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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사는 소꿉친구 검성이 무섭다-189화 (189/475)

〈 189화 〉 185화 : 경청하고, 곱씹어라 (3)

* * *

신나게 바닥을 구른 다음, 나는 정수리를 문지르며 그에게 물었다.

“그래서…… 역사소설을 냈고, 그걸 그대로 가르친 거군요?”

“……바로 다시 이야기를 계속하는 건가? 아무튼 그렇다. 학교의 교재로 삼았다고 들었으니, 블루벨과, 그 이후에 태어난 아이들이 배웠겠지.”

학교……?

아, 여러 아이들을 한데 모아서 가르치는 곳이랬나?

우리 마을로 따지면 검술 훈련소라 할 수 있겠군.

“대강 무슨 내용이 적혀 있었는지 알겠네요. 모든 나쁜 짓은 다 인간 때문에 벌어진 거라고 되어 있었겠죠. 아니면 그렇게 해석되도록 교묘하게 비틀었거나.

내 말 맞지, 블루벨? 인간이 생명수들을 불태웠다며.”

“……”

블루벨은 대답 없이 내 시선을 피할 뿐이었다.

아무래도 내가 자신을 비난하는 줄 안 모양이다.

그냥 확인하려고 물어본 건데.

음…… 그러고보니 얼굴이 좀 창백해진 거 같다.

아까 골든로드의 집에서처럼, 자신이 그동안 알고 있던 사실들이 완전히 잘못되었다는 것에 큰 충격을 받은 듯했다.

하긴, 이건 일족 모두에게 속은 거나 다름없잖아.

얼이 나가는 것도 당연하지.

그리고 그럴 때는 역시 따끈한 차 한 잔이 최고다.

나는 주전자를 들고, 그녀를 향해 살짝 흔들며 물었다.

“한 잔 줄까?”

“……됐어.”

“그래? 흠…… 메린, 마실래?”

“엉? 어, 응.”

물잔에 차를 따라 메린에게 건네준 다음, 그녀가 잔을 기울이는 때를 맞추어 함께 호로록 한 모금 들이켰다.

쟤도 거절했다면 뻘쭘하게 다시 주전자 내려놔야 했을 텐데, 안 그래도 돼서 참 다행이야.

어쨌든 블루스타의 이야기를 정리하면, 왕은 선대 왕을 손수 처형한 다음, ‘어머니 나무의 대리자’라는 지위를 한껏 이용해 엘프들을 완전히 휘어잡았다.

종국에는 언어까지 따로 만들고, 그걸로 왜곡된 역사서를 써서 신세대 엘프들에게 주입시켰다.

그 일련의 행동은, 오로지 엘프를 다시 위대하게 만든다는 목표를 이루기 위한 것이다.

그러니 애들을 이용해서 생명수를 되살리는 것도, 그 원대한 목표의 일환이겠지.

물잔을 들고 있는 손의 검지로 잔을 두드리며, 나는 그에게 물었다.

“블루스타, 왕이 지금 몇 살이죠?”

“거의 팔백 살 가까이 됐을 터인데, 왜 묻지?”

“혹시 왕이 ‘원래 저런 사람이 아니었는데’ 또는‘사람이 변했다’는 등의 말을 들은 적이 있나요?”

“내가 알기로는 없다.”

어느 날 갑자기 미쳐서 확 변한 건 아니라는 거군.

뭐, 왕을 모욕한 죄로 처벌받을까 무서워서 말을 안 한 걸 수도 있지만.

“아까 말했듯이, 그 나무에는 지금 파란열매가 열려 있어요. 아마 그걸 키우려고 애들을 쓴 거겠죠. 블루스타, 그걸 뭐에 쓰려는지 알아요?”

그는 내 물음에 고개를 저었다.

“나는 돌에렛에 열매가 맺혀 있다는 것도 몰랐다. 가까이서 본 적도 없고.

돌에렛에게는 폐하와, 폐하의 특별 지정을 받은 자만 다가갈 수 있다.”

“눈 좋잖아요. 그런데도 못 봤다고요?”

설마, 이제 와서 잡아떼려고 하는 건 아니겠지……?

“……거짓말 아닐 거야.”

그 생각이 내 표정에 살짝 묻어나왔는지, 블루벨이 블루스타를 변호하듯이 나섰다.

“……이 사람만 못 보는 게 아니야. 나도 잘 안 보여. 무언가 안개 같은 게 껴 있거든.”

“아, 그래?”

그러고보니 메린도 나무 주변이 뿌옇다고 했었지.

