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7화 〉 163화 : 엘프의 왕 (1)
* * *
이름을 알 수 없는 푸른머리 엘프, 왕의 친위대장이자 ‘블루벨을 짝사랑하는 남자 C’인 소아성애…… 아니, 어리지 않으니까 평원성애자인가?
엘프니까 그냥 나무성애라고 하자.
아무튼 우리 네 사람은, 그런 친위대장의 뒤를 따라 숲으로 향했다.
도중에 지나친 짝사랑남 A의 눈빛이 굉장히 매서웠지만, ‘왕이 우리를 만나기로 했다’는 걸 들어서 그런지, 뒤를 공격해오는 일은 없었다.
그렇게 엘프의 숲, ‘루 메호’에 들어섰는데……
생각보다 굉장히 평범하다.
이제 본격적으로 여름이 시작됐다는 걸 알리듯이, 한창 물이 올라 덥수룩해진 덤불들.
하늘이 보이지 않을 만큼, 무성히 뻗은 가지마다 이파리를 풍성히 내어 뽐내는 나무들.
풀꽃들은 내가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왜 밟냐고 향을 내뿜으며 항의를 해오고,
저 멀리 숲 어딘가에선 숲새들이 지저귀며 저들끼리 수다를 떨고 있다.
이따금 불어오는 서늘한 바람에 몸이 움츠려들어도, 울창한 나뭇가지들을 비집고 들어온 햇빛이 다시 따뜻하게 덥혀주었다.
산책하면서 버섯이나 나무열매를 따기 좋은, 그야말로 여름의 정취를 한껏 품은 숲이었다.
신비롭지도, 위험하지도 않아서 오히려 마음에 들었다.
……여기저기서 느껴지는 시선만 없었더라면 훨씬 좋았을 텐데.
“……”
멀리 있을 때는 별로 못 느꼈는데, 숲에 들어오니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통 시선이 내려 꽂히고 있다.
적의, 호기심, 살의, 경계……
개중엔 그냥 ‘지나가니까’ 보는 것도 있다.
그렇게 각기 다른 감정을 담아, 전부 다 나무 위에 숨어서 나를 보고 있다.
나를,
내려다보고 있다.
내려다…보고……
“……하.”
정신차려, 카엘 에스트렐.
그거 환청이야.
네 머릿속에서 만드는 가짜라고.
누구도 웃고 있지 않아.
누구도 떠들고 있지 않고 있어.
놈들은 저 멀리 있어.
네 바로 머리 위에 있는 게 아니야!
……그렇게 열심히 되뇌었지만, 이미 늦은 모양이었다.
순식간에 긴장이 솟아오르며 몸이 굳어버리고, 온 몸에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윽.”
머릿속이 시끄럽다.
듣지도 않은 웃음소리가 들린다.
끈덕지게 들러붙은 과거의 목소리가, 이때다 하고 또 다시 떠들어댄다.
망할, 하필이면 이런 데서!
그렇다고 여기서 벗어날 수도 없고……!
제길, 버텨야 돼!
후드를 꽉 쥐고, 더 깊이 쓸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당겼다.
그들이 나를 보는 게 아니라, 내 주위에 있는 다른 동료들을 보는 거라고 되뇌면서.
그러나 상태는 조금도 나아지지 않고, 이제는 숨이 막혀오기 시작했다.
입술이라도 깨물어야 하나……?
그때, 숲바람이 땀을 식히며 싸늘하기까지 느껴지던 손바닥이 따스해지면서, 부드러운 감촉이 내 손을 감싸는 게 느껴졌다.
“……?”
시선만을 슬쩍 향하자, 어깨에 블루벨을 들쳐업고 있는 메린이, 남은 손으로 내 손을 잡고 있었다.
내 시선을 느꼈는지, 그녀가 나를 힐끗 바라보았다.
주위를 경계하느라, 그녀는 곧바로 나에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메린이, 내 손을 잡고 있다.
그걸 인식하자마자, 머릿속을 울리던 목소리가 사라지면서 호흡이 편해지기 시작했다.
그녀가 곁에 있다는 사실에 안도하고 있었다.
괜찮아.
그 뜻을 전하듯이, 그녀가 내 손을 약간 더 강하게 쥐었다.
“……후우.”
……그래, 괜찮아. 메린이 있잖아.
너무 낙관하면 안 되지만, 너무 굳어 있을 필요는 없어.
그녀가 곁에 있으면 안전해.
항상 그랬듯이.
