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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사는 소꿉친구 검성이 무섭다-193화 (193/475)

〈 193화 〉 189화 : 심판의 때가 왔도다 (1)

* * *

그 후, 늑대의 도움을 받아 땅 속을 걸으면서도 두 아가씨의 잡담은 끊이지 않았고, 나는 모처럼 회복한 활기가 점점 깎여나가려는 것을 느꼈다.

지금 놀러가는 것도 아니고 엘프의 왕을 죽이러 가는 건데,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너무 긴장감 없는 거 아냐?

한숨을 푹 쉬는데, 나와 함께 앞쪽을 걷던 블루스타가 입을 열었다.

“그대들은 독특하군. 인간 특유의 적응력인가? 아니면 그대들의 여정은, 이 정도의 일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만큼 험난했던 것인가?”

“다 아니에요. 그냥 저 사제님이 이상한 거지.”

대놓고 뒤쪽을 가리키며 말하자, 로나가 까르르 웃으며 크게 외쳤다.

“아주 틈만 나면 껴안고 주무신다니까요!!”

“야, 임마, 내가 언제?!”

저 자식이 누가 들으면 오해할 소리를……?!

그러나 로나는 내 발끈한 모습에 오히려 더 재미있다는 듯이 킥킥 웃을 뿐이었다.

제길, 딱밤 먹여주고 싶다.

길이 좁지만 않았어도 한 방 갈겨주는 건데……!

“고맙다.”

“뭐가요?”

이 양반도 갑자기 뜬금없이 뭔 소리야?

뒤쪽 잡음 때문에 신경이 곤두서서 본의 아니게 날카롭게 되묻고 말았다.

그러나 블루스타는 전혀 개의치 않고 오히려 내게 미소를 지었다.

“사제에게 들었다. 나를 구한 건 그대의 뜻이라고. 또……내 사랑, 블루벨의 등도 밀어주었지. 덕분에 그녀의 마음을 들을 수 있었다.”

“……마음이야 다 안다면서요?”

“알지. 하지만 그저 알고 있는 것과 그걸 직접 듣는 게 어찌 같을 수 있겠나?

……그러니 고맙다, 용사여.”

“……”

으, 역시 이런 건 안 맞아.

그냥 넉살 좋게 ‘천만에요’ 라고 말하며 웃기엔 양심이 너무 아파!

블루벨이 말을 할 수 있도록 한 건 어쨌든, 블루스타에게 접근한 건 그를 전력으로 쓰기 위해서였으니…….

하아, 근데 또 솔직하게 고마워하지 말라고 해도 소용없단 말이지…….

“고마우시면, 용사가 아니라 이름으로 불러주세요. 그 호칭은 좀 부담스러워서요.”

짧은 한숨 뒤에 내뱉은 말은, 내 귀에도 어쩐지 볼멘소리처럼 들렸다.

그는 내 말에 의외라는 듯이 눈썹을 살짝 추켜올렸다.

이내, 눈을 약간 가늘게 뜨면서 입꼬리를 스윽 올렸다.

“부담스럽다니……. 정말 독특하군. 알겠다.”

나 참, 별 게 다 독특하네.

내 눈엔 이 양반과 저 뒤에 있는 엘프가 더 독특한데 말야.

세상에, 근친이라니…….

이 일이 끝나면 대체 뭐에 반한 거냐고 물어봐야겠다.

그 전에 이제 메린까지 합세시켜서 떠들고 있는, 저 빨간 사제님에게 들러붙은 사악한 잡귀를 딱밤으로 쫓아버려야지.

“좀 있으면 바깥이니까 이제 긴장들 해.”

늑대와 함께 선두에 선 위슨이 말하자, 뒤쪽에서 마구 울리던 잡음이 순식간에 잠잠해졌다.

살짝 뒤를 돌아보자, 로나가 방긋 웃는 얼굴로 고개를 살짝 갸웃거렸다.

무슨 할 말 있냐고 묻는 눈길이다.

대답 대신 어깨를 살짝 으쓱인 후, 나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

나 참, 분위기 바꾸는 거 되게 빠르네.

이윽고 눈앞이 환하게 밝아지며, 우리는 모두 땅 위로 다시 나왔다.

