길래요~”
로나가 히죽히죽 웃으며 짐짓 말을 늘어뜨렸다.
저 자식, 또 쓸데없는 걸로 놀리려고……!
“그게 뭐! 머리 길면 여러모로 위험하니까 올리라고 한 건데!”
“그럼요, 물론이죠! 평지에서 싸워도 머리가 길면 불리한데, 빽빽한 숲에선 더하죠, 그렇고 말고요~”
근데 있죠, 로나는 한결 더 큰 웃음을 띄우며 말을 이었다.
“카엘 님 때문에 올린 거잖아요? 왠지 카엘 님이 머리를 올려준 것 같단 말이죠~
그러고보니 결혼한 여자들은 죄다 머리 올리죠? 밤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 아아아, 아하여!”
“이 자식이 아침부터 쓸데없는 소리하고 있어!!”
뭔 소리를 하나 했더니, 이 사제님이 속에 음란마귀가 들어가지고, 진짜!!
그간의 원한을 담아 신나게 볼을 꼬집어주었다.
“그러게, 사제님, 가만히 있으라니까…….”
고통을 호소하는 로나의 외침에 섞여, 위슨이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잠깐의 소란이 있은 후, 우리는 쉬지 않고 계속 숲을 향해 걸었고, 해가 완전히 뜬 오전이 되어서야 숲 언저리에 도착할 수 있었다.
언저리라 해도, 실제로는 숲 입구까지 반 시간 정도 더 걸어야 한다.
그러나 드워프들에 의하면, 이 정도 거리는 되어야 엘프의 눈이 닿지 않는다고 하니, 여기가 ‘언저리’인 것이다.
저 멀리, 광활하게 펼쳐져 있는 녹색 벽을 바라보며, 나는 위슨에게 말했다.
“꺼내자.”
“어.”
뭘 말하는 건지 이미 다 알고 있다는 듯이, 위슨은 재깍 배낭을 뒤적였다.
곧,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는 엘프, 블루벨의 머리가 배낭 바깥으로 쏙 튀어나왔다.
그러자 위슨이 배낭을 거꾸고 들고 탈탈 털듯이 흔들며 뒤로 빠졌다!
자연히 블루벨의 머리가 땅에 떨어져, 굉장히 큰 소리를 내며 땅에 곤두박질쳤다.
“꺄윽?!”
그대로 배낭에서 발끝까지 완전히 빠져나온 후, 블루벨은 밧줄에 꽁꽁 묶인 채 신음하며 바들바들 떨었다.
“……”
이런 놈이 나보고 제정신이 좀 나가 있다고 지적질을 해댄단 말이지.
정말 기가 찰 뿐이다.
내 시선을 마주하며, 녀석은 태연하게 어깨를 으쓱였다.
“뭐. 무거워서 위슨 혼자선 못 꺼내니까 그런 건데 불만 있냐?”
“잠깐잠깐 꺼냈을 때처럼 내가 도와주려고 했는데 말이지.”
다짜고짜 녀석이 배낭을 뒤집어버려서 손쓸 새가 없었다.
그보다 여태까지는 조심조심 다뤘으면서, 갑자기 왜 막 대하는 건지, 원…….
“왜긴, 실험 끝났잖아. 폐기물을 뭐하러 잘 대해주냐?”
“……”
평소 같으면 사람을 그딴 식으로 취급하지 말라고 박박 잔소리를 긁었겠지만, 상대는 엘프였다.
그것도 지난번에, 그의 눈앞에서 마법을 폄하했던 장본인.
블루벨을 보는 시선이 여전히 이글거리는 걸 보니, 단단히 미운 털이 박힌 모양이었다.
이래서 다른 사람에게 미움 살 짓은 가급적 지양해야 하는 거다.
언제든 입장이 역전할 수도 있으니까.
한숨을 쉬며, 바닥을 구르는 블루벨을 똑바로 세워주었다.
“안녕, 블루벨. 고향 근처에 온 기분이 어때?”
