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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사는 소꿉친구 검성이 무섭다-169화 (169/475)

〈 169화 〉 165화 : 이상한 녀석이야 (1)

* * *

달린다.

가지를 딛고, 나무줄기를 차면서 허공을 날아 숲을 주파한다.

생각보다 숨이 차오르진 않지만,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성가시다.

역시 밋밋한 바위기둥을 타는 것과, 때때로 옹이가 튀어나와 있는 나무를 타는 건 좀 다르구만.

“서라!!”

싫어.

뒤를 따라오는 목소리에 속으로 대꾸하며, 발에 가지가 닿자마자 곧바로 아래로 뛰어내렸다.

핑, 가느다란 바람소리가 스쳐 지나간다.

그게 무엇인지 확인할 필요는 없다.

하고 싶어도 어차피 못해.

뛰어내리면서 가지에 걸어둔 갈고리의 반동을 타며, 나무를 빙 돌아가느라 바쁘니까.

“흐읍!”

반 바퀴 정도 돈 후, 나무를 차 방향을 틀면서 갈고리를 뺀다.

허공에 뜬 몸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치기 전에, 다른 나무에 갈고리를 쏘아 박았다.

귀를 때리는 바람소리에 섞여 욕이 들려온다.

왠지 모르게 웃음이 나며, 뻐근한 팔에 활력이 조금 더 솟아오르는 듯했다.

그렇게 계속 숲을 달렸다.

추격자가 땅 위를, 가지와 가지 사이를 폴짝폴짝 넘어다니며 쏴대는 화살을 피하면서 달렸다.

온통 녹색 천지인 이 숲속에서, 낙엽처럼 울긋불긋한 머리색 때문에 눈에 확 띄는 인질을 짊어지고서,

놈들을 꾀어내었다.

“크억?!”

뒤쪽에서 두 개의 단말마가 울렸다.

음, 무언가 뜯겨지는 소리가 들린 걸 보니, 하나는 죽었겠군.

그러게 왜 끈질기게 쫓아오고 그래?

적당히 따라오다가 포기하고 가면 좋았잖아.

속으로 투덜거리며, 어느 튼실한 나뭇가지에 잠시 멈춰 섰다.

“……후.”

‘손목 갈고리’를 쓰느라 뻐근해진 어깨를 빙빙 돌리며 숨을 돌렸다.

역시 한 팔만으로는 무리가 있군. 잘못하면 팔 빠져버리겠어.

그렇다고 양팔을 쓸 수도 없다.

내 다른 쪽 어깨엔, 블루벨이 축 늘어져서 쿨쿨 자고 있으니까.

“카엘.”

머리 위에서 속삭이는 목소리에게, 나는 계속 앞을 바라보면서 물었다.

“몇 놈이냐?”

“일단 하나.”

홱 줄었군. 어쩌면 끝나가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크게 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계속 해치우자.”

대답 대신, 가지가 흔들리며 나뭇잎이 하나 떨어졌다.

나는 블루벨을 다시 고쳐 메고, 왔던 길을 되돌아가며 놈이 나를 찾아내길 바랐다.

하…… 내가 생각하고, 실제로 저지르고 있긴 한데 말야.

진짜 이게 될 줄은 몰랐다.

추격자를 따돌리는 게 아니라, 하나하나 유인해서 없애버린다니.

그것도 엘프를 상대로.

원래는 처음 계획대로, 추격자들을 따돌리려고 했다.

근데 블루벨을 들쳐업고 한 손만으로 두세 번 나무를 옮겨봤더니, 절대 안 될 것 같았다.

물론 어깨에 업고 있는 블루벨은 별로 무겁지 않다.

그렇다고 깃털처럼 가벼운 것도 아냐.

계속 짊어지고 있다보면 어깨 아파온다고.

게다가 그 무게를 한 팔로만 계속 지탱해야 하니, 팔에 가해지는 부담이 장난이 아니었다.

그래서 계획을 바꿨다.

마침 블루벨의 머리 색깔이 밝아서 눈에 잘 띄니, 따라오는 놈을 전부 족치기로 한 것이다.

작전은 무척 간단했다.

내가 블루벨을 들쳐업은 채 여기저기 다니면서 추격자들의 주의를 끈다.

그 사이에, 나머지 세 명이 각자 적당한 때에 놈들을 처치한다.

참 쉽죠?

“히이익!!”

그렇게 또 한 명이 새된 소리를 지르며 숲에 삼켜졌다.

멀리서 울음소리가 들린 걸 보아, 위슨의 늑대가 물어가버린 모양이었다.

음, 메린이 ‘일단 한 명’이라 했었지?

