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용사는 소꿉친구 검성이 무섭다-195화 (195/475)

〈 195화 〉 191화 : 심판의 때가 왔도다 (3)

* * *

항상 생각하는 건데, 나는 참 팔자가 더러운 것 같다.

갑자기 습격받는 거야 이제 그러려니 할 수 있는데, 왜 꼭 기운 좀 빠졌을 때 센 놈이 붙는 걸까?

정말 이해가 안 돼.

너무 부조리한 거 아냐?

숨 돌릴 틈이라도 좀 주던가!

“윽!”

돌진해오는 검을 옆으로 피하면서 아래로 떨어져갔다.

옷깃이 아주 약간 잘려나간 것 같다.

땅에 닿기 전에 양쪽 갈고리를 번갈아 나무줄기에 찍으며 반 바퀴쯤 돈 후, 뒤에 있는 나무로 옮겨갔다.

그대로 옆 나무로 건너가, 위로 뛰고, 아래로 떨어지고, 또 다시 다른 나무로 건너간다.

반복되는 이 동작에숨 돌릴 틈 따위 조금도 없다.

잠깐이라도 멈출 수 없다.

머뭇거리는 순간, 나무에 박혀버릴 테니까!

“이 날파리 같은 놈!!”

둔탁한 소리가 들린 걸 보니, 저 미친놈이 또 나무줄기에 구멍을 하나 만든 모양이다.

아니면 굵직한 나뭇가지를 썰어버렸거나.

나무야, 미안해.

근데 미안한 김에, 저 놈 좀 잠깐만 붙잡아줄 수 없을까?

지금 숨이 차서, 뒤질 거 같거든……!

“하아……!”

망할, 다리가 후들거린다.

놈의 고함소리가 점점 더 크게 들리며, 내 속도가 점점 떨어지고 있다는 걸 간접적으로 알려주고 있다.

그래도 이를 악물고 계속 달린다.

와, 심장이 터질 거 같아.

염병할, 아까 친위대원 여섯은 진짜 애들 장난이었어.

적어도 갈고리를 쏘는 간격이 좀더 길었다면, 지구전이라도 시도해볼 수 있었겠지.

허공을 날아가면서 숨을 돌리거나, 저 미친놈을 어째야 할지 궁리할 수 있었을 테니까.

그러나 지금은 그런 여유가 없다.

저 미친놈이 속도가 너무 빨라서, 직선으로 가는 건 꼬챙이 만들어달라고 하는 거나 마찬가지이다.

게다가 섣불리 도약거리를 늘렸다간, 저 놈이 갈고리의 밧줄을 끊으려 할지도 모른다.

그러니 계속 움직여야 한다.

방향을 바꿔서, 높이를 바꿔서 계속 달려야 하는 거다.

그래서 죽을 맛이야.

아니, 진짜 죽을 거 같아……!

“죽어어어!!”

가지에서 뛰자마자 놈의 새된 고함소리가 들렸다.

내가 바로 전에 서 있던 나뭇가지에 놈이 올라타, 검을 나무줄기에 박으려는 게 보였다.

갈고리를 그 가지에 걸고 한 바퀴 빙글 돈 후, 나무줄기에 갈고리를 쏘고 회수한다.

“좀, 꺼져……!”

그 끌려가는 속도를 힘으로 삼아, 놈의 옆구리를 그대로 차서 날렸다.

“크악!!”

외마디 신음을 내뱉으며 놈이 검과 함께 저 멀리 날아갔다.

정말 열받는 건, 저렇게 날려버려도 금방 쫓아온다는 것이다.

“소용없다, 블루스타아아!!”

내 시야 밖에서 놈이 고함을 지르는 게 들렸다.

조금 있으면 또 돌진해오겠구만.

그러니 곧바로 이동해야 한다.

젠장, 이젠 팔도 아파오네……!

저 망할 미친 귀쟁이 새끼, 아까 블루벨을 쫓아갈 때보다 훨씬 더 빨라졌어!

그땐 힘을 아꼈던 거야, 뭐야?!

‘오른쪽!’

“……?!”

본능적으로 몸을 돌리고 팔을 올리자마자,

카앙­!

