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1화 〉 167화 : 아무튼 협력하자구 (1)
* * *
사람은 보통 놀라면 비명을 지른다.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위기를 알리려는 본능이겠지.
달리 말하면, 그 본능을 작동시킬 만큼의 정신머리는 남아있다는 소리가 된다.
“……”
그런 면에서 난 글렀다.비명도 안 나오니까.
그래도 메린을 보자마자 숨이 넘어가지 않은 게 어디야?
대단하다고 칭찬해줬으면 좋겠다.
메린은 자신이 던진 커다란 무언가의 앞에 우두커니 서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다.
환히 빛을 내고 있는 야광석등을 잡은 채, 손을 아래로 축 늘어뜨리고 있다.
그 탓에 불빛이 그녀의 콧잔등까지만 닿아서, 눈가에 어슴푸레하게 그늘이 끼어 있다.
그리고 그 상태로 두 눈을 부릅뜨고 있다!
그것도 완전히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우와, 불빛 때문에 눈에서 빛이 뿜어져 나오는 거 같아!
진짜 장난 아니게 무서운데요!!
“……인질로 삼는 건 수긍했어. 유용하니까.”
조용히 읊으며, 두 주홍빛 눈동자가 옆쪽을 향했다.
갑작스럽게 시선을 받은 블루벨이 움찔거리며 숨을 삼켰다.
“……목숨을 구해준 것도 납득했어. 그게 카엘, 네 성격이니까. 근데 뭐……?”
다시 그 눈이 나를 향하더니, 저러다 눈이 튀어나오는 거 아닐까 싶을 만큼 크게 벌어졌다.
음, 얼굴이랑 몸이 굳어서 다행이야.
안 그랬으면 완전히 새파랗게 질려선 벌벌 떨었겠지.
……아무리 무서워도, 진짜로 공포에 질린 표정을 그녀에게 보여줄 순 없다.
한겨울 추위 앞에 내던져진 것처럼 덜덜 떨고,
다리가 풀려서 일어나지 못하고,
감기로 목이 막힌 듯이 기침하면서 쌕쌕대면서,
온 몸으로 그녀에게 겁을 먹었다고 티 내는 건 상관없다.
하지만 얼굴은 안 돼.
그것만은 절대 보일 수 없다.
핑계를 전혀 댈 수 없으니까.
몸이 떨리는 건 춥다고 하면 돼.
호흡이 흐트러진 건, 사레가 들렸다고 하면 되고.
진실을 좀 숨겼을 뿐이지, 거짓말을 하는 건 아니니까 괜찮아.
하지만 표정은, 그 어떤 이유를 대어도 어물쩡 넘어갈 수 없다.
그러니 안 된다.
내가 그녀에게 큰 공포를 느끼고 있다는 걸 보여선 안 된다.
그녀 나름대로 추측해서 알고 있을 그 사실을, 확정시키면 안 되는 것이다.
……나까지 그녀에게 그런 상처를 줄 순 없어.
어렸을 때 신나게 준 걸로 충분해.
하지만 이대로는, 그녀에게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을 텐데.
“협력을 해……? 그래, 협력. 좋다 이거야. 근데 말야,”
말을 계속 꺼내던 메린은 별안간 내 앞에 쪼그려 앉더니, 눈높이를 나와 일직선으로 맞추었다.
굳어버린 건 얼굴만이 아니라 눈도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살벌한 기운을 마구 뿜는 주홍빛 눈동자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와, 심장이 두근거리는 동시에 죄어들고 있어.
………살려줘!
“밧줄을 풀어줘……? 안 죽일 걸 믿어……? 믿는다고?!”
갑자기 터진 고함에 귀가 찌잉 울렸다.
그녀는 내게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면서, 큰 소리로 말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호구 짓도 정도껏 해, 멍청아!! 저 년은 널 죽이는 게 목적이야!! 실제로 죽을 뻔하기도 했고!! 근데 밧줄을 풀어준다고?! 너 또 졸려서 대가리 굳었냐?!
넌 저 년을 고문했어!! 중간에 뭔 일 있지 않았으면 완전히 벗겨버릴 거였고!! 원한을 샀을 게 뻔하잖아!! 그런데도 널 안 죽일 거라는 게 말이 되냐?!”
지근거리에서 터지는 고함소리에 귀가 따가운데, 그 소리가 동굴 안에 메아리로 울리면서 귀를 마구 울려대었다.
아, 멀미나는 거 같아.
……이렇게 딴 생각이라도 하지 않으면, 여러모로 곤란해질 거 같았다.
