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7화 〉 173화 : “나 때는 말이야……” (3)
* * *
최초의 엘프가 이 대륙에 나타난 게 지금으로부터 몇 년 전인가, 그것은 엘프 자신들도 모른다.
그저 아주아주 오래 전이라는 것만 알 수 있을 뿐.
“처음엔 햇수를 안 셌거든.”
“그럼 언제부터 센 거에요?”
“글쎄? 그냥 언제부터인가 세기 시작했다고 하더라고. 꽃이 피고 지는 걸 보고, 날짜를 세기 시작했을 거 같긴 해.”
“진짜 그게 계기라면 꽃에서 태어난 존재답네요.”
내 말에, 골든로드는 빙긋 웃으면서 눈을 감았다.
“영글어진 꽃봉오리는 대지와 입을 맞추며 만개하니, 그것은 열매에 선사하는 축복이라.”
어머니 나무에서 떨어진 꽃봉오리는 땅에 닿는 순간, 활짝 피어나며 엘프를 내보낸다.
그러나 그 삶은 곧바로 시작되지 않는다.
활짝 피어난 꽃 안에서, 아침이슬을 그 입에 머금은 후에야 비로소 눈을 뜨고, 그들의 시간이 흐르기 시작한다.
사백 년 전에 태어난 엘프인 골든로드 역시 마찬가지였다.
“처음 눈을 뜨고 보는 건 거대한 나무. 오색찬란한 꽃들을 품은 어머니 나무.
처음 혀에 두르는 감미(?味)는 아침이슬. 어머니 나무가 주시는, 꿀보다도 더 달콤한 이슬.
새벽빛에 몸을 씻으며 처음으로 숨을 들이켰을 때, 비로소 ‘나’는 맥동하며 ‘나’를 깨닫누나.”
마치 그때의 이슬을 맛보듯 차를 홀짝인 후, 그는 천천히 눈을 떴다.
“……그렇게 나 자신을 인지하면 바로 머릿속으로 생각이 들어와. 순환을 수호해야 한다고.
내 이름이 무엇인지, 여기가 어디인지, 내 옆에 있는 다른 두 녀석은 누구인지보다 그 생각이 제일 먼저 들어. 마치 누가 심은 것처럼.”
생명의 순환을 수호하는 것.
그것이 엘프라는 종족이 지닌 사명이랬던가?
태어나면서부터 알게 된다고도 했던 거 같아.
블루벨은 그 방법을 모른다고 했지만……
어쩌면 이 아저씨는 ‘순환을 수호하는 방법’을 알지도 모르겠다.
막연한 기대감을 품으며, 나는 그에게 물었다.
“골든, 그 순환이라는 걸 어떻게 수호하는 거에요?”
“응? 싸워서 하지. 당연한 걸 묻는구나, 하하!”
“……”
응? 내가 이상한 거야?
이렇게 해맑게 웃으며 내 팔을 툭툭 칠 정도로 당연한 소리였던 거야?
하긴, 수호하는 거잖아?
수호가 뭐야? 무언가로부터 지키고 보호하는 거잖아.
그게 일이라는 건, 그 무언가를 위협하는 게 있다는 소리이지.
……생각해보니 진짜 당연한 걸 물었구나.하하, 나도 참.
왠지 얼굴이 더운걸?
차를 너무 많이 마셨나봐.
“하아…… 그럼 골든, 당신도 그 일에 참여해봤어요?”
“어르신들에게 듣기만 했지, 실제로 나가본 적은 없어. 어르신들이 마지막으로 나갔던 게…… 어어…… 대충 육백 년 전일 거야.”
육백 년 전?
그거 혹시……
“아트라토스군요?”
골든로드는 로나를 향해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높디높은 하늘에서 추방된 귀인이자 재앙이지. 보통 드래곤보다 두세 배는 더 컸다나봐. 아마 그래서 토벌된 게 아닐까 해. 표적이 크면 맞출 데가 많으니까.
이야, 그 대전쟁 이야기는 지금 떠올려도 소름이 돋아! 너무 끔찍해서.”
“대전쟁……? 놈을 처치한 건 다섯 영웅이 아닌가요?”
