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4화 〉 170화 : 아무튼 협력하자구 (4)
* * *
블루벨은 골든로드와 자리를 바꾸어, 그를 대신하듯이 나와 메린의 옆에 섰다.
그녀는 작업을 시작한 골든로드에게서 약간 떨어진 곳으로 우리를 데려가더니, 바닥에 주저앉아 공터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나와 메린도 자연히 그 옆에 나란히 앉게 되었다.
얼마간 묵묵히 공터만 바라보던 블루벨이, 불쑥 말을 꺼냈다.
“아무렇지도 않나보네.”
“엉? 뭐가?”
“내가 널 정신을 잃을 정도로 세게 때렸잖아. 날 봐도 아무렇지도 않나봐?”
뭔 얘기하나 했네.
나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별 생각 안 들어. 어디 통증이 남아 있는 것도 아니고, 달리 삐걱이는 데도 없거든. 그냥 자고 일어난 기분이야.”
“흐응…… 그래?”
블루벨은 고개를 돌려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다시 앞을 보며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그 사제 꼬맹이가 대단하긴 하구나.정말로 그걸 말끔하게 살려내다니.”
“……네? 살려내다니요?”
등골을 타고 올라온 한기에 몸을 떨며 조심스럽게 묻자, 그녀는 태연하게 대답했다.
“사제가 그랬어. 너 내장 다 뭉그러졌다고.”
“……”
조용히 일어나 메린의 건너편에 가려 했으나, 사악한 살인미수범이 어깨를 붙잡더니 강제로 앉혀버렸다.
“아무렇지도 않다며?! 사람 기분 이상하게 왜 갑자기 멀리 떨어지려는 건데?!”
“저리 떨어져라, 사악한 엘프야! 세상에, 뭐? 내장이 다 뭉개졌었다고?! 그거 거의 죽은 거나 마찬가지였다는 거 아냐!
아니 어떻게 주먹 한 방에 그렇게 돼?! 어떻게 그게 가능하냐고!”
머리를 감싸며 절규했다.
충격과 경악에 찬 나의 외침이 땅 속으로 꺼져가는 한편, 블루벨은 굉장히 여유로운 말투로 대답했다.
“그러게. 솔직히 나도 놀랐어. 생각보다 화가 엄청 쌓여 있었나봐.”
“돌겠네, 진짜…… 그럼 또 한 난리 났던 거 아냐?”
“아니, 전혀. 그 사제가 바로 치료했거든. 그래도 꽤 살벌했지? 저 여자가 날 붙잡고는, 당장이라도 죽여버릴 듯이 노려봤거든.”
힐끗 곁눈질을 하며 말하는 블루벨을 향해, 메린이 곧바로 눈살을 찌푸리며 응수했다.
“이 녀석이 제대로 회복이 안 되었다면 널 족쳐야 되니까.”
“어련하시겠어.”
고개를 흔들면서 비꼬듯이 대꾸한 후, 그녀는 크게 한숨을 쉬면서 시선을 내리깔았다.
“……뭐, 그래도 덕분에 뼈저리게 깨달았어. 카엘, 내가 널 죽이는 건 불가능해. 완전히 졌어.
엘프에 필적하게 움직이는 인간에, 내장이 다 파열된 걸 완벽하게 소생시키는 사제에, 게다가 정령에게 사랑받는 마법사까지……. 나 참, 블루스타도 혼자서는 널 죽일 수 없을 거야.
나보다 나이 많은 엘프 대여섯명이 달려들어야 겨우 될까 말까 할걸?”
대여섯은 너무 과대평가 아닌가?
우리 일행이 그 정도로 강한 거 같진 않은데.
메린은 어쨌든, 로나는 사제이니까 몬스터 외에는 살생을 못하니 공격이 제한된다.
위슨은 정령이 강한 거지, 그 자신은 전투원이 아니다.
주문을 외울 수 있다면 얘기가 달라지겠지만……
지금은 아주 멀리서 활 쏘면 그냥 끝나지 않을까?
근데 이 넷 중에선 내가 제일 약하잖아?
심지어 전투원인데.에휴…….
불쑥 끼어든 무거운 마음에 무릎을 끌어안으며, 나는 어딘지 초연해보이는 블루벨에게 물었다.