흠…… 왕은 그 나무에 파란열매가 맺힌 걸 숨기고 싶은 모양이다.

같은 엘프에게도 숨기려 하다니, 대체 어디다 쓸 작정인 거지……?

“위슨, 혹시,”

“없어.”

“……아직 말하던 중인데.”

“그 놈이 골든과 얘기 나눌 때, 열매 얘기는 없었냐고 물으려는 거 아냐?”

“………아냐. 무슨 특별한 얘기 없었냐고 물으려고 했어.”

그렇게 말하면서 차를 마시려 시선을 살짝 숙였다.

어디까지나 차를 마시기 위한 거지, 말하기도 전에 의도가 다 까발려진 게 민망해서 그런 게 절대 아니다.

……아무튼 아니야!

“별 거 없었어. 그 왕이라는 놈이 골든을 회유했고, 골든이 거기에 엿을 날린 게 다야.”

“……그 아저씨 살아있는 거지?”

위슨은 내 물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놈이 막 화내려는 순간, 죄수를 빼앗겼다는 보고가 들어왔거든. 놈은 그대로 화내다가 돌아갔어. 대신,”

“대신, 집 근처에 경비가 서게 되었지.”

갑자기 동굴 안쪽에서부터 목소리가 울렸다.

곧바로 벌떡 일어나 허리춤에 손을 댔는데,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다!

설마 거기에 검을 두고 왔나?!

황급히 주위를 둘러보니, 하필이면 목소리가 울려오는 쪽 벽에 기대어져 있다.

아잇, 망했네.

이 물잔이라도 슬링 탄환으로……!

탄환으로 삼으려 차를 벌컥벌컥 들이켜는 동안, 뜻밖의 손님은 동굴 안쪽 그림자 속에서, 야광석등의 빛 안으로 걸어나왔다.

열이 나지 않는, 차갑고도 밝은 빛이 우리에게 보여준 건, 머리 뒤쪽에 한데 묶은 연노랑색 머리를 휘날리는 남자 엘프였다.

“어이쿠, 카엘, 뭐 하려는 건지 몰라도 하지 마. 나야, 나. 자네의 친절한 엘프 아저씨, 골~든로~드!”

“……”

곧바로 물잔을 던져주었다.

그러나 그는 내가 힘차게 던진 물잔을 아주아주 여유롭게 받아 들고는, 살짝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응? 웬 물잔? 아, 차는 됐어. 아까 실컷 마셨거든.”

큭, 슬링 던지려고 차 다 마셔버린 게 통탄스럽기 그지없구나!

적당히 미지근하게 식었으니, 화상 걱정없이 골든로드에게 붙은 ‘헛소리하게 만드는 잡귀’를 쫓아버릴 수 있었을 텐데……!

그는 방긋 웃는 얼굴로 느긋하게 다가와 내게 물잔을 다시 돌려준 후, 동굴을 한 번 슥 둘러보았다.

“제법 괜찮네. 입구 꽉 막힌 것 치고는 공기도 잘 통하고, 습기도 별로 없고. 음, 근데 피냄새가 좀 나는데? 여기 누구 살던 데야?”

“곰이요. 스톤베어.”

“그렇구나. ……흠, 잠깐 여기 있어도 되지?”

그는 나에게 그렇게 물으면서 바닥에 철푸덕 주저앉았다.

대답 안 들을 거면 묻지나 말지…….

나는 한숨을 쉬면서 그 옆에 앉아, 다섯 잔째의 차를 따랐다.

“골든 씨, 여긴 어떻게 알고 오셨어요?”

“다 아는 수가…… 흠? 농담할 분위기가 아니구나? 블루벨의 신호를 따라왔어. 저 애에겐 부적이 달려 있거든.”

“네……?”

부적이 보내는 신호를 따라왔다고?

그럼 뭐야, 블루벨 저 자식, 위치 알려주는 부적을 쭉 달고 다니고 있던 거야?!

아니 진짜 어이가 없네.

……혹시협력하겠다는 건 거짓말이었던 걸까?

혼자서는 우리를 어떻게 할 수 없으니, 협력하는 척하면서 왕에게 넘길 기회를 계속 엿보고 있던 건가?

만약 그런 거라면,화가 굉장히 많이 날 것 같은데…….

“……설명 좀 해줄래?”

블루벨에게 말하는 동안, 내 얼굴이 서서히 일그러지는 게 느껴졌다.

그녀 역시 내 표정을 본 거겠지.

그녀는 자신의 머리에 달린 파란 꽃 장식을 손으로 가리면서 황급히 입을 열었다.