종족별로 하나씩 대표로 나서서 물리친 후, 맹약을 맺은 게 아니었나?
실제로 맹약서에 표기된 건 다섯 종족인데.
“다섯 영웅? 다섯 종족이겠지. 드래곤을 정면으로 상대한 건 소수이긴 하지만, 다섯이 아니라 여덟 명이었거든. 전투원이 다섯, 비전투원이 셋이었지?
인간 투사와 사제, 엘프 궁수에 정원사, 드워프 현자에 대장장이, 인어 시인, 그리고…… 하늘의 귀인 하나까지 해서 여덟.”
……비전투원이라는 거, 정원사랑 대장장이, 그리고 시인이겠지?
어떻게 드래곤과 정면상대한 거야?
실시간으로 보급이라도 했나?
정원사랑 시인의 역할은 대체……?
혼란에 빠진 내 귀에, 파랑새가 재잘대는 게 들렸다.
“야, 사제가 전투원에 껴 있는 건 안 이상하냐?”
“어? 그게 왜?”
사제도 싸우는 사람이지.
바로 가까이에 훌륭한 예시가 있잖아.
게다가 그 토벌전에 참가한 건 최초의 대언자, 창조주의 목소리를 대신 전하는 최초의 인간인 것이다!
분명 주먹 한 방에 바다를 가를 정도로 강했을 거야!
“너네 때문에 위슨의 상식이 틀어질까 걱정이야.”
“쓸데없는 걱정하긴. 내가 이 시대의 진정한 상식인 중 하나인데, 상식이 틀어지겠냐?”
“네 미친 짓을 재미있어 하는 시점에서 좀 망했는데.”
“원래 그 나이 땐 다 그런 거야.”
“내가 말을 말아야지.”
아무튼 그 여덟 명이 드래곤을 상대하는 동안, 다섯 종족의 일원들은 드래곤에게 이끌린 몬스터들과 맞서 싸웠다.
그 전투의 규모는 ‘대전쟁’이라 불릴 만큼 어마어마했고, 그만큼 희생자도 무수히 치러야 했다.
“희생자 수는 다 엇비슷했겠지만, 장기적으로는 엘프가 치른 희생이 가장 크다고 봐.”
“왜요?”
“산맥 너머에 남아있던 마지막 생명수가 불타버렸거든. 아트라토스가 뿜어낸 불이 대륙을 흐르면서 남쪽을 전부 태웠어. 땅 자체는 나중에 정원사가 되살렸지만…… 생명수는 돌아오지 않았지.”
“생명수……라면, 그 어머니 나무요?”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먼 옛날에는 산맥 너머에도 어머니 나무가 여럿 있었어. 곳곳에 뿌리를 내리고, 그 잎을 활짝 펼쳐서 거대한 숲을 이루었지. 물론 엘프들도 있었고.
하지만 죄다 불타거나 꺾여버렸어. 일부는 드래곤에게, 일부는 거인에게. 그리고 일부는 저절로 시들었지.”
“엥? 그게 시들어요?!”
화들짝 놀라는 나를, 골든로드는 오히려 의아해하는 눈으로 보았다.
“왜 놀래? 풀꽃이 피고 지듯이, 나무도 수명이 있어. 자네가 그걸 볼 일이 없어서 그렇지.”
“아니, 그냥 나무가 아니잖아요.”
“어머니 나무도 나무야. 조금 많이 특이한 나무.”
모든 생명은 언젠가 반드시 죽음을 맞는다.
그것은 숲과 엘프를 낳는 어머니 나무도 예외가 아니다.
다만, 그 수명이 얼마나 되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가만히 잘 있다가, 어느 날 갑자기 조용히 시들기 시작하는 것이다.
“한 번 태어난 엘프는 어머니 나무가 없어도 살아갈 수 있어. 그저 ‘새로운 엘프’가 태어나지 않을 뿐.
그 또한 순리로 여기며 조용히 사그라져야지. 멸망에 다다라버린, 이제는 없는 몇몇 종족들처럼.”
엘프의 시작과 끝, 그 장대한 이야기를 마친 골든로드는 물잔을 기울여 목을 축인 다음, 우리를 향해 빙긋 웃었다.
“자, 질문해.”