선발대라고 하나?

아무튼 그런 놈들은 이제 다 해치웠으니, 적당한 곳에 숨으면 놈들이 추격을 포기할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생각하며 또 다른 가지를 딛은 순간, 정면에 있는 나무의 위쪽에서 엘프가 떨어지며 가지에 착지했다.

놈은 길다란 활을 들고, 나를 향해 화살을 겨누며 승리에 찬 미소를 지었다.

“잡았다, 인간……!”

“……!”

움직여서 피하기엔 늦었다.

애초에 갈고리가 박힌 곳으로 끌려가는 형식이라, 도중에 멈추기도 어렵다.

그럼 어차피 정면이겠다, 이대로 돌파하는 수밖에……!

몸을 돌리며 갈고리를 빼었다.

그와 동시에,팽팽하게 당겨진 시위가 풀어지는 소리와 함께, 등허리에 찌릿한 타격이 느껴졌다.

“큭……!”

진짜 꼭 새총에 맞은 거 같다니까.

쏙쏙 아리는 통증에 얼굴이 절로 찌푸려졌다.

몸이 허공에서 한 바퀴 돌아 다시 앞을 향하자, 나는 재차 갈고리를 쏘았다.

그대로 날아가면서, 당황함을 감추지 못하는 엘프의 가슴팍에 발길질을 했다.

놈이 어디로 떨어지는진 모르겠지만, 정신을 잃지 않으면 살겠지, 뭐.

알아서 하라지.

“……”

몇 갈고리 더 뛴 후, 나는 커다란 아름드리 나무를 등지고 서서 귀를 기울였다.

‘손목 갈고리’ 특유의 소리, 퍽 박히고 스륵 당겨지는 소리 외에는 들리지 않았다.

“따돌린 걸까요?”

살짝 위쪽에서 들린 로나의 속삭임에, 메린이 내 왼쪽에서 투덜거렸다.

“아닐걸? 뒤에서 아직 살기가 풀풀 풍겨. 더럽게 끈질기네.”

“진짜? 하아, 망할 새끼들……, 위슨은 슬슬 힘든데.”

오른쪽에서 위슨이 한숨을 쉰 후, 재차 말을 이었다.

“테라가, 여기서 좀더 가면 동굴이 있대. 그럭저럭 깊다고 하니 그리로 가자.”

“동굴? 뭐 있는 거 아냐?”

박쥐나 곰이면 몰라도, 벌이 튀어나오면 좀 많이 곤란한데.

쫓아내려면 연기를 피우거나 불을 써야 하는데, 어느 방법을 쓰던 눈에 확 띌 테니까.

“벌은 좀 그렇지만, 나머지는 좋은 거 아니냐? 저녁거리잖아.”

“……”

역시 메린이야.사고방식이 나와는 전혀 달라.

참 신기해~ 어떻게 잡아먹자는 생각이 먼저 드나 몰라.

“어쨌든 계속 여기 있을 순 없잖아요. 위슨 씨 말대로 그리로 가요.”

“그렇기는 해……. 좋아, 가보자. 위슨, 안내해줘.”

지체없이 위슨에게 길안내를 부탁하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행여나 또 엘프들이 툭 튀어나오거나 멀리서 활을 쏠까 봐, 공연히 방향을 바꾸면서 나무에서 나무로 옮겨다녔다.

“우으……”

그러던 중, 약한 신음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어이쿠, 이런. 인질님이 깨어나셨나보네.

수면약이 너무 약했나?

“므읍?!”

놀란 듯이 소리를 내며 버둥거리는 블루벨에게, 나는 나지막이 말했다.

“쉿. 가지에 댁 머리 박아버리기 전에 조용히 해줄래?”

“……”

내 정중한 부탁을 들은 그녀가 곧바로 입을 다물었다.

역시 대화로 해결하는 게 제일 좋지.

훈훈히 웃으며 계속 나아갔다.

그렇게 도착한 동굴에는, 온 몸에 돌이 박혀 있는 곰 두 마리가 웅크리고 있었다.

정식 명칭이 스톤베어랬나?

바위곰이라니, 보이는 그대로의 이름이군.

그리고 그 스톤베어 두 마리는 그대로 목이 잘려 절명하고 말았다.

그래도 자다가 죽었으니 아무 고통도 못 느꼈을 거야.

……그 대신 내가 고통을 느꼈다.

목이 아니라, 머리 부근에서.

왜냐?

도축에 환장하는 두 녀석이 둔덕 안에서 작업 중이니까!

“……”

아니 우리 지금 추적당하는 중인 거 아니냐고.

바로 동굴 안에 숨어도 시원찮을 판에 진짜……!