그녀의 손을 꼭 잡으며, 그렇게 재차 되뇌었다.
이윽고 숲의 풍경이 조금씩 바뀌며,빽빽하고 곧게 뻗은 나무들 중에집을 얹고 있는 나무들이 하나 둘 보이기 시작했다.
숲 안쪽으로 가면 갈수록 그 ‘나무집’들의 숫자는 점점 더 많아졌는데, 어떤 나무엔 집 여러 채가 붙어 있기도 했다.
“……”
그리고 엘프들이 나뭇가지에서, 나무 뒤에서, 집 안에서 우리를 빤히 쳐다보았다.
인간으로 치면 대여섯 살 정도로 보이는 어린 엘프들이 우리를 가리키며 까르르 웃기도 했다.
그에 호응해주기엔, 아이들을 제외한 어른 엘프들의 표정이 죄다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물론 험악한 얼굴로 우리에게 알 수 없는 말을 던지는 사람들도 있었다. 엘프들이 쓰는 언어인 듯했다.
뭐, 욕하는 거겠지.
인간 따위가 어딜 들어오느냐, 이런 식으로.
“이 놈들! 초절정 미소녀 블루벨 님에게 무슨 해괴망측한 짓이냐!”
“아니, 여보, 이것 좀 놔! 저거 블루벨이잖아! 돌에렛의 최고 작품인 블루벨이 저런 험한 짓을 당하는데 이걸 참으라고?!”
“당신, 진짜 미쳤어?!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게 마누라 앞에서 할 소리야?!”
그래서……
“크으윽! 어째서 바닥을 향해 업고 있는 거지?! 뒤집어! 뒤집으란 말이다아아아!”
“블루벨 쨩의 뒤태에 저, 좀 와버렸습니다만 이건 어떨지?”
“하아하아, 저 놈의 손이 되고 싶다는……!”
그럭저럭 긴장하고 있었는데……
“……”
뭐야, 이게?!
앞의 몇 명은 그래도 이해되는데, 나머지는 뭐야, 미친놈들인가?!
우와, 벌레가 목 뒤를 기어다닐 때처럼 소름 돋았어, 당장이라도 여길 나가고 싶어!!
그보다 이 소리들, 죄다 파랑새 쪽에서 들리는데 말이지?
이 자식이 쓸데없이 하나하나 목소리 바꿔 가면서 진짜……!
“얌마, 에코, 너 그만 안 해?!”
“엉? 왜? 너네는 이 놈들 말 못 알아듣잖아. 그래서 친히 알려주고 있는 건데.”
“이런 망할, 그럼 그 소리들이 죄다 진짜야?! 오, 신이시여, 세상에……! 난그냥 모르고 있으련다. 나한텐 알려주지 마.”
“그래? 뭐, 나야 편하지.”
파랑새는 내 부탁대로 그 괴상한 말들을 전해주지 않았고, 덕분에 내 정신력은 그 이상 깎이지 않을 수 있었다.
참고로 그 변태 새끼들 중 하나가 블루벨 쨩 어쩌고 하면서 우리에게 달려들었었는데, 놈은 나타나자마자 곧바로 숲 저편으로 날려졌다.
우리 중 누구도 아닌, 같은 엘프인 친위대장에 의해.
그가 놈을 날려버리고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기까지 걸린 시간은 굉장히 짧았다.
그야말로,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내가 얼떨떨한 말투로 고맙다고 전하자, 그는 앞으로 넘어온 머리카락을 홱 넘기는 개지랄을 떨면서 대꾸했다.
어전까지의 안전을 보장한다는 약속을 지켰을 뿐이오.폐하께서 그대들을 보리라 하신 것도 있으니!
아마 뒷말은 주변 엘프들에게 한 말이었겠지.
그 이후로 누구도 난입하지 않았으니까.
“……가까운 사이인가보오?”
“예?”
불쑥 들려온 말에 반사적으로 되묻자, 친위대장이 꼿꼿이 앞을 향한 채, 재차 입을 열었다.
“그 무뢰배가 달려들 때, 그대 옆의 여자가 반사적으로 그대를 제 뒤에 숨기더군. 손을 잡고 있기도 하고.”
“아아…… 예에, 뭐, 그렇죠. 근데 여자인 건 어떻게……?”
우린 아직 후드를 뒤집어쓰고 있다.
설마 그새, 후드 안까지 들여다본 건가?
“숲에 들어오기 전, 그대와 대화를 나누는 것을 들었소. 내용은 기억에 담지 않았으니 괘념치 마시오.”