노기를 터뜨리고 있는 그녀는 그 정도로 무서웠다.
“아, 안 죽일 거야! 어차피 하지도 못할,”
“아가리 닥쳐, 미친년아!! 너한테 안 물어봤어!!”
“히으…….”
……자기변호를 하려고 했던 건지, 블루벨은 끼어들었다가 공연히 욕만 얻어먹고 말았다.
가엾기도 하지.
“너, 저 말에 넘어간 거야? 안 죽인다고 하는 말만 믿고 그러는 거냐?!”
드디어 그녀가 나에게 답을 요구했다.
으, 대답을 해야 하는데, 입까지 완전히 굳어서 떨어지지 않아!
하지만 온 힘을 다 써서라도 입을 열어야 돼!
안 그러면 메린의 분노가 더 커져버릴 거야!
“……아, 냐…….”
겨우겨우 입술을 달싹일 수 있었다.
떨리며 나오는 숨소리에 덮인 탓에, 그녀는 듣지 못했는지 한쪽 눈을 찌푸렸다.
“우물거리지 말고 똑바로 말해!!”
“아, 아냐. 아니야. 아니야, 메린. 그런 거 아니야.”
그녀의 일갈에 입이 절로 떨어졌다.
단단히 굳어버렸던 얼굴근육들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그녀가 내 얼굴을 붙잡는다면 여러모로 끝장이지만, 다행히 메린의 손은 그대로 가만히 있었다.
대신, 그녀는 여전히 목청을 높여 소리쳤다.
“아니면 뭔데. 뭘 근거로 믿는다는 건데!!”
“그, 메린, 저기, 으……, 호, 화난 거 아는데, 소리 좀…….”
“내 소리가 뭐!!!”
“빌어처먹게 크니까 줄이라고!!!”
평소대로 공포심을 누르려고 맞고함을 친 순간,
“시끄러, 이 새끼들아!!”
삐이이
……파랑새의 고함소리와 함께 귀가 울렸다.
얼핏 지나간 시야에, 메린이 두 귀를 감싼 채 바닥에 웅크리고 있는 게 보였다.
후, 나만 당한 게 아니군.
파랑새 녀석, 그래도 공정한 구석이……
“흐으으…… 나는 왜……”
“……”
……없네.
별 소리치지도 않은 블루벨까지 엎어져서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귓속을 날카롭게 울리는 소리가 사라진 후, 나는 다시 동굴벽에 기대어 앉았다.
그런 내 콧잔등에 파랑새가 앉더니, 내 이마를 콕콕 쪼며 말했다.
“말싸움하든 말든 상관없는데, 여기 동굴이다, 이 등신들아. 내 동족들이 바글바글 모여 있는 데라고.
바깥까지 소리 퍼뜨리고 싶냐? 어? 귀쟁이들에게 여기 있다고 알리고 싶어?그럼 그냥 밖에 나가, 새끼들아! 여기서 지랄하지 말고.”
“……야, 근데 나랑 메린은 그렇다 치고, 블루벨은 왜……?”
내가 묻자, 파랑새는 째짹, 짧게 울더니 대답했다.
“원흉이니까.”
“……”
큰 소리가 나게 된 원흉이라서 귀를 울려버린 모양이었다.
그건 핑계이고, 사실은 그냥 괴롭히고 싶었던 거 아냐?
“마, 맞아요. 에코는 심술쟁이거든요오…….”
늑대가 나와 메린의 사이에 불쑥 나타나며 말했다.
평소엔 잘 들리지 않는 그녀의 목소리가, 동굴 속에서 웅웅 울리면서 또렷하게 귀에 들어왔다.
“두, 두 분, 싸우지 말고 이야기를 하세요오……. 두 분 다 말귀 트여 있잖아요?”
그렇게 말하면서, 늑대는 내 다리 위에 철푸덕 엎드렸다.
푹신하면서 따듯한 기운이 느껴지며, 금방이라도 호흡이 막혀버릴 만큼 긴장된 몸이 점차 풀어지는 것 같았다.
……근데 난 싸운 적 없는데.
일방적으로 말로 처맞았지.
“……”
메린도 그대로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 뒤쪽, 동굴 입구에서 위슨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배낭에서 이것저것 꺼내고 있는 게 보였다.
……그래, 메린이 나왔다는 건 작업이 다 끝났다는 거지.
그럼 아까 얘가 나와 블루벨 사이로 던졌던 건…….
메린이 떨어뜨린 야광석등을 주워서 그 시커먼 무언가를 비추어보았다.
