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2화 〉 188화 : 헤아리고, 결단하라 (2)
* * *
골든로드는 물잔을 살살 흔들며 입을 열었다.
“생각 중이야. 자네가 왕을 상대하는 걸 보고 싶긴 한데, 그냥 집에 있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거든.
아, 그렇지. 카엘 자네, 어머니 나무 본다고 했었잖아. 봤어?”
“예에……. 보긴 봤죠…….”
정말 기억에 오래오래 남을 것을 봤지.
흐릿해서 잘 안 떠오르지만.
“허? 또 안색이 안 좋아지네? 뭘 봤길래 그래?”
“그……”
……좀처럼 말이 이어지지 않는다.
희한하네, 아까는 차를 계속 들이부어야 하긴 했지만 이야기는 할 수 있었는데.
지금은 그때보다 시간도 더 지났는데, 왜 아까보다 더 입을 떼기가 힘든 거지?
물잔을 꽉 쥐고 다시 입을 열려는 순간, 옆에서 목소리가 울렸다.
“나무에 인간 어린애 셋이 박혀 있고, 근처 창고 지하에 시체를 썩히고 있는 나무통이 깔려 있었어요.”
……정말 완벽한 요약이군.역시 메린이야.
좀더 느릿한 말투에 목소리도 조금 낮았다면 훨씬 나았을 텐데.
별일 아니라는 듯한 말투로 별일을 전하고 있으니까, 귀나 머리 둘 중 하나가 맛이 간 게 아닌가 싶을 만큼 상당한 괴리감이 느껴진다.
질 나쁜 농담을 하는 듯한 기분마저 들고 있었다.
그도 비슷하게 느낀 듯했다.
멍하니 입을 벌리고 있다가, 그녀가 말을 마치고 조금 더 지나서야 말을 꺼냈다.
“……허? 뭐? 진짜로?”
“네.”
그의 시선이 나를 향하길래 그를 살짝 돌아보며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러자, 그는 황당하다는 듯한 얼굴로 다시 입을 벌린 채 눈만 끔벅거렸다.
“허…….”
여러 뜻이 담긴 듯한 긴 숨을 내쉰 후, 골든로드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말했다.
“그래…… 그럼 난 그 나무를 보러 가야겠네. 자네들은 왕을 처리해.”
“……그 자리에 없어도 괜찮아요?”
“어차피 난 별로 도움이 안 될 거야. 악마를 상대하는 건 자네들에게 맡길게. 나 참, 진짜 살다 보니 별일을 다 본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차를 홀짝이는 그에게, 블루스타가 말을 걸었다.
“스승님, 여쭙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뭔데? 그리고 맨날 얘기하는 건데, 그 스승 소리 좀 그만해.”
“저는 계속 그리 부를 테니 포기하시죠.여하간, 정녕 폐하가 악마인 겁니까? 저 사제에게 이야기는 들었습니다만…….”
왕을 적대하는 것과는 별개로, 놈이 악마라는 건 도무지 믿기지 않는 모양이었다.
골든로드는 ‘말도 잘 안 듣는 저딴 놈이 제자라니 싫다’면서 투덜댄 후, 자신의 눈을 가리키며 말했다.
“봤어. 악마 맞아. 아주 시커멓더라.”
“……그렇습니까.”
그 짧은 대답으로 납득한 건지, 블루스타는 표정을 찡그리며 고개를 끄덕일 뿐, 그 이상 더 묻지 않았다.
오히려 내가 눈을 휘둥그레 뜨며 그에게 묻고 있었다.
“그게 보여요?”
“응. 아직 껍데기 안에 있으니까 또렷하진 않아. 그래도 사람의 것인지 아닌지는 알 수 있지.”
“아하, 그래서 회유에 안 넘어간 거군요.”
“아니? 놈이 엿 같아서 거절한 건데? 악마가 아니라 사람이라도 사절이야. 아니, 사람이었으면 더 나았겠구나. 그 자리에서 죽였을 테니.
악마는 보통 방법으로는 죽지 않거든. 그래서 그냥 보냈지. 아깝게시리.”
씁쓸하게 웃으며 그렇게 말한 후, 골든로드는 물잔을 확 기울여 남은 차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빈 잔을 바닥에 내려놓고 일어서는 그를 보며 물었다.
“가시려고요?”
“응. 가서 자장가 불러야 돼. 안 그러면 난리를 치거든. 특히 그 미친 영감탱이…… 느릅나무가 발악을 해대면서 영 좋지 않은 기운을 막 내뿜어. 아직 안 미친 꽃들도 남아 있는데, 그렇게 둘 순 없지. 차 잘 마셨어.
