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0화 〉 166화 : 이상한 녀석이야 (2)
* * *
얼마간 침묵이 이어진 후, 블루벨의 입이 서서히 열렸다.
시선은 여전히 야광석등에 머무른 채로.
“……이상한 걸 묻는구나. 그걸 누가 솔직히 대답한다고?”
“그런 사람이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지.”
그녀의 입이 진심을 담고 있든 말든 상관없다.
그 진위를 파악하는 건, 어차피 내 귀가 아닌 눈이니까.
나는 그녀가 대답할 때, 단 두 가지, 그녀가 말을 담을 때의 표정, 그리고 그 눈동자를 볼 것이다.
말은 아무 소용이 없다.
혀는 머리의 통제를 받아 움직이기 때문에, 얼마든지 진심을 숨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표정과 눈동자는 다르다.
이들은 머리가 아니라 마음이 담당하는 영역이기 때문에, 특수한 훈련을 받은 사람 외에는, 그 두 가지에서 흘러나오는 감정을 절대로 숨기지 못한다.
물론 나는 독심술사가 아니라서, 그 사람의 속마음을 구구절절 알 수는 없다.
그냥 이 사람이 뻥을 치냐, 안 치냐만 알 수 있지.
무슨 명백한 근거가 있는 건 아니고, 그냥…… 보고 있으면 감이 온다.
아, 이 사람이 거짓말을 하는구나~ 하고.
겉과 속이 다르면 다를수록 그 느낌은 더 강하게 왔다.
그리고 애석하게도,아직까지 오해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정말, 애석하게도 말야.
가만히, 블루벨의 입이 다시 열렸다.
“……만약 내가 너에게 진심으로 호의를 품고 있다고 하면? 믿을 거야?”
“두 번 더 물어보고.”
그래서 목소리와 눈빛의 대답이 일관적이라면 믿겠지.
속으로 ‘고통을 즐기는 사람’이라는 딱지를 붙이겠지만.
“그럼 내가 널 찢어발겨서 거름으로 뿌리고 싶다고 하면?”
“세 번은 더 물어볼 거야.”
“……왜?”
여전히 시선을 내리깐 채, 그녀는 이유를 묻는 게 의무라는 듯이 딱딱한 말투로 물었다.
야광석등의 빛에 훤히 드러난 그녀의 눈을 보며, 나는 살짝 미소지었다.
“처음엔 다들 절제하거든.”
마치 부글부글 끓고 있는 솥처럼, 사람은 마지막 한 가닥의 이성으로 뚜껑을 만들어 자신의 속마음을 덮는다.
그러니 같은 걸 두 번 더 물으며 그걸 건드리는 거다.
말 그대로 뚜껑이 열리도록.
그렇게 해서 조금이라도 뚜껑이 열리면……
그 틈으로 내용물이 넘쳐 흐르게 된다.
예의 때문에 참고 억누르고 있던 속마음이, 그대로 콸콸 다 쏟아져 나오는 것이다.
사실 굳이 그럴 필요는 없긴 해.
솥에서 나는 냄새로 뭔 요리인지 대강 알 수 있는 것처럼, 사람 속마음에서도 어느 정도 분위기가 풍기니까.
“하지만 탈탈 털어버리는 게 좋잖아? 그래야 아무 미련도 안 남지.”
후회는 남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건 그 사람의 몫이지, 내가 신경 쓸 게 아니다.
솥에 눌어붙은 찌꺼기는, 솥 주인이 알아서 처리해야지.
“일부러 그 고생을 해? 혹시 욕 먹는 게 취향이야?”
“아니, 난 지극히 평범한 감성이야. 그래서 솔직히 힘들어. 근데 어쩌겠어? 내가 일부러 터뜨린 건데 감수해야지.”
기가 막히다는 듯이, 그녀가 콧방귀를 뀌었다.
“취향도 아니면서 그런다고? 너 정말 이상한 녀석이구나.”
“내가 할 말이야. 그래서, 대답은?”
“……”
침묵에 잠긴 말을 끌어내듯이, 야광석등에 머물러 있던 그녀의 눈길이 서서히 올라왔다.