“보초 세웠으니까 괜찮을 거에요! 그리고 이미 동굴 안에 들어온 거나 마찬가지잖아요? 저 둔덕이 동굴 입구를 막았으니까요.

설령 뚫리더라도, 뒤쪽이랑 양옆은 막혀 있으니까 막기도 훨씬 수월할 거고요.”

그러니 걱정 말라면서, 로나가 열심히 나를 다독였다.

그녀의 말이 맞긴 하다.

귀가 예민한 스라소니가 밖에 숨어서 귀를 쫑긋 세우고 있고, 또 늑대가 동굴 바로 앞에 커다란 둔덕을 만들어서 입구를 아예 막아버렸다.

두 환장할 녀석은 늑대의 도움을 받아, 그 둔덕 안에서 작업하고 있다.

그러니 밖에서 보일 리는 만무하고, 피냄새도 풍기지 않을 터.

몬스터 고기이긴 해도 신선한 저녁거리인 건 사실이고, 그 둔덕 안에서 고기를 구울 수도 있겠지.

가죽도 요긴하게 쓸 수 있을지도 모르고.

그래, 나도 알고 있어.

아무 문제도 없을 거야.

근데 말야,

“여유부리는 거 자체가 문제 아니냐?”

“아하하.”

로나는 대답 대신 그냥 웃어버렸다.

하…… 나도 모르겠다.

한숨을 쉰 후, 나는 동굴 벽에 기대어 앉힌 블루벨을 돌아보았다.

‘바위궁전’에서 산 휴대용 야광석등 덕분에, 둔덕에 막혀 빛이 들어오지 않는 동굴에서도 그녀의 모습이 또렷이 보였다.

시선을 푹 내리깐 채,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다.

……너무 얌전하다.

이건 진짜 뜻밖인데.

나는 동굴에 들어온 후, 그녀의 입을 막고 있던 붕대를 풀어주었다.

이제 그녀는 소리를 지르든, 불평을 하든 자유롭게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녀가 선택한 건 침묵이었다.

괜히 신경이 쓰일 정도로 묵직한 자물쇠가, 그 입에 걸려 버리고 말았다.

여전히 잡혀 있는 거에 좌절한 건지,내가 약속을 안 지킨 것 같아서 실망한 건지, 뭔지…….

화를 참고 있는 것 같지도 않다.

그러기엔 기운이 없어도 너무 없어 보였다.

결국 내가 먼저 인내심이 끊어져 버렸다.

그녀의 맞은편 벽에 기대어 서서,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의외로 조용하네. 욕이라도 할 줄 알았더니.”

살짝 메아리 낀 목소리가 조용히 동굴 안을 울리자, 그녀의 귀가 움찔거리는 게 보였다.

그러나 입은 여전히 꾹 닫힌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혹시 얌전한 척하는 거야? 이제 와서 그래도 안 속으니까 괜히 애쓰지 마.”

“……”

“아니면 그냥 말을 섞기 싫은 건가? 인간에 용사에 고문범에 납치범이라서?”

……응? 말하고 보니 입을 닫고 있는 게 당연해 보이는데?

나도 누가 날 고문하고 납치하면 말 섞기 싫겠다.

음, 그냥 건드리지 말고 가만두는 게 낫겠군.

나는 그대로 바닥에 털썩 앉아, 동굴벽에 등을 기대었다.

“……말하기 싫으면 하지 마. 혀만 안 깨물면 돼.”

“왜 나 살렸어?”

하기 싫으면 하지 말라니까 말을 하네.

뭐지? 청개구리 심보인가?

바닥에 둔 야광석등을 바라보며, 나는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뭔 소리야?”

“사제에게 들었어. 나 사형 선고받았다며? 왜 막았어?”

“댁 살리려고 한 거 아냐. 그 왕이라는 놈이 우릴 무시하길래 한 마디 한 거지.”

만약 그 왕이 정중했다면 블루벨은 지금쯤 형장에 섰을 거다.

그녀의 처우는 엘프들에게 맡길 생각이었으니까.

“그럼 여기는 왜 데려온 거야?”

“인질 삼으려고.”

“이제 와서 뭘 얻을 수 있다고?”

“적어도 댁 아버지의 칼은 무뎌지겠지.”

무심하게 대꾸하자, 블루벨이 드디어 고개를 들었다.

아무 감정도 서리지 않은 눈으로 나를 마주보며, 그녀가 입을 열었다.

“그 사람은 내 아버지가 아니야. 날 키운 사람일 뿐이지.”

“양아버지도 아버지인데.”

“……아버지는 딸을 여자로 보지 않아.”

