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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사는 소꿉친구 검성이 무섭다-201화 (201/475)

〈 201화 〉 197화 : 잿더미가 품은 것 (3)

* * *

생선수프와 고기파이라는 기묘한 메뉴로 늦은 점심을 해결한 후, 별일 없이 오후 티타임 시간을 맞이했다.

그에 맞추어 테이블에 막 찻주전자와 갓 구운 버터 비스킷을 놓았을 무렵, 바깥에서부터 발소리가 여럿 울렸다.

곧 두 명의 엘프와 한 명의 꼬마애가 부엌에 들어왔다.

“와, 비스킷! 지금 티타임인가요?”

인사를 나누자마자 버터 비스킷에 눈독을 들이는 로나였다.

시간 맞춰서 온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보군.

“앉아서 같이 먹자. 넉넉히 있거든.”

“그래그래, 셋 다 앉아. 둘이 오늘 우리집 식재료를 끝장낼 작정인 거 같거든. 아주 많이도 만들었어.”

그렇게 투덜거리면서도 비스킷을 낼름 집어먹는 골든로드였다.

그치만 우린 잘못 없는걸.

제대로 물어봤는걸!

좋을대로 쓰라고 한 건 저 아저씨인걸!

그리고 이 집 창고에는 아직 풀지 않은 포대가 잔뜩 쌓여 있다.

그러니 비축 걱정은 없을 거야.

……아마도.

“아쉽지만 곧바로 왕궁에 돌아가야 돼요. 그 말 전하러 왔어요.”

비스킷을 하나 집으며 로나가 내게 눈길을 주었다.

“카엘 님, 위슨 씨는 왕궁에 머무를 거에요. 그 아이들, 계속 상태를 지켜봐야 한대요. 저도 거기 묵으려고요.”

“………그렇구나.”

왕궁 2층의 침실에 있던 어린애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네다섯 살짜리 어린애답지 않게 뒤척이지도 않고 꼿꼿하게 누워 있던 다섯 명의 아이들…….

어딘지 얼굴빛이 살짝 창백한 게 이상하다 싶긴 했는데……

아니나다를까, 위슨이 그 애들의 얼굴에 가까이 코를 대고 냄새를 맡은 후, 충격적인 소식을 전했다.

­­정향이랑 타임이네. 얘네, 의식을 잃었어.

­­……허?

……그 말을 듣는 순간, 정말 실시간으로 머릿속이 싹 비워졌었지.

지금 생각해도 한숨이 절로 나온다.

아무튼, 그 때문에 위슨이 지금 왕궁에서 그 애들에게 먹일 약을 만드는 중이다.

중화제랑 각성제를 만든다고 했던 것 같은데……

아마 하루만에 되진 않겠지.

그러니 로나도 같이 거기 머무르려는 거겠지.

죄다 엘프인 곳에 위슨 혼자만 둘 순 없는데다……

시간이 너무 걸린다 치면, 강제로 끌고 와야 하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비스킷 싸 줄게. 가서 같이 먹어. 아, 고기파이도 있으니까 그것도 가져가고.”

“고기…파이……?!”

응? 갑자기 로나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뭣 때문에 충격먹은 거지?

전혀 모르겠어.

꼭 마비된 것처럼 우뚝 멈췄던 로나는,

“아아아……! 주님, 감사합니다……!”

바닥에 털썩 엎드려 감사기도를 올렸다! 아니 갑자기 부담스럽게 왜 이래?!

녀석은 무슨 통곡하는 것처럼 소리내며 몸을 떨었다.

대체 왕궁에서 무슨 일이 있었길래……?점심 못 먹었나?

가만히 블루스타에게 의문이 잔뜩 담긴 시선을 던졌다.

그러자 그가 내 눈을 피해 어딘가 먼 곳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지옥이 있었다.”

“알아듣게 말해주세요.”

“블루벨이 냄비를 건드렸다.”

“……”

그 말이 나오자마자 부엌 안에 절규와 폭소가 동시에 터져 나왔다!

바닥에 엎드린 사제님과, 테이블의 연노랑머리 아저씨가 만드는 불협화음에 순간 머리가 어지러웠다.

“아니 그 정도로 심했어요?”

“먹은 자들 중, 똑바로 서 있는 자는 여기 둘과, 그 어린 마법사뿐이야.”

“당신은요?”