쇳소리가 숲에 울려퍼지며 놈이 핏발 선 눈이 코앞에 들이밀어졌다.

바로 뒤이어, 팔에 강한 진동이 느껴지며 몸이 뒤로 날아가는 게 느껴졌다.

“크하……!”

정신, 바짝 차려!!

날려가는 속도를 반동으로 바꾸어, 거의 본능적으로 가지에서 가지로 옮겨갔다.

정신을 차리니 어느 아름드리나무의 줄기에 등을 대고 주저앉아 있었다.

……어떻게 움직여서 여기에 온 건지 전혀 모르겠어.

일단 ‘손목 갈고리’가 엄청 튼튼하다는 건 알겠다.

팔이 저리긴 해도 아직 쓸 수 있다.

다리도 아직 움직이니, 더 버틸 수 있다.

다만 호흡이 한계였다.

제대로 쉬지 못한 숨이 한꺼번에 들이닥쳐, 일순 눈앞이 휘청거리며 의식이 깜빡였다.

젠장, 빨리 호흡을 안정시켜야 돼!

나무줄기에 기대어 고개를 들자마자 기침이 터져나오려 해, 황급히 입을 팔로 틀어막고 몸을 웅크렸다.

놈이 들으면, 끝장이야……!

“욱……, 쿠흡……!”

기침이 멎은 후, 내가 아무 지지대도 걸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멍하니 떠올렸다.

나 참, 가지가 충분히 넓어서 망정이지.

하마터면 그대로 떨어져 죽을 뻔했잖아.

나 스스로에게 속으로 자조 섞인 일갈을 던지며, 계속 입을 틀어막은 채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그나저나, 이렇게 있는데도 아직 나는 꼬챙이 신세가 되지 않았다.

놈이 드디어 나를 놓친 모양이군.

“숨어도 소용없다, 블루스타아아!! 네놈의 심장소리, 숨소리, 내가 놓칠 것 같으냐아아!!”

어디서 울리는 건지 알 수 없는 목소리가 외치자, 나 역시 속으로 좀 놓치라고 외쳐주었다.

그때, 갑자기 바람이 불어왔다.

꼭 저 미친놈의 고함소리에 반응한 것처럼, 일대에 바람이 흐르기 시작했다.

위에서는 나뭇잎이, 아래에선 덤불이 마구 흔들리며, 가지들이 서로 부대낀다.

새의 지저귐조차 삼켜버릴 정도로 굉장히 소란스러웠다.

“……”

그 바람이 얼굴을 감싸자, 풀내음이 느껴지며 어지럼증이 가셨다.

여름의 싱그러움을 한껏 담은 바람이, 땀에 절은 이마를 위로하듯 어루만져주었다고 하면, 상황에 맞지 않은 감상이겠지?

그래도 때맞춰 불어준 바람 덕분에 숨은 제대로 돌릴 수 있을 듯했다.

이 소음 속에선 저 미친놈이 얼마나 귀가 좋건, 내 숨소리를 듣지 못하겠지.

어차피 아직 움직이지도 못하는데 숨이나 편하게 쉬자.

나는 입을 막던 팔을 떼고 긴 숨을 내쉬었다.

“아아아악!! 왜 놈의 기척을 알려주지 않는 거냐!! 어째서 블루벨을 더럽힌 그 놈을 돕는 거냐고오오!!”

……역시 못 듣는구나.

그보다 저 미친놈, 진짜 아까부터 뭔 소리를 하는 건지 전혀 모르겠어.

나를 블루스타라고 부르면서, 기척은 내 걸 찾고 있다.

블루벨이 아닌 엘프를 블루벨이라 부르면서 죽었다고 꺼이꺼이 울더니, 지금은 또 살아있는 것처럼 말하고 있다.

거봐, 역시 난 미친놈이 아니라 정상적인 상식인이라니까?

미친놈이었으면 저 놈이 뭔 소리를 하는지 이해가 됐을 거 아냐.

근데 진짜 뭐가 어떻게 된 거야?

블루스타랑 결투하면서 대체 뭔 일이 있었길래 저렇게 돌아버린 거냐고.

“하, 아핫, 하하하하핫!! 보이지 않는다면, 보이게 만들면 되잖아!! 카하하핫!!”