“……귀, 정말 좋으시군요.”
난입자를 해치운 그 짧은 사이에, 메린의 움직임을 파악했을 뿐 아니라, 어떤 자세를 취하고 있는지까지 봤다고?
게다가 아까 숲 바깥, 그 떨어진 거리에서 나눈 대화가 들렸어?
그 옆에 있던 짝사랑남 A는 안 들리는 것 같았는데……!
괜히 친위대장은 아니구만.
염병할, 너무 뛰어나.
이거 용사인 걸 절대 들키지 않기를 빌고 또 빌어야겠다.
친위대장은 내 경계 섞인 칭찬에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귀만으로 들은 건 아니오. 나는 아직 정령의 힘을 빌릴 수 있으니, 그 덕을 보았지.”
……소리의 정령인가.
파랑새가 뒤에서 불쾌한 듯이 째짹거리는 게 들렸다.
친위대장은 그를 아는지 모르는지, 여전히 딱딱한 말투로 재차 물었다.
“……여자가 그대보다 나이가 많소?”
“아뇨, 동갑입니다. ……그냥 말 편하게 놓으세요. 왠지 안 어울리시네요.”
“……그러지. 그대도 편히 놓아라.”
“전 존댓말이 더 편합니다.”
그러자 세 녀석이 일제히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후, 하나같이 ‘헛소리하네’라고 말하고 있군.
눈은 안 보이지만 분위기가 풀풀 풍긴다고.
“뭘 봐, 이 자식들아. 내가 틀린 말 했냐?”
“……”
일갈하는 나를 향해, 내 동료들은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두고 보자.
아무튼, 나는 적대하기 전까진 계속해서 그에게 존댓말을 하기로 했다.
어차피 한참 어르신일 거고, 우리에게 그럭저럭 정중하기도 하니까.
소아, 아니 나무성애에 긴 머리를 홱 넘기는 짓거리를 하는 변태라 그렇지, 사람은 괜찮은 거 같았다.
말이 나와서 그런데, 이렇게 엘프들을 직접 보고 나니, 역시 이들은 죄다 변태 새끼들이시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 괴상한 말을 쏟아내는 미친놈들이 아니더라도 변태가 분명해.
왜냐? 여자 엘프들 대부분이 제대로 굴곡이 도드라져 있거나, 늘씬한 몸이었으니까!
아니 왜 저 성숙한 여인들을 두고, 굴곡이 생기다 만 데다 평평하기까지 한 블루벨에게 열광하는 거야?!
누구처럼 무르익지 않아서 좋다는 건가?
이쯤 되면 문화 자체가 글러먹은 게 아닐까?
아, 갑자기 이 숲을 전부 불태우고 싶어졌어.
정화에는 불이 최고이지. 암, 그럼.
진짜로 위슨에게 부탁하기 전에 그 충동을 억누르고자, 나는 친위대장에게 말을 걸었다.
“다들 블루벨을 좋아하네요. 인간 눈에는 굉장히…… 특이해보입니다.”
휴, 미친 것 같다고 할 뻔했어.
조심해야지.
내 말에, 친위대장은 여전히 앞을 보며 대꾸했다.
“그녀의 몸이 매력적이니까.”
“히익!”
“……노파심에 이른다만, 나는 그녀의 육체미에 반한 것이 아니다.”
“아, 예. 그러시겠죠.”
다들 그런 식으로 합리화하더라.
사랑에 빠진 사람이 어쩌다 이러저러한 사람일 뿐, 내가 그러그러한 취향인 게 아니다~ 라면서.
나 참, 세상에 그런 게 어딨어?
원래 취향이니까 끌려서 좋아하게 된 거겠지.
그럼 나도, 좋아하게 된 사람이 우연~히 엄청나게 강하고 무시무시한 여자인 거지, 원래부터 그런 무서운 여자가 취향인 게 아니겠네?
“……”
당연히 아니지!
그래, 친위대장은 블루벨의 마음에 반했을 거다.
합리화가 아니라 진실을 얘기한 거야.
암, 그렇고 말고!
“나는 블루벨을 누구보다도 가까이에서, 오랫동안 지켜본 자다. 그녀의 겉만 보고 멋대로 판단하는 자들과는 달라.”
“흠, 그럼 블루벨이 술,”
“그녀는 술을 싫어한다. 냄새를 맡는 것도 질색하지.”
친위대장은 단호히 내 말을 자르며, 처음으로 나를 돌아보았다.
