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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사는 소꿉친구 검성이 무섭다-190화 (190/475)

〈 190화 〉 186화 : 경청하고, 곱씹어라 (4)

* * *

블루벨은 그에게 두 어깨를 잡힌 채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머리장식이 담겨 있을 두 손은 어찌나 힘을 꽉 주고 있는지, 하얗게 질려선 덜덜 떨고 있다.

겁을 먹었거나…… 당장이라도 소리치며 떨어지고 싶은 걸 꾹 참고 있는 듯했다.

불현듯 블루스타의 손이 그녀의 머리로 향했다.

울긋불긋한 머리에 손이 막 닿으려는 순간, 그는 손을 우뚝 멈춰 세우더니 다시 내렸다.

그리고는 그녀를다독이듯이, 천천히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정말 미안하다. 네 고난을 누구보다도 잘 알면서 경솔히 행동해, 네게 크나큰 고통을 주고 말았다. 네가 날 믿지 않는 것도 당연해.”

“……”

“……지난 이십 년은 후회의 나날이었다. 내가 부족하여 정욕을 억누르지 못한 것, 그걸 인정해서 네게 큰 상처를 준 것, 제대로 사죄하지도 못하는 것……. 하루도 후회하지 않은 날이 없어.”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참회했다.

“이십 년 전 그날, 네게 그런 표정을 짓게 한 나 자신을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었다. 아니, 지금도 용서할 수 없어.

그러니 네가 나에게 먼저 손을 내밀지 않는 한, 너에게 다가가지 않으리라 맹세했다.설사 두 번 다시 너를 보지 못한다 해도…….

……아니, 어쩌면 그저 두려웠던 건지도 모르겠다. 나는 너와 거리를 두어, 이 마음이 스스로 사그라지길 기대했는지도 몰라.”

그저 조용히 잊히기를, 150년만에 다시 찾아온 고독이 모든 것을 덮어버리기를 기다리길 바랐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십 년간 그녀를 내버려둔 건지도 모르겠다며 그는 중얼거렸다.

블루벨은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잠자코 그의 참회들을 듣고 있었다.

그가 아직 아버지였을 시절, 그녀를 지키고자 선물한 머리장식을 두 손에 꼭 쥐고서.

“그러니…… 정말 미안하다, 블루벨.”

“……”

울먹이는 듯한 그녀의 얼굴이, 천천히 그를 올려다보는 게 보였다.

나는 아주 조용히 일어나, 가급적 발소리를 내지 않으려 애쓰며 자리를 옮겼다.

의아해하는 시선이 뒤통수에 꽂혔지만 개의치 않고, 나는 두 사람의 표정이 모두 보이는 위치에 자리를 잡았다.

“용서해달라는 말은 하지 않으마. 나에겐 그런 자격이 없어.”

마침내 눈에 들어온 블루스타의 얼굴엔, 미소가 하나 떠올라 있었다.

……당장이라도 피를 토하고 죽는 게 아닐까 싶을 만큼 괴로움에 가득 찬 미소.

“나는 여전히, 사내로서 네 앞에 서고 싶다.”

이십 년의 고뇌로도 꺾이지 않은 마음을 전하는 그의 얼굴은, 어쩐지 보이지 않는 눈물을 흘리고 있는 듯했다.

“너를 다시 본 순간 깨달았다. 내 호흡이 멈추지 않는 한, 너를 향한 이 마음이 사그라지지 않으리라는 것을.

……이미 나는, 내 심장 모두를 너에게 바쳤음을.”

“……나…는……!”

“안다. 알다마다…….내 어찌 네 마음을 모르겠느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그는 다시금 비통에 젖은 미소를 띄웠다.

“지금은…… 아니, 평생 답하지 않아도 괜찮아. 이 이후로 나를 가까이하지 않아도 상관없다.

다만 이것 하나만은 믿어다오. 나는, 너를 괴롭게 하는 자들과 달라.”

