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6화 〉 162화 : 왕에게 안내하라 (4)
* * *
푸른머리 엘프는 나를 마주보며, 재차 입을 열었다.
“그리고 왕의 뜻은 곧 일족의 뜻이며, 곧 어머니 나무 ‘돌에렛’의 뜻이지.”
즉, 엘프가 저지르는 모든 행동은 다 왕의 뜻이기 때문에, 책임질 사람도 왕 한 사람이라는 뜻인 모양이다.
“흠, 그럼 나는 조금 전에 왕을 호출한 거군.”
“그러하다. 그 때문에 내가 이리 온 것이다.”
“아무리 봐도 왕은 아닌데?”
고개를 갸웃하며 묻자, 푸른머리 엘프가 그 긴 머리카락을 옆으로 휙 넘겼다.
……뭐하는 짓거리야?
저절로 얼굴이 굳는 게 느껴졌다.
그런 뒤, 놈이 입을 열었다.
“나는 친위대장이다. 왕께서 그대의 호출에 응하기로 하셨다. 나는 그 답을 하러 나온 것이다.”
“아, 그러세요. 잘 됐네요.”
“그러니,”
그는 말을 끊더니, 갑자기 나를 싸늘하게 노려보며 말을 이었다.
“……이제 됐겠지. 내 사랑을 모욕하는 건 그쯤 해라.”
“뭐? 내 사랑? 블루벨 얘기야?”
“달리 누가 있나? 나는 그녀에게 내 심장의 전부를 바쳤다. 그러니 그녀를 계속 모욕한다면, 왕의 명령을 거역하게 되더라도 네놈을 속히 처단할 수밖에 없다……!”
“……”
우와……
저런 말을 남들 다 듣는 데에서 당당히 하다니……!
아연해하는 내 뒤에서 작게 꺄악 하는 탄성이 들렸다.
저 사제님, 은근히 이런 거 되게 좋아한단 말야.
아무튼, 그럼 저 친위대장이라는 놈이 진짜 블루벨의 애인인가?
그렇다는 건……
“히익.”
저 놈도 소아성애 변태 새끼구만?!
생긴 건 멀쩡한데, 취향 참……!
으, 아니야. 이종족이잖아.그럴 수 있어.
엘프 문화에선 평평할수록 매력이 높은지도 모르잖아?
존중하자고, 존중.
어쨌든 블루벨은 170살이나 먹은 늙은이잖아.
얼굴도 몸도 좀 많이 젊을 뿐이야.
그렇게 나 자신을 다잡은 후, 나는 그에게 물었다.
“그래…… 이건 미안하게 됐어. 진심이야. 그래서, 둘이 애인인 거지?”
“그럴 예정이다.”
“짝사랑이잖아아!!”
이 새끼가 날 속였어?!
아니 결국 짝사랑남 C인 주제에 뭘 잘난 듯이……!
그러자 친위대장은 피식 웃더니 자신만만한 태도로 대꾸했다.
“당치도 않다. 그녀가 부끄러워하느라 아직 인정하지 않았을 뿐. 결국 그녀는 내 품에 안길 것이다. 이건 예정된 일이야.”
“웃기지 마!! 블루벨은 당신 같은 냉혈한에게 어울리지 않아! 난 그녀를 백 년간 옆에서 지켜봤다! 그 꽃이 피는 걸 옆에서 보며 지켜왔다고!
앞으로도 내가 평생 그 옆에서 향취를 맡을 거다!!”
그 뒤를 이어, 대놓고 체취 맡아왔다고 고백하는 짝사랑남 A,
“큭……! 저 추잡한 놈들……! 걱정 마라, 블루벨! 넌 이 오라비가 반드시 지켜주마……! 넌 나의 달콤한 풋사과이니까!”
그리고 상황 파악 못하는 짝사랑남 B가 개소리를 펼쳤다.
“쌉소리들 하고 있네. 게다가 댁은 나한테 잡혀 있잖아. 지키긴 뭘 지켜, 정신 안 차리냐?!”
어처구니가 없어서 짝사랑남 B를 걷어찼다.
그리고 풋사과는 절대로 달지 않다.
덜 익어서 신 맛만 나지.
근데 뭐?
블루벨이 풋사과라고?
달다고?!
“크아악! 뒤져라, 미친 변태 새끼야아아!!”
“끄얽!! 왜 나만……!”
“너 새끼가 제일 가까워서 그런다!!”
뒤늦게 치밀어 오른 빡침에 사정없이 걷어차주었다.