아직 약간 어슴푸레한 빛 속에서, 맑은 공기가 허파를 가득 채우는 게 느껴졌다.

“알현실은 저쪽이야.”

“좋아, 그럼 바로…… 왁?”

순식간에 여러 일이 벌어졌다.

내 몸이 갑자기 홱 당겨지고, 메린이 어딘가를 향해 돌을 던졌으며, 늑대는 위슨과 로나를 제 몸으로 감쌌다.

다시 중심을 잡은 내 눈에, 방금 전까지 내 머리가 있던 곳에 볼트가 꽂혀 있는 게 보였다.

……그리고 허둥지둥거리는 블루벨의 앞에, 블루스타가 몸을 굽히고 있는 것도.

“블루스타?! 정신 차려요!”

“안 돼, 뒤에 있어라!”

명백하게 고통이 섞여 있는 목소리이다.

설마 볼트에 맞은 건가?

“……마침내 나타나셨군.”

말소리가 들리더니, 조금 전까지는 아무도 없던 곳에 한 엘프가 서 있는 게 보였다.

얼굴은 기억이 날락말락한데, 차림새는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가죽갑옷에 연갈색 망토, 그리고 허리에 찬 검.

이틀 전까지만 해도 여기 있는 푸른머리 엘프가 썼던 장비들이다.

다른 게 있다면, 손에 쇠뇌를 들고 있다는 것뿐.

“기다리고 있었다, 블루스타……!”

“허?”

괴상한 발언에 그만 얼빠진 소리를 내고 말았다.

지금 누굴 기다렸다고……?

“글라드? 여긴 어떻게……!”

블루벨이 중얼거리듯이 그 이름을 입에 담았다.

글라드? 글라드……

아, 글라디올러스!

“짝사랑남 A!!”

“그딴 식으로 부르지 마!!”

놈이 고함치더니 곧바로 쇠뇌를 쐈다!

본능적으로 고개를 숙여 볼트를 피하자, 퍽 하는 불온한 소리가 머리 위에서 들렸다.

아, 깜짝이야.

놈은 흐트러진 마음을 다스리듯이 심호흡을 하더니, 재차 우리를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후…… 블루벨, 널 구하러 왔지. 이 불한당들이 나오는 소리를 듣고 바로 달려왔어.

이제 조금만 더 견디면 돼. 내가 곧 저 냉혈한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게 해줄 테니까……!”

소리를 듣고 바로 온 거라고?

옛 선조의 능력을 각성한 덕분인가?

제길, 일부러 땅 속으로 나온 보람이 없잖아.

근데……

나 잡으러 온 게 아닌 거야……?

황당해서 눈만 깜빡이고 있는데, 블루스타가 비틀비틀 일어나더니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애송이 녀석이 가소롭기 그지없군! 네놈 홀로 나를 쓰러뜨린다는 것이냐? 그간 나에게 주먹 하나 스치지 못했던 네놈이……?”

“그건 다 옛날 일이야. 지금의 난 달라! 폐하께서 내게 힘을 주셨지……! 이제 난 당신과 비등해. 그 증거로, 당신의 가슴엔 내가 쏜 볼트가 박혀 있지.”

이거 대체 무슨 전개야……?

그보다 역시 저 양반, 볼트를 맞은 거였나!

놈의 말에 블루벨이 또 다시 움직였지만, 블루스타가 그녀를 가로막듯이 팔을 뻗었다.

그리고, 또 다시 웃음을 터뜨리며 한 손을 들어 볼트를 흔들었다.

붉은 자국 따위 조금도 묻지 않은, 아주 깨끗한 볼트를.

“기고만장한 것도 정도껏 해라, 글라디올러스. 쇠뇌로 나를 잡을 수 있으리라 생각한 게냐?”

“큭……!”

놈이 분통을 터뜨리며 쇠뇌를 땅바닥에 내동댕이쳤다.

우와, 블루스타 저 양반, 날아오는 볼트를 잡은 거야?

손에 잡았는데도 맞은 것처럼 연기한 거고?

왜……?

“……흥, 여유로운 것도 지금뿐이야. 아무리 그래봤자 당신은 맨손. 게다가 지금 이쪽으로 당신의 옛 부하들이 오고 있지.”