“그래서, 완전히 포기하셨다?”
“그래. 완전히 다 털었어. 이제 널 봐도 화가 나지 않아. 오히려 불쌍해.”
……감정 정리 덜 된 거 아냐?
굉장히 자연스럽게 시비를 거네.
불쌍한 건 댁 몸이라고 속으로 목청껏 외치면서, 나는 블루벨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런 나를 진중한 눈으로 보며, 그녀는 말을 이었다.
“왜, 불만이야? 약한 놈이 아둥바둥거리고 있는 걸 보면, 당연히 불쌍하다고 생각하는 거 아냐? 게다가 어디 도망도 못 가잖아.”
“……진짜 시비 거는 거야?”
“아니. 개인적인 감상이야. ‘용사’라는 거창한 직책에 비해, 굉장히 별 볼 일 없는 인간을 본 내 감상.”
“……”
불쌍하다는 건 일단 차치하고, 도망도 못 간다…….
흠, 그 말대로이긴 하군.
도망을 왜 가게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뜀박질로는 셋 중 누구도 따돌리지 못하겠지.
어쩐지 블루벨의 말엔 그보다 더한 뜻이 있는 것 같았지만, 그게 뭔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블루벨의 그 감상을 단칼에 잘라버리며, 메린이 심드렁한 말투로 말했다.
“이 녀석이 불쌍하다고? 댁이 이 녀석을 몰라서 그래. 카엘은 불쌍하지 않아. 동정을 받기엔 너무 멍청하거든.”
“……”
뭐지? 변호를 가장한 고발인가?
굴러오는 짐수레 피하라며 낭떠러지로 밀어버리는, 뭐 그런 건가?
아니 여기선, ‘카엘은 용사인걸! 그러니 아무리 약하더라도, 아득바득하면서도 꺾이지 않는 거야!’라고 해줘야 하는 거 아냐?!
내가 봐도 닭살 돋지만 원래 다 그런 거잖아!
게다가 하필 안 불쌍하다는 이유도 멍청해서라니, 이건 절대 못 넘어가!
“내가 멍청하다고? 딴 사람은 몰라도 네가 나한테 그런 소릴 하냐? 글도 제대로 못 읽는 녀석이?!”
“글 잘 읽어서 책 많이 읽으셨지. 그럼 뭐하냐? 완전 헛똑똑이인데.
몬스터가 쳐들어오니까 마을로 도망가라고 했더니 도로 돌아오지, 용사로서 당장 여행을 떠나라는 말에 군말없이 따르지.”
메린은 무릎을 세우고 그 위에 엎드린 후, 투덜거리듯이 계속 말을 이었다.
“그 바람에 마녀들에게 시달렸지, 엘프에게 죽을 뻔했지……. 그런데도 예정대로 계속 여행하고 있어. 계속 용사 하고 있잖아. 그게 멍청한 거지, 뭐냐?”
“……정답! 책임감이 강하다!”
“책임감이 왜 나와, 이 멍청아! 어휴…….”
내 대답에, 메린은 답답해 죽겠다는 듯이 한숨을 푹 쉬었다.
내가 뭐 틀린 말한 것도 아닐 텐데, 괜히 난리야…….
“아, 왜! 아무리 내가 못났다 해도 어쨌든 용사라잖아. 그러니,”
그러니 맡은 바 책임을 다해야 하지 않는가?
물론 여기 온 건 팔려간 애들 때문이지, 맹약서에 도장 받으러 온 건 아니다.
안 찍어줄 게 뻔하니까.
그리고 메린은 정말 기가 차다는 듯이 헛웃음을 켠 후, 블루벨을 향해 말했다.
“봤지? 이 놈이 이렇게 멍청해. 되고 싶어서 용사가 된 것도 아닌 놈이, 떠맡은 일에 책임감 느껴선 때려칠 생각은 애초에 하지도 않아.
엿 같다느니 거지 같다느니 꿍얼대면서, 못 해먹겠다는 소리는 한 마디도 안 한다고.
겁도 많은 놈이, 용사가 됐으니까 여행 떠나란 소리를 듣고 싫다는 소리 하나 안 했다니까? 오히려 나랑 훈련하는 걸 더 싫어했지.”