“난 입에 대지 않았지.”

“……”

그러고보니 지금 미친듯이 웃는 저 아저씨, 골든로드도 지난번에 된통 당했었지?

탈진 직전까지 몰렸던 거 같은데.

즉, 지금 왕궁에 있는 사람 전부 그 꼴이 됐다는 거군.

……그렇구나. 로나가 왕궁에 묵으려는 건 위슨 때문이 아니라, 그 사람들을 치료하려는 거구나.

근데 이 둘에 위슨은 왜 멀쩡한 거지?

“아아, 비스킷 맛있어요……. 흑흑…….”

감격의 눈물을 글썽이는 로나에게 물었다.

“근데 넌 어떻게 멀쩡한 거야?”

“전투사제 훈련 중에 독 내성을 키우는 것도 있거든요.”

……진짜로 독 취급이군.

블루벨이 뒤에서 얼굴을 붉힌 채 무어라 작게 중얼거렸다.

그럼 위슨이 멀쩡한 것도 당연하다.

그 녀석도 평소에 독초랑 독버섯을 다루고 있으니까, 내성이 꽤 높겠지.

“그럼 댁은?”

“나? 맛있었는데. 다, 다들 입맛이 너무 까다로운 거야! 내가 이상한 게 아니라고!”

“……”

돌에렛은 자신의 마지막 딸이 어떻게든 살아남기를 바랐던 게 틀림없다.

그래서 강한 위장과 장식 수준의 혀를 선사한 거지.

뭘 먹든 멀쩡하도록.

그래도 그 괴멸적인 미각이 평범한 음식에까지 횡포를 부리진 않는 모양이다.

여관에서 묵을 때나, 야영할 때나, 블루벨은 요리들을 아주 바닥까지 싹싹 긁어 먹었으니까.

솔직히 굶고 산 줄 알았어.

“그래서 그 비보(??)를 전하러 온 거야?”

“저는 그런데요, 블루스타 씨는 다른 할 말이 있대요.”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블루스타가 품속에서 꾸러미 하나를 꺼내어 제 스승에게 내밀었다.

뭐냐고 묻는 듯한 그의 시선에, 그저 풀어보라는 듯이 손짓하면서.

“……?”

골든로드는 꾸러미를 열어 안을 들여다보고, 곧 고개를 갸웃거리며 손바닥을 대고 탈탈 털었다.

이윽고 그의 손바닥 안으로 무언가 툭 떨어졌다.

연갈색의 동그란 물체.

……사람 눈만 한 큰 씨앗이었다.

“뭔 씨앗인지 모르겠네? 뭐야?”

“돌에렛의 재 안에서 찾은 겁니다.”

“엥? 아무리 봐도 그냥 평범한 씨앗인데?”

주의 깊게 이리저리 씨앗을 살펴본 후, 어깨를 으쓱이는 골든로드.

블루스타는 그런 그의 모습에 쓴웃음을 지었다.

“……역시 그렇습니까? 장로들을 포함한 다른 사람들도 모두 그러더군요. 그래도 그게 돌에렛이 타고 남은 재 안에 묻혀 있던 건 사실입니다. 다들 그 나무의 씨앗으로 보고 있어요.”

“그럼 그런가보지. 그거 확인하려고 보여준 거야?”

씨앗을 다시 꾸러미에 넣고 묶으며 묻는 제 스승을 향해, 블루스타가 고개를 까닥이며 대답했다.

“그것도 있지만…… 스승님이 이를 기르셨으면 한다고 하네요.”

“엥? 왜?”

“스승님이 임시 왕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왜?!”

발끈하는 그에게 블루벨이 어깨를 으쓱였다.

“왕에게만 전해내려오는 이야기를 알고 있잖아요. 그러니 대표를 새로 뽑을 때까지는 왕이래요.”

“누가 그딴 개소리를 했어?!”

“장로들이요.”

“그 우라질 오크 사생아 놈들이……!!”

우와…… 오크 사생아라니 엄청난 욕인걸?

나는 재빨리 그의 앞에 따끈한 차를 따라주며 말했다.

“자자, 그렇게 성내지 마요. 임시라잖아요. 그리고 어차피 마을의 사사로운 일들은 장로들이 처리한다고 들었는데요, 뭘.”

“하루종일 알현실에 앉아서 누구 만나야 되잖아! 난 그런 거 질색이라고!”