“……어떻게 그걸 다 기억하는 거죠?”
제일 먼저 떠오른 의문을 입에 담았다.
육백 년 전에 일어난 이야기는 그렇다 치고, 대륙 중앙에 있던 생명수가 없어졌다는 이야기는 최소 천 년은 더 전에 있던 일 아니야?
이 아저씨는 사백 년 된 사람이니, 분명 그 이야기들도 전해들은 거겠지.
하지만 그런 것 치고는 너무 생생해.
마치 직접 겪은 이야기를 전하는 것처럼, 길고 긴 이야기를 술술 풀고 있어.
전해지기 쉽도록 노래로 된 것도 아닌데, 대체 어떻게……?
“권능이야.”
짤막하게 대답하는 그의 목소리엔 씁쓸함이 묻어나왔다.
땅 위를 자유자재로 다니는 능력, 지상의 어떤 존재보다도 멀리 볼 수 있는 눈,
눈꽃이 가지에 내려앉는 소리조차 들을 수 있는 귀, 한 번 보고 들은 것을 절대로 잊지 않는 기억력,
그리고 천 년에 가까운 수명에, 흙으로 돌아가는 그 순간까지 결코 노화되지 않고, 어떤 음식물도 필요치 않는 몸.
그것이 본래 엘프가 지닌, 그야말로 축복이란 축복은 혼자 다 받아먹은 모습이라며 그는 말했다.
“음식물이 필요없다고요? 아침 드셨잖아요.”
“영락했으니까. 삼백 년 전 어느 날, 우린 갑자기 허기를 느끼기 시작했어. 너희처럼 끼니 챙기기 시작한 건 그때부터야.”
그래도 고기는 전혀 못 먹겠더라.
골든로드는 씁쓸하게 웃으며 덧붙였다.
“옛날의 우리는 그야말로 완벽한 개인이었지. 삶을 이어가는 데에 누구의 도움도 필요하지 않은 완벽한 개인.”
그래서 그들은 홀로 살았다.
종족이 모여 살긴 해도, 지금처럼 누군가와 함께 한 이불을 덮는 것은 생각도 하지 못했다.
한 마디로, 성욕이 없었던 것이다.
“뭐, 그래도 남녀 고유의 기관은 갖추고 있었어. 아마 기능도 잘 했을걸? 안 써서 그렇지.
아, 그래, 옛날 여자 엘프는 다 블루벨 같았어. 자네들도 블루벨이 인기있는 건 알지? 어쩌면 옛 시절을 그리워하는 건지도 몰라.”
기원 자체가 소아성애란 말인가……!
알고 싶지 않은 지식이 늘었다.
“엘프가 인간처럼 생식행위로 태어나게 된 게 169년 전부터라 했죠? 그럼 성욕도 그때부터……?”
“……블루벨이 태어나고 며칠 뒤부터 시작됐지. 그야말로, 천박한 대혼란이었어.”
단 맛을 처음 느낀 아이가 그에 헤어나오지 못하듯이, 엘프들은 그 열락에 완전히 빠져버렸다.
지금처럼 결혼해서 하나의 가정을 꾸린다는 개념이 세워진 건, 고작 몇 십 년 밖에 되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아직도 잘 안 지켜지고 있지.”
“……”
그래서 로나의 그 핑계가 통했던 거구나.
헛웃음을 켜며 고개를 젓는 그를 보며, 나는 아연할 수밖에 없었다.
혹시……
엘프들이 유독 이상한 취향이 많은 것도 그 때문일까?
그런 본능이 너무나도 갑작스럽게 생겨서, 제대로 자리를 잡지 못하고 비틀려버린 걸까?
“글쎄……, 그걸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거야. 어쩌면 자네 말대로, 갑자기 본능이 생겨서 뒤틀린 건지도 몰라.
세상에, 날개사슴이랑 밤을 치르다니,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나무보단 나은 거 같은데.”
“……”
앗,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중얼거렸나봐!
갑자기 옆이 싸늘해!
등줄기에 식은땀이 흐르는 걸 느끼면서 꼿꼿하게 앞을 보았다.
눈 마주치면 죽을 거 같아……!