“아, 아니야! 이건 내가 어렸을 때, 그러니까 태어난 지 얼마 안 됐을 때 블루스타가 달아준 거야!”

“왜?”

“그, 그건…… 그러니까…….”

좀처럼 말을 잇지 못하는 모습에 살짝 불편해지려는 순간, 블루스타가 그녀를 보호하듯이 앞에 나섰다.

“파렴치한 놈들로부터 블루벨을 지키기 위한 것이었을 뿐이다. 스승에게 듣지 않았나? 블루벨이 태어난 후,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 그거.”

떠올리는 데에 좀 시간이 걸렸다.

음, 블루벨이 태어나고 며칠 안 되어서 모든 엘프의 성욕이 폭발했다고 했던가?

그때는 그녀가 아직 제대로 몸도 못 가누는 때였을 테니, 위치 추적이 필요하긴 했겠구나.

나는 고개를 끄덕거리면서 물었다.

“근데 왜 아직도 가지고 있어?”

“그러게 말야. 버릴 거라고 맨날 노래를 불렀으면서 아직도 안 버렸더라.”

“………………”

여전히 머리장식에서 손을 떼지 않은 채, 그녀는 고개를 푹 숙이고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블루스타는 놀란 것처럼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다가, 천천히 몸을 돌려 그녀와 마주섰다.

그 탓에, 나에겐 이제 그의 표정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내 반대편에 있는 로나가 눈을 반짝이고 있는 걸 보면, 지금 그녀를 보며 무슨 표정을 짓고 있을지 대충 상상이 갔다.

아마 감격했다는 듯이 웃고 있거나, 의외라며 놀라고 있겠지.

“블루벨…….”

“………마요.”

벼룩만 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던 그녀는, 갑자기 무슨 오기가 생겼는지 고개를 쳐들고 빽 소리질렀다.

“착각하지 마요! 장식이 예뻐서, 버리기 아까워서 그냥 쓰고 있을 뿐이니까! 당신이 매순간순간, 내가 어디 있을지 확인하고, 몰래 지켜봤을 걸 생각하면……온 몸에 소름이 돋아……!!”

“그런 적 없다만.”

“내가 그걸 믿을 거 같아요?! 이걸로 내 주변 상황도 볼 수 있잖아요! 부, 분명 내가 목욕하는 거랑, 그 밖에도 다른 모습들, 다 훔쳐봤을 거야……!”

……그건 절대 아닐 거 같은데.

나는 속으로 대꾸했다.

저 양반이 그런 짓을 저지를 인상이 아닌 건 차치하고…….

블루벨의 알몸 따위 170년 전부터 실컷 봤을 텐데, 굳이……?

엘프니까 기억력도 그럭저럭 좋을 거 아냐.

훔쳐보는 걸 좋아하는 변태가 아닌 이상……

……잠깐.

그래, 이 사람들 엘프잖아.

괴상한 성적 취향을 가진 종족인 엘프……!

어쩌면 그 자신도 모르는 음침한 욕구에 이끌려서 주변 상황까지 보이는 그런 부적을 준 걸 수도……!

“어휴, 말도 안 되는 생각 좀 그만해.”

“네?! 아, 어, 아, 아무 생각도 안 했는데요!”

갑자기 들린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냅다 변명부터 하고 말았다!

그러자 목소리의 주인인 골든로드가 나를 의아하게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응? 자네 말고 블루벨한테 한 건데…….”

“……아, 네.”

가만히 고개를 돌리고 차를 벌컥벌컥 마셨다.

말없이 내 빈 잔에 차를 따라주는 메린의 친절과, 맞은편에서 나를 쳐다보는 두 녀석의 따듯한 시선이 왠지 모르게 가슴을 쿡쿡 쑤셨다.

“아무튼 블루벨, 억지 좀 부리지 마. 그 녀석이 네 알몸을 뭐 하러 훔쳐봐? 이미 옛날에 질리도록 봤을 텐데.”

“아저씬 빠져요!!”

“어이쿠, 무서워라.”

말은 그렇게 하지만, 실실 웃으며 두 귀를 틀어막는 모습에선 무서워하는 기색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런 그를 향해 씩씩대는 블루벨의 맞은편에서, 무척이나 무거운 목소리가 울렸다.

“……내 너에게 그런 불온한 모습을 보인 적이 없다고 여겨왔거늘, 진정 나를 그러한 자로 보는 게냐?”

“……읏.”