아, 그 마음은 좀 알 것 같아.

나는 내 몫의 차를 따라서 한 모금 마신 후, 머리를 감싸고 신음하는 그의 등을 두드려주었다.

“가엾기도 하지…….”

“크아아아!!”

터져 나온 함성엔, 아까 왕을 상대할 때만큼이나 큰 분노가 서려 있었다.

“음, 걱정 마십시오. 임시이니까 알현실에 계실 필요도, 누굴 만나실 일도 없을 겁니다. 그저 왕궁에 잠깐 사신다 생각하시죠.”

“웃기고 있네, 결혼식에 가서 축복의 말 해주고 그래야 되잖아! 게다가 왕성 그 쓸데없이 큰 곳에서 어떻게 편하게 지내?! ……아.”

갑자기 무언가 생각났는지, 골든로드가 꾸러미를 힐끗 보았다.

“……그래, 지금의 왕궁이 저기 있는 건, 생명수가 거기 있었기 때문이야.”

“스승님?”

“아저씨, 뭔 생각하시는 거에요?”

의아한 눈빛과 미심쩍은 눈빛을 마주하며, 골든로드는 의기양양하게 웃었다.

“이거 묘지에 심으면 왕궁에 안 가도 되잖아?”

“……허?”

“이야~ 마침 자리가 비어서 경관이 좀 허전해졌거든! 거기엔 죽은 엘프들의 흙이 잔뜩 묻혀 있으니 위로하는 의미에서도 딱 좋을 거야.”

아, 느릅나무 자리에 심으려는 모양이군.

홀로 쓴웃음을 지었다.

“자리가 비다뇨? 거기 느릅나무가……”

“이제 없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묻는 블루벨의 말을 자르며, 그는 나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카엘이 보내줬거든. 성검으로.”

“아…….”

블루벨은 이해됐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녀도 성검이 돌에렛을 태운 걸 직접 봤으니까…….

역시나 그 모습을 떠올렸는지, 그녀는 약간 눈썹을 살짝 찡그리며 울적한 표정을 지었다.

“예에, 좋으실 대로 하세요. 장로들도 장소는 상관없다고 했으니…….”

“……뭐? 잠깐, 이거 좀 수상한데. 진짜 임시 맞아?”

“……”

“아니 왜 대답이 없어? 눈은 왜 피하는 거야?!”

앗, 보인 거 같아.

대표가 좀처럼 뽑히지 않아서 계속 왕을 하고 있는 연노랑머리 아저씨의 모습이……!

추궁하듯이 블루스타를 빤히 노려보던 골든로드는, 곧 한숨을 푹 쉬었다.

“하, 됐다. 조만간 흐지부지 되겠지. 어쩌면 흩어질지도 모르고.”

대수롭지 않게 이상한 이야기를 하는 골든로드에게 모든 시선이 한데 쏠렸다.

그럼에도 그는 전혀 개의치 않고 차를 한 모금, 호로록 들이켰다.

“아트라토스가 깨어났잖아. 조만간 이 숲에 몬스터들이 쳐들어올걸? 대재앙이 끝나고 얼마나 남아있을지 모르겠네. 뭐, 어차피 엘프는 끝났지만.”

“……”

그렇게 말하며 버터 비스킷을 우물거리는 임시 왕을 향해,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왜요? 그 씨앗이 자라서 나무가 되면……”

“만약 이게 생명수의 기능을 가진다면, 그래, 엘프가 태어나겠지.”

그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을 이었다.

“그래도 그건 우리가 아니야. 그냥 숲요정이지. 아무 맹세도 맺지 않은 태고의 엘프.

어쩌면 지금 우리와는 생김새가 다를지도 몰라. 아무튼 그들은 엘프가 아니라 다른 이름으로 불리겠지.”

……그리고 그때쯤, 엘프는 전설 속에서나 나오는 종족이 되어 있을 것이다.

그렇게 중얼거리며 그는 한숨을 푹 쉬었다.

“숲에 숨어 살아서요?”

“아니, 멸망해서.”

“……네?”

찻잔을 기울인 후, 그는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엘프는 숲에게 버려졌어. 그래서 지금은 숲이 우리에게 화를 내고 있지. 하지만 우리 같은 ‘나무 출신 엘프’가 모두 사라지면, 숲은 엘프에 더 이상 아무 관심도 보이지 않을 거야. 그저 숲에 빌붙어 사는 생명 중 하나로 보겠지.”