등골이 순간 섬찟할 만큼, 한기가 서린 두 눈이 확연히 고하고 있었다.
말하지 마라.
놈들이 듣는다.
“……”
음, 술을 좋아하는 게 알려지면 많이 곤란해지는 모양이군.
나는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다시 앞을 보며, 친위대장은 계속 말을 이었다.
“술은 판단력을 빼앗을뿐더러, 감각과 움직임까지 둔하게 만든다. 그걸 그녀가 좋아할 리가 없다.
……그대도 보다시피, 많은 자들이 그녀에게 매혹되어 있지. 가까이해서 좋을 게 없다.”
흠, 어째 몸을 지키려고 일부러 술 싫어하는 척한다고 들리는데.
물론 관심 없는 사람과 같이 술 마셨다가 일이 터지면 낭패이긴 하지.
그래도 친구와 한잔하면서 즐길 수도 있는 거 아닌가?
어쩌면 블루벨이 그렇게 술을 퍼 마신 건, 그야말로 고삐가 풀렸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동안은 몰래몰래 홀짝이기만 했을 테니.
그건 그렇고,
“블루벨과 가깝게 지내시나 보군요.”
어떤 진성 변태 새끼는 블루벨이 이슬만 먹는다며 지랄하던데, 친위대장은 블루벨이 술꾼이라는 걸 제대로 알고 있는 듯했다.
그건 즉, 그녀가 그나마 마음 편히 술을 홀짝일 수 있을 정도로 가까운 사이라는 것이다.
……정작 애인 사이는 아니라는 게 희한하긴 하지만.
“가깝지. 누구보다도.”
그렇게 말하며, 친위대장은 저 먼 곳을 바라보듯이 살짝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누구보다도 멀다.”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는 그의 뒷모습은, 어딘지 무척 쓸쓸해보였다.
이후, 침묵을 지키는 친위대장을 따라, 우리는 숲 안쪽 깊숙이 들어갔다.
광장인 듯한 넓은 공터를 지나서 한참을 더 들어가니, 집이 나무 위가 아닌 땅에 지어져 있었다.
마치 우리 인간처럼.
하나같이 나무에 달린 집들보다 한층 화려하고 큰데, 안에 아무도 없는 건지 인기척이 나지 않았다.
길을 돌아다니는 사람도 하나 없어, 굉장히 고요한 거리였다.
다만, 돌아다니지 않는 사람, 경비병들은 드문드문 보였다.
가죽갑옷을 걸친 경비병들이, 몇몇 집 앞과 거리 모퉁이에 두세 명씩, 손에 활을 든 채 서 있었다.
친위대장이 그 앞을 지나칠 때마다 고개를 살짝 까닥일 뿐, 우리에겐 딱히 시선을 주지 않았다.
마치 경계 대상이 아닌 것처럼.
……그나저나 여기만 경비병이 있고, 또 여기서도 일부 집에만 경비를 서고 있는 걸 보니, 엘프 사회에도 뭔 계급이 있나보군.
경비병이 지키는 걸 보면, 여기가 통칭 ‘높은 분’이 사는 동네인 듯했다.
“……크흠.”
불현듯 소리가 나서 돌아보니, 로나가 잔기침을 하고 있었다.
먼지 먹었나?
그녀는 목을 가다듬더니, 친위대장에게 물었다.
“……저 큰 나무 밑에 있는 게 왕궁인가요?”
“그렇다.”
로나가 가리킨 곳, 부자 동네 너머에는 굉장히 큰 나무가 하나 자라 있고,그 앞에 궁전보다는 저택이 더 어울리는 건물이 하나 있었다.
살짝 고개를 들며, 친위대장이 경외가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폐하가 계신 왕궁과, 어머니 나무인 돌에렛이다.”
어머니 나무.
무엇 때문에 그리 부르는지는 모르지만, 그 나무는 ‘부엉이탑’보다는 현저히 작았다.
그래도 그 뻗어 있는 가지와 무성한 이파리들은 하늘을 가리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나무의 주변에는 무언가 푸른색의 빛 알갱이들이 떠다니고 있었다.
아니, 반짝이는 건가?
아무튼 무척 신비로운 분위기를 내뿜고 있었는데……,
희한해.
가까이 가기 싫어.
나무를 보는 순간, 무언가 꺼림칙한 기분이 들었다.
“카엘 님,”
로나가 나지막이 말을 걸어왔다.
“조심하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이 이상 뭘 어떻게 더 조심해?