블루벨이 딱히 노여워하는 기색이 없는 걸 보면, 놈이 생각하는 것만큼 그리 친하지 않은가봐.
아무튼 궁금증이 풀렸을 뿐만 아니라, 드디어 숲 안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휴, 정말 힘들었어.
블루벨의 옷섶을 다시 맨 다음, 케이프도 도로 곱게 둘러주었다.
“수고했어.”
“……”
음, 눈의 초점이 없어졌군.
숨은 아직 쉬고 있는데다 급소를 찔렀던 것도 아니니, 출혈 때문에 그런 건 아닐 것이다.
아마 저 미친놈들 때문이겠지.
쯧쯧, 가엾기도 해라.
진심으로 안타까워하며, 나는 여전히 자신만만한 얼굴을 하고 있는 짝사랑남 C, 아니 친위대장에게 말했다.
“그럼, 안내해.”
“아직 그대가 약속을 다하지 않았다.”
“음? 옷은 다시 입혔는데?”
딴 게 또 있었나?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자, 짝사랑남 A가 분개한 목소리로 외쳤다.
“폐하를 만나게 하면 그녀를 풀어준다고 했잖나!! 이제 그녀를 풀어줘!!”
“그건 댁한테 한 소리잖아. 저 대장님이랑은 상관없지.”
“아니, 상관있다.”
친위대장은 내 말을 단호히 부정하며,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내 말하지 않았나? 그녀를 모욕하는 건 그쯤 하라고. 블루벨, 내 사랑을 그만 놓아주어라!”
“왕 앞에 섰을 때 풀어주지.”
바로 대꾸하자, 친위대장이 한층 더 얼굴을 구기며 낮게 중얼거렸다.
“……우리가 네놈들 인간처럼 비열한 줄 아느냐? 모독도 정도껏 해라, 인간……!”
“가능한 댁들의 활을 무겁게 하고 싶을 뿐이야.”
매섭게 노려보는 친위대장의 눈을 똑바로 마주하며 대답했다.
나는 엘프를 모른다.
한 번 내뱉은 말은 반드시 지키는지, 또는 실리를 우선하여 거리낌없이 뒤통수를 치는 놈들인지 전혀 모르는 것이다.
자신들 외의 존재는 전부 밑으로 보고 있다는 것.
그 하나만 알고 있을 뿐.
인질을 해방하지 않을 근거로 삼기엔 충분하다.
이 놈들이 ‘인간’을 지성체로 보리라는 보장이 없으니까.
……아니, 보고 있지 않을 거야.
아니면 그 어린애들이 밀수꾼 놈들에게 ‘비료’라 불릴 리가 있나……!
기싸움을 하듯이, 한동안 말없이 시선을 마주했다.
이내 친위대장이 먼저 시선을 거두며, 체념한 듯이 한숨을 쉬었다.
“……할 수 없군. 좋다, 따라와라. 어전까지의 안전은 보장하마. 그 대신,”
잠시 말을 끊은 후, 친위대장은 절박한 눈으로 블루벨을 보며 말을 이었다.
“그녀를 치료하게 해다오. 피를 너무 많이 흘렸다. 그녀는 보는 바와 같이 연약하고 가녀린 여인이니, 어전까지 버티지 못할 것이다.
제발, 부탁한다……!”
“……”
금방이라도 무릎을 꿇을 듯이, 그는 무척이나 간절한 말투로 부탁했다.
변태 새끼이긴 하지만 이 셋 중엔 제일 낫군.
그나저나……
“……이거 내가 엄청 나쁜 놈이 된 거 같은데?”
은근히 되게 껄끄럽단 말이지?
거참 희한하네, 분명 엘프들이 악당일 텐데.
그렇게 중얼거리자, 메린이 어깨를 으쓱이며 대꾸했다.
“나쁜 놈 맞지. 인질 잡고 눈앞에서 고문했잖아. 저 놈들한텐 찢어 죽여도 시원찮을 개 같은 놈으로 보이는 게 당연하지 않냐?”
“……”
이 자식이 또 사실(fact)로 때리고 있네.
누가 그걸 몰라?!
“얌마, 꼭 그렇게 따져야 속이 시원하냐? 너 대체 누구 편이야?!”
“네 편.”
“……”
쯧, 바로 대답하고 말야.
상황이 상황이니까 그냥 넘어가준다.
당연한 걸 왜 묻냐는 듯이 고개 갸웃하는 게 귀여워서 그런 게 절대 아니니까 말야!