진한 녹색 눈동자를 무심하게 깜빡이며, 그녀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둘 다야.”
“……”
“너랑 같이 있던 거, 솔직히 좋았어. 넌 나를 무조건적으로 긍정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덮어놓고 싫어하지도 않았으니까.
나도 누구 눈 신경 쓸 필요 없이,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으로 다닐 수 있었고.”
흠, 모든 엘프의 선망을 받는 건 아닌 모양이군.
그런 걸 보면, 역시 엘프의 나라도 사람 사는 동네였다.
좀 많이 지랄맞아서 그렇지.
“하지만 네가 나한테 한 짓을 생각하면…… 죽기까지 두들겨 패고 싶어. 생각만 해도 속이 끓어올라!
망설임없이 칼로 찌르면서 뭐? 미안해? 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블루벨은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리고,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분통을 터뜨렸다.
“나한테 죽을 뻔했으면서 내 속을 자꾸 떠보려고 하고! 죽어도 상관없다며 실험에 써먹으면서, 정작 몸의 상처는 고쳐주고!
그러면서 마구 상처를 입히고, 옷까지 벗기려 들고! 그러면서 진심으로 미안해하고, 그 두 변태 새끼들을 혼내주고!
인질로서 가치는 별로 없다고 하면서, 죽을 뻔한 걸 살려주고!
대체 어느 쪽이야? 왜 자꾸 오락가락 해? 왜 사람 헷갈리게 하는 거냐고!! 순수하게 미워할 수가 없잖아!!”
건드리지 않았는데도, 그녀는 알아서 자신의 속을 쏟아부었다.
그런 그녀를 묵묵히 지켜보면서, 나는 그녀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너 같은 미친놈은 싫어. 진짜 두 번 다시 보고 싶지 않아.
……근데,”
한껏 토로한 그녀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리며, 눈가에 물기가 어리기 시작했다.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듯한 얼굴로, 그녀는 목소리를 쥐어짜내듯이 힘겹게 말을 이었다.
“너만큼, 날 받아준 사람은 없어. 내 말을, 내 행동을, 아무 사심없이 받아들여준 사람은, 네가 두 번째란 말야!
그래서 미워할 수 없어. 미워하기, 싫어……! 하지만 용서할 수도 없어. 너랑 있으면 편한데, 너를 보면 화가 나!
머리가 마구 뒤엉키는 거 같아! 진짜 미칠 거 같다고!!”
말을 토해낸 후, 그녀는 마침내 고개를 떨구었다.
어깨를 떠는 그녀에게서 얼마간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이윽고, 그녀는 크게 훌쩍이며 다시 고개를 들고, 완전히 젖은 눈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마, 흑, 만족해?”
“음…… 뭐라고 해야 하나…….”
주의 깊게 관찰할 필요는 전혀 없었다.
아주 그냥 온 몸으로 감정이 마구 뿜어져 나오는 게 눈에 보이는 것 같았으니까.
잠시 허공을 보며 머리를 긁적인 후, 나는 피식 웃었다.
“당신 되게 이상한 사람이구나.”
“내가 할 말이야, 이 미친놈아!”
훌쩍이면서 그녀는 다시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을 보자, 내 입에 씁쓸한 웃음이 절로 떠올랐다.
……이 엘프, 진짜 바보다.
내가 저지른 마지막 짓만 기억하고, 나머지 것들은 죄다 가식으로 치부하거나 무시해버리면 되는데.
그러나 그녀는 그러지 않았고, 내 행동이 죄다 진심에서 나온다는 걸 안 모양이다.
그 탓에 이도저도 못하고 속만 끓이고 있는 거고.
“……”
얼굴에 웃음이 떠오르는 걸 막을 수 없었다.
다른 사람에게 내 진심이 전해지는 건, 그 종류가 무엇이든 기쁜 법이다.
그 짝사랑남 B가 그랬던가?
블루벨이 순수하고 맑은 성정을 지녔다고.
술 퍼먹고 날강도질을 한 시점에서 맑은 건 글렀지만, 어느 정도 순수하긴 한 것 같다.