“콜록, 콜록……. 뭐? 고향? 장난하나, 숲이면 다 고향인 줄……”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대꾸하던 그녀는, 내가 숲 쪽으로 몸을 돌려주자 곧바로 말을 잃었다.
“……말도 안 돼. 하루도 안 지났을…텐데……?”
여전히 시간감각이 없군.
마지막에 대략 5분 정도 바람 쐰 후로…… 딱 일주일 지났네.
“배 안 고프지?”
“어? 어, 배는 안 고픈데…… 아니,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이게 대체 어떻게……!”
“2주야.”
덤덤하게 대꾸하자, 그녀가 뭔 뜬금없는 소리를 하냐는 식으로 나를 쏘아보았다.
뱀처럼 동공이 세로로 찢어져 있어서 좀 소름이 끼친다.
“댁이 처음 배낭 속에 들어간 지 2주 지났다고.”
“……”
“덕분에 좋은 결과 얻었어. 여차하면 활어를 보관할 수도 있겠더라.”
통에 물을 담아서 넣어야 되니 번거로워서 그렇지.
내 말에, 블루벨은 기가 막히다는 듯이 숨을 내뱉으면서 말을 꺼냈다.
“그딴 소리를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하는구나? 쯧, 이래서 인간 놈들은…….”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기습했던 놈이 나불댈 소리는 아닌 거 같은데?”
이 엘프는 내가 용사인 게 분명해지니, 틈을 노려서 나를 죽이려 했다.
그걸 메린이 막아서자, 그녀를 벼랑 너머로 날려버렸고.
그런데도 이렇게 밧줄로 꽁꽁 묶기만 하고, 사지 하나 건드린 것 없다.
귀도 안 깎아줬고.
굉장히 관대한 처사 아니야?
“개소리 떨지 마! 물건 취급하고 있잖아! 우린 적어도 사람 취급한다고!”
곧바로 빽 소리지르며 반박하는 블루벨에게, 나는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머리 박아서 삐쳤구나. 아까 그거 아플 거 같긴 하더라. 근데 그거 내가 시킨 게 아니라 쟤 혼자 저지른 거거든? 나한테 지랄하지 마라.”
“날 그 배낭에 집어넣은 건 너잖아!”
“안전하게 운반해준 거야. 고맙게 여겨.”
배낭에 안 들어갔다면 여러모로 힘들었을 거다.
블루벨이? 아니, 내가.
이 녀석을 심기 불편한 우리 일행과 같이 데리고 다녔다간, 2주 내내 투닥거리면서 시끄러웠겠지.
어쩌면 중간에 싸우기도 할 거다.
어쩌면 위슨의 물약 실험대가 되거나, 로나나 메린이 우득! 하고 목을 꺾어버렸을지도 모르고.
지금도 메린이 뒤에서 엄청나게 무서운 눈으로 노려보고 있다.
옆에 있는 나까지 괜히 등골이 오싹해질 정도이다. 어으, 무서워.
그 시선을 일부러 무시하는 건지, 블루벨은 아랑곳하지 않고 콧방귀를 뀌었다.
“하, 내가 말을 말아야지. 그래서, 날 방패로 앞세우고 숲에 들어가시겠다?”
“잘 아네. 댁을 내세워서, 댁네 왕을 만날 거야. 여러모로 따질 게 많거든.”
숲에 들어갈 때 블루벨을 내세우는 건 파랑새의 조언이지만, 왕을 만나는 건 내 결정이다.
그래, 나는 엘프들의 왕을 만날 거다.
어디까지나 인간 사절로서.
그들에게 내가 용사라는 걸 밝힐 생각은 추호도 없다.
내가 뭐 싸우는 걸 즐기는 성격도 아니고, 욕 먹거나 살기를 받는 걸 즐기는 변태도 아닌데 그걸 왜 밝혀?
“그래. 근데 뭐, 숨겨도 결국 들키겠지.”
“……”
건조한 눈으로 메린이 딴죽을 걸자, 곧바로 다른 두 녀석도 말을 보태기 시작했다.