아, 내일 동이 트거든 자네들끼리 알아서 출발하고 움직여. 나도 알아서 갈 거야.”
그는 느긋하게 손을 흔들며, 아까 모습을 드러냈던 그 동굴 안쪽으로 향했다.
여기 왔을 때처럼 땅을 뚫고 가려는 모양이다.
역시 능력이 온전히 살아있는 옛 엘프답구만.
“맞다. 말해줄 게 있는데 깜빡했네.”
그러다 걸음을 멈추고 다시 돌아서더니, 나를 보며 빙그레 웃었다.
“오늘밤은 푹 쉬어. 여기가 들킬 일은 전혀 없을 거야. 숲이 자네들을 숨겨주고 있거든.”
“네? 그걸 어떻게 아세요?”
“내가 직접 확인했으니까 알지! 정령이고 짐승이고 몬스터이고, 자네들 흔적을 알려주지 않더라. 그래서 블루벨의 신호를 따라왔어.”
땅을 딛은 흔적도, 동굴 입구를 흙으로 틀어막은 것도, 심지어 나무에 갈고리가 찍힌 자국조차도 알려주지 않았다.
그새 다른 엘프들처럼 능력을 잃은 게 아닌지 순간 의심했다며 그는 웃었다.
“아마 내가 여길 나가고 집에 돌아가는흔적도 다 지워질걸? 이야, 역시 용사님이구나. 숲이 막 도와주네.”
“용사 상관없어.”
넉살 좋은 그의 말에 대꾸한 건 파랑새였다.
녀석은 제 날개를 부리로 다듬으면서, 심드렁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
“숲은 그저 저 놈한테 은혜를 갚고 있을 뿐이야.”
“엉? 왜?”
뜬금없는 소리에 눈을 크게 뜨며 묻자, 파랑새는 나를 뚱하게 마주보더니 한숨을 푹 쉬었다.
“모르면 말아라, 미친놈아. 나는 또 왜 ‘영원히 감사한다고 했는데 뭐 도와주는 거 없냐’는 말이 안 나오나 했는데, 그냥 흘려들었었구만.”
“뭔 소리야, 좀 알아듣게 말해. 누가, 언제 나한테 그랬는데?”
“신경 꺼, 사소한 거야.”
아니 지가 실컷 신경 쓰이게 만들어 놓고…….
진짜 어이가 없네.
불만을 잔뜩 품은 채 녀석을 노려봤지만, 역시 내 잔소리를 잔뜩 처먹어도 거뜬한 놈답게 나를 깔끔하게 무시했다.
위슨이 가끔 보이는 그 철벽 같은 태도는 저 싸가지에게 배운 거야. 틀림없어.
하, 이래서 아이에겐 좋은 교육자가 필요하다니까.
“흠, 모르는 사이에 빚을 지운 거야? 대단한데? 뭘 했는지는 몰라도, 축하해! 이제 자네는 숲에서 굶어 죽을 일이 없을 거야.”
“……배 곯고 있으면 갑자기 사과가 굴러오기라도 한다는 건가요?”
“하하, 그보다는 좀더 현실적이지! 사과나무가 있는 데로 자네를 유도할 거야.
아무튼 그렇게 됐으니 불침번 같은 거 서지 말고 푹 쉬라고. 자네가 있는 한, 이 안은 안전할 테니까.”
그럼 잘 자~ 그는 재차 인사한 후, 동굴 안쪽, 바위벽으로 단단히 막혀 있을 곳으로 쭉 걸어갔다.
그의 모습이 어둠 속으로 사라지면서 발소리가 뚝 끊기고, 그 이상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이야, 어떻게 돌멩이 구르는 소리도 안 들리냐?
정말 사기적인 종족이라니까.
……그건 그렇고, 내가 뭘 했다고 숲이 은혜를 갚는다는 건지 모르겠다.
뭐, 파랑새 녀석은 싸가지가 없긴 해도 아예 없는 소리는 안 하니까, 진짜로 나에겐 별일 아닌 작은 일 때문이겠지.
이유를 알 수 없으니 조금 찜찜하긴 하지만, 덕분에 푹 쉴 수 있으니 고맙게 여기자.
그렇게 생각하며 잘 준비를 마치고 배낭을 베개 삼아 베고 눕자, 메린이 내 옆에 자리를 잡고 누웠다.
그녀의 옆 얼굴을 슬쩍 본 후, 나는 눈을 감고 중얼거렸다.
“잘 자.”
“응. 너도.”
정말 착실하게 대답해주는 모습에 홀로 피식 웃으며, 막 잠에 들려는 찰나,
“……잠깐.”