글라디올러스가 미친놈답게 갑자기 미친듯이 웃더니, 숲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육중한 무게가 땅에 부딪치는 소리가 마구 들렸다.

자연히 그쪽으로 고개를 돌린 나는, 눈에 들어온 광경에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오, 신이시여……!”

수백 년은 됐을 법한 나무들이, 일제히 쓰러지고 있었다.

내가 서 있는 곳과는 전혀 상관없는 방향이 마구 무너지고 있지만, 조금 있으면 내 쪽으로도 오겠지.

그보다 큰일이다.

저거 지금 내 발판이 없어지고 있는 거잖아!

저 등신 새끼, 돌아버리더니 오히려 머리가 좋아졌나봐!

“……후우.”

숨도 돌렸겠다, 이렇게 된 거 이판사판이다.

어차피 이대로 있다간 머지않아 구석에 몰려서 죽을 거다.

그럴 바에야 뭔가 해보고 뒤지는 게 낫지!

“블루스타아아아!! 나와라아아!!”

……그 양반은 아니지만 소원대로 나가주지.

나는 나무들이 신나게 무너지고 있는 방향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바람은 계속 불고 있다.내 등을 밀어주듯이, 뒤에서 힘있게 불어오고 있다.

나무가 무너지고 나뭇잎이 흔들리는 소리 때문에, 놈은 내 발소리를 듣지 못할 것이다.

기습하기엔 최적의 환경이다.

“……!”

내 쪽으로 무너지는 나무를 피해 뒤로 물러났다가, 그 나무줄기를 발판삼아 더 높이 뛰었다.

저 앞쪽에, 놈이 환호성을 지르면서 나무들을 쓰러뜨리는 게 보인다.

일직선으로 땅 위를 곧게 달려주고 있네.

참 고마운 미친놈이로군.

숨을 크게 들이쉬고, 온 힘을 다해 나무를 건너며 달렸다.

놈을 크게 제친 다음, 나무에서 뛰어내리며 놈의 정면으로 들어가 마주보았다.

한쪽 갈고리를 넣고, 품속에서 물건 하나를 꺼내어 손에 쥐었다.

“거기 있었구나!!”

“오냐, 와줬다, 미친놈아!!”

끈끈이 공을 바닥에 던지면서, 놈의 뒤에서 쓰러져가는 나무를 향해 갈고리를 쏘았다.

“윽?!”

놈의 발이 끈끈이에 붙으면서 자세가 흐트러졌다.

자연히 복부가 훤히 노출되었다.

땅을 차면서, 놈의 복부에 무릎을 꽂아넣었다.

“커흐억!!”

끈끈이에 붙었던 발이, 이내 무언가 뜯어지는 소리와 함께 바닥에서 떨어졌다.

놈의 몸이 나와 함께 쭉 날아갔다.

밧줄이 전부 회수되기 직전, 나는 놈의 얼굴을 부여잡고 그 머리를 나무에 들이밀었다.

퍼석 하는 소리가 귀에 또렷이 들렸다.

“하아, 하아……!”

갈고리를 풀고, 뒤로 몇 걸음 물러나서 주저앉았다.

숨도 더럽게 차고, 무엇보다 무릎이 아려서 걸을 수가 없다.

저 놈의 몸으로는 충격을 다 받을 수 없었던 모양이다.

이거 뼈에 금간 거 아냐?

가쁜 숨을 몰아쉬며 앞을 쳐다보았다.

미친놈은 고개를 떨군 채 축 늘어져 있다. 그 주변엔 붉은 피가 콸콸 흘러내려 웅덩이를 만들고 있다.

머리도 깨졌고, 그게 아니어도 저렇게 피를 쫙 빼고 있으니 죽었겠지.

그나저나 놈의 발바닥이 훤히 보이고 있다.

신발은 제대로 신고 있는데?

아, 끈끈이 때문에 신발 밑창이 뜯어진 건가?

이야, 저 끈끈이 장난 아니네.

아군이 붙으면 어쩌려고 저리 세게 만들었대?

“하아…….”

이제 다른 녀석들이 오길 기다리면 되겠지?

아무리 그래도 여기 앉아 있긴 뭐하니……

“……허?”