그건 그렇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꽤 친한 거 같던데? 술도 같이 마시지 않아? 다른 엘프들에겐 비밀로 하는 거 같던데.”

“……150년 동안은 아버지였으니까.”

재차 시선을 내리깔며, 그녀가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엘프에게 부모라 할 건 돌에렛밖에 없어. 아니……, 그 품에서 태어난 엘프는 내가 마지막이었지.

아무튼, 돌에렛이 낳은 엘프는 손위형제나 자매가 맡아서 독립할 때까지 돌보게 되어 있어. 그래서 블루스타가 날 키운 거야.”

엘프는 꽃에서 태어난다.

블루벨은 그렇게 말했다.

왕궁 뒤에 있던 그 약간 꺼림칙한 나무, 이들의 어머니 나무인 돌에렛에는 한때 꽃봉오리가 가득 맺혀 있었다.

그 중에서 해마다 서너 송이의 봉오리가 나무에서 떨어져, 그늘 덮인 땅 위에 살포시 내려앉았다.

“땅에 닿은 봉오리들은 순식간에 커져선 활짝 피어나. 그리고 그 안에서 엘프가 걸어나오는 거야.”

“……진짜?”

“나는 본 적 없지만, 내 윗세대는 다 그렇게 태어났대. 블루스타도 그렇고.”

그렇게 태어난 엘프는 팔구백 년을 숲에서 살아간 뒤, 숨을 거두는 즉시, 그 자리에서 흙으로 돌아간다.

인간처럼 땅에 묻어 썩히거나 불태울 필요 없이, 알아서 흙이 되는 것이다.

블루벨의 목소리가 조용히 동굴을 울렸다.

“원래는 태어나자마자 성체였어. 오백 년 전까지만 해도 그랬대. 하지만 삼백 년 전부터 점점 어린 형체로 태어나기 시작했어.”

그 쇠퇴는 급속도로 이루어졌다.

엘프들은 해마다 점점 어린 모습으로 태어났고, 경험할 리가 없는 ‘성장’을 통해 성체가 되었다.

돌에렛 역시 점차 힘을 잃어가는 건지, 꽃봉오리로 가득했던 나무에 빈 자리가 생기기 시작했다.

해마다 땅에 내려앉는 꽃봉오리도 서너 송이에서 하나로 확 줄어버리고, 나중엔 그 봉오리가 피는 시간 간격마저 늘어나고 말았다.

“나는 오 년만에 태어난 거래.”

야광석등을 바라보며, 그녀가 중얼거렸다.

“마지막 꽃봉오리에서 말야.”

그래서였을까?

오 년 만에, 그것도 마지막 꽃에서 태어난 블루벨은 완전한 성체의 모습이었다.

……나무가 마지막 남은 힘을 죄다 쥐어짜기라도 한 것처럼.

그러나 나무는 블루벨을 만들 때, 균형을 고려하진 않은 듯했다.

처음부터 다 자라 있었던 건 몸뿐이고, 정신은 텅 비어 있었던 것이다.

마지막 꽃에서 태어난 엘프에겐 아무 의식도 없었다.

그저 숨을 쉬고 있을 뿐, 생존욕구조차도 구비되어 있지 않았다.

……그야말로, 살아있는 인형이나 다름없는 상태였던 것이다.

거기까지 들은 후, 나는 너무나도 어리둥절한 나머지, 생각나는 대로 입 밖에 내고 말았다.

“안 물어봤는데…….”

“……”

헉.

블루벨의 눈동자에서 빛이 사라져갔다!

나는 황급히 손까지 내저으며 말을 덧붙였다.

“아, 아닙니다. 친히 말씀해주시는 게 너무 황송하다는 뜻이었습니다. 계속하시죠, 블루벨 님. 예.”

블루벨은 나를 건조한 눈으로 노려보더니, 콧방귀를 뀌며 고개를 홱 돌렸다.

“그래~ 용사씩이나 되는 대~단한 인간님인데, 나 같은 떨거지 엘프의 얘기는 하나도 재미없으시겠지! 묻지도 않았는데 혼자 떠벌떠벌대서 참 미안하게 됐네!”

“아, 아냐. 아니라니까? 진짜 깜짝 놀란 거야. 그리고 댁 이야기도 되게 흥미롭고……!”

……응?

근데 내가 왜 허둥대면서 변명하고 있지?

저 녀석이 땡깡을 피우건 말건 그냥 냅두면 되잖아.

“……흥. 입 바른 소리하긴.”

뾰로통한 얼굴로 중얼거리면서도, 블루벨의 얼굴엔 약간 활기가 돌아온 듯했다.