곧바로 눈을 뜨고 몸을 일으켰다!
제길, 너무 자연스러워서 그냥 그런가보다 하고 넘길 뻔했어.
아니 어이가 없네, 왜 굳이 여기 와서 자는 거야?
설마 아직도 저 두 엘프를 경계하는 건가?
다른 두 녀석도 같이 있는데?
“야, 너 왜 여기서 자냐? 저쪽 가, 저쪽! 자리도 많구만!”
“싫어. 피곤해.”
그녀는 눈을 감은 채 대꾸했다.
경계하느라 이런 게 아닌 건 조금 다행이긴 한데, 뭔 뜻으로 대답한 건지 모르겠다.
피곤해서 움직이기 싫다는 건가?
“내가 굴려줄까?”
“피곤하다니까. 네 옆에서 잘 거야. 그래야 더 잘 잔단 말야. 안 그래도 내일 힘쓸 텐데 푹 쉬어야지.”
“…………”
동굴은 생각보다 소리가 잘 울린다.
당연히 메린이 중얼거린 말도 메아리 치면서 사방팔방으로 퍼져갔고, 이내 나를 향해 시선이 모여드는 게 여실히 느껴졌다.
메린 말대로 내일이 가장 고생스러울 테니 푹 쉬어야 한다.
그러니 저 자식들도 얼른 신경 끄고 잠이나 잤으면 좋겠다.
특히 히죽거리고 있을 사제님은 더더욱!
한숨을 푹 쉰 후, 다시 자리에 누워서 메린을 슬쩍 쳐다보았다.
벌써 잠에 들었는지 규칙적인 호흡소리가 옅게 새어나오고 있다.
가만히 그 머리를 만져주자, 그녀가 긴 숨을 내쉬며 내 쪽으로 살짝 몸을 틀었다.
덕분에 거의 얼굴을 마주보게 되었다.
살며시 감긴 두 눈, 아주아주 조금 열려 있는 입술.
……갑자기 그날, 그녀와 키스했던 게 떠올라, 쓸데없이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자야 되는데.
안 그래도 나는 여기 있는 사람 중 제일 체력이 낮으니까, 푹 쉬어야 그나마 맞출 수 있을 텐데.
그러나 나는 두근거림을 가라앉히긴커녕, 오히려 손끝으로 그녀의 입술을 더듬었다.
적당히 말라 있으면서도 부드러운 감촉이 느껴진다.
이따금 새어나오는 숨결이 손끝을 간지럽힌다.
……그날 밤에 느꼈던 감각들이 점차 되살아나며, 목이 마르기 시작했다.
그렇게나 차를 마셨는데 무슨 물기가 더 필요하다고.
“……메린,”
속삭이듯 불러보아도 답이 없는 걸 보니, 진짜 잠에 빠진 모양이다.
머리를 만지던 손을 내려 뺨을 쓸어내려도 미동도 없다.
만약, 지금 그녀에게 입맞춘다면……
……깨겠지.
응, 이 녀석은 십중팔구 깨서 갑자기 왜 키스하냐고 물어볼 거야.
그럼 이 동굴에 있는 다른 사람들에게, 나는 ‘욕구를 못 참고 딴 사람들 다 있는 데서 여자를 덮친 미친놈’이 되겠지.
그리고 그건 거짓 하나 섞이지 않은 명명백백한 사실이니까, 나는 반박도 못하고 쭈그러질 테고.
후후, 정말 끔찍한 전개인걸?
“……”
하지만 이대로는 잠들 수 없어…….
……두근거리기 시작한 가슴을 진정시키려면, 무언가 해야 한다.
안 그러면 밤을 꼴딱 새버릴 거야.
그러니까…… 그러니까 이건 어쩔 수 없이 하는 거다.
내 옆에서 자야 푹 잘 수 있다고 당당하게 선언한 이 녀석처럼, 나 역시 최대한 푹 쉬기 위한 것일 뿐.
어쩔 수 없는 거야.
단지 그것뿐이다.
………아마도.
“……메린, 이쪽으로…….”
뺨을 어루만지며 속삭이자, 그녀가 꿈틀대듯이 나에게 더 가까이 다가왔다.
……곤히 잠들었는데도 내 목소리가 들리는구나.
속이 살짝 간질거리는 걸 느끼며, 망토 속에 팔을 넣어 그녀의 어깨에 둘렀다.
“우응……”
“……!”
그러자 그녀가 몸을 뒤척이더니, 나에게 더 찰싹 달라붙었다.
바로 코앞에 그녀의 얼굴이 있다.
