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0화 〉 176화 : 무섭고도 귀여운 너
* * *
포식자를 맞닥뜨린 쥐가 이렇지 않을까?
상대가 언제 갑자기 달려들어서 내 숨통을 끊을지 모른다는 원초적인 두려움.
왜 하필 내가 대상인가 하는 억울함.
어쩌면 살 수 있을지 모른다는 실낱같은 희망.
그런 여러 감정이 한꺼번에 밀어닥치며 머릿속을 헤집어 놓는다.
그 중엔 굉장히 단순하고 근원적인 의문도 섞여 있다.
얘가 왜 이럴까?
……라는 의문.
“……그, 여기서 뭐해?”
“왜? 있으면 안 되냐?”
“아니, 그건 아닌데…….”
뭐지? 메린의 분위기가 영 좋지 않은 거 같은데.
어제 그 동굴보다도 한층 더 강한 한기… 아니, 눈보라가 뿜어져 나오고 있는 거 같아!
……왜?
“너, 방금 그 엘프 방에서 나온 거냐?”
“어? 어, 으, 응.”
“흐음…….”
내 대답을 들은 그녀가 고개를 천천히 끄덕이더니, 갑자기 눈을 살짝 부릅떴다!
우와, 위압감 장난 아니야, 진짜로 얼어붙은 것처럼 눈도 못 깜빡거리겠어!
아니 근데 진짜 왜 이러는 거지?
“누가 가달라고 한 것도 아닌데, 알아서 찾아간다……. 아주 친절하시네?”
“어…… 블루스타한테 가려면 블루벨을 데려가야 하니까…… 설득을 좀…….”
“아, 설득…….그걸 왜 네가 하냐?”
목소리는 왜 또 이렇게 싸늘하고?
“아니, 그, 협력하기로 한 사이잖아? 그러니까……”
“협력하면 개인사도 챙기는 거냐?”
“아니, 초면인 것도 아니고……”
“뭐 얼마나 오래 봤다고?”
“아니, 알고 지낸 기간은 상관없지……”
“아, 그래? 자의적으로 나설 정도로 굉장히 친해지셨다?”
……왜 점점 더 표정이 구겨지고 있는 걸까?!
대체 왜? 내가 뭐 잘못했나?!
당혹스러운 나머지, 머리가 살짝 핑 도는 게 느껴졌다.
“아, 아니요, 친해진 건지는 잘 모르겠는데 그래도 일단은 블루스타 그 양반을 만나러 가려면 블루벨이 필요하니까요, 근데 왠지 들리는 말이 좀 마음에 걸렸다고 해야 하나, 왠지 남일이 아닌 거 같다는 생각도 좀 들어서 말이죠, 그래서 좀더 이야기를 듣고 싶어서요. 예.”
그 탓에 말을 횡설수설 쏟아내고 말았다!
근데 왜 존댓말이……? 겁먹어서 그런가?
“남일이 아닌 거 같다니? 어디가?”
“어? 그건…….”
아니 이걸 또 귀신같이 덥썩 물어버리네?!
어쩌지? 이 녀석이 당사자인데 그걸 말하긴 좀…….
“……뭐야? 말 못하겠냐? 그 엘프한테는 할 수 있고, 나한텐 못한다?”
근데 말 안 하면 여러모로 큰일날 거 같아!
왠지 이 녀석의 표정이 좀 어두워진 거 같기도 하고!
으…… 할 수 없지.
우물거리듯이, 한 마디 한 마디 말을 떼기 시작했다.
“그…… 너도 어렸을 때부터, 나한테 이것저것 배웠잖아. 가까이 지낸 것도 그렇고, 그…… 내가 너, 좋아…하는 것도 그렇고…….”
“……”
아으, 별 거 아닌 말인데 왜 얼굴이 더워지냐?
이 녀석에게 좋아한다고 말한 것만 몇 번인데 새삼스럽게…….
“그래서…… 하…… 아, 아무튼, 좀 얘기를 한 것뿐이야.”
“……그래.”