환한 빛이 홱 드리워지면서,
두 눈을 부릅뜬 채 입을 쩍 벌린 곰 대가리가 나타났다!!
“……!”
……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이번엔 내가 이를 악물고 참았으니까.
왜냐하면, 저 곰 대가리는 그냥 껍데기, 즉 가죽일 뿐이다. 내가 아무리 겁이 많다고 해도, 가죽 때문에 비명을 지를 순 없지!
근데 왜 하필 대가리가 내 쪽을 보고 있는 거야, 심장 떨어지는 줄 알았네!
나는 불빛을 치워버리고, 몸까지 아예 틀어서 메린과 마주 앉았다.
“……메린,”
“……”
조용히 부르자, 숙여져 있던 그녀의 고개가 들렸다.
불만이 두 눈에서 아주 그냥 철철 흘러 넘치고 있지만, 아까 같은 살벌함은 찾아볼 수……있긴 해도 좀 많이 줄어들어 있었다.
“여기서 애들 찾으려면 블루벨의 협력이 필요해. 근데 꽁꽁 묶어놓으면 제대로 도움을 받을 수가 없잖아. 안 그래?”
“그 엘프는 카엘 님을 보면 화가 치밀어 솟지만 말이죠~”
“……”
불쑥 끼어든 목소리의 주인을 쳐다보았다.
로나는 다른 곳을 쳐다보면서 혼자 발을 까닥거리고 있다.
말 꺼내기 전부터 저러고 있었구만?
혹시 열 넷이란 게 나이가 아니라 쟤가 숨기고 있는 꼬리 숫자 아니냐?
“……그딴 소리를 듣고서도 믿는다는 말이 나온다고? 역시 너,”
메린이 한층 더 얼굴을 찌푸리면서 말을 이었다.
“저 년 좋아,”
“아니라니까!! 악.”
발끈하며 소리치자마자 파랑새의 부리공격을 맞았다.
“새끼가 소리지르지 말라니까.”
“아니 얘가……! 되도 않는 소리를……!”
“어쩌라고, 그게 나랑 뭔 상관이야. 암튼 소리지르지 마라.”
“……”
억울해!!
메린, 이 자식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니까 나도 모르게 터져나온 건데!
억울해애애!!
“이 새끼가 속으로 지랄이네! 시끄럽다고!”
……연속 부리공격을 맞고 말았다.
후우, 엄청 아픈데 피는 안 난다.
혹시 살갗이 아니라 딴 데를 때리는 건가, 되게 신기하네.
“아무튼 메린, 그런 이유는 결코, 절대 아니니까, 제발, 그 소리 좀 하지 마.”
말을 딱딱 끊으며 강조해주었다.
근데 진짜 이해가 안 되네.
남녀 감정 같은 거 모르겠다는 녀석이, 왜 툭하면 저 엘프랑 날 엮는대?
“……네가 그랬잖아. 좋아하게 되면 바보가 된다고. 그러니까 저 엘프한테도 그런 거 아냐?”
의외로 완전히 뜬구름 잡는 소리는 아니었다.
한참 빗나가서 그렇지.
“야, 내가 바보인 건 너한테만 그런 거지, 저 엘프는 하등 상관이 없어. 애초에 말했잖아, 저 엘프는 내 취향 아니라고.
난 소아성애자가 아냐!”
“야, 이 새끼야, 너 그게 뭔 뜻이야?! 내가 뭐 어떻다고!”
가능한 메아리가 치지 않도록 소리를 줄이며 발끈해하는 블루벨이었다.
그 빠른 적응력에 감탄하는 마음을 담아, 솔직히 대답해주었다.
“키만 좀 큰 어린애잖아. 앞에는 평평하지, 옆은 좀 들어갔다가 말았지……. 꼭 위슨 같은데.”
괜히 처음 만났을 때 성별 헷갈린 게 아니야.
그러고보니 키도 위슨이랑 비슷했던 거 같은데.
그럼 진짜 덜 자란 거잖아.
근데 이게 성체라고? 여기서 더 안 자란다고?
“크흡…….”
“안타까워하지 마, 이 자식아! 내 몸매는 완벽해! 엘프의 정수 그 자체라고!”
아닌 거 같던데.
하지만 지금은 블루벨이 중요한 게 아니니 그냥 무시해주었다.
“후…… 아무튼 메린, 내가 저 엘프에게 그런 마음을 품을 일은 절대 없어. 천지가 뒤집어져도 없으니까 그 소리 진짜로 다시 하지 마라.”