……자리를 옮기려고 했는데, 믿기지 않는 광경에 몸이 얼어붙고 말았다.

글라디올러스가, 머리 뒤에서 피를 질질 흘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있었다.

말도 안 돼…….

저건 진짜 말도 안 돼!

엘프라도 생물이잖아, 머리 깨지면 죽어야지!!

투둑, 툭.

“흐하……”

땅에 피를 흩뿌리며, 놈은 고개를 들고 나를 보며 웃었다.

이마에서 흐르는 피로 얼굴이 온통 검게 물든 모습에 소름이 돋았다.

검은 피.

생명력은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부패한 피.

……악마의 피!

씨발, 지랄도 정도껏 해야지, 이런 게 어딨어?!

방금 전까지는 빨갰잖아!!

한 팔은 방패 삼아 앞으로 내밀고 다른 팔로 갈고리를 쏘려는 순간, 허벅지에 격통이 흘렀다.

“크흐, 흐흐……! 드디어, 잡았다!!”

내 허벅지에 검이 자라나 있는 게 보였다.

……망할, 한 발 늦었어.

“우, 라질……!”

“네놈만 아니었으면……! 네놈 때문이야, 다 네놈 때문이라고……! 블루벨이 그렇게 된 건, 블루스타 다 네놈 때문이야!!”

“끄아아악!”

미친 새끼가 남의 다리를 검으로 마구 쑤셔대고 지랄이야!

미친놈 아니랄까봐 칼날을 맨손으로 잡고 있네!

그러더니 이번엔 팔에 검을 꽂았다.

이 새끼, 대체 뭐가 하고 싶은 거야?!

“씨, 발…… 장본인한테나, 지랄할 것이지……!! 눈깔 삐었냐, 미친 개새끼야!! 내가 어딜 봐서 블루스타야!!”

“닥쳐!! 그렇게 블루벨의 냄새를 풀풀 풍기면서 누굴 속이려고……! 행색을 바꾼다고 내가 네놈을 못 알아챌 줄 아느냐, 블루스타!!”

멀쩡할 때도 냄새 어쩌고 하더니, 미치니까 더 심해졌다!

블루벨이랑 붙어 있던 남자는 죄다 블루스타로 인식하는 거야?

근데 나, 그 엘프의 냄새가 밸 정도로 붙어 있던 적 없는데?

제대로 거리 두고 있었는데?!

“아, 맞아, 네놈, 블루벨의 어깨를 마구 찔렀었지? 그녀가 느꼈을 그 고통, 전부 되돌려주마!!”

“그건 블루스타랑 상관없잖아!! 하나만 해, 미친 새끼야!! 저리 꺼져!!”

제기랄, 멀쩡한 다리로 아무리 걷어차도 끄떡도 없다.

놈은 그런 나를 비웃듯이 눈을 희번덕거리며, 내 팔에 꽂았던 검을 뽑으려 했다.

“음?!”

칼자루를 쥐고 당기길 여러 번, 결국 놈은 양손으로 자루를 잡고 낑낑대다가 벌러덩 뒤로 넘어가버렸다.

그 틈에 자리를 빠져나가려 했지만, 놈이 곧바로 내 가슴을 짓밟은 탓에 실패하고 말았다.

더럽고 치사한 귀쟁이 같으니라고!

놈은 그 상태로 다시 칼자루를 쥐고 뽑으려 들었다.

자연히 놈의 발에 힘이 들어가며 가슴을 짓누르기 시작했다.

“뭐야, 왜 안 빠져?! 이 비겁한 놈, 끝까지 졸렬한 수법을 쓰는구나!”

“옷이, 좋은 거다……!병신아!”

드워프들이 아라크네라고 불렀던가?

아무튼 내 고향의 목화로 짠 천은, 내구가 아직 멀쩡할 때 잘리거나 뜯기면 저들끼리 도로 붙는다.

그래서 칼에 물을 묻히거나 열로 달구지 않으면, 조금 자르자마자 날이 천에 붙어버린다.

게다가 나는 셔츠 위에 더블릿을 입은 상태이다.

즉, 놈의 검은 이중으로 붙잡혀 있는 것이다.