납득이 되셨는지, 메린에게서 뿜어져 나오던 한기가 그야말로 눈 녹듯이 사라졌다.
마구 구겨졌던 얼굴도, 언제 그랬냐는 듯이 평소처럼 덤덤한 상태로 돌아와 있었다.
“그 친위대장한테는 밤에 갈 거지?”
“어? 어, 응.”
“그래. 그럼 난 부엌에 있을 테니 혹시라도 밖에 나가고 싶거든 불러라.”
내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그녀는 무덤덤하게 말을 던진 채 돌아서려 했다.
그 발이 떼이기 전에, 나는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
“뭐냐?”
“……묻고 싶은 게 있어서.”
“뭘?”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주홍빛 눈동자에선, 조금 전과 같은 살벌함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하지만 이대로 그녀를 보낼 수는 없었다.
나는 그녀에게 물어야 한다.
어째서 블루벨만 엮이면 날선 반응을 보이는 건지, 그 이유를 알아야 한다.
블루벨과 협력하기로 한 이상 계속 같이 움직일 텐데, 그때마다 이런 식으로 나를 쪼아대면 좀 많이 곤란하다.
안 그래도 눈 빨개서 가끔 흠칫흠칫 놀라는데, 그걸 부릅뜨고 있으니까 진짜 무섭다고!
심장 쫄려서 죽을 거 같아!
“메린, 너 있잖아……. 블루벨 싫어하냐?”
“갑자기 그걸 왜 물어?”
“……네가 이런 식으로 날세우는 게 한두 번이 아니니까 그렇지.”
맨 처음은 블루벨에게 숙박비를 내줬을 때였지?
그 다음은 내가 야한 상상을 했을 때였고, 또 어제 동굴에서 블루벨에게 협력하자고 했을 때도 이랬지.
그리고 바로 조금 전, 블루벨과 얘기하려고 방에 들어갔다 나오는 걸 보고 이러고 있고.
이게 벌써 네 번째인 거다.
한두 번이면 몰라, 네 번이나 비슷한 일이 일어나면 그냥 확실시해도 되는 수준이다.
적대하는 사이이니까 경계 차원에서 그랬던 거라 하기엔……
뭔가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
“뭐라 대답하든 화 안 낼 테니까 솔직히 대답해줘. 너, 블루벨 싫어해?”
“……”
나를 빤히 보던 그녀의 눈이 갑자기 가늘어지더니, 그녀가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뭐, 싫어하면 안 된다고 하려는 거냐? 잘 대해달라?”
“얌마, 앞서가지 마. 그거 때문에 묻는 게 아니잖아.”
왠지 몸이 으슬으슬 떨리는 거 같은데, 여름감기에 걸린 걸까?
메린은 그런 나를 빤히 보더니, 한숨을 쉬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걱정 안 해도 갑자기 칼 들이대진 않을 거다. 그 엘프가 그럴 의사가 없다면.
됐지? 이제 놔.”
그러면서 표정을 찌푸린 채, 나에게 붙잡힌 손목을 살살 흔들었다.
음, 이걸로 다섯 번이군.
그리고 내가 품고 있던 막연한 의심은, 점차 확신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역시, 메린은 블루벨을 미워하고 있다.
그녀가 이렇게 누군가를 강하게 싫어하는 건 처음 본다.
자신을 직접적으로 욕하던 그 고향 사람들에게도 보이지 않던 비호감을, 난생 처음으로 그 엘프에게 내비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나는 그 이유를 들어야 한다.
얘한테 무슨 변화가 생긴 건지 알아야 해.
“메린,”
나는 다른 손으로 그녀의 손바닥을 잡고, 그녀의 손목을 잡았던 손을 놓는 대신, 그 손등을 감쌌다.
“네가 왜 그 엘프를 싫어하는 건지 알고 싶을 뿐이야. 다른 거 없어. 진짜야.”
“……”
나보다 작지만 강한 그 손을 더 힘있게 감싸쥐며, 그녀의 주홍빛 눈을 들여다보듯이 바라보았다.
곧 그녀의 인상이 펴지면서, 살짝 시선이 내려가는 게 보였다.