그 호흡은 아직 닿지 않고 있지만, 내가 조금만 더 다가가면 그 숨결을 마실 수 있겠지.
조금만 더 가까이,
조금만 더, 내가 얼굴을 내민다면 닿을 거다.
그 감미로운 감촉을, 또 한 번 맛볼 수 있는 거다.
조금만이라면 괜찮잖아……?
“…………윽.”
이 상황에……
무슨 생각이야……!!
온 힘을다해 그 마음을 억누르고, 나는 그녀의 뒷머리를 살짝 당겨, 내 어깨에 닿도록 했다.
마음 한편에서 고자 새끼니 하는 욕설이 마구 들려오는 듯했지만, 이번엔 라벤더 향기가 내 코를 간지럽히는 탓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항상 이 향을 맡으면, 두근거려서 미칠 것 같았는데.
……그러나 지금은 바닥에 누워 있어서 그런지, 되려 두근거리던 마음이 서서히 잠잠해지기 시작했다.
귓가에 울리는 그녀의 규칙적인 숨소리가 어쩐지 나를 토닥여주는 것 같았다.
마음이 진정되어 가자, 달아났던 잠이 다시 찾아오기 시작했다.
코에 닿는 라벤더 향이, 그녀의 정수리에서 풍기는 체취와 어우러지면서 한결 더 마음을 깊게 가라앉혀주었다.
아마 그녀의 온기 때문이겠지.
항상 이 따스함이 나를 안정시키고, 안심시켜주었으니까.
……그래도 그렇지, 진짜 어이가 없네.
당장이라도 터져버릴 것처럼 들끓던 열이 이렇게 단번에 사그라지다니 말이 돼?
젊은 혈기 다 어디 갔어?
내가 피곤하긴 한가보구만.
너덜너덜해졌던 마음은 그녀의 무릎베개로 어떻게 기웠지만, 피로감은 다 풀어낼 수 없었던 모양이다.
뭐, 배 채운 뒤에 나눈 이야기 때문에 추가적으로 더 피곤해진 것도 있겠지.
……진짜 저질체력이구만.
자조하듯 웃으며, 눈을 감고 한껏 그녀를 끌어안으면서 속삭였다.
“잘 자.”
“……”
대답 대신 들려온 긴 숨소리를 받으며, 금세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렇게 큰 맘 먹고 저지른 덕분에, 나는 꿈도 안 꾸고 정말 푹 잘 수 있었고, 여관방 침대에서 잔 것만큼이나 상쾌한 아침을 맞이할 수 있었다.
어제 느꼈던 진득한 피로감도 전부 사라진, 말 그대로 활기찬 아침.
거사를 치르기엔 더할나위 없이 완벽한 아침이었다.
기껏 한 고생이 바래지 않도록, 나는 주변 잡음을 개미 눈알만큼도 신경 쓰지 않으려 애쓰며, 왕궁 근처까지 땅 속으로 가자고 제안했다.
아무리 숲이 우리를 숨겨준다고 해도, 이 동굴에서 바로 나가는 건 지나치게 눈에 띌 것 같았던 것이다.
그러나 위슨은 내 제안에 고개를 저었다.
“안 돼. 인원이 너무 많아. 이 인원으로 거기까지 갔다가는 위슨이 쓰러지든가, 테라가 잠들 거야.”
“음…… 그렇게 힘이 드는 거야?”
위슨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주변 탐색해야지, 너네 안 묻히게 범위 조절하며 길을 여닫아야지……. 한두 명이면 몰라도, 여섯은 너무 많아.”
“그럼 알현실이 있는 방향이면 돼. 너한테 무리가 안 가는 거리가 어느 정도야?”
“여기서 2km.”
……미묘한데?
그래도 뭐, 이 동굴에서 바로 나가는 것보단 낫겠지.
나는 그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부탁한 후, 아까부터 계속 잡음을 내고 있는 두 아가씨를 돌아보았다.
“……어, 진짜로?”
“그렇다니까요. 카엘 님이 말에서 뛰어내려선……”
“……”
살짝 얼굴을 붉힌 채 흥미진진하게 귀를 기울이고 있는 변태 엘프와, 아침에 나와 메린을 보자마자 꺄아꺄아 소란을 피우던 사춘기 사제님이 정답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대충 그 돈독 오른 도시에서 열렸던 파티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 같군.
아니 잡담하는 건 상관없는데, 왜 하필 내 얘기를 하는 거야?
돌겠네, 진짜.
“그리고 두 분이서 무도회장을 점거해선……”
“우와.”
“그만 떠들고 준비 좀 하시지?!”
……결국 못 참고 빽 소리지르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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