“꼴 좋다, 미친 새끼야! 절대 안 빠질걸?!”

그렇게 소리치며, 멀쩡한 팔을 들어 놈의 관자놀이를 향해 갈고리를 쏘았다.

끌어당기자 우드득, 목뼈가 부러지며 놈의 고개가 꺾였다.

그럼에도 놈은 멈추지 않고, 오히려 내 위에 엎드려서 목을 조르기 시작했다.

진짜 악마가 되어버린 건가?!

그럼 성검밖에 없는데……!

“커, 헉……!”

“죽어, 죽어, 죽어!! 네놈 때문에 블루벨이 변했어! 네놈 때문에 블루벨이 죽었어!!그러니 네놈도 죽어버려어어!!”

열심히 발버둥을 쳐봐도 끄떡하지 않는다.

빌어먹을, 무슨 힘이 이렇게……!

“아아, 꼴 좋다, 아주 좋은 얼굴이야!! 크흐, 크흐흐흐!! 이걸 나 혼자 보고 있으니 정말 아쉬워. 블루벨도 아주 좋아했을 텐데!!”

“지랄, 마……! 하아……! 으으윽!”

놈의 손을 좀 떼어낸 순간, 놈이 내 팔에 꽂은 검을 돌리는 바람에 도로 힘이 빠져버렸다.

“그래, 아주 좋군. 눈도 귀도 굉장히 만족스럽도다. 내 손으로 직접 숨통을 끊지 못하는 게 아쉽지만, 이것도 나쁘진 않군.”

놈의 입에서 다른 놈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개소리를 지껄이던 그 왕이다……!

이 미친 새끼, 왕에게 힘을 받았다더니, 진짜 말 그대로 악마의 힘을 받았던 거구나!

“행여나 도움을 기대하고 있나? 하하하하,그거 안타깝군!아무도 오지 않을 게다! 네놈이 여기 있는 걸 아는 자는 단 하나도 없으니!

자아, 비참하게 절망해라! 네놈의 운명을 저주하면서 죽어라, 용사!!”

그러니까 지랄하지 말라고.

아무도 못 온다니, 개 풀 뜯어먹는 소리하고 있어……!

……반드시 온다.

내가 좀 신나게 돌아다닌 탓에 시간이 좀 걸려서 그렇지, 그녀는 반드시 여기로 올 거다.

메린은 항상, 나를 찾아왔으니까……!

“아…… 윽…….”

……시야가 흐려진다.

그래도 나는 믿는다.

메린은 반드시 나를 찾아온다.

설령 그녀가 보게 되는 게 이미 싸늘하게 식은 내 시체일지라도, 어쨌든 여기 올 거야.

안 그래……?

……메린.

“……”

……흐릿한 의식 속에서,

돌풍이 휘몰아치는 소리가 들린 듯했다.

곧이어 목을 조르던 힘이 사라지면서 시야가 약간 또렷해졌다.

“……!”

나를 비웃던 얼굴이 사라져 있다.

정확하게는, 머리가 사라져버렸다!

남은 힘을 쥐어짜 놈의 손을 내 목에서 떼고, 머리 없는 몸뚱이를 옆으로 굴려서 치워버렸다.

잘려나간 목에서 검은 피가 콸콸 쏟아져 나오는 게 보였다.

저 피에 닿으면 저주에 걸릴지도 모른다.

나는 맹렬하게 기침하면서 바닥을 기어 물러났다.

막혔던 숨이 한 번에 들어오며 기침이 멈추지 않는다.

목이 찢어질 거 같아.

“……엘…… 카엘……! 카엘!!”

내 이름을 다급히 부르는 목소리가 들리며, 억센 손아귀가 내 어깨를 붙잡고 하늘을 향하도록 몸을 돌렸다.

부옇게 흐린 시야 한가득, 주홍빛 눈동자가 비친다.

……거봐, 온다니까.

진짜 매번 어떻게 알고 찾아오나 몰라.

“너, 이 피……! 설마…… 내가 너무 늦은 거야……?!”

“아냐, 콜록, 아, 콜록콜록!! 내 거, 아냐, 콜록콜록콜록!!”

손을 휘저으며 말하자, 그녀가 나를 이리저리 살피더니 긴 숨을 내뱉으며 옆으로 비켜섰다.