“알려줘. 블루벨이 왜 싫어? 그 엘프 때문에 죽을 뻔했으니까 그런 거야? 아니면 내 목을 노리던 녀석이라서?”
“……아냐.”
내 시선을 피한 채, 그녀가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싫어하는 거 아냐. 애초에 그 엘프는 원래 적이었잖아. 나랑 널 죽이려 드는 건 당연한 거지.”
“어…… 그래?”
그거 때문에 미워하는 게 아니야?
아니, 그 이전에 싫어하는 게 아니라고?
어라? 내가 잘못 본 건가?
금방이라도 죽일 듯이 눈을 부라리는 거 보면 싫어하는 게 맞는 거 같은데…….
메린은 여전히 바닥에 시선을 둔 채, 재차 입을 열었다.
“없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안 들어. 그냥…… 거슬려.”
“……”
그게 싫어하는 거 아닌가?
둘이 무슨 차이가 있는 거지?
존재를 허락하냐 안 하냐, 그 차이인가?
그보다 목숨을 위협했다는 원한 때문에 싫어하는 게 아니라, 그냥 눈엣가시로 여기고 있는 거라면…….
혹시, 메린 이 녀석……?
“왜 거슬리는데?”
“왜……?”
새로이 떠오른 가정을 확인하려고, 그녀에게 조용히 질문을 던졌다.
그러자 그녀는 조용히 내 말을 되뇌더니, 바닥에 고정되어 있던 시선을 위로 들었다.
그 상태로 멀뚱히 서 있다가, 잠시 후 어깨를 으쓱이며,
“몰라.”
“……”
굉장히 간결한 대답을 돌려주었다!
메린답다면 메린다운 시원시원한 대답이긴 한데, 아무리 그래도 너무 짧은 거 아니냐!
그럼 뭐야, 이유 없이 그냥 거슬리다는 거야?
아, 물론 정말 그렇다 해도 이상한 건 아니다.
괜히 싫은 사람이 있고, 별 이유 없이 끌리는 사람이 있고 그렇잖아?
하지만 이 경우는 다르다.
지금 얘가 블루벨을 싫어하는 건, 태생부터 서로 맞지 않는 관계라서 그런 게 절대 아니야.
왜냐면……
메린이 지금 하고 있는 건 단순한 경계나 미움이 아니라,
질투이니까.
물론 그녀가 왜 질투하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무엇에 질투하는 건지는 알고 있다.
그녀가 아주 그냥 대놓고 티를 팍팍 내고 있었으니까.
나는 심호흡을 한 후, 그녀의 눈을 똑바로 마주보면서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가 보기엔 말야. 너, 내가 블루벨이랑 가까워지는 걸 시샘하는 거 같은데.”
“시샘?”
눈을 동그랗게 뜨며, 그녀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가 그 엘프를 시샘한다고? 왜??”
“그건 나도 모르지. 네 일이잖아. 진짜 왜 그러는 건지 몰라?”
“몰라.”
딱 잘라 대답하는 그녀의 얼굴은 평소처럼 무덤덤했다.
조금 전에 거기 서려 있던 서늘함과 불쾌함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다.
“……시샘이 뭔지는 알지?”
“부러워서 미워하는 거잖냐. ……근데 내가 그러고 있다고?”
뜻은 잘 알고 있군.
하지만 이해가 안 간다는 듯이 눈썹을 찡그리고 있는 걸 보면, 아무래도 자신이 질투하고 있다는 걸 자각하지는 못하는 듯했다.
뭐, 그녀가 스스로 깨닫지 못해도 이상할 건 아니다.
질투는 엄연히 따지면 감정이 아니라 행위이니까.
‘질투’는‘다른 사람이 너무 부러운 나머지 그 사람이 싫어진다’는 상황을 설명하는 말일 뿐, 결국 ‘싫다’는 감정을 기반으로 삼은 행위이다.
그리고 그런 복합적인 감정은, 대개 다른 사람의 눈으로 봐야 알 수 있는 법이다.
그러니 메린에겐 이렇게 묻는 게 더 확실하겠지.