……태어날 땐 의식, 그러니까 자아가 전혀 없었다고 했던가?
그럼 그녀가 이런 성격을 가질 수 있게 된 건, 그 친위대장이 애쓴 덕분이겠지.
변태 놈들의 손에 그녀가 망가지지 않도록 지키고 돌본 것이리라.
역시 본 바탕은 괜찮은 사람인 것 같아.
근친성애자라 그렇지.
……문득, 머릿속에 생각 하나가 슬며시 떠올랐다.
“……저기, 블루벨,”
그 생각을 거부하지 못하고, 나는 불쑥 물었다.
“댁이 자아를 갖는 데, 얼마나 걸렸어?”
“……뭐?”
“생존욕구도 없는 상태로 태어났다며. ……댁이 다른 엘프들과 같이 섞여 산 게 몇 살부터냐고.”
“단체, 끅, 단체 활동 말하는 거야? 후, 학교 들어간 게 열 다섯 살인데.”
이따금 숨이 막혀 꺽꺽거리고, 코를 훌쩍이면서도 그녀는 성실하게 대답해주었다.
“열 다섯…….”
……생각보다 짧네.
물론 생존욕구조차 없는 상태였으니, 블루스타는 아마 밤낮으로 그녀의 옆에 붙어서 돌보았을 거다.
텅 빈 인형을 십오 년만에 사람으로 바꿀 정도로, 그야말로 지극정성을 다했겠지.
……아니 근데 어떻게 성애로 이어지냐고. 그건 진짜 이해가 안 된다.
“근데 그걸 왜 물어?”
“……그냥 조금, 궁금해서.”
훌쩍거리면서 묻는 그녀의 눈길을 피해 야광석등을 바라보며, 적당히 핑계를 대어버렸다.
……만약,
만약 메린에게도 제대로 된 양육자가 붙어 있었다면…….
그녀의 부모님이 두 분 다 살아서 그녀를 돌보았다면, 지금과는 다른 모습이,
“아니요.”
명랑한 목소리가 내 상념을 가차없이 깨뜨렸다.
조용히 향한 시선의 끝에, 로나가 나를 보며 생긋 웃고 있었다.
“그 분은 달라요.”
그녀는 마치 내 속을 들여다보기라도 한 것처럼, 딱 잘라 말했다.
“물론 지금과 좀 다르긴 하겠죠. 그래도 카엘 님이 상상하시는 그런 모습은 절대 아닐 거에요.”
“……내가 뭘 상상했다고.”
“평범~한 옷을 입고, 평범~하게 웃는 모습 아니에요?
훗후. 지금은 또 어떻게 알았냐고 생각하고 계시죠? 로나는 다 안답니다!”
그렇게 말하며, 로나는 헤실헤실 웃는 얼굴로 나를 빤히 보았다.
내가 조금 전, 블루벨의 진심을 보려고 그녀를 관찰했던 것처럼.
……속마음을 숨기지 못하는 건 나 역시 마찬가지인 거다.
그리고 로나는 나보다 훨씬 어리면서, 몇 단계는 더 위에 있는 고단수였다.
“나 참, 그것도 훈련받아서 된 거냐?”
“네, 물론이죠! 전투사제는 수사를 잘해야 하거든요.”
겸연쩍은 마음에 틱틱대는데, 별안간 로나가 히죽 웃었다.
저 사악한 미소……!
아니 이번엔 또 뭘 걸고 넘어지려고?!
“아쉽긴 아쉬우시겠어요! 만약 그 분에게 부모님이 계셨다면, 지금쯤 두 분이서 살림 차리고 계셨을 텐데요!
어렸을 때부터~♪ 양가 부모님이 묵인한 사이~♪ 꺄아아~”
“시끄러, 임마!”
저 자식이 이젠 아예 곡조까지 붙이고 있네!
왜 점점 발전하는 건데?!
“사실 저도 슬슬 소재 다 떨어진 줄 알았는데요. 카엘 님이 계속 반응하셔서 그런가, 계속계속 샘솟네요! 아, 재밌다.”
“악한 마귀야, 로나에게서 썩 떠나가라!!”