“그러고보니, 가는 곳마다 꼭 한둘은 알아봤지?”
“그때마다 정말 신기하다니까요. 특히 지난번에 그 파티에서 봤던 볼케 백작! 무려 얼굴을 알아봤잖아요! 피터 왕자님처럼 눈부시게 잘생긴 것도 아닌데!”
“그래도 못생긴 건 아니지. 눈이나 코가 뭉개져 있진 않으니까.”
그냥 사람 같이 생겼다, 이거구나.
제길, 너무나도 적합한 평가라서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여버렸다.
그녀의 말에, 위슨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래, 등쳐먹기 좋게 생기긴 했어.”
“성격이 그대로 얼굴에 나온 거죠! 카엘 님은 다정하고 순하시니까요!”
“정신이 맛이 갔다는 것도 나와야 다들 조심할 텐데.”
“어쩔 수 없어요. 그건 성격이 아니니까요.”
“그래, 그건 병이잖아. 옛날부터 뜬금없이 발작하고 그랬거든. 지랄병이지.”
와, 진짜 어이가 없네.
어떻게 당사자 앞에서 저렇게 뻔뻔하게 뒷담하는 척하면서 욕할 수 있는 거지?
차라리 나를 직접 까, 이 자식들아!
그보다 왜 다들 내가 제정신이 아니라고 하는 거야?메린 쟤까지!
그래, 뭐 내가 감정을 잘 주체 못하는 게 있긴 한데, 그게 미친 건 아니잖아?!
……하지만 여기서 발끈하며 끼어들었다간 더 성가셔진다.
그냥 못 들은 척 넘어가야지.
후우, 난 정말 관대해서 탈이야.
“아무튼 용사인 건 숨길 거야. 설사 안에서 들키더라도, 바깥에서 공격받는 것보단 낫겠지.”
“만약 끝까지 모르면? 그대로 나오는 거냐?”
“엘프들이 순순히 말을 들어준다면.”
순순히 애들을 내놓고, 이제 더는 그런 거래를 하지 않겠다고 약조해준다면 그대로 떠날 것이다.
안 들어준다면…… 글쎄, 솔직히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
그 자리에서 냅다 왕을 죽일 수도 없을 거고, 만약 죽이더라도 일이 해결되지도 않을 텐데…….
뭐, 일단 가보면 알겠지.
“꿈도 크셔라.”
그리고 콧방귀를 뀌며, 블루벨이 딴죽을 걸었다.
“왕을 만나기는커녕, 숲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벌집이 될걸? 내가 가만히 있을 거 같아? 출발하자마자 곧장 소리칠 거야!”
“용사가 왔다고?”
“그래!”
그래, 그러겠지.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확인차 묻는 건데, 조용히 따라올 생각은 없어?”
“당연히 없지! 난 네 적이야! 네가 죽길 바라는 적! 들키기 싫으면 날 죽여야 할걸?!”
“……”
나 참, 왜 굳이 저렇게 적이라는 걸 강조하면서 죽이라고 하는 걸까?
나이가 무려 151살이나 차이 나는데다 종족도 달라서 그런지, 사고방식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저런 소리를 하면서 눈이 떨리는 걸 보면 진짜로 죽고 싶은 것도 아닌 것 같고.
일족에 대한 충성심인가?
“하…… 죽고 싶으면 댁네 왕한테나 죽여달라고 해. 난 댁이 울고불고 빌어도 안 죽일 테니까.”
그렇게 일축하며, 나는 뒤쪽을 향해 손짓했다.
내가 손을 까닥이는 걸 본 블루벨이 곧바로 눈살을 찌푸렸다.
“뭐야, 뭘 할,”
속셈이야?
……라고 물으려던 거겠지.뒷목을 맞아서 쓰러진 바람에 말이 끊겼지만.
힘없이 축 늘어진 엘프를 메린이 들쳐업었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중얼거리듯이 물었다.
“안 죽였지?”
“죽이지 말라며.”
어제 그렇게 일러두긴 했지. 근데……
“너 방금 원한을 가득 실어서 때린 거 같아서.”