와, 진짜 혼자 왔구나.

우리 기척을 알아차리자마자 냅다 뛰어온 모양이다.

바보 아냐?

아무튼 그렇다는 건……

아직 저 놈만 옛 선조의 능력을 각성했고,딴 놈들은 열심히 뛰어오고 있다는 소리가 되겠지.

흠…… 지금 서둘러 움직이면, 친위대 하나 없는 왕을 상대할 수 있겠군.

……좋아.굉장히 마음이 아프지만, 비장의 수를 쓸 수 밖에……!

나는 우리를 등지고 선 두 근친커플을 바라보며, 속으로 감사와 사죄의 뜻을 전했다.

“하지만 나 혼자로도 충분해.”

검이 뽑히는 날선 소리가 울리고, 글라디올러스가 검 끝을 겨누었다.

……블루스타에게.

“이번에야말로 결판을 내주지……! 당신의 교활한 술수에 빠진 블루벨을 되찾을 것이다!”

“……”

너 용사 안 잡냐?

왕이 용사 잡으라고 시켜서 온 거 아니냐고.

아니 저딴 놈이 친위대장이라니 진짜 인재가 없긴 없었나보네.

아, 그래그래, 엘프끼리 신나게 노닥거리고 있어라.

연적이랑 사생결단으로 결투하는 장면 열심히 찍으셔.

난 이만 가련다.

메린과 로나, 위슨에게 슬쩍 손짓했다.

세 사람이 곧바로 ‘손목 갈고리’를 가동해서 날아가는 동시에, 나도 그 뒤를 따르며 세 엘프에게 손을 흔들었다.

“그럼 수고해~”

“어라?! 야, 이 새끼야, 어디가?!”

블루벨의 고함을 뒤로 하며, 우리는 왕궁의 알현실로 향하기 시작했다.

후…… 이렇게 곧바로 희생이 생길 줄이야.

블루벨, 블루스타……

당신들의 희생, 절대로 잊지 않을게……!

“야, 이 미친 새끼야!! 그렇다고 곧장 버리고 가냐!!”

“……?!”

이미 그 자리에서 한참 멀어졌을 텐데, 블루벨의 고함소리가 바로 뒤쪽에서 들려왔다!

저 자식, 지금 따라오고 있는 거야?!

이런 망할!!

“도망치는 거냐, 블루스타!! 블루벨을 풀어줘!!”

“눈 똑바로 뜨고 봐라, 애송아!! 내가 끌려가고 있잖나!!”

“블루벨에게 책임을 돌리다니 비겁하다!! 어디까지 추해질 셈이냐?! 사내답게 정정당당하게 싸우란 말이다!!”

“네놈의 행태 어디가 정정당당하다는 거냐?! 정말 어처구니가 없구나!!”

제기랄, 저 등신 새끼까지 따라왔잖아!

그래도 소리가 점점 더 가까워지지 않는 걸 봐선, 움직이는 속도는 블루벨과 비슷한 수준인 듯하다.

그보다 대화 내용 심각하게 맥이 빠지니까 저리 꺼져줬으면 좋겠는데.

나는 살짝살짝 몸을 돌리면서 소리쳤다.

“블루벨, 댁 무슨 생각이야?! 얘기가 틀리잖아!! 비장하게 희생하겠다고 각오했던 건 다 어디 갔어?!”

“미친놈아, 내가 언제 그랬어!! 협력관계잖아, 제대로 협력하라고!! 우리만 죽으라고 냅두고 튀냐?!”

“죽긴 왜 죽어, 블루스타 강하잖아! 어차피 그쪽에 볼일 있는 거 같아서 빠져준 건데 왜 지랄이야?!”

“그럼 너네 무기라도 주고 가, 이 야박한 놈들아!! 어차피 검 안 쓰잖아, 내놔!!”

아잇, 진짜!

지가 쓰는 단검 주면 될 거 아냐, 왜 쫓아와서 난리야?!

제길, 내 검이라도 줘야 하나……?

“던진다, 받아!!”

그때, 메린의 목소리가 들리더니 무언가 길다란 게 휭휭 돌면서 내 옆을 지나갔다.