“그거야 내가 선택됐다고 하니까…….”
“그렇다고 싫다는 말 한 번 안 하냐? 아니면 뭐, 너 고향 떠나고 싶었어?”
“그건 아닌데…….”
지랄 같은 곳이긴 해도, 못 살겠으니 당장이라도 떠나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없다.
어쨌든 고향이고, 아버지도 계시니까.
……그렇다고 고향을 사랑하고 그런 건 또 아닌 것 같단 말야?
집이 그립기는커녕, 아버지가 잘 계실지 걱정되지도 않으니까.
나 참, 아버지가 들으면 자식 새끼 키워봤자 소용없다고 통탄하시겠네.
“아니면 뭔데.”
“음, 그냥…… 누가 해야 되니까?”
솔직하게 대답하자, 메린은 재차 땅이 푹 꺼져라 한숨을 쉰 후, 손을 휘휘 내저으며 말했다.
“이런 놈이 뭐가 불쌍해? 답답하기만 하지. 댁도 불쌍해하지 마. ‘불구덩이’가 다시 지펴진 걸 제 탓으로 생각하고 술 퍼먹은 얼간이이니까.”
“……”
흑흑, 가만히 있는데 괜히 말로 두들겨 맞았어.
억울해!내가 뭐 틀린 말한 것도 아니잖아!
누군가는 해야 되는 일이잖아!
하……
역시 용사 하기 힘들다…….
안 되겠다. 얼른 화제를 바꿔야지.
안 그러면 또 메린 녀석이 억하심정으로 성질부려서, 내 정신이 가루가 돼버릴 거야!
나는 풀들 틈에 쪼그려 앉아 잡초를 뽑고 있는 골든로드를 보며 말했다.
“아무튼 블루벨, 댁은 우리에게 협력하는 거지? 그래서 여기로 데려온 거고?”
“어? 어어, 응, 맞아. 여기가 제일 안전하거든.”
처형장은 아무도 찾지 않으니,이 숲에서 가장 안전하다.
그렇게 말하며, 블루벨은 덤덤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사실 달리 믿을 사람도 없어. 그래도 아저씨는 우릴 넘기지 않을 거야.”
“흠…… 개인적인 친분에 의한 평가인가?”
“그것도 있는데, 음, 아저씨는 좀 특이하거든.”
“……”
특이한 정도가 아닌 거 같은데.
골든로드는 느긋하게 잡초를 뽑으면서, 혼자 뭘 중얼거리는 건지 연신 입을 움직이고 있다.
이따금 뒤를 돌아보면서 손을 내젓기도 한다.
마치 누가 있기라도 한 것처럼.
……그러나 그곳에 있는 거라고는,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꽃밖에 없다.
음, 여러모로 아프신 분인가보군.
“아니, 여기서 미친 건 너밖에 없어.”
“그건 맞지.”
“……”
나를 중상모략하는 자가 또 하나 늘었구나!
아니 어이가 없네.
내가 어딜 봐서 미쳤다는 거야?
블루벨이 저러는 건, 내가 지한테 한 짓 때문에 그렇겠지?
심한 짓이긴 하지만, 이상한 짓은 아니었잖아!
아끼는 사람을 괴롭혀서 정보를 불게 하는 건, 사람 심리를 이용한 고도의 작전인데!
거듭거듭 말하는 거지만, 난 지극히 일반적이고 정상적이면서 상식적인 사람이다.
메린은 뭐, 내가 가끔 감정이 치우쳐서 혼자 나불거리는 걸 봤으니…….
그래도 미친 건 아니지.
정신줄 놓을 때 무슨 말했는지 기억 잘 안 나긴 하는데, 사람이 평정을 잃으면 다 그런 거 아냐?
지들은 뭐 얼마나 이성적이라고……!
속으로 투덜거리는 내 귀에, 블루벨의 목소리가 조용히 울렸다.
“아저씨는 영혼이 보여. 그들의 목소리도 들리고. 그래서 저러고 계신 거야.”
고목 주변에 피어 있는 꽃들은, 엘프들이 제 수명보다 일찍 죽어서 생겨난 잔재일 뿐, 그 이상의 의미는 없다.