나는 다시 그녀를 마주보며 물었다.
“메린, 내가 블루벨과 가까워지는 게 싫어?”
“……”
주홍빛 눈동자가 살짝 커지더니, 곧이어 아래로 향하는 게 보였다.
멍한 눈으로 밑을 바라보고 있는 그녀의 손등을, 엄지손가락으로 토닥이듯 슬슬 쓰다듬었다.
그녀가 다시 입을 열 때까지, 얼마든지 기다려줄 심산이었다.
그리고 잠시 후, 그녀의 두 눈이 나를 똑바로 마주하며, 굳게 닫혀 있던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싫어.”
조금 전처럼 간결한 대답.
그러나 그 목소리엔 조금 전보다 더 힘이 들어가 있다.
“너랑 그 엘프가 가까워지는 거, 싫어.”
단호히 말하며, 그녀는 감싸인 손에 힘을 주고 내 손을 꽉 맞잡았다.
……마치, 블루벨에게 가지 못하도록 나를 붙잡는 것처럼.
그 귀여운 항의에, 갑자기 가슴이 꽉 죄이면서 뜨거운 충동이 끓기 시작했다.
“……!”
아아, 안 돼, 여기서는 안 돼……!
그녀의 손등을 감싸던 손으로 황급히 입을 가렸다.
우와, 예상할 대로 다 한 건데.
그냥 확인만 받았을 뿐인데!
근데 이렇게…… 크게 반응한다고?
원래 그런 건가?
메린은 내가 입을 가린 채 가만히 서 있자, 얘기가 끝났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맞잡고 있던 손을 놓은 후, 무덤덤한 표정으로 나를 보며 말했다.
“이제 됐지? 나 간다.”
“어? 어, 응…….”
어물거리는 사이에, 그녀가 몸을 홱 돌리며 성큼성큼 가버렸다.
그녀의 모습이 부엌문 안으로 사라진 후에도, 나는 그 자리에 못 박힌 듯이 멀거니 서 있었다.
“……”
계속해서 입을 가린 채, 나는 천천히 지난밤에 빌린 방으로 향했다.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한 후, 조용히 문을 닫았다.
창에 커튼을 드리우고, 망토와 신발을 벗어서 근처에 고이 놓은 다음, 가만히 침대 속으로 들어갔다.
그대로 이불을 덮어쓴 후,
“……푸흐! 흐히, 으히히힛!”
실컷 웃음을 터뜨렸다!
아아, 그 자리에서 그녀를 끌어안으며 신나게 웃고 싶은 걸 겨우 참았네!
세상에, 질투라니!
다른 사람도 아닌 메린이!
내가 블루벨과 친해지는 걸 질투한다니!!
물론 아끼는 인형을 다른 사람에게 빼앗기기 싫은 것과 같은, 그런 단순한 독점욕이겠지.
그치만 알게 뭐야!
그녀가 나 때문에 질투한다는데!!
아니 이걸 알고서 어떻게 가만히 있어?
어떻게 기뻐하지 않을 수 있겠냐고!!
그녀 대신이라는 듯이 베개를 끌어안으며, 나는 그렇게 이불 속에서 한참을 웃었다.
배가 땡기고, 눈물까지 찔끔 흘러나올 정도로 웃음을 전부 쏟아낸 후,
“히이…… 후…… 하아아……”
여전히 이불을 뒤집어쓴 채, 나는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웃음이 물러간 자리에 남은 것은, 머릿속마저 익어버릴 듯한 열기였다.
“하아…… 메린…….”
……바보 녀석, 질투 같은 거 할 필요 없는데.
난 항상 네가 최우선이란 말야.
내 걱정도, 감탄도, 안심도, 친절도, 위로도……
내가 가진 좋은 감정은, 전부 네가 먼저 받고 있다고.
그것도 모르고 샘을 내다니.
아, 귀엽기도 하지.
아니면, 오직 너 한 사람에게만 그 감정들을 쏟으라는 거니?
날 독차지하고 싶은 거야?