“그래? 뭐, 너랑 날 죽이려 했었으니까, 나도 모르게 힘이 더 들어갔을 수도 있지.”
남 얘기하듯이 대수롭지 않게 말하며, 그녀는 가만히 엘프를 향해 귀를 기울였다.
“숨 쉬네.”
일단 살아는 있군.
근데 얼핏 듣기로는, 목뼈가 부러지면 의식을 되찾아도 평생 몸을 못 움직이게 될 수도 있다고 한다.
그러니 로나에게 한 번 뼈를 봐달라고 하는 게 좋겠지만……
“그래? 그럼 됐지, 뭐. 가자.”
내 알 바 아니다.숨만 쉬고 있으면 됐지.
적이라고 계속 강조하면서, 정 떨어지라고 계속 틱틱대고 있는데, 그 뜻을 존중해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도 블루벨은 나에게 고마워해야 한다.
기절시키는 담당이 로나가 아니라 메린이었으니까.
부수고 으깨는 걸 좋아하는 저 사제님에게 부탁했다면, 팔다리 양쪽 다 으스러지는 고통을 느끼며 기절했겠지.
음, 그런 건 역시 못 보겠어.
“내가 진짜 정에 약한가봐. 아무리 그래도 심한 짓은 못하겠다.”
다시 후드를 눌러쓰고, 앞서 걷기 시작한 메린을 따라가며 중얼거렸다.
그러자 옆에 있던 위슨이 어깨를 으쓱이며 대꾸했다.
“위슨 생각에는, 진짜 정에 약한 사람은 기절 안 시킬 거 같아.”
“그럼? 뭐, 입 안에 천조각이라도 쑤셔 넣어? 그것도 불쌍하지 않냐?”
지난번에 직접 봤으니 할 수 있는 말인데, 영 좋지 않다.
당사자는 계속 입을 벌리고 있어야 하니 침이 줄줄 새어 나오지, 그거 막겠다고 목구멍까지 닿도록 천을 쑤셔 박으면……,
으으…… 차라리 기절시키는 게 백 배 낫지.
“입 밖을 천으로 묶으면 되지. 아니면 약을 먹이든가. 왜 그 생각은 못하냐, 이 미친놈아.”
“아.”
그 방법이 있었구나.
하하, 왜 그 생각을 못했지?
나도 참…….
머리를 긁적이자, 위슨이 한숨을 쉬며 내 어깨를 턱 짚었다.
“있잖아, 네가 미친놈인 건 아는데, 조금이라도 좋으니 일반 상식 좀 챙겨줘. 네가 그래도 이 일행의 대장이잖아. 응? 제발 좀 부탁이다.”
일반 상식?
아니 진짜 어이가 없네.
나는 녀석에게 코웃음 치며 대꾸했다.
“재료만 보면 눈 돌아가는 놈이 일반 상식을 들먹이냐? 하, 참, 기가 막혀서.”
“뭐. 귀한 재료가 보이면 챙기는 게 상식인데?”
“주인 있는 걸 허락없이 만지지 않고, 길 가다 갑자기 벼랑 아래 동굴로 뛰어내리지 않는 게 더 우선순위가 높은 상식 아니냐?”
다행히 ‘바위궁전’에서는, 용사를 위한 지원책으로서 위슨에게 어느 정도 물자 제공을 했기 때문에 별 문제없었다.
그러나 나는 아직도 또렷이 기억한다.
말리스의 시계탑에서 이 녀석이 행패를 부리던 것을……!
그 돈독 오른 도시에서 벌금을 물 뻔했던 거에 비하면, 이 녀석이 요전에 동굴 봤다며 벼랑에서 뛰어내린 건 애들 장난이다.
후…… 그땐 진짜 식겁했어…….
내 말을 들은 위슨이 어깨를 으쓱였다.
“너도 뛰어내렸잖아. 낭떠러지.”
“좋아하는 사람을 구하는 건 상식인데?”
“나도 좋아하는 재료를 구했을 뿐인데?”