어쨌든 왕궁 뒤에 있는 나무가 껄끄러운 건 사실이니, 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 신경 거슬리는 느낌은, 왕궁 앞에 다다르자 훨씬 더 심해졌다.
……후드를 쓰고 있어서 정말 다행이야.
인상이 구겨져선 좀처럼 안 펴지고 있는데, 왕궁 앞에서 갑자기 인상 팍 쓰면 괜히 의심 샀을지도 모르니까.
큼지막한 울타리 문을 통과해 왕궁 안으로 들어간 후, 친위대장은 굳게 닫혀 있는 어느 커다란 문을 쿵쿵 두드렸다.
그러자 문이 열리며, 곱게 차려 입은 엘프가 나와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친위대장이 그 엘프에게 무어라 말을 전하자, 그가 다시 인사하더니 문을 닫으며, 도로 안으로 들어가버렸다.
“시종장이다. 폐하께 그대들이 당도했음을 아뢰라 전하였다.”
그럼 이 앞이 알현실인가?
건물 크기도 그렇고, 인간의 왕성, 랜드스타보다 확연히 작다.
콧대는 높아도 검소하게 사는 게 미덕인가보네.
잠시 후, 다시 문이 열리면서 시종장이라는 사람이 안으로 들어오라는 듯 손짓했다.
친위대장을 따라 안으로 들어가자, 왕의 알현실다운 묵직한 분위기가 우리를 맞이했다.
나무그늘 때문에 어두침침한 바깥과 달리, 알현실은 빛 알갱이들이 가득 든 등불 덕분에 무척 밝았다.
나무로 짜인 벽에는 어떤 그림이 그려진 태피스트리가 걸려 있고,
천장에는 아무 등도 달리지 않은 대신, 어떤 문양이 가득 그려져 있었다.
화려하진 않지만, 위엄은 충분히 갖추고 있었다.
이 안에 있는 가구라고는 서너 개의 단 위에 올려진 의자, 단 하나뿐이었다.
그리고 그 의자에는, 봄의 새순을 연상시키는 연한 녹색빛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뜨린 엘프가 삐딱하게 앉아 있었다.
머리에는 나뭇가지를 엮어 만든 듯한 금관을 쓰고, 금빛 옷자락이 의자를 덮고 바닥에까지 치렁치렁하게 내려와 있다.
관을 쓰고 있으니, 아마 저 사람이 왕이겠지.
엘프의 왕은 우리가 들어서는 것을 빤히 보며, 금빛 눈동자를 깜빡이고 있었다.
친위대장은 몇 걸음 안으로 들어가더니, 꾸벅 고개를 숙였다.
뜻을 알 수 없는 말이 몇 마디 나오자, 왕이 그 말을 막듯이 손을 까닥이며 입을 열었다.
“되었다. 내 직접 저들과 이야기할 터이니, 그대는 물러가도록.”
“……예, 폐하.”
친위대장은 곧바로 뒤로 물러나면서, 나에게 시선을 주었다.
아, 그렇지.
나는 메린을 보며 눈짓했다.
“……흠.”
약간 탐탁치 않아 하면서도, 그녀는 들쳐업고 있던 블루벨을 친위대장에게 넘겼다.
그는 기다렸다는 듯이, 곧바로 블루벨을 받아 조심스럽게 품에 안아 들었다.
그녀의 체구가 좀 작아서 그런지, 그의 팔 안에 완전히 쏙 들어간 모양새가 되었다.
그러고서 그는 어쩐지 놀란 눈으로 나를 보았다.
나는 그에게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약속했잖아요?”
“……알고 있다. 그럼 실례하지.”
우리에게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한 후, 방을 막 나서려는 그를 왕이 불러 세웠다.
그리고 갑자기 씨익 웃으며, 무어라 주절주절 말을 늘어놓았다.
뜻은 몰라도, 되게 안 좋은 의미인 건 알 수 있었다.
친위대장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으니까.
그는 블루벨을 안아 든 채, 간곡한 말투로 무어라 말을 하기 시작했다.
……왠지 그냥 있기 어색한데.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나 알자.
나는 슬쩍 파랑새를 건드리며 물었다.
“야, 왕이 뭐라고 했길래 저래?”
“죽이랬어.”
“……뭐?”
내가 되묻자, 파랑새가 심드렁한 목소리로 재차 대답했다.
“쳐자고 있는 귀쟁이 년, 사형시키라 했다고.”
눈이 저절로 휘둥그레 커졌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