“어……”

“음, 어렵나? 그럼 이건 어때? 지금은 굶주린 스톤베어 앞에 서 있으면 짜증이 담긴 입질을 받거든? 훗날엔 잡아먹힐 거야.”

……아, 그런 뜻이었구나.

문득 위슨의 정령인 늑대가 했던 말이 생각난다.

이제 점점 엘프가 미워지지 않는다며, 그녀는 그 이유를 알려주었다.

­­그냥 미워할 가치가 없어져서……. 이젠 축복이 없으니까…….

아무것도 남지 않은 엘프는, 미움마저 기울일 가치가 없다고.

……그 선언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잔혹한 것이었다.

“그런 신세가 되어서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겠어? 저 좋을대로만 사는 종족인데.”

“너무 비관적이에요, 골든 씨.”

그보다 한참은 더 짧은 삶을 살아온 사제가, 비스킷을 우물거리며 단호히 부정했다.

“엘프는 이제 사람이 됐어요. 그것도 무리를 지어서 사는 사람이요. 그러니 서로 도우면서 살아갈 수 있을 거에요.”

“글쎄…… 그건 너무 희망적인 거 아냐?”

그의 회의적인 반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는 환히 웃으며 재차 말했다.

“어디에든 희망은 있고, 무슨 일이든 긍정적인 면이 있는 법이에요!

지금 왕궁에 있는 인간 아이들, 어떻게 찾았는지 들으셨나요?”

골든로드를 따라, 나도 함께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보니 메린한테 그걸 안 물어봤네.

로나와 같이 있었으니 그녀도 알고 있었을 텐데.

아직 살아있는 애들이 있었다는 사실에 온 신경이 쏟아진 탓이다.

“종소리 때문에 ‘나무 출신 엘프’들 대부분이 못 움직였잖아요? 돌에렛에 바칠 제물을 옮기던 엘프도 그 중 하나였대요.”

그래서 엘프의 왕은 긴급으로 다른 운반원을 소집하라 명했고, 궁에서 일하는 한 엘프에게 그 일이 떨어지게 되었다.

원래 이런저런 짐을 나르는 일꾼이었던 그 엘프는, 왕의 명령을 받고 허둥지둥 그곳으로 갔다고 한다.

“제물…… 애들은 왕성 근처의 집들 중 하나에 모여 있었어요. 경비들이 지키고 있던 집 중 하나요.”

“……”

“아무튼 그 집에 미리 와있던 시종이 그 엘프에게 애들을 가리키면서 제물들을 실어가라고 했대요. 그랬더니 그 엘프가……

애들을 실으려는 척 다가간 다음, 시종을 집 밖으로 밀어내고 농성을 시작한 거에요!”

뜬금없이 전개가 확 틀어지네?

황당해하며 그녀를 멀뚱히 쳐다보자, 로나가 킥킥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렇게 버티다가 막 농성이 뚫리려 할 때에, 다른 엘프분들이 와서 구해줬대요.”

“허…… 여러모로 놀라운데? 근데 그 엘프는 왜 그런 거래?”

눈을 끔벅거리며 묻는 골든로드를 향해, 그녀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자식들이 생각났대요.”

“응……?”

“여섯 살이랑 네 살, 이렇게 자녀가 둘 있는 분이었어요. 인간이랑 엘프는, 귀 빼고 나머지는 비슷하게 생겼잖아요?

그래서 집에 있는 아이들이 생각나서, 도저히 제물이 되도록 둘 수 없었대요.”

……그랬구나. 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어째서 로나가 지금 이 이야기를 하는 것인지도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연노랑색 머리카락을 가진 엘프, 골든로드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던 것이다.

약간 혼란스러운 기미도 들어있는, 그런 눈빛으로 그는 물었다.

“그런 생각이…… 든다고……?”

“네. 사람이니까요.”

“……”

“신기하시죠? 그게 구세대와 신세대의 차이에요. 그 왕도 그 차이를 알아차리지 못했을 거에요.

골든 씨, 당신과 같은 구세대는 완성된 존재로 만들어져 있어요. 그러니 다른 사람을 필요로 하지 않았을 거에요. 없어도 살아가는 데에 문제없으니까요.”

초월적인 능력들을 가진 그들은, 301년 전까지는 식사조차도 필요하지 않았다.