“이 자식이 어디서 되도 않는 말장난을……!”
“뭐. 뭐. 위슨이 뭐 틀린 말했어?”
딱밤을 놓으려는 내 손을 녀석이 붙잡았고, 그러다 결국 위슨과 양손을 맞잡고 힘겨루기를 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뿐이었다.
쿵! 하는 묵직한 울림과 함께, 로나가 헤실헤실 웃으며 말을 걸었으니까.
“아하하, 그렇게 힘이 남아도시면, 저랑 잠깐 같이 노실래요?”
“아니요. 괜찮습니다.”
……너 나 할 것 없이 얌전히 다시 길을 걸었다.
잠시 후, 우리는 숲 입구에 도착했고,
“……인간, 용건이 뭐냐.”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다섯 명의 엘프들이 나와서 반겨주었다.
하나같이 활을 겨누어서.
“……”
보이는 것만 다섯인가?
눈앞에 있는 이 나무에서도, 그 양옆으로 펼쳐진 나무들 하나하나에서도 전부 시선이 느껴지고 있다.
정확히 몇 명이나 보고 있는 건지는 몰라도, 정말로 공격을 받는다면 벌집이 되긴 하겠지.
나는 후드를 깊이 눌러쓴 채, 우리에게 활을 겨누고 있는 엘프들을 바라보았다.
하나같이 가느다란 몸에, 머리가 치렁치렁하고 앳되어 보이는 얼굴을 하고 있다.
키는 작지 않지만, 우리에게 말을 건 놈의 목소리가 가느다란 것도 그렇고, 아무리 봐도 다 큰 어른이 아닌 거 같아.
위슨 동년배 같은데?
그러고보니 여기 뻗어 있는 엘프, 블루벨도 키만 좀 큰 어린애처럼 생겼단 말이지…….
“……”
……설마 엘프들은 죄다 이런 몸매인 건가?
저 녀석이 ‘완벽한 몸매’ 어쩌고 하면서 되도 않는 개소리를 지껄인 게, 엘프 기준으로는 그게 정말이었던 것인가?!
블루벨이 평평한 몸매인 게, 그 웃긴 신념 때문에 풀떼기만 처먹어서 그런 게 아니라, 종족 특성이라고?
이, 이 무슨 비극이……!
“크흡…….”
“……실성한 놈이로군. 얌전히 물러가라. 그럼 살려주지.”
“……”
초면인 사람에게조차 미친놈 취급을 받고 말았다!
제길, 난 그저 남자로서 좀 한탄했을 뿐인데.
후, 그래, 쓸데없는 생각 말고 할 일이나 하자.
나는 헛기침을 한 후, 되도록 딱딱한 말투로 대답했다.
“당신들의 왕을 만나러 왔습니다.”
“……뭐? 폐하를? 네놈이 폐하의 손님이라면 증표가 있을 터. 보여라.”
“증표? 흠.”
이들과 거래를 튼 그 귀족들은, 엘프들만이 알 수 있는 증표를 가지고 있나보군.
정기적으로 들르기라도 했나?
뭐, 아무튼 우리가 내밀 수 있는 증표는 하나뿐이다.
나는 메린에게 손짓하며, 여전히 우리를 쏘아보고 있는 엘프들에게 말했다.
“이건 증표가 되시나?”
메린이 들쳐업고 있던 블루벨을 바닥에 세우며, 그들에게 얼굴을 보여주었다.
“블루벨?!”
나에게 말을 걸던 엘프의 눈이 휘둥그레 커지며, 곧바로 활을 거두었다.
그리고 제 동료들에게도 활을 내리라는 듯이 손짓했다.
그가 이들의 대장인 건지, 네 명의 엘프는 표정을 찡그리면서도 고분고분 활을 내렸다.
……생각보다 반응이 큰데?
이래서 파랑새가 블루벨을 앞세우라고 한 거군.
그리고……
이 다음은 순전히 나에게 달렸다고 했지?
좋아. 해보자고.
조용히 심호흡을 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