“……”

그렇게 말하며, 그는 블루벨의 어깨에서 두 손을 떼고, 그녀의 손을 꼭 감싸 쥐었다.

그녀는 한층 더 깊은 울상을 지으면서도, 그가 하는대로 가만히 내버려두었다.

……손을 뿌리치려면 얼마든지 할 수 있을 텐데.

“그때는 제대로 전하지 못했지. 블루벨, 내가 사랑하는 건 ‘완전무결의 새침데기 공주님’이 아니란다. 나는 어리광쟁이에, 주당에, 차조차 제대로 못 끓이는 요리치에……”

‘어리광쟁이’라는 말이 나올 때부터 새빨개진 블루벨의 얼굴을 지그시 바라보며, 그는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성실하고 다정하며 사려 깊은 너. 마음이 여린 걸 부끄러이 여기면서도 결코 그 마음을 버리지 않는 너. ……그런 너를 사랑한다.”

“……”

“그리고 그 부적은 위치 추적밖에 못해. 네가 학교에 가게 된 그 해에 바꿨지 않느냐?”

“…………”

말을 마친 후, 그는 가만히 그녀의 손을 놓았다.

마침내 그에게서 풀려난 블루벨은, 새빨갛게 물든 얼굴을 천천히 들고 그를 바라보았다.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 그녀는 몇 번이나 입을 달싹거리다, 이내 도로 고개를 숙여버렸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잠시 안타까이 바라보던 블루스타는, 이윽고 천천히 발걸음을 돌리기 시작했다.

아마 맞은편 구석으로 물러나려는 거겠지.

……블루벨 녀석, 나나 다른 사람에겐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팍팍 쏘아대면서, 왜 저 양반에겐 아무 말도 못하는 거야?

내일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르는데,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지금 해야지……!

“……”

음, 그러고보니 블루벨과 약속을 했었지?

그녀가 블루스타와 대화하는 걸 도와주겠다고.

골든로드는 그저 한숨을 푹 쉬며 어깨를 으쓱이고 있으니, 내가 나서서 그녀의 등을 밀어줘야지.

나는 물러나려는 블루스타를 불러 세웠다.

발길을 멈추고 나를 내려다보는 그를 마주하며, 나는 조금 고민한 후, 그에게 하나 묻기로 했다.

……어쩌면 블루벨이 가장 알고 싶을지도 모르는, 그녀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을.

“저기, 블루스타, 언제부터 블루벨을 사……연모한 거에요?”

“음? 내 277번째 생일 때 반했다만.”

우와, 당당하게 즉각 대답하는 거 봐!

음, 아무튼 올해로 23년째 짝사랑 중이라는 거군.

……역시, 처음부터 블루벨에게 흑심을 품은 게 아니었어.

“근데 그대가 그걸 왜 묻는 거지?”

“그냥 궁금해서요.”

대강 대답한 후, 나는 물잔을 기울이면서 블루벨을 슬쩍 살펴보았다.

“……그때…부터…….”

홀로 중얼거리는 그녀의 얼굴에서 차츰 긴장이 풀어져갔다.

아마 무언가 떠오르는 기억이 있는 거겠지.

“블루벨,”

……이제 어쩔 거야?

댁이 믿든 안 믿든, 블루스타는 댁의 인생 중 147년간은 순수하게 아버지로 살았어.

댁이 온전한 한 사람이 되고도 더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야, 마음에 품은 거라고.

“할 말 있지 않아? 블루스타에게.”

“……”

내가 그렇게 말하자, 블루스타는 의아한 얼굴로 다시 몸을 돌려 블루벨을 마주보았다.

블루벨은 잠시 침묵을 지키더니, 마침내 결심한 것처럼 홀로 끄덕이며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가 물러난 거리만큼 다가가, 그의 앞에 선 후, 천천히 그 입을 열었다.

“……나, 아직…… 그때 일, 용서 못해요. 굉장히 무서웠으니까.

사과해도 소용없어요. 용서…… 절대 안 할 거야.”

“……그래, 알겠다.”