그저 그러한 상징일 뿐이라고, 모든 엘프들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연노랑색 머리카락을 가진 묘지기, 단 한 사람을 제외하고.
“잔재가 아니야. 주검이지. 영혼이 남아있는 주검. 꽃 하나하나에, 죽어서 꽃이 되기 전의 엘프들이 영혼 상태로 존재하고 있대.”
“흠…… 그냥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고?”
“이따 두 꼬맹이한테 물어봐. 내 말이 진짜인지 아닌지 확인해줄걸?”
아무래도 저 연노랑머리 아저씨가 영혼을 본다는 건 정말인 듯했다.
음, 근데 그게 저 사람을 믿을 수 있는 거랑 무슨 관계가 있는 거지?
그렇게 묻자, 블루벨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윗사람들을 되~게 싫어하시거든. 여기를 꽃밭으로 만들어버리고, 덤으로 저 나무도 미치게 만들었다면서.”
“나무가 미쳤다고? 죽은 게 아니고?”
가지만 앙상하게 남아있고 색깔도 시커멓길래 죽은 줄 알았는데.
블루벨은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응, 아직 살아있고, 완전히 미쳤대. 아저씨는 저 나무의 목소리가 들리나봐. 옛날에 한 번, 술이라도 처먹이면 좀 닥쳐줄까? 하고 밤에 혼잣말하시더라고.”
나중엔 죄다 불질러버릴까 고민하길래, 블루벨은 그에게 귀마개를 선물했다.
그는 왠지 난처한 듯이 웃으며 받아들더니, 그 다음날 바로 블루벨의 손을 잡고 붕붕 흔들며, 덕분에 잘 잤다고 굉장히 기뻐했다고 한다.
그 뒤로 그가 자신에게 속을 터놓게 됐다고 말하면서, 블루벨은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그 웃음을 보며, 나는 묻지 않을 수 없었다.
“흠…… 둘이 어떻게 알게 된 사이야?”
“내 보모야.”
“……뭐?”
“블루스타가 집을 오래 비워야 할 때마다, 나를 아저씨한테 맡겼거든.”
그 말은 즉……!
“사, 삼각관계……!”
“뭔 소리야! 나랑 아저씨는 그런 사이 아냐, 이 불손한 놈아!”
사정없이 내 머리를 후려치며 블루벨이 빽 소리질렀다.
물론 메린은 그걸 막기는커녕, 굉장히 건조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다.
음, 역시 합리적인 녀석이야.
무조건적으로 내 편을 들지는 않는다니까.
근데 나한테 애착이 있는 거 아니었어?
그럼 적어도 ‘때려도 내가 때린다’며 좀 반발해주고 그래야 되는 거 아니냐?
……왠지 모르게 마음이 추워지는 것 같았다.
“애초에 골든 아저씨는, 저 나무랑 여기 공터에 있는 식물만 사랑한다고!”
그녀가 그렇게 외치자, 잡초를 뽑고 있던 골든로드의 움직임이 우뚝 멈추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그녀에게 다가왔다.
블루벨의 두 어깨를 잡고 흔들면서 타이르는 그의 얼굴엔, 무척이나 당황한 기색이 서려 있었다.
“저기저기저기, 블루벨, 내가 누누이 말하지 않았어? 그런 말은 남들이 오해하니까 하지 말라니까!”
“다들 그러던데요? 사백 년 동안 여자 하나 안 사귀고 맨날 여기만 서성거리는 이유가 뭐겠냐고.”
“뭐긴, 일하러 나오는 거지!! 이 망할 자식들이 애한테 뭔 소리한 거야?!”
“옛날에 그랬잖아요. 나무랑 결혼했다고.”
“하도 물어보니까 우스갯소리로 넘긴 거지! 그게 진짜겠니?!”
두 사람이 실랑이는 모습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그러나 정작 두 사람의 모습은 제대로 들어오지 않는다.
소리 역시 귓속으로 들어오자마자 반대편으로 흘러가버리고 있다.
너무나도 큰 충격에, 머리가 일하기를 멈춰버린 탓이다.
“……나무랑……결혼……?”