갑자기 내 몸통이 확 틀어지더니, 의자에 앉은 골든로드의 얼굴이 정면에 보였다.
그와 동시에 허리가 심각하게 땡기기 시작했다!
우아아, 허리 꺾인다아아!!
“카엘…… 아니라고 했잖아…….”
조용조용히 말하는 그의 미소는 무척이나 차가웠다.
앞을 보고 있던 내 두 발을 밟으면서, 상반신만 홱 옆으로 꺾는다는 잔인한 공격을 할 정도로 서늘했다!
“이상하네……, 그렇게 내 말이 못 미덥나?”
“아으아아아!! 아니에요, 믿어요, 믿고 말고요!!”
“역시 그렇지?”
하하 웃으며, 골든로드가 내 몸에서 발과 손을 떼었다.
어우씨, 허리 나간 건 아니겠지?
남자는 허리가 생명이랬는데…….
“하하, 자네는 날 믿어줄 줄 알았어. 괜찮아? 자네가 진심으로 그 소리하는 줄 알고 허리 꺾어버리려 했거든. 뭐하면 여기 앉아.”
“아니요……, 괜찮아요…….”
체조하듯이 이리저리 허리를 돌려보았다.
휴, 그냥 좀 근육이 땡겼을 뿐이구나. 다행이다.
“골든, 안심하지 마. 저 놈은 일부러 골리면서 쳐맞는 걸 좋아하는 변태거든.”
“누가 변태야, 임마!”
여전히 책을 보면서 쓸데없는 말을 흘리는 위슨에게 일갈했다.
“의외로 짓궂구나. 전혀 안 그럴 거 같은데.”
“아하하, 너무 나쁘게 생각 마세요. 카엘 님이 골든 씨를 친하게 보고 있다는 거니까요!”
“그래? 카엘, 그 마음은 기쁘지만 친애의 표시는 다른 걸로 해줘. 그러다 허리가 거꾸로 접히면 안 되잖아.”
방긋 웃으며 무시무시한 협박을 하는 엘프 아저씨였다.
……훗, 그런 협박에 굴할 내가 아니지.
하지만 로나가 있을 때나 놀려야겠어.
속으로 가만히 다짐했다.
“아무튼, 옛날과 달리 허기를 느끼긴 해도 나머지 능력은 여전해. 어때, 부러워?”
“노망 안 난다는 건 부럽네요. 그 외엔 그다지…….”
“그래? 특이하네. 대부분의 인간은 우리를 부러워한다고 들었는데.”
당연히 부러워하겠지.
특히 몸이 늙지 않는다는 걸 부러워하지 않을 존재가 어디에 있을까?
하지만……
“세상만사엔 뭐든지 대가가 있는 법이잖아요.”
능력만 보면 엘프가 부러워서 미워질 거다.
하지만 그들이 지닌 사명을 생각하면, 부럽긴커녕 그런 능력이 없어서 다행이라며 안도하게 된다.
어째서 엘프에게만 온갖 능력을 덕지덕지 붙여주었겠는가?
어째서 그들이 태어나자마자 사명을 인지하게 되어 있겠는가?
그 정도는 되어야 생명의 순환을 수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맞서는 상대가 장난이 아닌 것이다……!
“역시 용사라서 그런지 시점이 다르구나. 맞아, 우리가 상대하는 건 이 대륙, 더 나아가선 세상의 목숨을 위협하는 것들이거든. 일족 자체가 숨겨진 용사라고 할 수 있지.”
세계의 시간을 움직이는 시계추를 뽑으려던 거인 베헤모스,
자식이 바다에 삼켜졌다며 바닷물을 몽땅 마셔버리려던 뱀 레비아탄,
하늘의 경계를 흩뜨리려 하던 새 지즈.
그 다음이 바로, 대지를 몽땅 불태우려 했던 드래곤 아트라토스였다.
“그럼 그걸 전부 엘프 혼자서 대응했다는 거에요?”
“당연히 아니지. 우리는 자연에 비롯된 모든 존재를 통제할 수 있는 권한도 주어져 있거든.
정령, 유니콘, 노움을 포함한 요정들, 임프 등등, 통칭 ‘숲의 자녀들’을 부르고 그들에게 지시를 내릴 수 있어.