오른손에 딱밤을 장전한 후, 녀석이 키득거리는 틈을 타 잽싸게 거리를 좁혔다!
따악!
그녀의 이마에서 맑고 고운 타격음이 나면서, 동굴 안에 잔잔히 퍼졌다.
“히으으…….”
“후우…… 주께서 역사하셨도다.”
바닥에 웅크려 신음하는 사제님 앞에 서서, 나는 성호를 긋고 감사 기도를 올렸다.
“……이런 상황에서 장난칠 생각이 나?”
“장난이라니. 엄청 진지한데.”
단호히 대답하는 나를, 블루벨은 코를 훌쩍이며 건조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자리로 돌아온 나는, 블루벨이 훌쩍이는 소리가 잦아들었을 즈음, 재차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그래서, 댁은 이제 어쩔 거야?”
“……뭘?”
“사형수잖아. 왕명에 따를 거야? 그럼 우리 도와줘. 그래야 확실하게 사형당하……아니요, 아무것도 아닙니다.”
우와, 세로동공이라 그런지 눈 부릅뜨니까 엄청 무서워!
“하…… 진짜 너 같은 놈이 용사라니 말세다, 말세. 어떻게 그런 농담을 하니?”
농담 아니었는데.
그러나 그냥 입 다물고 가만히 있기로 했다.
때로는 숨겨야 하는 진실도 있는 법이니까.
블루벨은 야광석등을 내려다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솔직히 모르겠어. 널 죽이면 사면받을 수 있을 거 같은데, 가능할 거 같지 않아. 죽이기도 싫고.”
……‘죽이기 싫다’는 것보다 ‘불가능하다’는 게 더 큰 거 아닌가?
불가능하지 않다면, 죽이기 싫어도 지난번처럼 푹 해버릴 거라는 거잖아?
따지려 했지만, 블루벨의 말이 곧바로 이어지는 바람에 때를 놓치고 말았다.
“그렇다고 널 도울 수도 없어. 널 돕는 건 일족을 배신하는 거니까. 하지만……,”
“일족이 이상하다?”
내가 대신 말을 맺어주자, 잠시 침묵을 지키던 그녀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블랙펄이 말한 게 너무 걸려. 장로들이 강령술을 허락하다니…… 믿기지가 않아.”
산맥에서 만난 블루벨의 동기, 블랙펄은 말했다.
그가 거대 그리폰을 죽음에서 되살린 것을 장로들에게 전했더니, 자신을 격려하더라고.
“……세상에 태어난 생명은, 언젠가 반드시 죽음을 맞이해야 해.”
그리고 죽었다면, 이 세상에서 영영 떠나야 한다.
그 몸은 대지로 돌아가, 또 다른 생명을 낳는 초석이 되어야 한다.
그것이 순리.
생명의 순환이다.
그 흐름을 거스르는 것은 결코 용납되지 않는다.
특히나 엘프에겐 더더욱.
“생명의 순환을 지키는 것, 그게 엘프에게 주어진 사명이야.”
“흠…… 유니콘처럼 종족 단위로 가지는 사명이야? 뭘 어떻게 해서 지키는데?”
“몰라.”
“……”
사명이라며?
어이가 없어서 빤히 쳐다보자, 블루벨은 뺨을 발갛게 물들이면서 소리쳤다.
“무, 뭘 하는지는 안 배웠단 말야! 그래도 그런 사명이 있는 건 진짜야! 태어나면서부터 아는 거라고.
너도 블랙펄 봤잖아. 그 놈, 원래 그렇게 안 생겼었어.순리를 거스른 벌로 저주를 받아서 그래.”
“흠…… 강령술 부작용으로 해골처럼 쪽 말라버린 게 아니고?”
아니면 그리폰을 되살릴 때, 자신의 생명력도 썼거나.
내 추측에, 로나가 고개를 저었다.
“강령술사는 다른 생물의 생명력만 바쳐요. 자신의 걸 바쳐버리면, 의식을 진행할 수가 없잖아요.”
그렇군.
그럼 정말로 순리를 거스른 대가로 저주를 받아, 그런 흉측한 몰골이 된 건가.