“그래도, 그…… 내가 오해한 건, 오해한 거니까…….”

말을 흐리며, 그녀는 꼭 쥐고 있던 손을 펼쳐, 파란 꽃 모양 머리장식을 그에게 내밀었다.

“달아, 주세요.”

“뭐……?”

벙벙한 얼굴로 되묻는 그에게, 그녀는 도로 고개를 숙인 채 더듬더듬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귀를 새빨갛게 물들인 채.

“여기 거울 없으니까…… 내가 직접 달려고 하면, 삐뚤어지니까…….”

“……”

“나…… 잘, 모르겠어요. 그날, 무서웠는데. 그러면서 두근거리고. 난 당신을 아버지라 생각했는데, 근데 두근거리면…… 이상한 거잖아요.”

오, 세상에……!

나는 조용히 물잔을 내려놓고, 두 손으로 떡 벌어진 입을 굳게 틀어막았다.

무시무시한 사실이 밝혀지려 하고 있다는 예감이 강하게 들고 있었다.

“그래서 무서워서, 잠을 잘 수가 없는데…… 문을 잠가야 한다는 생각은 안 들고.”

“……”

“모르겠어요. 나, 집을 나오고서 계속 이 부적, 달고 다녔어. 갑자기 당신이 찾아와서, 그 놈들처럼 막 밀어붙이면 어쩌나 싶으면서도, 계속…… 계속 달고 다녔어요.”

블루벨은 숙였던 고개를 살짝 들어 그를 올려다보았다.

여전히 얼굴은 새빨갛게 물들어 있고, 머리장식을 받친 두 손은 파르르 떨리고 있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들은 나 역시, 엄청난 사실에 충격을 받아 와들와들 떨고 있었다.

역시 내 눈은 틀리지 않았어……!

저 엘프, 강제로 당하는 게 취향이야!

그런 걸 뭐라고 하더라?

아, 그래, 피학성애……!!

아까 벌벌 떨던 걸 보니 겁탈당하는 건 싫어하는 거겠지. 의외이긴 하지만, 그나마 다행이군.

달리 말하면, 좋아하는 사람에게 당하는 건 괜찮다는 것이다.

그건 즉, 블루벨도 저 양반에게 그럭저럭 호감이 있다는 소리이지!

와, 또 하나의 근친성애자다!

세상에, 하나로도 어지러운데 이상성욕을 두 개나 가지고 있어?

어머니 나무의 마지막 꽃이라고 여러모로 크게 챙겨준 거야, 뭐야?

그딴 거 말고 다른 거나 챙겨줄 것이지!

“어쨌든 이거…… 당신이 내 무사를 바라고 달아줬던 거니까……. 아직, 위험하니까……. 그러니까 그때처럼, 직접 달아줬으면……좋겠어요.”

“블루벨…….”

“차, 착각하지 마세요! 당신의 마음을 받아준다거나 그런 게 절대 아니니까! 나, 나는, 그저……!”

“되었다. 네 마음은 알고 있다 하지 않았느냐?”

부드럽게 제지하며, 블루스타는 평소의 모습에선 전혀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따뜻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그녀의 손에서 머리장식을 집은 후, 그녀의 머리를 손으로 빗어 내렸다.

길게 풀어헤쳐진 그녀의 머리가, 그의 손가락 사이에서 정돈되는 게 보였다.

“……”

그 후, 그는 머리장식을 입에 물더니, 자신의 뒷머리를 일부 묶고 있던 끈을 풀었다.

그의 푸른색 머리가 물결치는 가운데, 그는 그녀의 머리를 한 줌 쥐어 뒤로 묶은 다음, 그 바로 가까이에 머리장식을 꽂았다.

바로 조금 전에 그가 하고 있던 머리 모양 그대로였다.

블루스타는 그녀의 묶인 머리를 쓸어내리며, 만족스러운 듯이 중얼거렸다.

“……역시, 이 모습이 가장 어울리는구나.”

“읏……!”