아무래도 그녀가 자신의 검을 넘겨준 모양이었다.

“……좋아, 받았어!”

짧은 외침을 마지막으로, 블루벨의 목소리는 더 들리지 않았다.

음, 마침내 미끼 역할을 떠맡아준 거군.

그럼 이번에야말로 희생을……

뿌우­­­

……잊지 않으려고 했는데, 그다지 큰 의미가 없었을지도 모르겠다.

뒤쪽에서 뿔피리 소리가 우렁차게 울리더니,

뿌우­­­ 뿌우­­­ 뿌우­­­

그에 호응하듯 여기저기서 뿔피리 소리가 연이어 울리기 시작했다.

“잡아라!”

“쏴라!”

그러자 나무 곳곳에서 엘프들이 나타나 소리치기 시작했다!

이런 망할, 아예 숲에 쫙 풀어놓고 대기시켰었구만?!

“너무 빨라!”

“놓치지 마! 계속 알려라!”

다행히 놈들은 우리를 따라잡지 못했지만, 모습을 드러내는 족족 뿔피리를 불면서 화살을 마구 쏘아대었다.

드워프의 망토 아니었으면 옛적에 화살꽂이 신세가 됐겠지.

……그래도 돌팔매질 당하는 것 같아서 영 기분이 좋지 않지만.

놈들도 완전히 바보는 아닌지, 일부는 우리가 지나가는 때를 맞추어 머리 위를 노리거나 옆을 찌르려 했다.

“꺄악?!”

“억!”

……어째서인지 가지에서 미끄러지거나, 나뭇가지에 얼굴을 맞거나, 눈에 새똥을 맞거나 하는 소소한 사고를 당해서 그렇지.

끝장을 내버리는 게 안전하겠지만, 그렇게 일일이 상대하다가는 하루가 훅 흘러갈 거다.

그래서 코앞 근처에 나타나는 놈들만 해치우면서, 우리는 계속 알현실을 향해 달렸다.

“이야~ 역시 카엘 님! 악운이 강하시군요! 괜히 일상이 전쟁터인 마을에서 살아오신 게 아니었네요!”

“저게 악운이야?! 난 행운이 왔으면 하는데!”

그리고 내 고향 마을은 전쟁터가 아니다.

그냥 더럽게 살기 힘들 뿐이지.

딴 사람이 오해할 만한 발언은 삼가줬으면 좋겠다.

“크아아! 죽어라, 인간!”

측면에서 나타나 울화통을 터뜨리는 엘프를 갈고리로 엮어서 떨어뜨렸다.

나무에 부딪치든 누가 물어가든 주워가든, 살 놈은 알아서 살겠지.

“이제 뿔피리 안 들려! 끝났나봐!”

날아오는 화살을 걷어차며 메린이 소리쳤다.

화살을 걷어찬다는 진귀한 장면을 목격한 탓에 일순 멍해진 머리를 재빨리 흔든 후, 나는 근처에 있을 위슨을 향해 외쳤다.

“위슨! 뒤에 섬광물약 터뜨리자!!”

“허튼소리!”

엥? 아니, 뿔피리가 없다는 건 이 앞에는 보초 서는 엘프들이 없다는 거니까, 뒤에 추격해오는 놈들 떨구려고 터뜨리자는 건데…….

설마 위슨 녀석, 죄다 처치하자는 무시무시한 발언을 하려는 건가?!

그러나 이윽고 들린 목소리는, 내 예상을 훨씬 벗어난 내용을 줄줄 읊었다.

“물약으론 모자라! 한참 모자라고 말고! 모처럼 살아 숨쉬는 숲인데 크게 놀아야지!!”

“허?”

저건 위슨의 말이 아니야.파랑새의 본심이다……!

뭐가 그리 신난 지, 녀석의 목소리는 엄청 고양되어 있었다.

“깨어나라!”

뒤이어 울린 목소리는 완전히 다른 음색을 지니고 있었다.

뿔피리보다도 낮고 웅장한 울림이, 땅 속 심연에까지 닿을 듯한 묵직한 진동이 숲에 퍼지기 시작했다.