흥이다!
고개를 돌려 살짝 더워진 얼굴을 식히고 있자, 로나가 내 눈앞에 손을 흔들어서 주의를 끌었다.
그녀는 헤실헤실 웃는 얼굴로, 메린이 붙잡고 있는 블루벨을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카엘 님, 훈훈한 대화를 나누시는 것도 좋은데요. 빨리 안 하면 그 엘프 의식 잃을 거에요.”
“엉? ……아, 맞다.”
블루벨의 얼굴빛은 정말로 창백해져 있었다.
바닥은 이 엘프가 흘린 피로 흥건히 젖어 있다.
하긴, 이대로 두면 왕에게 가기 전에 죽겠군.
여전히 입은 막고 있으니 치료해줘도 문제없겠지.
손은 다시 묶어야겠지만.
그런 블루벨을 보며, 얼굴이 흙빛이 되고 있는 친위대장에게 말했다.
“치료는 우리가 하지. 걱정 마, 제대로 할 테니까.”
놈이 무어라 입을 열려는 걸 무시하고, 나는 블루벨을 다시 넘겨받은 다음, 로나와 함께 뒤로 물러났다.
왠지 모르게, 로나가 사제라는 걸 숨기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바닥에 앉힌 블루벨을 로나가 조용히 치유하는 동안, 나는 금방이라도 눈을 감을 듯한 그녀에게 나지막이 말을 걸었다.
“블루벨? 아직 깨어 있지? 지금 눈 감으면 진짜 죽어. 정신 잡아.”
“……”
“음, 거듭 말하는 거긴 한데, 진짜 댁한테 이럴 생각은 없었어. 용서해달라고 할 생각은 없는데, 그래도 미안한 건 진심이야. 미안해.”
블루벨은 나를 매섭게 쏘아보더니, 저쪽으로 고개를 돌려버렸다.
뭐, 당연하지.
나라도 미친놈이 개소리 깐다고 욕할 거야.
“위슨, 수면물약 있어?”
“옛다.”
로나의 치료가 끝나자마자, 나는 블루벨의 입을 막고 있던 붕대를 풀었다.
“하아……!”
그리고 그녀가 쌓여 있던 숨을 토해내자마자, 우리 집안에 전해내려오는 ‘약 먹이기’ 비술을 시행했다.
크게 벌어진 입을 붙잡고 물약을 들이부은 다음, 입을 꽉 막아버린 것이다.
코도 잡은 건 두 말할 여지가 없다.
“콜록콜록! 너, 너 진짜, 으읍!!”
그리고 도로 붕대를 감아 입을 막아버렸다.
그동안 로나는 그녀의 두 손을 뒤로 돌려서 꽉 묶었다.
음음, 말 안 해도 알아서 착착 해주다니, 참 믿음직스러운 사제님이야.
정말 무섭다.
“한숨 푹 자. 가능하면 다시 보지 말자고.”
“으읍…… 므으……!”
“기도 받으면 좀 기운이 나니까 자도 안 죽어. 내가 많이 받아봐서 알아.”
“으으……”
대답인지 신음인지 알 수 없는 소리를 흘리며, 그녀의 몸이 푹 꺾였다.
뭐, 신나게 욕했겠지.
쓴웃음을 지으며, 나는 수면약 효과로 잠에 빠진 그녀를 들쳐업었다.
몸집이 작은 만큼 그리 무겁지 않았다.
그대로 친위대장에게 가려는 찰나, 갑자기 메린이 내 팔을 붙잡았다.
“엉? 왜?”
“……넘겨.”
“어? 아, 이 녀석? 괜찮아. 별로 안 무거,”
“넘겨.”
그녀가 눈을 부릅뜨며 낮게 읊조렸고,
“아, 옙.”
나는 곧바로 그 말을 따랐다.
……방금 눈이 번쩍인 것 같았는데?
내가 잘못 봤나?
아무튼 진짜 죽는 거 아닌가 싶을 만큼 엄청난 압박감이었다.
우와, 손에 진땀까지 배었어!
다시 메린을 보자, 그녀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블루벨을 들쳐업은 채, 무덤덤한 얼굴로 서 있었다.
으음…… 어쨌든 기분이 풀린 것 같군.
내가 죽을 일은 없겠어.
나는 안도한 후, 친위대장에게 손짓하며 말했다.
“안내해주십시오.”
“……따라오시오.”
살짝 질색해하는 표정으로 대꾸하며, 친위대장이 앞장서서 걷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