블루벨의 얼굴이 순식간에 가을 단풍보다도 더 진하게 달아올랐다.

그녀는 홱 몸을 틀어 동굴 구석으로 가더니, 그대로 자리에 쪼그려 앉았다.

블루스타는 그 뒷모습에 미소지으며, 다시 걸음을 돌려 반대쪽 구석으로 향했다.

……끝난 거 같은데, 잘 된 건가?

건너편에서 로나가 블루벨을 향해 히죽거리는 걸 보니 잘 된 것 같기도 한데.

“나 참, 어차피 저럴 거면서 뭘 그리 어깃장을 놨나 몰라. 안 그래?”

건너편에 있던 골든로드가 다시 내 옆으로 와 앉으며 동의를 구했다.

나는 그저 어깨를 으쓱일 수밖에 없었다.

“글쎄요, 여기서 저 엘프를 본 건 하루밖에 안 됐거든요.”

“잠깐 보긴 했잖아. 말 안 섞겠다고 고집 피우는 거.”

“하…… 저는 지금 보고 들은 이야기가 더 놀라워서요.”

세상에, 호감 있는 사람에게 힘으로 눌리는 걸 좋아하는 성향이라니!

……설마 여기 오기 전까지 계속 적이니 죽이라니 했던 것도……?!

히이익! 역시 엘프는 죄다 변태야!!

그러고보니 그 엘프 마녀도 그런 쪽 변태였잖아!!

오, 신이시여, 이 종족 너무 무서워요,살려주세요!

“응? 뭐가 놀라운데? ……어라? 자네, 왠지 안색이 안 좋은 거 같은데? 아, 혹시 블루벨에게 마음 있었던 거야? 저런! 아주 실망이 크겠어.”

“뜬금없이 이상한 소리하지 마세요! 옆이 따가워진다고요!”

“옆? ………아, 농담이야, 농담! 그냥 한 말이니까 신경 쓰지 마.”

푹푹 꽂히던 시선이 가라앉았길래 슬쩍 옆을 보았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메린이 뚱한 얼굴로 차를 홀짝이고 있다.

아니 이젠 말만 나와도 저러네.

누가 보면 쟤가 나 좋아하는 줄 알겠어.

“역시 둘이 그런 사이구나? 저번엔 아니라고 하더니.”

“아닌 거 맞거든요?”

이거 봐, 바로 이런다니까.

나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아니라고? 메린~ 자네 카엘 좋아하지~?”

“모르겠는데요.”

그걸 당사자에게 바로 묻는 이 아저씨도 아저씨지만, 의아한 듯이 살짝 고개를 갸웃거리며 즉각 대답하는 저 녀석도 참…….

그리고 그녀의 대답을 들은 그는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헛웃음을 지었다.

정말 어이가 없군.

“아니 누구랑 똑같은 소리하네. 요즘 그게 유행어야?”

“같은 취급하지 마세요. 쟨 진짜 모르는 거니까.”

“그래? 흠…… 뭐, 모르면 어때. 어차피 자네랑 계속 붙어 있을 텐데. 하하, 힘내라고.”

내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하하 웃는 이 아저씨를 어쩌면 좋을까?

바닥에 내려놓은 물잔을 다시 들고, 잔 속에 찰랑이는 물결을 보며 엘프 아저씨에게 붙은 사악한 잡귀를 쫓는 데에 쓸지 잠시 고민했다.

……차가 아깝다.그냥 내 영혼이나 살리자.

한숨을 쉬며 차를 들이켰다.

“심심해서 경비 뚫고 여기까지 오신 건 아니죠?”

“맞는데?”

“………안녕히 가세요.”

“농담이야, 농담! 나 참, 좀 놀렸다고 그새 삐친 거야? 내가 왕이랑 뭔 얘기했는지 자네가 궁금해할 거 같아서 얘기해주러 왔어.

근데……, 하하, 위슨 붙여놨었구나. 전혀 몰랐지 뭐야? 우리 용사님, 정말 철저하고 신중하시네?”