그러니 다른 누군가를 의지하지 않았으리라.

“그래도 이렇게 모여 산 건 단 하나, 사명 때문이었겠죠?혼자서는 절대로 해낼 수 없는 것이었으니까요.”

“……”

그러나 이제 엘프는 아무런 능력이 없을뿐더러, 인간처럼 일정 햇수를 보내야 성체가 될 수 있다.

갓 태어난 엘프는 기본적인 의식주조차 다른 사람의 손을 빌려야 한다.

그 과정을 거치며, 무의식적으로 서로를 돌보아야 한다는 인식이 생긴 게 아닐까?

로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그렇게 말했다.

“저는 평소에 엘프들이 어떻게 사는지 몰라요. 하지만 생전 상관없는 인간의 어린아이들에게서 자신의 자식들을 겹쳐본 엘프가 나타난 건 사실이에요.

저는 이게 징조이자 증명이라고 봐요.”

“무엇에 대한……?”

미간을 좁히며 묻는 그에게 환한 웃음을 지으면서, 로나가 자신 있게 말했다.

“이 모습이 당신들의 본래 종착지라는 거요.”

“……뭐?”

“보세요. 권능을 다 잃고 숲에 버림받았는데, 엘프는 여전히 지성체에요. 트롤이나 오크처럼 무지성의 괴물이 되지 않았죠.

엘프가 더 이상 수호의 사명을 짊어질 필요가 없어지면, 이런 모습이 되도록 계획되어 있었던 게 분명해요!”

악마의 농간 때문에 기간이 홱 당겨졌을 뿐, 처음부터 이렇게 될 예정이었을 것이다.

언젠가 지니고 있던 능력들을 전부 반납하고, 그저 귀가 뾰족한 사람이 되어 살아가는 것.

그것이 엘프에 대한 계획이 아니었겠는가?

창조주를 섬기는 교단의 사제, 로나는 그렇게 말했다.

“만약 그랬다면 숲이 엘프를 버리지 않았겠죠? 그럼 숲의 현자가 됐을 텐데, 그건 좀 아쉽겠어요.”

……누구도 그 말을 뒷받침해줄 수 없다.

엘프가 맹세의 서약을 올린 ‘하늘의 귀인’…천상의 존재는 이중에 단 한 명도 없고, 그들과 직접 연락할 수 있는 사람도 없으니까.

그럼에도 그녀의 말, ‘맹세를 어긴 저주로 영락한 게 아니’라는 그 말에 고개가 끄덕여지는 건……

내가 엘프가 아니라서 그런 걸까?

남의 일이니까, 그냥 좋게 끝맺고 싶은 건지도 모른다.

엘프의 찬란한 역사를 기억하는 유일한 엘프는, 그 말을 듣고 씁쓸히 웃었다.

“낙관적이구나.”

“아하하, 사람은 그런 법이니까요!”

“그래……. 내가 감히 단정할 게 아니구나.”

그걸로 할 말은 모두 했다는 듯이, 골든로드는 그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차만 호로록 마셨다.

블루스타는 그 모습을 복잡한 눈으로 보다가, 돌연 나를 향해 입을 열었다.

“카엘, 그대에게도 용건이 있다.”

“네? 저요? 뭔데요?”

설마 돌에렛을 없앴으니 숲을 나가라고 하는 건 아니겠지?

아무리 그래도 그건 들어줄 수 없다.

위슨도 그렇지만, 그가 돌보고 있을 애들이 제일 마음에 걸린다.

설령 그 애들이 깨어나는 건 못 보더라도, ‘이제 괜찮다’는 이야기는 듣고 가고 싶다.

그래야 마음이 편할 거 같아.

……다행히 블루스타는 나에게 떠나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턱을 문지르며 중얼거렸다.

“엄밀히 따지면 부탁이겠군. 긴히 들어주었으면 한다.”

“무슨 부탁이요?”

눈을 감고 잠시 뜸을 들인 후, 그는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을 꺼냈다.

“블루벨을 데려가다오.”

“……뭐요?”

나 스스로도 얼굴이 구겨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아마 블루벨과 같은 표정일 거야.

뜬금없이 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거냐는 표정.

그러나 블루스타는 흔들림없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그대의 여정에, 블루벨이 함께할 수 있도록 허락해다오.”

망설임 하나 없는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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