만약 진짜 그런 거라면……
아아, 내 맘대로 착각하고, 진짜 내 모든 걸 너에게 쏟아버릴 거 같아.
끓어오르는 열까지, 전부 다……!
“히히…….”
……아니 뭐, 당연히 그런 건 아니겠지.
하지만 그렇게 혼자 망상하며 실실 웃을 정도로, 나는 무척이나 기뻤다.
그녀가 나를 특별히 여긴다는 게,
그녀가 그런 마음을 내비친 게 기쁘다.
정말로 내가 너에게 영향을 주고 있다는 사실이,
나와 함께 있으면서 네가 조금씩 변해가고 있다는 사실이 기쁘다.
……내가, 너에게 도움이 되고 있구나.
그 사실을 새삼 알게 된 게, 너무나도 기쁘다.
“후우…….”
베개를 꽉 끌어안으며 긴 숨을 내쉬었다.
수용할 수 있는 범위를 한참 넘는 기쁨을 느껴서 그런가?
왠지 취한 것처럼 머리가 몽롱하다.
……안 되겠다.
이대로 있으면 또 자버릴 거 같아.
자고 일어난 지 얼마 안 됐는데 벌써 낮잠을 잘 순 없지.
이불을 걷으며 몸을 일으켰다.
머리가 부스스해졌을 테니 다시 정돈해야겠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든 순간,
창문 바깥에 있는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
“다 했어?”
“……”
수상하게 창문을 넘나들기 좋아하는 아저씨가 창턱에 엎드린 채, 부드럽게 나부끼는 커튼 사이로, 나를 보며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평소 같았으면 놀라서 비명을 질렀겠지.
그러나 하도 어처구니가 없어서 그런지, 내 머리는 아주아주 차갑게 식어갔다.
“……거기서 뭐해요?”
“자네한테 용건이 있어서 왔는데, 많이 바쁜 거 같아서 기다리고 있었어.”
바쁜 거 같아서, 기다렸다고? 언제부터……?
설마 처음부터 있었던 건……
아니야, 창에 커튼 칠 때 분명 아무도 없었는데?!
“……언제부터 계셨던 거에요?”
조심스럽게 묻자, 골든로드는 콧노래라도 흥얼거릴 기세로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얼마 안 됐어. 자네가 이불 속에서 숨을 거칠게 쉬길래 좀 있다 올까 했는데, 갑자기 혼자 히히 웃으면서 꿈틀대더라.
그래서 뭐하는 건가 궁금하기도 해서 그냥 보고 있었지.”
“…………”
“아, 근데 자네, 거기서 한 발 뺀 건 알아서 잘 처리하리라 믿어.”
“빼긴 뭘 빼요, 아니거든요!”
이 아저씨가 누가 듣고 오해하게시리……!
솔직히 열이 오르긴 했는데, 그래도 그 정돈 아니었어!
설령 그만큼 달아올랐다고 해도 여기서 풀 리가 없잖아!
저렇게 귀 좋은 아저씨가 있는 걸 뻔히 아는데 어떻게 그래?!
“그래? 아주 열띤 한숨을 쉬길래 그런 줄 알았는데.”
“아잇, 진짜. 아니라고요! 하아…… 그래서, 용건이 뭔데요?”
“아, 별 건 아니고,”
혹시 옛 엘프들은 다 저러고 다녔던 걸까 싶을 만큼, 군더더기 하나 없는 매끄러운 동작으로 창문을 넘은 후, 골든로드는 빙긋 웃으며 말했다.
“블루스타 녀석, 집에 없더라. 그 말 전해주러 왔어.”
“……네? 없다고요?”
“응, 없어. 거기 있는 건 병사들이랑 차가운 침상뿐이야.”
대수롭지 않은 목소리로 말한 후, 그는 두 손으로 얼굴을 덮으며 긴긴 숨을 토해냈다.
이내 다시 드러난 그의 얼굴엔, 조금 전까지 방글방글 웃던 게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싸늘한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놈들이, 그를 데려갔어.”
으르렁 섞인 낮은 목소리가, 땅 속을 타고 울려오는 듯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