사백 년간 아무 여자하고도 만나지 않고, 그저 이 공터에 와서 저 나무만 신경 썼다고……?
나무랑 결혼했다고……?
그러고보니 아까 블루벨이 그랬지?
윗사람들이 저 나무를 미치게 만들어서, 골든로드가 그들을 굉장히 싫어한다고.
그 말을 들었을 때는 순수하게, 사랑하는 나무를 망가뜨린 거에 화가 단단히 났구나 싶었는데…….
설마…… 그 사랑이 그 사랑이 아니라……!
“어, 그, 저기, 카엘, 자네 설마 이상한 생각하는 거 아니지? 그렇지?”
블루벨을 붙잡고 항의하던 골든로드가, 불현듯 나를 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상한 생각이라니? 뭔 생각?
내가 무슨 생각을 할 거라고 의심하는 걸까?
문득 그의 얼굴 양옆에 나 있는 귀에 눈이 갔다.
아아, 그래, 이 사람도 엘프이지.
소아성애에 근친성애에, 훨씬 전에는 고통을 즐기는 변태에……
아무튼 수상하게 이상성욕자가 많은 엘프……!
“아, 아니야. 자네가 생각하는 그런 거 절대! 절대로 아니야.”
“……”
“자네는 숲 바깥에서 왔으니까, 응, 블루벨이나 다른 엘프들보다 훨씬 식견이 높을 거야. 그치? 하, 하하하……!”
어쩔 줄 몰라 하는 표정.
마구 흔들리고 있는 눈동자.
마치 고이고이 숨기고 있던 비밀을 들킨 것처럼 허둥대는 모습…….
확신했다.
이 사람은……!
“나나, 나무…성애……!”
“결국 그 소리야?! 아니야, 카엘, 그런 거 절대 아니야!! 맹세코 아니야, 진짜로 아니야!!”
결국이라고? 그건 즉, 내가 그 생각을 할 거라는 걸 이미 다 예측하고 있었던 거잖아!
황급히 블루벨의 말을 막은 것도, 변명하듯이 나에게 말을 걸던 것도!
그게 다 도둑이 제 발 저린 거 아냐!
세상에……
보기엔 멀쩡하게 생겼는데……!
“아냐아냐아냐, 진짜 아니라니까! 저 느릅나무는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여기 있었던 나무야! 그냥 오래 보고 있고, 또 되게 아름다우니까 아낀 거지, 자네가 생각하는 그런 애정이 아니라고!”
“아…… 예에…….”
“자네 안 믿고 있지?! 아니 미치겠네, 왜 죄다 나만 보면 그 소리야?! 연애랑 결혼 안 하는 게 그렇게 이상해?! 그러고 싶은 생각이 안 드는 걸 나보고 어떡하라고!
그럼 날개사슴 방목장 운영하는 클로버는?! 그 친구는 사슴을 사랑해서 혼자 사는 거겠네?!”
골든로드는 잔뜩 흥분한 채, 나를 붙잡으며 절실하게 외쳤다.
그런 그의 뒤에서, 블루벨이 굉장히 뚱한 표정을 지으며 대꾸했다.
“모르셨어요? 클로버 그 사람, 반년 전에 날개사슴이랑 식 올렸어요.”
“…………”
공기가 순식간에 얼어붙는 듯한 느낌과 함께, 등골에 싸한 기운이 흘렀다.
아마 메린도 나와 같은 걸 느낀 모양이다.
이제까지 덤덤히 있던 그녀가, 눈을 휘둥그레 뜨며 천천히 골든로드를 돌아보았으니까.
“……”
길고도 무거운 침묵이 공터를 휘감았다.
손가락 하나도 움직일 수 없는 기묘한 긴장이 흐르고 있다.
……언제까지나 이러고 있을 순 없어.
나는 용기 있게 헛기침으로 침묵을 깬 후, 블루벨을 돌아본 채 굳어버린 골든로드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그…… 엘프들은…… 독특…하다고 이해하고 있으니…… 너무 마음두지 마세,”
“아아아아!! 아니야, 아니라고! 아니란 말야……! 씨발,쳐망해버려라, 추잡한 동족 새끼들아아아!!”
묘지기의 비통한 절규가 공터에 널리 울려퍼졌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