어쩐지 주변이 서늘해진 것 같은데, 밤이라서 그런가?

왠지 내 어깨를 두드리는 그의 손길도 점점 매워지고 있는 것 같다.

음, 피곤한가보군.

“그래~ 신중해야지! 자네는 지금 적진에 있는 거니까. 그래, 그래. 이해하고 말고.”

신나게 두드리던 손을 멈추어, 내 어깨를 척 붙잡는 골든로드.

여전히 방긋 웃고 있다.

“근데 좀…… 아주아주 조~금, 섭섭하네?”

“왕이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까 지켜보라고 한 거에요.”

“아, 날 걱정해서 한 거다?”

“당연하죠.”

“……”

“……”

방긋 웃는 그를 향해, 나 역시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침묵 속에서 서로 웃은 채 마주하길 수 초 후,

꽈아악.

그에게 붙잡힌 어깨가 갑자기 구겨지는 느낌이 들었다!

“우아아악! 엄청나게 아픈데요!!”

“그야 힘주고 있으니까.”

“아니 내가 뭘 어쨌다고!!”

“카엘, 젊은이는 솔직해야 돼. 벌써부터 사람 속이고 그러면 못 써.”

“솔직하게 말한 건데!”

꽈아아아악.

꺄아아아!

진짜 어깨 구겨진다아아!!

“끄아아악! 알았어요, 알았다고!

자의이든 타의이든 뻥치거나 숨길 거 같아서 들으라고 했어요! 됐어요?! 아아아, 죽일 테면 죽여라아아!!”

악에 받쳐서 소리치자, 그가 샐쭉한 표정을 지으며 내 어깨를 놓았다.

아…… 어깨 아파…….

근데 조금 있으니 왠지 시원한 느낌이 든다.뭐지……?

“그래, 상대는 악마이니까 조심해서 나쁠 건 없지. 그럼 위슨이 상황까지 본 거야? 아니면 소리만?”

“소리만 들었을 걸요…….”

“그래? 그래도 여기까지 온 보람이 있긴 하네. 자네, 블루스타 대신 친위대장이 된 자가 누구인지 아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름이 아마 글라디올러스랬나?

블루벨을 짝사랑하는 남자 A이기도 한 그는, 블루벨보다 어린 엘프 중에선 가장 전투실력이 뛰어나다고 들었던 것 같다.

“그래, 블루벨보다 어린 엘프야. 근데 사다리를 안 쓰고 내 집 문을 두드렸어.”

허……? 뭐야, 그거.

그냥 나무를 걸어 올라갔다는 소리 아니야?

대번에 인상이 찌푸려졌다.

“블루벨 이후의 엘프는 그런 능력이 없는 거 아니었어요? 근데 어떻게……?”

“나야 모르지. 그래도 쓸데없이 기어오르던 걸 보면, 그런 능력이 생긴지 얼마 안 됐나봐.”

기어오르다니……뭔 일이 있었길래?

그는 빙긋 웃으며, 대수롭지 않은 말투로 대답했다.

“왕의 제안을 거절했더니 ‘감히 폐하의 명을 거절하다니! 주제를 알아라!’라면서 내 멱살을 잡더라. 그래서 주제를 알게 해줬지. 하하, 젊은이다운 치기이긴 해.

음, 그래도 조심하는 게 좋을 거 같아. 뒤떨어지긴 해도, 갑자기 옛 엘프의 힘을 되찾게 할 수 있다면, 그걸 더 강화할 수도 있지 않겠어?”

옛 엘프의 힘을 되찾는 게 가능한 건가?

그게 됐으니 글라디올러스는 친위대장이 되고, 왕은 말 안 듣는 블루스타를 치우려 했던 거겠지만…….

하……어쨌든 망했군.

왕 주위에 블루벨처럼 움직이는 놈이 적어도 하나는 생겼다는 거 아냐.

진짜 뭐 쉽게 굴러가는 일이 없구만.

“염병할.”

덤덤히 불평하며, 가만히 물잔을 기울였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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