나를 힐끔거리는 그 눈에는 어떤 부정적인 빛도 품지 않고 있다.

……희한하네.

“흠…… 나랑 말 섞는 게 싫지 않은가봐?”

어깨를 푹푹하기도 했고, 옷도 좀 풀었었는데.

그런 짓을 당하면 보통 쌍욕을 퍼붓거나, 싸늘하게 노려보며 침묵하지 않나?

어느 쪽이든 복수의 순간만 손꼽아 기다리면서, 속으로 칼을 갈겠지.

근데 이 엘프는 그런 기색이 없다.

이상해.

의아한 마음에 그렇게 묻자, 블루벨의 눈이 일순 커졌다가 다시 가늘어졌다.

그녀는 다시 시선을 내려, 빛을 내뿜고 있는 야광석등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러게. 너한테 온갖 심한 짓은 다 당했으니 욕하고 저주를 퍼부어도 모자랄 텐데, 왜 내 이야기를 했을까?

……왜 널 죽여버리고 싶지 않은 걸까?”

“죽었으면 좋겠다며?”

“왕…… 일족이 용사의 죽음을 바라니까. 넌 용사잖아? 그러니 죽어야 해. 내 임무이기도 했으니까, 가급적 내 손에 죽어줬으면 했어.”

거 되게 솔직하네.

무슨 모닥불 쬐면서 앉아 있는 것도 아닌데, 너무 술술 얘기해주는 거 아냐?

“……하지만 그것도 다 끝났지. 용사를 죽이긴커녕 애꿎은 인간 왕자만 건드려버렸고, 그래서 사형 판결을 받았고.”

자조하듯 씁쓸히 웃으며, 그녀는 제 무릎을 감싸 안고 그 위에 얼굴을 대었다.

그대로 시선만 옮겨 나를 올려다보며, 그녀는 속삭이듯이 말했다.

“그냥 너 따라갈까봐.”

“……”

“나, 꽤 쓸 만하지 않아? 너희 죄다 근접전이 특기잖아. 내 활이 큰 도움이 될 것 같은데?”

희미하게 미소를 지은 채, 그녀는 내 대답을 기다리듯이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진심인 건지 농담인 건지…….

어째서인지 눈을 빛내고 있는 그녀를 향해,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수작 부리는 거냐?”

“……수작이라니?”

“음…… 있잖아, 블루벨,”

공연히 머리를 긁적이고, 이번에는 내가 바닥 위의 야광석등에 시선을 고정했다.

왠지, 의아한 듯이 눈을 깜빡이는 그녀를 마주하면서는 말이 나오지 않을 것 같았다.

“혹시 억지로 호감 사려는 거면 하지 마.”

“……”

“나는 말야, 속으론 꼴도 보기 싫고 꺼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겉으론 알랑방귀 뀌면서 앵기는 게 제일 싫거든. 그 반대도 싫어. 쓸데없이 괴롭히는 거니까.

그 다음 싫은 게 강도 새끼이고.”

뭐, 강도질은 생계 때문에 저지르기도 하니까, 경우에 따라선 용서해줄 수도 있다.

당연히 대가는 착실히 거두고서.

“……근데 처음 건 아니야. 용서가 안 돼. 설령 나중에 진심으로 호의를 가지고 나를 대한다고 해도, 내가 그걸 못 믿거든.”

내가 고향 마을 사람 일부를 아직도 용서하지 못하는 것처럼.

나를 대하는 말투도, 태도도 그때와는 다르지만, 여전히 그들을 의심하는 것처럼.

“그리고 그 때문에 인간불신이 심해졌다고 댁을 더 미워할 거야.”

……그 몇몇 사람 때문에, 고향 사람 모두와 거리를 두게 됐다고 원망하던 것처럼.

어느덧 내 시선은 바닥에 놓인 야광석등을 떠나, 이 동굴의 입구 쪽에 머물렀다.

둔덕 속에서 곰 사체를 신나게 해체하고 있을 소꿉친구를 떠올리며.

……메린은 어땠을까?

‘사람 껍질을 쓴, 사람 아닌 것’으로 취급받을 때마다 무감정한 표정을 지으면서, 그녀는 무슨 생각을 품고 있었을까?

안이 보이지 않는 흙덩이에 시선을 고정한 채, 나는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니 다시 묻는다. 솔직하게 대답해줘.”

천천히 눈을 돌려 블루벨을 보았다.

그녀는 여전히 무릎을 끌어안고, 그 위에 고개를 얹은 채 바닥을 쳐다보고 있었다.

“나를 증오해?”

그런 그녀를 빤히 바라보며, 조용히 그 물음을 담았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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