그의 말이 끝나는 순간, 그녀는 귀를 움찔거리면서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마치 잘못을 저지르고 꾸중을 듣는 듯한, 그런 아이의 얼굴이었다.

그녀 역시 알고 있는 것이다.

백 년도 넘는 시간동안 곁에서 본 그가, 자신에게 그런 파렴치한 짓을 할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그, 치만……! 그럴 게 뻔하잖아……! 나를 좋아한다고, 사랑한다고 한 놈들이 전부 그랬는걸!”

……그러나 그걸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엔, 이 동네가 너무 나빴던 모양이었다.

그녀는 제 얼굴을 두 손으로 덮은 채, 괴로운 듯이 허리를 구부리고 뒷걸음질을 치며 외쳤다.

“여름에 얇은 옷을 입고 있으면 물을 뿌리고! 다짜고짜 벽에 밀어붙이고! 어디론가 끌고 가려고 하고! 어디를 가든 졸졸 따라다니고! 숨어서 지켜보고!!

들려, 다 들린다고! 추잡한 숨소리가, 찔꺽거리면서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아아…아아아……! 부르지 마, 나 부르지 마, 개병신 새끼들아!

난 네놈들을 몰라. 네놈들 소유가 아니야! 네놈들을 사랑하지 않아! 네놈들 애 따위 배고 싶지 않다고!!”

더 물러날 데가 없어진 그녀는, 그대로 자리에 무너지듯이 주저앉았다.

“블루벨!”

“오지 마!!”

손을 뻗으며 자신에게 다가오려는 블루스타를 향해, 그녀는 앙칼진 목소리로 외쳤다.

“가까이 오지 마!! 당신도 똑같아. 다 똑같아! 날 사랑한다며?! 당신도, 당신도……!!”

“아, 이런, 또 도졌네.”

골든로드는 한숨을 쉬면서 자리를 탈탈 털고 일어나더니, 블루벨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갔다.

블루벨은 그저 벽에 기대어 앉아, 몸을 웅크린 채 벌벌 떨 뿐, 자신에게 다가오는 골든로드를 제지할 생각도 못하는 듯했다.

“블루벨,”

가만히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골든로드는 살며시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진정해. 이중에 네 몸에 미친 사람은 없어. 너도 알잖아.”

“우……흐윽…….”

“블루벨, 네가 그 부적을 버리지 않은 걸 보면 알아. 블루스타가, 네가 보고 겪은 쓰레기들 같은 놈이 아니라고 믿고 싶은 거 아냐?”

“……”

훌쩍이면서도,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새 엉망진창이 된 그녀의 얼굴에 쓴웃음을 지으며, 골든로드는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네 입으로 직접 말해봐. 블루벨, 지금 이 상태가 이어져도 좋아?”

“……”

“내가 말했지? 제대로 이야기하라고. 그 다음에 인연을 끊든 뭘 하든 하라고.”

“……으.”

그는 그녀의 머리에 손을 뻗어, 블루스타가 주었다는 그 머리장식을 떼어 그녀에게 보여주었다.

“아니면, 내가 이거 먼저 버려줄까?”

“……아!”

머리장식을 낚아채려는 그녀의 손을 피하며, 골든로드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 도, 돌려줘요!”

“흠흠~”

사람 약올리듯이 콧노래를 부르며, 그는 자신에게 달려드는 블루벨을 피해 뒤로 폴짝 뛰더니,

“어이쿠, 실수.”

그대로 머리장식을 가볍게 위로 던졌다!

우와, 저거 굉장히 익숙한 광경인데!

……아, 왠지 속이 뒤틀리는 거 같다.

“아, 아아, 안 돼……!”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듯한 표정으로, 블루벨은 공중을 돌며 떨어지는 머리장식을 향해 필사적으로 손을 뻗었다.

머리장식은 무사히 그녀의 두 손바닥 안으로 떨어졌고,

“……!”

다급하게 움직인 탓에 균형을 잃은 블루벨의 몸이, 그대로 블루스타의 품으로 뛰어들었다.

뭐, 그가 재빨리 그녀의 어깨를 잡아 세운 덕분에, 어느 두 사람이 바라는 상황은 만들어지지 않았다.

……로나도 그렇고, 저 아저씨도 그렇고, 옆에서 대놓고 혀를 차거나 이마를 짚고 있네.

아니 무슨 연극 보는 것도 아니고…….

나 참, 돌겠네, 진짜.

“블루벨…….”

“……”

“……미안하구나.”

사죄를 읊는 그의 목소리에, 블루벨의 두 귀가 움찔거렸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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