“인고의 때가 끝났으니 일어나라! 그들은 축복을 유기한 자들이요, 약속을 잊은 자들의 껍데기이니라!

그들을 돌보지 말지어다! 그들을 용납하지 말지어다! 그들을 따르지 말지어다!”

비명 섞인 스산한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했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가 느껴졌지만, 그래도 나는 멈출 수 없었다.

발을 멈춰서는 안 된다, 뒤를 돌아보면 안 된다는 예감이 머리에 팍팍 꽂히고 있었다.

아마도 파랑새가 내고 있을 그 낮은 목소리는, 계속해서 말을 퍼뜨렸다.

“명을 전하노라! 참회한 수호자는 일어날지어다! 너의 눈을 흐린 자, 너의 어머니를 죽인 자를 대적하라! 그 길을 막아서는 자를 적대하라!

너의 주인이 명하셨다!”

누구를 향한 것인지 모를 외침을 전한 후, 파랑새는 다시 평소처럼 아주 약간 굵은 소년의 목소리로 깔깔 웃었다.

“와하하하! 혁명이다, 귀쟁이 새끼들아!! 우리는 노예가 되지 않는다!!”

“……”

아니 누가 보면 종살이하고 있는 줄 알겠네.

우리 중에 제일 편하게 살고 있는 거 같구만.

이후로 뒤쪽에서 무언가 비명이 들리는 것 같기도 하고, 빛이 마구 번쩍거리는 것 같기도 했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내 탓은 아니겠지.

……그래도 뭔 일이 일어났는지는 알아야 할 거 같다.

나는 잠시 발을 멈추고, 위슨의 어깨에 앉아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파랑새에게 물었다.

“뭐한 거냐?”

“엉? 소집. 그간 이 놈들을 종처럼 모신 대가도 받을 겸, 덤으로 찌그러져 있는 등신 녀석들도 두들겨 깨울 겸 불러 모은 거다.”

“등신 녀석들? 누구?”

파랑새는 낄낄 웃으며 두 땅딸막한 날개를 펼쳤다.

어깨를 으쓱이는 시늉인 듯했다.

“누구긴! 종소리 듣고 찌그러진 놈들이지! 집에 처박혀서 질질 짜지 말고 그만 나와서 일하라고 전하라더라.”

“어…… 누가?”

“세상 밖에 있는 귀인. 넌 몰라도 돼. 갈길이나 가라.”

“어…… 그래, 뭐…….”

너의 주인 어쩌고 했으니 보나마나 창조주이겠지.

어차피 더 물어봤자 안 알려줄 게 뻔하니, 대충 그렇게 이해하기로 했다.

그 후, 다시 숲을 달리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었을 즈음, 또 다른 진동이 우웅 하고 울리며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참으로 졸렬하고 무도하구나, 용사!! 나의 무고한 백성들을 꾀다니!!

“왕이로군. 근데 내가 한 거 아닌데.”

또 다시 멈춰 서서 허공에 대고 대꾸해주었다.

내가 시킨 거면 또 몰라, 파랑새가 혼자서 멋대로 저지른 건데 왜 나한테 지랄이야?

억울해!

그러나 놈은 내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네놈이 가당치 않은 수작을 부리길 좋아하니, 나 역시 응당 걸맞은 처치를 해야 할 터!!

“나 아니라고, 짜샤! 좀 들어!”

­내 손수 준비시킨 대장은 네놈이 요사스러운 여자로 홀렸으나, 뒤떨어지긴 해도 아직 다른 자가 남아있지!!

돌에렛의 대리인으로서 명한다! 그대들 눈앞의 용사를 죽여라!

“저 새끼가 끝까지 개소리를……?!”

홀리긴 누가 홀려, 본인이 빡대가리라서 공사 구분 못한 거지!

허공에 대고 분통을 터뜨려보았으나, 놈은 제 할 말만 하고 가버렸는지 아무 말도 돌아오지 않았다.

당장 가서 그 혓바닥을 잘라버리겠다고 다짐하는 순간, 메린이 다급한 목소리로 외쳤다.

“카엘! 밑!”

“?!”

본능적으로 그 자리를 떠나자마자, 서늘한 은빛 섬광이 내 눈앞을 지나갔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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