“내가 먼저 사절이다, 이 미친놈아!”
왁왁 떠드는 소음은 한 귀로 흘려버린 후, 여전히 인상을 쓰고 있는 메린에게 다시 말을 걸었다.
늑대의 푹신한 털을 쓰다듬고 있어서 그런지, 한결 마음이 편해져 있었다.
“저 성질 까다로운 엘프는 말야, 내가 볼 때 되게 솔직한 성격이야. 그런 사람이 ‘죽이지 않는다’고 직접 말까지 했잖아. 그러니 날 안 죽일 거야.”
“……그 왕이 그랬잖아. 널 죽이면 저 엘프랑, 그 파란머리 엘프를 용서해주겠다고. 제 이익이 걸렸는데 배신을 안 하겠냐?”
“안 할 거야.”
조용히, 하지만 단호히 말했다.
“네가 있으니까.”
“……나?”
눈썹을 움찔거리며 되묻는 그녀를 향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너. 네가 옆에 계속 있으니까 날 죽일 수 없다고 했어. 난 그 말을 믿어.”
여기까지 오면서 날 지켜준 것처럼, 그녀는 분명 앞으로도 날 지켜줄 것이다.
……남자로서 좀 많이 한심한 꼴이긴 해도 어쩌겠어?
얘가 나보다 몇십 배나 더 강한걸.
그건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니 메린,
“나는 너를 믿어.”
그녀의 손을 잡으며, 힘있게 말했다.
“너를 믿으니까 블루벨에게 협력하자고 하고, 손발을 풀어줄 수 있는 거야.
만일 내가 저 엘프를 잘못 봐서 배신당하더라도, 네가 있으면 최소한 죽지는 않을 테니까.”
물론 부상은 입겠지.
그러나 목숨이 붙어 있다면 어떻게든 된다.
그녀는 이제껏 그래왔던 것처럼, 내 목숨을 구해줄 것이다.
그녀를 믿기 때문에, 나는 낯선 땅에서 다른 사람을 믿을 수 있다.
“……너한텐 부담주는 거겠지. 인간도 아니고 엘프니까. 그래도…… 안 될까?”
조심스럽게 물으며, 그 눈동자를 들여다보듯이 가만히 살폈다.
그녀는 찡그린 얼굴로 눈을 깜빡이다가, 이내 한숨을 쉬었다.
나머지 빈 손을 들어, 내 다리에 누워서 하품하는 늑대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그녀가 나지막이 말했다.
“……네 말대로 상대는 엘프야. 얼마든지 날 따돌리고 널 죽일 수 있어.”
“한 대는 버틸 자신 있어.”
“……그 다음 죽는 거 아냐.”
“그 사이에 네가 어떻게 해주겠지.”
여태 그래왔던 것처럼,이후로도 그래주겠지.
내 손을 뿌리치지 않고 맞잡아주는 그녀의 모습에서, 나는 또 다시 강하게 확신했다.
“……너 너무 나한테 다 맡기는 거 아니냐?”
“그러려고 너랑 같이 다니는 건데?”
이 여정이 시작되기 전, 나는 메린에게 그 이유를 대며 같이 가자고 했다.
엿 같은 사람들 틈에 두고 갈 수 없는 게 원래 이유였지.
하지만 그녀의 검술 때문이라는 그 표면적인 이유도 완전 거짓말은 아니다.
그러니 메린이 수긍하고, 나 스스로도 그 이유에 납득했던 것이다.
그리고 다시 한번, 메린은 그 이유를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알았어. 네가 팔다리 중 하나 병신이 될 각오가 있다는데, 내가 말려봤자 뭔 소용이 있겠냐?”
“……”
……응? 내가 그런 말을 했던가?
전혀 기억에 없는데.
“그 대신,”
그녀는 뚱한 눈으로 나를 보며 말했다.
“너 내 옆에 딱 달라붙어 있어. 먹고 싸고 잠자는 그 모든 때에. 절대 떨어지지 마.”
“……”
진중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나는 블루벨에게 말했다.
“미안, 협력은 없던 일로 하자.”
“싫은데?”
……뭐? 싫다고?
뜻밖의 대답에 놀라며 블루벨을 쳐다보았다.
장난하냐, 당연히 안 한다, 이 새끼야, 등의 말이 나올 줄 알았는데……
“그래, 협력하자. 난 장로들과 폐하의 의중을 알아보고, 넌 아이들을 찾고. 좋네, 후후후…….”
……그렇게 선언하는 블루벨은, 어째서인지 굉장히 밝은 얼굴로 미소를 짓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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