격한 기침을 뱉으며 어떻게든 숨을 고르려 애쓰고 있는데, 갑자기 팔이 축축해지며 찌릿한 통증이 느껴졌다.

잔기침을 하면서 그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그녀가 배낭을 내려놓고 물주머니를 들고 있는 게 보였다.

아무래도 검이 꽂힌 부분에 물을 끼얹은 모양이었다.

“하……! 케헥! 야……, 말 좀 하고 좀…….”

“급한데 무슨. 뽑는다.”

이내, 팔에서 무언가 쑥 빠져나간 느낌이 들었다.

아, 존나 아파…….

“좀 참아, 지금 지혈을……”

“아니, 윽, 아직 아냐. 메린, 나 좀 일으켜줘……!”

“뭐? 돌았냐? 아니 왜…… 허?”

그녀가 무언가 기척을 느꼈는지 고개를 돌렸다.

그 시선을 따라가자, 검은 피를 철철 흘리며 바닥에서 퍼덕거리고 있는 몸뚱이가 보였다.

……하, 저러고 있을 줄 알았다.

근데 앞이 안 보여서 못 일어나는 모양이다.

꼭 그 좀비인가 하는, 살아난 시체 같네.

“메린……, 빨리……!”

“어? 아, 응.”

메린의 도움을 받고 일어나자마자 검을 뽑았다.

예상대로 나타난 성검을, 놈의 심장에 아주 깊숙이 찔러 넣었다.

그러자 숲 어딘가에서 째지는 비명소리가 울리더니, 퍼덕거리던 몸뚱이가 뻣뻣하게 굳었다.

머리 없는 몸뚱이는 곧 축 늘어져, 하얀 재가 되어 흩어졌다.

……비명도 울렸겠다, 머리도 같이 사라졌겠지?

찾기 귀찮으니까 그랬으면 좋겠다. 진짜로.

“……하아아아…….”

긴장이 풀려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아……, 진짜 생각지도 않은 데서 개고생을 해버렸네.

근데 이 놈을 없애자마자 엘프 왕이 또 지랄할 줄 알았는데, 아무 말도 안 들린다.바쁜가?

뭐, 어때.

곧 놈의 면상을 볼 텐데.

허벅지는 걸레짝이 됐고 팔에도 구멍이 나버렸지만, 잘라지진 않았으니 로나가 오면 깔끔하게 나을 거다.

기운 빠진 건 위슨의 약을 먹으면 그만이야.

오늘 반드시, 왕의 목을 거둔다……!

“아윽!”

격통이 흘러, 생각의 늪에서 강제로 빠져나왔다.

메린이 난자당한 내 허벅지를 붕대로 돌돌 감고 있었다.

하얀 천이 순식간에 붉어지는 걸 멍하니 쳐다보았다.

그러고보니 피를 꽤 흘렸을 거 같은데…….

“피를 채울 방법은 없단 말이지……. 하하…….”

“뻘소리 말고 눕기나 해. 로나가 곧 올 거야.”

“하……메린…….”

붕대에 막 매듭을 묶은 메린이 나를 돌아보았다.

그 어깨에 기대듯이 이마를 대고, 멀쩡한 팔을 둘러 그녀를 안았다.

아니, 그녀에게 안겼다.

“카엘? 너 괜찮냐……?”

“……어. 괜찮아. 그냥 잠깐만…….”

깊게 숨을 들여마신다.

흙먼지와 땀이 섞인 그녀의 체취가 풍긴다.

익숙한 그 냄새가, 내가 지금 현실에 있다는 걸 여실히 알려주고 있다.

……정말로 살아 남았구나.

이제야 제대로 실감이 난다.

이제 괜찮아. 이제 안심할 수 있어.

그 마음이 피어오르며 내 입에 웃음을 띄웠다.

“……넌 날 찾아올 줄 알았어.”

언제나 그랬으니까.

그렇게 속삭이자, 그녀가 살며시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네가 살아있을 줄 알았어.”

언제나 그래왔듯이.

그렇게 속삭이는 그녀의 목소리엔, 약간의 물기와 많은 웃음이 섞여 있었다.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