흠…… 종족 단위로 부여되는 사명인데, 뭘 해야 하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그걸 어긴다면 반드시 대가를 치른다.
진짜 희한하네.
어기지만 않고 그냥 살아도 되는 거면, 뭐하러 사명을 부여한 거지?
……그냥 어기지 말라는 걸 강조한 건가?
생각해보면, 유니콘도 ‘순결과 무구를 지키는 것’이 사명이라지만 여기저기 쏘다니진 않잖아.
어쩌면 그 사명이란 걸 수행할 때에, 엘프들 스스로 그 때와 방법을 알게 되는 건지도 모른다.
사명 자체는 태어나면서부터 알고 있다고 하니까.
그녀는 어딘지 시무룩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아무튼…… 뭘 해야 할지 잘 모르겠어.”
“그래? 그럼 우리 도와줘.”
“……”
아니 모르겠다고 하니까 알려준 거구만, 왜 노려보고 지랄이시지?
날 보면 화가 난다더니, 그것도 좀 섞여 있는 거 같다.
정말 어이가 없네.
“뭐. 어차피 손이 비잖아.”
내 말에, 블루벨이 곧바로 발끈하며 소리쳤다.
“너 내 말 뭘로 들었어? 못 돕는다고 했잖아!”
“아, 그래. 알았어. 그럼 ‘공공의 목적을 위해 잠시 휴전’하자. 이러면 되지?”
“……뭐?”
표정을 구기는 블루벨에게,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난 여기 팔려온 인간 애들을 찾아야 돼. 그러려면 여기 주민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블루벨, 댁은 일족의 장로들이 의심스럽다고 했잖아? 그러니 댁의 의문을 풀 겸, 인간 애들도 같이 찾자는 거지.”
이곳은 엘프만 사는 땅이니, 우리 네 사람은 공공연하게 돌아다닐 수가 없다.
조사를 하려면 주민들에게 물어보고, 여기저기 기웃거려야 하는데 그럴 수가 없는 것이다.
즉, 우리는 엘프가 필요하다.
마침 블루벨은 면식이 있기도 하니, 그녀가 도와준다면 나로선 편하긴 한데…….
“말이 돼? 난 사형수야. 넌 용사이고. 수배가 내려져 있을 게 뻔한데 그걸 어떻게……”
“그건 생각해봐야지. 아무튼 어때? 협력할래?”
블루벨이 멍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와중에, 갑자기 불빛이 움직였다.
로나가 바닥에 있던 야광석등을 주워든 탓이었다.
로나는 의아해하는 나를 보며 생긋 웃더니, 그 자리에 선 채로 물었다.
“음, 카엘 님, 만약 그 엘프가 우리와 협력하겠다고 하면요. 밧줄 풀어주실 거에요?”
“어? 어어, 아마도?”
협력하게 되면 어떻게든 힘을 빌리게 되는 거니까, 당연히 풀어줘야지.
“그 엘프가 카엘 님을 해치지 않을 거라고 믿으시는군요.”
“어? 어, 응.믿어.”
“그렇군요.”
고개를 끄덕이더니, 로나는 불현듯 동굴벽 쪽으로 폴짝 뛰었다.
그와 동시에,
뭔가 엄청나게 큰 게 이쪽으로 날아왔다!
“뭐야?!”
뭔지 알 수 없는 커다란 그것은, 푸벅 하는 묵직한 소리를 내면서 나와 블루벨 사이에 떨어졌다.
순식간에 흙먼지가 피면서 눈과 코가 따끔해졌다.
기침하면서 손을 휘휘 저어, 조금이라도 흙먼지를 더 빨리 날리려 애를 썼다.
그런 내 귀에, 터벅터벅 하는 발소리와 함께, 싸늘한 목소리가 들렸다.
“……믿는다고?”
내가 아는 목소리일 텐데, 메아리가 잔뜩 들어간 탓에 굉장히 낯설게 들렸다.
“……네가 드디어 미쳤구나, 카엘 에스트렐.”
음산하게 중얼거리며, 메린이 흙먼지 속에 서서 나를 내려다보았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