……이렇게.”
그렇게 말하며, 골든로드는 가만히 창 쪽으로 손을 뻗었다.
이내, 푸드덕하는 날갯짓소리와 함께, 매 한 마리가 들어와 그 손에 앉았다.
“왕궁 주변을 살펴줘. 돌에렛엔 가까이 가지 말고.”
마치 대답하는 듯이 삐익 울고, 매가 다시 창 밖으로 파다닥 날아갔다.
“원래 키우던 건……”
“설마. 카엘, 내가 매를 키워서 어디에 쓰겠니? 사냥할 것도 아닌데.”
“흠, 입 밖으로 부르지 않아도 되나보네요.”
“그래. 머릿속으로 떠올리며 속으로 부르면 돼. 요즘 애들은 그게 안 되는 모양이지만.”
씁쓸히 웃으며 말을 마친 후, 골든로드는 가만히 블루벨을 돌아보았다.
“그렇지, 블루벨? 요즘 애들은 소환술이라는 걸 쓴다며? 참 번거롭겠어.”
“……”
말없이 테이블을 보고 있는 블루벨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두 눈은 커다랗게 뜬 채, 입술이 파래져선 덜덜 떨고 있다.
무언가 단단히 큰 충격을 받은 듯한, 따끈한 차가 몇 잔 필요할 듯한 모습이다.
그래서 한 잔 타다 주었다.
“자, 마셔.”
“……”
블루벨은 마치 마시라고 해서 마신다는 듯한, 인형처럼 삐걱거리는 움직임으로 물잔을 기울였다.
그래도 따끈한 차 한 모금이 마음을 살짝 가라앉혀준 듯, 얼굴에 혈색이 아주 조금 돌아온 것 같았다.
내가 다시 자리로 돌아온 다음, 로나가 골든로드를 향해 입을 열었다.
“그런 숨은 영웅분들이 어째서 이번엔 용사를 죽이려는 거죠?”
“글쎄? 그건 왕의 뜻이니까 모르지. 난 애초에 용사가 올 거라는 것도 몰랐는데?”
“모르셨다고요?”
눈을 동그랗게 뜬 로나를 마주보며, 골든로드는 빙긋 웃었다.
“몰랐어. 아트라토스가 다시 깨어난 것도, 용사가 이 숲에 올 거라는 것도 전혀 몰랐지. 아무것도 못 들었거든.”
“하지만 종소리가……”
“그래. 한 달쯤 전에 어디서 울리는지 모를 종소리가 들리긴 했어. 하지만 그 의미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 아마 왕만 알고 있었을걸? 선대 왕에게 들었을 테니까.”
“이해가 안 돼요.”
로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을 이었다.
“어째서 선대 왕만 알고 있었던 거죠? 수명이 짧아서 역사를 잇기 힘든 인간조차도 다들 막연하게나마 알고 있는데, 어째서…….”
어째서 민중에게 알리지 않았나?
한 번 보고 들은 것을 절대로 잊지 않는 능력을 가졌으니, 단 한 마디라도 남겼다면 종소리가 들렸을 때 그 의미를 단숨에 알았을 것을.
그렇다면, 용사를 죽인다는 허무맹랑한 계획을 세울 일도 없었을 것을.
그런데 선대 왕은 어째서 그 사실을 숨겼는가?
무언가 깊은 뜻이 있었던 건가?
……그녀는 그렇게 묻고 있었다.
그러나 그 의문에 대한 답은 영영 얻을 수 없겠지.
‘선대 왕’은 이미 이 세상에 없을 것이고, 그 후대인 지금의 왕은 이미 우리를 적대하고 있으니까.
“일부러 숨긴 건 아닐 거야. 그냥 알리지 못했을 뿐이지. 왜냐하면,”
그리고 그런 내 생각을 비웃듯이, 굉장히 태연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선대 왕은 처형됐거든. 아트라토스 토벌 후에.”
“……!”
뜻밖의 답에 숨을 삼키는 소리가 둘, 부엌에 조용히 울렸다.
……차 두 잔이 필요하겠군.
충격으로 하얗게 비워진 머릿속에, 그 생각만 조용히 떠올랐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